[칼럼] 잔존하는 이미지들
[칼럼] 잔존하는 이미지들
  • 가비노킴
  • 승인 2018.11.07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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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그림을 감상하는 데서 시작해보자. 다음은 네덜란드 출신의 얀 페르미에르(Jan Vermeer, 1632-1675)의 <레이스 뜨는 여인 La Dentellière>(1669-1670)이다.

얀 페르메이르(Jan Vermeer), '레이스 뜨는 여인 La Dentellière'(c.1669-1670)
얀 페르메이르(Jan Vermeer), '레이스 뜨는 여인 La Dentellière'(c.1669-1670)

무엇이 보이는가? 혹자는 장식용 레이스를 만드는 섬세한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여인이라고 말할 터다. 또는 여인 옆에 놓인 빨간 실로 만든 ‘술’ 장식이 달린 청색 쿠션을 보는 사람도 있을 터다. 물론이다. 필자가 이미 <레이스 뜨는 여인>이라는 제목을 알려주고 그림을 보자고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술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혹은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Girl with a pearl earring>(c.1665)라던지 <우유 따르는 여인 The Milkmaid>(c.1657-1658)이라는 그림을 한 번이라도 보았거나 제목을 들어본 사람이라서 화가에 대한 정보를 조금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일상적 장면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이라는 설명에 이의(異議)가 없을 것이다.

Jan Vermeer, La Dentellière, 1669-1670 (c) Musée du Louvre _ Angèle Dequier
Jan Vermeer, La Dentellière, 1669-1670 (c) Musée du Louvre _ Angèle Dequier

그러나 동시대 미술이론가 조르주 디디-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 b.1953)은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는 그림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줄무늬가 있는 청색 쿠션 앞에 늘어뜨려진 빨간 술 장식만 주시할 경우, 마치 상처에서 피가 격렬히 분출하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했다. 명백하게도 그것은 술 장식의 그림이다. 하지만 동시에 아래에서 피가 울컥거리면서 흐르는 모습이라거나 마치 용암이 분출하는 모습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시각적 사실이다. 우리가 이 그림의 여러 ‘세부들’에 주목하여 감상할 때, 전혀 다른 그림들이 예측할 수 없이 무수히 출현한다. 따라서 이 작품의 제목이 제시하는 <레이스 뜨는 여인>이라는 형상은, 우리가 이 그림을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바라볼 때라야 비로소 우리의 눈을 하나의 관점만으로 보게 하는 통제에 성공한, 부분적이고 잠정적인 사례에 불과하다.

Jan Vermeer, 'La Dentellière'(c.1669-1670) (detail)
Jan Vermeer, 'La Dentellière'(c.1669-1670) (detail)

이제 우리 시대의 작품으로 눈길을 돌려보자. 다음은 런던을 기반으로 작업활동을 하는 정윤경(b.1981) 작가의 작품이다.

Clapping Form IV, 160x130cm, pencil & Acrylic on unprimed canvas, 2017 © Yunkyung Jeong
Clapping Form IV, 160x130cm, pencil & Acrylic on unprimed canvas, 2017 © Yunkyung Jeong
Experincing Moment II, 190x150cm, pencil & Acrylic on unprimed canvas, 2017 © Yunkyung Jeong
Experincing Moment II, 190x150cm, pencil & Acrylic on unprimed canvas, 2017 © Yunkyung Jeong
Structural Sensibility IV, 50c40cm, Acrylic on unprimed canvas, 2016 © Yunkyung Jeong
Structural Sensibility IV, 50x40cm, Acrylic on unprimed canvas, 2016 © Yunkyung Jeong

