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석, “우린 구름 뒤의 별이고 구름이 걷히면 반짝이게 될 존재들이죠”
정현석, “우린 구름 뒤의 별이고 구름이 걷히면 반짝이게 될 존재들이죠”
  • 박종언 기자
  • 승인 2018.11.13 21:0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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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석 정신장애인 당사자 인터뷰
청소년기 왕따의 기억 등 복합적으로 발병
정신병동에서 포도주 만들어 마신 ‘혁명’의 기억 소중
통신의 단절은 관계의 단절, 자유를 침해해
일을 했을 때 자극이 오고 회복도 빨라져
조그만 일거리에서 시작하고 사회적 관계도 가져야
동료지원활동가는 당사자 공감하는 치유자
사랑하는 사람은 버팀목이자 내 편
부모님께 잘 살 수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어
증상이 있어도 공동체에서 사는 게 치유
박종언의 만남: 길을 묻다 (c) 마인드포스트
박종언의 만남: 길을 묻다 (c) 마인드포스트

20살 때 정신병원에 첫 강제입원을 당했다. 9개월을 그곳에서 ‘무료하게’ 머물렀다. 어느 날 그 무료함을 이기기 위해 입원된 동료 네 명과 ‘음모’를 꾸몄다. 반입돼 들어온 포도주스 1.5리터 5개를 창가 양지바른 곳에 내놓았다.

여름이었다. 포도주스는 빠르게 숙성돼 포도주로 변했다. 밤 10시 취침시간 침대에 누워 마지막 순찰 플래시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순찰이 끝나고 고요해진 병동. 그와 동료들은 창밖 가로등 불빛을 의지해 숙성시킨 포도주스의 ‘포도주’를 거나하게 마셨다. 그리고 새벽에 서로 노래를 불렀다.

간호조무사들이 달려왔고 이들은 독방에 갇혀 사지가 묶였다. 하루이틀의 강박의 시간이 지나고 다시 모였을 때 그와 동료들은 웃었다. 뭔가 해냈다는 거. 무료하고 할 것이 없는 병동에서 그들은 그 사건을 하나의 작은 ‘혁명’이라고 불렀다. 물론 그 다음부터 포도주스는 반입이 허용되지 않았다.

정현석(40) 씨는 그 ‘혁명’의 주동자였다. 그는 첫 퇴원 후 10년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집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고 온갖 드라마를 다 섭렵했다.

어느 날 어머니가 하는 작은 회사에서 일을 도왔다. 처음에는 한 시간도 하기가 힘이 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적응이 됐고 그는 그렇게 세상으로 한 발자국씩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바리스타와 동료지원활동가 등을 거치며 그는 비로소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돌아보면 왜 그렇게 해야 했는지, 왜 그 긴 시간을 스스로 세상과 격리되는 걸 선택했는지, 그리고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스스로 깨달았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기 시작한 것이다.

4년째 사랑하는 사람과 열애(熱愛)를 이어나가고 있고 친구들도 하나씩 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의 주변은 그렇게 풍요로워졌다.

현석 씨는 정신장애인이 치유의 길로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이 ‘개입’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은 인간에게 존재의 이유를 부여한다. 노동이 곧 존재다. 그래서 노동을 한다는 것이야말로 사회적 가치로서의 자신을 만들어내고 키워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착취가 아니라면 노동은 인간의 존엄을 지탱하는 뿌리가 된다. 그를 만난 건 만추(晩秋)의 가로수 은행잎이 떨어져 내리던 13일 오후의 한 카페에서다. 다음은 일문일답.

정현석 당사자 활동가 (c)마인드포스트
정현석 씨 (c)마인드포스트

-중학교 때 ‘왕따’(집단 따돌림)를 당했는데 지금도 그 기억이 남아 있습니까.

“그때는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었는데, 그때 주변에 바로 알렸으면 (중학교) 2년 동안 힘들지 않았을 거라 생각해요. 2년 동안 끙끙 앓다가 선생님한테도 말하고 엄마한테도 말했어요.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니까 친구가 공부하는 법을 알려주더라고요. 그러니까 뭐든지 말을 해야 도와주는 것 같아요. 혼자 앓고 있으면 안 도와주는 것 같더라고요.”

