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수 “그 정신요양시설은 우리를 그냥 상품으로 여겼어요”
김덕수 “그 정신요양시설은 우리를 그냥 상품으로 여겼어요”
  • 박종언 기자
  • 승인 2018.11.28 00: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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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장애인 당사자 김덕수 씨 인터뷰
아버지는 부재(不在)하는 존재…나를 지켜주지 않아
요양시설에서 억압과 폭력 민낯 체험
죽기를 각오하고 나서야 그곳에서 퇴소
그곳에서 빠져나오려는 악몽을 자주 꿔
고통 속에서 어머니의 존재 소중함 알게돼
사랑도 결혼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조현병 당사자들이 나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
박종언의 만남: 길을 묻다 (c) 마인드포스트
박종언의 만남: 길을 묻다 (c) 마인드포스트

그의 삶에서 아버지는 늘 부재(不在)하는 존재였다. 어린 시절, 집 근처에서 놀다가 친구의 형에게 얻어맞았다. 근처에 아버지가 있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버지는 그를 모른 척 했고 혼자 웃기만 했다. 정신질환을 가진 아버지가 자신을 보호할 수 없다는 걸 그는 너무 일찍 깨달아야 했다.

10대 후반에 발병해 몇 군데의 정신병원에 입·퇴원을 반복한 후 누나의 지인(知人)이 말했다. “돈 5만 원만 주면 먹여주고 재워주는 곳이 있다”고. 누나는 그를 충남의 한 정신요양시설에 보냈다. 1990년대 초반이었다. 처음 들어간 그 시설은 창문에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그 광경을 본 그는 자신이 잘못된 곳으로 들어왔다는 걸 알았다.

입소한 이후 그는 일상적인 폭력에 노출돼야 했다. 또 억압과 폭력의 공간이었던 그곳을 빠져나오기 위해 온몸으로 싸워야 했다. 3년 6개월 후 그는 비로소 그 ‘지옥’ 같았던 공간을 나오게 된다. 이후 국립춘천병원으로 갔는데 그곳에는 그의 말대로 밥에 고기에, 나물에 ‘진수성찬’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살이 찌기 시작했다고 한다.

2018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전국의 정신요양시설을 전수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입소자의 65%가 10년 이상 입소한 것으로 드러났다. 어쩌면 그가 시설에 있던 3년 6개월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한없이 빠른 퇴소였을 수 있다. 그는 그 죽음 같은 공간을 나왔고 어떤 이들은 아직 폭력으로 표상되는 그 시설에 갇혀 있다.

김덕수(47) 씨는 아파서 나쁜 대우를 받아야 했던 그 시절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지금 전국에 산재한 정신요양시설에서는 또 누군가가 폭력 앞에 떨면서 서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정신요양시설에서 당했던 폭력의 기억이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이라고 해도 말이다. 기억하겠다는 것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을 공유하는 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폭력적 정신요양시설의 메커니즘은 힘을 잃을 것이다. 그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함께 기억해야 할 ‘기억과의 싸움’일 것이다. 그를 만난 건 27일 그가 다니는 한울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다. 은행잎이 다 떨어진 오후였다.

김덕수 씨 (c)마인드포스트
김덕수 씨 (c)마인드포스트

-스무 살 무렵, 정신요양시설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어떤 폭력과 학대를 받았습니까.

“처음 갔을 때는 겉은 되게 화려하더라고요. 건물에 그림도 그려놓고 꽃도 그려져 있었고.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창문이 창살로 돼 있더라고요. 아, 내가 잘못 들어왔구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음날인가 우리는 일하고 있는데 반장이 자요. 반장님 주무세요, 일 안하세요 하니까 들어오래요 반장이. 들어갔거든요. 뺨을 스무 대를 때리더라고요. 그러더니 옆에 있던 나이 든 할아버지가 또 저를 열 대를 때려요.