이번엔 무엇이 보이는가? 나뭇잎이나 새의 깃털을 연상시키는 형상들이 때론 군집을 이루는 덤불로, 때론 쏟아져 내려오는 폭포수로, 때론 여기저기를 가로지르며 종횡무진하는 통로로, 때론 활활 타오르는 불길로 등장한다. 세부가 전체를 구성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러한 전체를 와해시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혹은 화면상의 여기저기를 떠다니는 조각들이 마치 “불꽃 같은 것” “깃털 같은 것” “덤불 같은 것” 등에서 “암흑 같은 것” “혼돈 같은 것” “동양적 풍경화 같은 것”등으로 변모해나가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적당히’ 거리를 두고 전체를 파악하려고 해도, <레이스 뜨는 여인>과 같이 명쾌하게 우리의 시각장에 들어오는 만족스러운 형상은 없다. 쉽게 말해 정윤경 작가의 그림은 세부들을 유기적으로 구축해 마침내 하나의 그림만을 제시하는 방식이 아니라, 마치 짜집기용 조각들처럼 서로 뚜렷한 관련성이 있는 듯 없는 듯 모호한 파편들의 덩어리 같은 것처럼 보이게 하고 있는 셈이다. 관람자는 정윤경 작가의 그림 내의 일부 형상만 선택적으로 잘라내어 추출한 ‘추상’의 과정을 통해, 작품이 완성된 사후(事後)에도 끊임없이 출현하는 이미지와 형상들과 대면하게 된다. 항상 새로운 형상을 재발견하는 것이다. 그러한 발견을 가능케 하는 지점에는, 그동안 은폐되어 왔고 억압되어 왔기 때문에 숨겨져 있던 이미지들이 의미화를 기다리며 우글거리고 있다. 캔버스 표면 위에서 이리저리 유령처럼 거닐다가 불현듯 관람자의 시선을 사로잡기까지, 그 이미지들은 잔존(殘存)하고 있다. 어제는 보이지 않았지만, 오늘은 보일 수 있으며, 언제나 스스로를 반복적으로 드러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작품을 오랫동안 감상할 때, 관람자는 신체의 감각과 기억의 변화에 따라 그림이 응시되는 지점을 바꾸어나가기도 한다. 예컨대 ‘적당히’ 거리를 둔 채 그림 전체를 관조하기도 하고, 비스듬한 각도에서 물감의 물질성을 자세히 바라보기도 하고, 그림에 얼굴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전체적 형상에 대한 기억을 잃은 채 사소한 세부에만 몰두하기도 한다. 몸을 움직여야만, 육체적인 피로가 동반될 때라야 새로운 이미지들이 잔존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모더니즘 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관람방식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거리를 두고 관람하는 것’만이 전체 그림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태도였다. 그러나 오늘날은 그림을 올바르게 파악하거나 관람하는 태도 자체가 의문에 부쳐진다. 이제는 파편화된 세부에 관심을 갖고 공감하는 일, 전체 그림과 유기적인 연결이 상실된 지점으로만 간주됐던 사소한 세부에 관심을 기울이고 “가까이” 다가가는 일이 미술작품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시대가 됐다. 현대미술이 젠더, 인종, 문화, 여성, 페미니즘, 이민, 성소수자, 평등, 육체, 장소, 언어, 과학, 유전공학, 생물학 등을 주제로 작업하고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다.

정신장애인의 문제도 이와 같다. 단지 팔짱 끼고 거리를 두며 눈으로만 파악하는 모더니즘의 태도가 아니라, “가까이” 다가가서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때론 오른쪽으로, 때론 왼쪽으로 ‘우리의 신체’를 움직이며 공을 들여야 한다. 그동안 정신장애인들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관람할 때라야 파악할 수 있는 ‘전체’ 그림의 세부요소로도 전혀 읽혀지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그리고 언제나’ 잔존해 오고 있었지만, 역사 속에서 억압돼 왔고 숨겨져 왔으며 배제돼 왔다. 그들은 ‘이미 그리고 언제나’ ‘전체’ 그림 속에 있었지만, 언어의 세계로 들어온 적이 없었고 담론화되지 못했던 무의미한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전체’ 그림을 완성하는 요소라기보다는, 거꾸로 ‘전체’ 그림의 완성을 지연(遲延)시키기 위한 알리바이로 존재해 왔다.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이 <레이스 뜨는 여인> 그림 앞에서 전혀 엉뚱한 이미지를 읽어내고 담론화함으로써, ‘전체’ 그림 내부의 사소하고 작은 ‘구역(pan)’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잔존해 오고 있던 이미지들을 현실세계에 소환한 것처럼, 우리는 이제 역사 속에서 ‘이미 그리고 언제나’ 배제와 혐오의 대상으로 격리수용돼 왔던 정신장애인이라는 (그 사소하고 억압된, 따라서 숨겨진) ‘구역’을 우리 언어의 세계, 의미화의 세계로 불러들여야 한다. 정윤경 작가가 명시적으로 전체와 세부의 위계관계를 허물고, 전체와 세부를 씨실과 날실처럼 교차하고 조합한 형상으로 제시함으로써 생명 그 자체의 힘을 분출한 것처럼, 우리는 이제 잔존해 왔던 정신장애인이라는 ‘세부’를 ‘전체’와 교차하고 조합하며 엮어내야 한다.

가비노킴(Gabino Kim)
가비노킴(Gabino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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