-그 왕따의 기억이 현재까지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왕따 때문에 정신장애인이 됐다기보다는 우울증이든 조현병이든 조울증이든 충격이 누적돼서 어느 순간 심지에 불이 붙어가지고 터진 것 같아요. 어렸을 때 방학 때마다 우리를 떨쳐놓고 서울로 일하러 가던 엄마의 뒷모습을 보고 울었던 충격이 있었고, 또 시골친구들하고 헤어져 서울에 왔을 때 그 순간도 큰 충격이었고, 왕따도 내 인생에서 큰 충격이었고 여러 가지 충격들이 절 힘들게 했던 요소가 아닌가 생각해요.”

-복합적으로 작용한 건가요.

“방학 때마다 엄마랑 아빠랑 헤어지고 막 울었을 때. 시골친구들 초등학교 6학년 때 떨어지고 서울로 올 때 엄청 울었거든요. 서울생활은 적응 못했고. 내가 사투리를 쓰니까 말할 때마다 서울 애들이 웃잖아요. 그래서 말도 안 하고 지내고. 그게 힘들었어요. 농한기가 되면 아버지는 목수일 하러 가시고 어머니는 서울 공장 일하러 가시고.”

-정신병원에서 포도주스로 포도주를 만들어 먹었습니다. ‘일탈’이 아닌 하나의 ‘혁명’이라고 했는데 왜 혁명이라고 생각했습니까.

“통제된 공간인데 나름 우리가 제한된 재료를 가지고 알코올을 창조했잖아요. 다섯 명이 한 방에 모여서 취했고 노래를 불렀어요. 물론 다음날 독방에 다섯 명 다 갔지만 통제된 공간에서 일탈했고 나와서 또 웃었어요. 우리가 뭔가 해낸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그 혁명적 일탈 이후 어떤 처벌을 병원에서 받았습니까.

“바로 알코올 분해 일어나는 주사 맞고 묶여서 밤을 보냈죠. 우리가 취해서 노래를 부르니까 조무사, 간호사가 쫓아왔죠. 포도주스 1.5리터 5개를 비웠어요. 그때가 여름이었는데 창 밖에다 뚜껑 열어가지고 널었거든요. 왠지 될 거 같은 거예요. 와인, 이거 될 거 같지 않습니까. 아이디어를 제가 냈거든요. 포도가 발효된 게 와인이니까 이것을 햇볕에 널어버리자. 밖에 엄청 더운 날이니까. 그러니까 그날 저녁에 맛을 봤는데 이것은 알코올이다 싶었죠.”

-정신병원에서 강박이나 폭행을 당해 봤습니까.

“제가 강남성심병원에서 3개월을 채우고 한양대병원에 입원했을 때, 12월쯤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안 내 보내주더라고요. 당시에 대선이 있어서 사람들이 투표하러도 가고 떡국도 먹으러 가는데 나는 안 내 보내주는 거예요. 나중에 엄마 말이, 내보내주면 더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것 같아서 안 내줬다는데 나는 거기에 반항해서 집기류를 집어던졌죠. 의자랑 TV를 밀어버리고. 그래서 묶였죠. 1박 2일 동안. 초발하고 처음 묶여서 입원했을 때는 내 의식이 없었잖아요. 근데 내 의식이 살아 있는데 묶여 있는 건 처음이라서 무서웠어요. 또 대소변이 마렵다 하면 풀어줄 줄 알았는데 기저귀를 채우고 소변이 마렵다 하니까 관을 대더라고요. 그때 스무 살 때였으니까. 상상도 하기 싫어요.”

-정신병원에서 통신의 자유가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했었어요. 아직도 통신의 자유가 보장되지 못하는 정신병원들이 많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저는 말이 안 되는 처사라고 생각해요. 통신의 단절은 외부하고의 단절인데 이 급변하는 세상에 통신이 안 된다는 건. 정신병동은 교도소보다 더 심한 거 같아요. 교도소는 사람들 들어오면 바깥 얘기도 듣고 하는데 정신병동은 텔레비전밖에 없어요. 병원 내 공중전화에서도 이상한 얘기한다 싶으면 스위치 내려버려요. 내가 하는 얘기를 듣는다는 거잖아요. 말이 안 되죠. 그건 사찰이잖아요. 통신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건 가장 기본적인 거 같아요. 폐쇄병동에 가두는 것도 말이 안 되는데 말이죠. 연락이 끊어져버리면 친구들하고 다 관계가 끊어져요. 3개월, 6개월 입원 기간이 길어지면 다 떨어져나가요. 인맥이 다 단절되는 거예요.”