왜 그런지 몰랐어요. 무서워서 잘못했습니다 하는데 발하고 팔을 묶더라고요. 그랬는데 작업반장이라는 사람이 오더니 엄지발가락으로 명치를 콱 때리더니 욕을 하더라고요. 아, 내가 정말로 잘못 들어왔구나. 거기서 있는 사람들이 거의 십 년, 십오 년 있는 사람들이에요. 저는 3년 6개월 있었는데 상당히 빨리 나온 거죠.”

-그 정신요양시설이 일상적으로 폭력이 이뤄지던 곳인가요.

“그렇죠. 아침 5시 반에 일어나서 6시까지 씻고 밥 먹고 일을 시작해서 오후 5시 반까지 일해요. 저녁 먹고 약을 먹을 때 간호사 자격이 없는 여자가 약을 줘요. 감독은 각목을 들고 와요. 그러면 반장이 얘는 뭘 잘못했고 얘는 무엇을 잘못했다 하면 맞기 시작하는 거예요. 엉덩이도 때리고 얼굴도 손으로 때리고. 그러면 입에서 피가 나요.

보통 상태가 나쁜 사람, 아니면 말썽 피우는 사람, 그 두 부류를 때려요. 그런데 상태 나쁜 사람들은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몰라요. 그러면 그 사람은 약을 아예 주지 않고 CP라고 하는 빨간색 약인데 50밀리를 한 알 줘요. 약으로서 주는 게 아니라 형식적으로 주는 거예요. 그리고 상태가 좋은 사람들은 (위탁된) A병원에서 정신과 주치의가 와요.

주치의가 맡은 환자가 몇 명이냐면 우리 시설 400~500명 돼요. 근데 그 의사도 상태가 많이 안 좋은 애들은 배제해요. 안 맡으려고 해요. 상태가 좋은 사람들만 약을 줘요. 그러니까 그 (배제된) 사람들은 거기서 썩는 거예요. 죽을 때까지 있는 거죠. 주치의도 배제해버리고.”

-작업치료라는 명목하의 노동에 대해 더 듣고 싶습니다.

“아침 5시 반에 일어나서 6시까지 씻고 30분 동안 작업하고 그 다음에 밥 먹고. 또 작업하고. 점심때는 30분 쉬었다가 5시30분까지 작업해요.

-무슨 작업입니까.

“쇼핑백 있잖아요. 종이로 된 그걸 만들어요. 제가 거기 일한 지 2년 정도 돼갈 때 통장을 만들어준다고 하더라고요. 한 달에 3천 원씩 만들어준다고 해서 그렇게 알았죠. 그런데 석 달 지나고 그 사람들이 말하는데 우리가 3천 원씩 통장에 넣었던 돈이 간식비로 다 나갔다 (하는 거예요). 3개월이면 일인 당 9천 원이잖아요. 근데 일을 하면 초코파이 하나씩 무료로 주거든요. 그런데 그 초코파이 하나를 줬다는 이유로 돈이 다 나갔다 (그러는 거예요). 3개월 후에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그러면 처음에 일 시작할 때, 월급을 받았어요.

“월급 안 받았어요. 일만 했는데요.”

-그럼 한 푼도 못 받고 일만 했네요.

“못 받았었죠.”

-항의했어요.

“아이고. 그럼 맞아 죽어요. 그러면.”

-3년 6개월 있었는데 왜 못 나왔습니까.

“처음에는 누나가 와서 날 집어넣고 갔어요. 누나가 계속 면회 잘 오겠다고 약속하고 갔어요. 누나가 일 년 후에 면회를 왔는데 아니래요. 면회를 계속 왔대요. 누나가 (나 입소하고) 한 달 뒤에 왔대요. 그런데 감독이 ‘지금 덕수 씨가 상태가 많이 안 좋아서 보호자를 때릴 수도 있고 어떻게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다음에 와라’ 해서 한 세 번 정도 돌려보냈대요. 그래서 일 년 후에 왔는데 그렇게 말을 하더라고요 큰누나가.