-당신에게 정신병원은 어떤 의미인가요.

“정신병원은 나를 리셋(reset·초기화로 돌아감)해 버린 것 같아요. 스무 살 이전과 스무 살 이후의 삶이 갈린 거 같아요. 정신병원에 있으면서 좋았던 기억들은 다 없어진 거 같아요. 그 속에서 뭔가 잃어버려 가지고. 지금 난 41살이 아니라 21살 같아요. 그 안에서 아이처럼 돼 가지고 나온 거 같아요. 그 9개월의 시간이 내 삶을 지워버린 것 같아요. 21년 동안의 삶을 지워버린 것 같아요. 병 때문에 지워진 건지 그 공간에서의 삶 때문에 지워진 건지 모르겠지만 지워진 같아요.”

(c)마인드포스트
(c)마인드포스트

-첫 정신병원 퇴원 후 10년간 골방에서 지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지냈습니까.

“내 방에서 구형 컴퓨터로 옛날 게임을 하고 TV에서 하는 드라마 다 섭렵하면서 (지냈죠). 졸리면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집안 식구들 다 일하고 저 혼자 집에 있었거든요.”

-그 10년 동안 바깥으로 거의 나오지 않았죠.

“그나마 나오기 시작한 게 어머니가 차리신 공장에서 일할 때 그때 회복이 빨리 됐던 거 같아요.”

-그때 사람들이 있는 공동체로 나오고 싶지는 않았습니까.

“생각은 있었는데 되지가 안 더라고요. 그나마 나를 빠르게 회복시켜 준 건 일이었던 것 같아요. 내가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지만 병원에서 먹는 약이 제일 나쁘고 방안에서 먹는 약이 다음으로 나쁘고 일하면서 먹는 약이 제일 좋고 더 좋은 건 일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먹는 약이다 이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약을 먹더라도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나면서 먹을 때 약이 제일 효과가 좋은 거 같더라고요. 정신장애인들에게는 일이 제일 중요한 같아요. 내가 일을 했을 때 자극이 오고 회복 속도도 빨라지는 것 같아요.”

-지금도 골방에서 침묵하며 살아가는 정신장애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공동체로 나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이 사람들도 뭔가 자극이 필요할 거예요. 자극을 경험할 동료지원가가 방문한다든가요. 자극을 경험한 사람들의 글을 접한다든가 매체를 접한다든가 그런 것도 자극이 될 수 있죠. 자극이 있어야 돼요. 밖으로 나가고 싶은 자극.”

-어떤 게 가장 큰 자극입니까.

“제일 좋은 건 조그만 일거리라도 가지고 시작하는 거죠. 사람들 만나고.”

-바리스타 생활을 7년간 했습니다. 그 일이 당신에게 어떤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까.

“전 바리스타 자격증도 있어요. 서초에서 4년 하고 스타벅스 1년 하고 서울대 3년 하고. 제가 4대보험을 처음 지급받은 첫 번째 직업다운 직업이었죠. 보통의 사람들하고 일대 일로 만날 수 있었던 순간이었죠. 그분들에게 음료를 내어주고 내가 한 마디씩 건네고. 오늘 날씨 좋네요. 오늘 머리 하셨네요, 옷 참 이쁘네요, 이렇게 대화하면서 사람들하고 친해질 수 있었던 계기였던 같아요. 바리스타 일을 하면서 십 몇 년 만에 회복이 되고 비당사자들한테도 다가갈 수 있었던 계기가 됐어요.”

-동료활동가로서 활동하셨습니다. 동료지원활동은 동료지원 그 이상의 의미라고 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정신장애인이 천 명이면 천 명마다 고유한 스펙과 기술이 있어요. 천 명의 동료지원가가 나올 수 있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천 개의 백신인 거고 천 개의 치료제인 거고. 다 값어치가 있는 활동가들이라는 거죠. 우리 당사자가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이고요. 제도적으로 지원이 돼서 직업화된다면 좋겠어요.”

-그 활동을 하면서 스스로 회복됐다고 생각하십니까.

“같이 회복되는 거 같아요. 동료지원활동가를 하면서 다른 동료들을 만나고 경험도 들으면서 공감도 해 주고. 비슷한 경험을 해 봤기 때문에 금방 느낄 수 있죠. 아예 다르지만 비슷하단 말이에요. 비슷한 경험을 바탕으로 또 다른 당사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고.”

-어떤 종류의 일을 하고 싶습니까.

“지금은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는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요. 제가 사회복지사 공부를 하고 있거든요.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있는 노후의 당사자가 돼서 노후의 당사자들을 케어할 사회복지 당사자가 되고 싶어요. 그런 시설이 생긴다면.”

-왜 그 일을 하고 싶습니까.

“그렇게 그분들과 함께 살아가다가 함께 생을 마감하는 것도 의미 있을 거 같아요. 도우미도 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네. 내년 1월 4일이 만난 지 4년째예요.”

-사랑을 통해서 정신장애가 긍정적으로 바뀌던가요.

“아주 큰 버팀목이고 지지대인 거 같아요. 내 편이고 가족들보다 더 힘이 돼요. 요즘은 더 많이 통화하고 얘기하고. 가족들보다 날 더 잘 알죠. 같이 아파하는 사람이니까. 같은 약을 먹고 같은 아픔이 있으니까. 가족들도 이해 못하는 아픔을 아니까 더 힘이 되죠.”

-사랑을 통해서 마음이 많이 변하던가요.

“많이 미안한 감정이 있죠. 마음만큼 잘 못 해주는 거 같아서요.”

-정신장애인도 결혼해서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살아갈 수 있는데 집안에서 그렇게 못 만들어주는 거 같아요. 제도든 시선이든 편견이든. 제도적으로 보면 아이가 태어났을 때 아이의 육아에 대한 지원들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게 전혀 없잖아요. 육아 지원도 비당사자 위주로 맞춰져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럴 바에는 커플로 살자 이런 얘기를 가끔 해요.”

-무슨 말입니까.

“결혼, 혼인으로 엮이지 말고 평생 커플로 살다가 죽기 직전에 호적에 묶는 것도 괜찮지 않느냐. 죽기 전에 혼인식하자고.”

-정신장애인으로 아기는 낳으려고 하십니까.

“우리는 안 낳기로 했어요. 자신이 없어요. 육아에 대한 자신도 없고 그리고 경제적으로 빈곤하기도 하고. 요즘 육아하는데 몇 억이 든다고 하잖아요. 그리고 건강한 아이가 태어날까에 대한 걱정도 있고요. 둘 다 정신과 약을 복용한지 20년이 넘었고 또 아이까지 아프다면 아이한테도 미안하고. 우리도 못 해 주고 아이도 못 해 줄 것 같아요.”

(c)마인드포스트
(c)마인드포스트

-토론장이나 집회에서 정신과 의사들을, 혹은 정신의료 권력을 비판하는 걸 자주 봤습니다. 의사들과 의료권력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교집합 부분도 있고 차집합 부분도 있는 거 같아요. 어느 정도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는 건 맞는데 우리들의 말도 들어볼 필요는 있어요. 무조건 자기네들 생각이 맞다 위주로 진료할 게 아니라 우리들 말도 들어가며 진료한다면 더 치료가 잘 될 거예요. 예를 들어 동료지원가들과 함께 한다든가 정신장애인들과 함께 하는 자리를 자주 연다면 도움이 될 텐데 너무 본인들 고집에 빠져있는 거 같아요. 매너리즘이라고 할 수 있고.”

-약 먹으면서 의사 욕한다고 하셨는데.

“(웃음) 약을 먹으면서 의사 욕하고. 어쩔 수 없는 물고 물리는 관계인 거 같아요. 의사가 싫다고 약을 안 먹을 수는 없어요. 그럴 바에는 타협점도 찾고 같이 할 부분은 함께 의논도 하고. 우리가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존재가 아니란 말이에요. 도움 되는 일도 있을 거고.

우리가 20년 동안 몸으로 경험한 이야기를 하면 더 좋은 약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고. 의사들은 호르몬, 화학 물질에만 의존할 게 아니라 우리들의 목소리를 들으면 더 도움이 될 수 있다 이거죠. 신약이 나오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고 그런 작업들을 했으면 좋겠다는 거죠.

제도와 법을 만들 때도 우리들과 함께 하고요. 이번에 보니까 절차보조인 사업도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더라고요. 정신장애인이 주축도 아니고 정신장애인들은 나쁘게 말하면 ‘따까리’라고 하고 하는 말도 나오는데 그러면 안 되죠. 절차보조인 사업만은 말 그대로 정신장애인 권익옹호 사업이 돼서 저희들이 주축이 되는 게 맞죠.”