저로서는 첫 면회잖아요. 근데 시설에서 첫 면회할 때 너무나 좋은 옷을 입히더라고요. 감독이 나한테 하는 말이 뭐냐면 ‘너 여기서 있었던 일 누나한테 한 마디라도 하면 넌 나한테 맞아 죽는다’, 그래서 예 알았습니다 했거든요. 그렇게 하고 가서 누나한테 반장한테 맞은 걸 말했어요. 퇴원시켜 달라고 했는데 누나는 몰랐죠. 왜 그러느냐 하다가 갔어요.

면회 끝나고 감독이 불러서 같이 원장한테 갔어요. 원장이 널 때린 애가 누구냐고 물어보라고요. 그래서 반장님하고 할아버지라고 그러니까 ‘너 다시 한 번 그런 말 하면 죽여 버린다’고 원장이 그래요. 그때 진짜 많이 쫄았어요. 나중에 제가 바닥 닦는 약 크레졸도 먹고 가위로 배 째고 해서 일반병원으로 갔어요. 중환자실에 있었는데 누나가 왔더라고요. 누나, 나 더 이상 그 요양시설에 가면 진짜 자살할 거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누나가 재정상 안 좋아서 다시 요양시설로 오게 됐어요.

그래서 왔는데 제가 시설에서 계속 소리를 질렀어요. 그러니까 시설에서 얘가 죽을 것 같다, 자살할 것 같다 해가지고 (퇴원시킨 거예요). 사람 한 명이 죽으면 시설에서 장례비로 백만 원을 물어야 된대요. 그러니까 그걸 안 내려고 나를 퇴원시킨 거예요. 거기는 원생들을 퇴원을 시킬 생각을 안 해요. 왜냐하면 사람 한 명당 국가가 매달 돈 100만 원 정도를 시설에 주거든요. 그래서 우리를 그냥 상품으로 여겼어요.”

-시설에 400여 명이 살았던 거죠. 반장이라는 자가 정신장애인이 아니라 알코올중독자였나요.

“그렇죠.”

-덕수 씨를 때린 그 할아버지는요.

“함 도사라고 불렀어요. 그 사람은 내가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어요. 그 할아버지가 저를 열 대를 때린 거예요. 그 할아버지는 반장이란 친분이 있어요. 그래서 저를 때린 것 같아요. 나이가 65세 정도 될 거예요. 반장한테 잘 보이고. 그런 부류의 사람들한테는 반장이나 감독이 몇 주에 한 번씩 담배 한 갑을 줘요. 청자, 백자, 솔 이런 식으로요. 그거 갖고 몇 주일을 조금씩 피우는 거죠.

저희들은 봉사조라고 있어요. 아침에 세면대 씻고 바닥 닦는 일하면 담배 한 개비를 줘요. 한 대가 요만(손가락 만)하잖아요. 그걸 3분의 1씩 잘라요. 그래서 아침에 3분의 1, 점심에 3분의 1, 저녁에 3분의 1 피워요. 신문지에 돌돌 말아서 피워요.

그리고 밖에서 시설의 막노동이 있어요. 거기 가서 일하면 솔담배를 열 개비 줘요. 그 열 개비를 가지면 진짜 부자예요. 뭐 자장면, 통닭하고 다 바꿔먹을 수 있으니까. 그 만 원짜리 통닭을 십 원짜리 한 개비 솔담배랑 바꿔먹을 수 있어요.”

-막노동은 뭐 하셨어요.

“거기서 건물을 증축하려고 해서 막노동했거든요. 일반인도 와서 하고 우리도 하고 했어요. 그런데 원장이, 그 나쁜 놈이 (시설의) 70대 되는 할아버지가 일을 하고 있는데 구둣발로 그 할아버지를 막 지근지근 밟는 거예요. 왜 일을 못 하냐고. 할아버지니까 당연히 일을 느리게 하잖아요. 그런데 이 XX야, 욕을 하면서 밟는 거예요. 그거 보고 때리고 싶더라고요. 근데 원장을 때리면 나는 맞아 죽잖아요. 가만있었는데 너무하더라고요.”

-담배를 거의 못 피웠겠네요.

“담배는 어떻게든 피웠죠. 막노동해서 열 개비 받거나 그 다음에 봉사조하거나 그렇게.”

-막노동 하루 종일하면 월급 대신 담배 열 개비.

“백 원어치. 하나에 십 원이니까요.

(c)마인드포스트
김덕수 씨 (c)마인드포스트

-정신요양시설 폭력에 대해 항의한 적 있어요.

“없어요. 근데 사실 거기 나오고 나서 몇 년 동안 악몽을 꿨어요. (꿈속에서) 지하에 있는데 지하에서 답답하니까 올라가야 되는데 안 올라가지는 거예요. 괴로워하다가 깨고 그랬어요.”

-정신요양시설에서 죽어가는 사람도 많이 봤다고요.

“봤어요 한 번. 청소를 하다가 갑자기 쓰러져요. 일으켜서 반장 불렀는데 또 쓰러지는 거예요.병원 이송했는데 심장마비로 죽었어요.”

-강박을 당하거나 발바닥을 매로 맞는 건 일상적인 것이었습니까.

“거의 하루에 한 명씩은 (맞았어요). 나도 두세 번 맞은 적 있고요.”

-그곳에서 느낀 거나 깨달은 게 있습니까.

“거긴 인정사정이 없더라고요. 제가 거기서 맞고 묶이고 고통을 당했잖아요. 그렇게 하다보니까 어머니가 생각나더라고요. 옛날에 세치 혀로 어머니한테 나가, 꺼져 이런 식으로 심하게 대했거든요. 그게 마음에 걸리더라고요. 그래서 어머니한테 여기 요양시설에서 평생 살겠다고 편지를 보냈어요. 어머니가 그걸 보고 감동을 받았나 봐요. 또 시설에서도 나를 내보내려고 했었고 어머니도 그걸 허락하셨나 봐요. 그때 나오게 된 거예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소환해보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그냥 허울뿐인 아버지. 내가 지금도 기억나요. 아무리 생각해도 섭섭한 게 뭐냐면 아버지가 연탄 리어카 끄는 일을 했어요. 아버지가 근처에 있었어요. 난 그 근방에 있었고요. 그런데 옆에 있는 애가 나를 놀려서 따라갔는데 그 형이 나를 때려요. 내가 ‘아버지’라고 외쳤는데 아버지가 안 말리더라고요. 그냥 아무 말도 안 하고 웃으면서 있는 거예요. 그게 어린 마음에 너무 상처를 받은 거예요. 그때가 초등학생 때였는데.”

-그런 일 한 번 생기고 아버지는 더 이상 나를 보호해줄 수 없는 존재로 느껴졌나요.

“그렇죠.”

-그때부터 덕수 씨는 혼자 살아나가야 된다, 그런 생각을 가졌습니까.

“아버지는 나를 생각해주고 도와주지 않는 존재라는 걸 알았죠.”

-덕수 씨가 한참 보호받아야 할 나이게 아버지라는 보호막을 잃어버리셨네요. 그래서 혼자 살아가는 방법을 일찍 깨우쳐야 했고요.

“그건 아니죠. 어머니랑 같이 살았으니까요. 옛날엔 내가 사실 제 마음대로 했어요. 그런데 그 요양시설에서 당해보고 묶여 보고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그러니까 내 중심적이 아니라 어머니 중심적, 큰누나 중심적, 작은누나 중심적으로 한번 해 보자 싶었죠. 그렇게 하니까 어머니하고 누나가 나를 알아주더라고요. 그게 쉽지는 않았어요. 그렇게 하고 나서 보니까 누나들도 어머니도 믿어주고. 근래에는 어머니가 저를 많이 의지하고 계세요.”

(그의 아버지는 현재 지방의 정신병원에 있다고 했다. 덕수 씨는 아버지의 존재를 잊은 지 오래돼 거의 만나지 않는다고 했다)

-국립춘천병원에서 면회와 통신의 자유가 있던가요.

“예. 있었죠. 2주 동안은 전화도 못하고 면회도 안 되고. 그 후에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전화를 해도 되고. 그 안에 공중전화가 있어요. 카드 넣고. 일주일에 한 번. 개방병동에 있을 때는 계속 걸어도 되고요.”