-비정신장애인으로 살았다면 당신은 어떤 삶을 살았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비장애인으로 살았다면 내 삶도 그렇게 좋지는 않았을 거 같아요. 약을 먹고 안 먹고의 차이이지 내가 잘난 사람은 되지 못했을 거라 생각해요. 차라리 정신장애인으로 살아온 20년의 경험이 바탕이 돼서 나에게 또 다른 힘과 용기, 지혜를 준 거 같아요. 사랑하는 이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된 것도 정신장애인이 됐기 때문인 거 같아요.

저는 정신장애가 다시 와도 괜찮겠다고 말하고 싶어요. 왜냐면 잘 극복한 내 삶이 그렇게 창피하지 않으니까요. 물론 21년 중에 10년을 감췄지만 오픈한 시간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면 줬으니까요. 토론 현장에도 나가 보고 대학교 교육의 현장에서 학생들을 만나보고 종사자들 앞에서 강의도 하고 이런 경험들이 있었죠. 내가 대학교 겨우겨우 들어가 졸업했으면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생각해도 글쎄요, 지금 어디 골방에 갇혀 있는 취업준비생의 모습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도 들고”

-정신장애인이기 때문에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건 아닌 거 같아요. 그러니까 불행해진다기보다는 정신장애인 되고 나서도 어떻게 삶을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바뀔 수 있을 거 같아요. 정신장애인 됐다고 방에서 생을 마감하면 불행하고 그걸 깨고 나와서 사람들을 만나고 얘기하고 경험을 나누고 한다면 충분히 값어치가 있을 거 같아요.

정신장애 하나하나가 꽃이 되고 열매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꽃이 되지 못하고 열매 맺지 못하는 정신장애인들이 많다는 게 좀 아쉬운데 꽃이 되고 열매가 되는 정신장애인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그 열매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요. 우리는 모두 그 과정일 수 있어요. 꽃이 되고 열매가 되는 과정요. 저는 도움이 되는 열매가 되고 싶어요.”

-부모님에 대해 어떤 마음이 듭니까.

“저는 삼형제 중 큰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아픈 손가락이죠. 우리 엄마가 나보다 하루만 더 살고 싶다고 했는데요. 작년에 엄마를 내가 일하는 현장에 많이 모시고 다녔어요. 강연장이나 토론장에. 엄마 아빠가 없어도 나 이렇게 살 거다 걱정마라 하고 보여주려고요. 눈 감는 순간에도 좀 걱정 안 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모시고 다녔어요.”

-원망은 없었어요.

“제가 혼자 살 수 있을 거 같다고 엄마가 말을 하더라고요. 걱정만 했는데 너 아픈 것도 공부가 되는 거 같다고. 제가 신문에 가끔 나온 거 보여주면 좋아하더라고요. 조선일보 인터뷰도 있었고 비마이너나 에이블뉴스 같은 데 제가 시위하는 것도 나오잖아요. 그걸 보여주면 엄마가 뿌듯해 하시는 거 같더라고요.”

-당신에게 치유란 어떤 의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 병을 받아들이고 그리고 내 병과 함께 살아갈 준비가 됐다면 치유가 아닐까 생각해요. 그러니까 내 병과 함께 가는 거. 영화 ‘뷰티풀마인드’를 보면 마지막 장면까지 환청, 환시가 주인공 내시와 함께 하잖아요. 그런 것처럼 환청, 환시가 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살아낼 수 있다면 그게 치유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꼭 나는 약을 안 먹어야 치유야, 나는 당사자 복지카드가 있으면 치유가 아니야 이런 게 아니라 그냥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을 먹어도 병에 걸렸어도 장애를 입었어도 사회에서 함께 하고 있음이 치유이고 행복인 거 같아요.”

-정신장애인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내가 어디 문학수업 시간이 썼던 글인데 우린 구름 뒤의 별이고 구름이 걷히면 반짝이게 될 거란 그 구절이 있는데요. 지구에서 별을 보면 그 별이 탄생의 순간에도 반짝이고 그 별이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도 반짝이고 별이 아파도 반짝이고 건강해도 반짝이거든요. 그런 것처럼 다 반짝이고 있는 소중한 존재들이니까 너무 우울해하거나 아파하지 않았으면 해요. 다 빛나는 존재니까, 우리는 다.”

(c)마인드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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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결 2018-11-19 09:36:24
정현석 활동가님의 인터뷰 감사합니다. 언제나 어디선가 반짝이고 있을 정현석 활동가님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