-국립춘천병원에서 살 쪘잖아요. 그 요양시설하고 춘천병원하고 비교해보니까 어떻던가요.

“아이고, 천국과 지옥이죠 뭐. 그 요양시설은 밥에 냄새가 장난 아니에요. 처음에는 못 먹었어요. 그러다가 배가 고파서 먹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거기 있는 사람들은 밥을 잘 먹어요. 반찬도 짠무랑 김치라고 해봤자 고춧가루 조금 묻힌 것, 그렇게 주더라고요.

춘천병원 가니까 맛 있는 밥에다가 김치, 고기… 너무 많이 먹었어요. 너무 잘 먹었어요. 아무튼 전에 그 요양시설의 밥은 개밥이었어요. 근데 춘천병원에서 너무 잘 먹어서 한 백 킬로그램 정도 쪘어요. 먹고 자고 해도 되고 밖에 나갈 수도 있고 얼마나 좋은지 몰랐어요. 담배도 마음대로 피울 수 있고.”

-정신요양시설에서 어머니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고요. 당신에게 어머니는 어떤 존재입니까.

“어머니는 나한테 있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 어머니가 지금 간경화를 앓고 계세요. 간이 조금밖에 안 살아 있어요. 그래서 2~3년 있으면 돌아가실 거 같아요. 어머니가 없으시면 내가 진짜 어떻게 사나 그 생각을 하니까 너무 슬프고 어머니가 정말 소중한 걸 알겠더라고요. 요즘은 어머니한테 내 나름대로는 잘하려고 노력해요.”

-미신으로 치료한 적 있습니까.

“있어요. 어머니랑 저랑 무당집에 갔어요. 거기서 무당이 나를 보자기로 뒤집어씌우더라고요. 그리고 뒤에서 훠이 훠이 하면서 팥을 내 등 뒤에 뿌리면서 나가거라 귀신아 나가거라 그래요. 또 있어요. 어머니한테 들은 얘기인데요. 어머니 친구의 언니가 증산교를 믿는데 제사를 제대로 치루면 내가 낫는다고 말했나 봐요. 그래서 당시 돈으로 200만 원을 써서 제사를 지냈대요. 나 몰래.”

-그래서 증상이 좋아졌던가요.

“아이고. 말도 안 되는 소리죠.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고민을 나눌 친구가 있습니까.

“아직까지는 누나들밖에 없는 거 같아요. 센터의 몇 명과는 얘기를 나누지만 깊은 얘기는 안 해요. 깊은 얘기를 할 때 누나들이 최고요. 누나들한테는 깊은 얘기도 했고요.”

(c)마인드포스트
김덕수 씨 (c)마인드포스트

-사랑이나 연애를 하고 싶지 않습니까.

“어머니가 속아서 결혼했어요. 저희 큰아버지가 외할아버지(엄마의 아버지)한테 ‘우리 아버지랑 결혼하면 논 몇 마지기 주고 뭐도 주겠다’ 그렇게 속여서 결혼했어요. 아버지가 정신질환이 있다는 건 얘기도 안 하고요. 그때 엄마 나이가 22살이었는데 큰아버지가 아버지 나이를 열 살이나 낮춰서 속여서 결혼시켰어요. 우리 외할아버지를 완전히 속인 거죠.

엄마도 결혼할 생각이 없었대요. 그런데 외할아버지가 데릴사위 들어와야 된다, 안 그러면 나 죽겠다 하니까 그것 때문에 엄마가 결혼을 했대요. 어머니가 그래요. 나도 속아서 결혼했다.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이 더 나오지 않도록 너도 그냥 연애하지 말고 결혼도 하지 말고 그냥 혼자 살아라.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덕수 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도 그게 맞는 거 같아요. 사실 저도 여자 싫어요. 내가 능력도 안 될뿐더러 별로 여자를 사귀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

-사랑을 하면 삶도 조금 변하지 않을까요.

“사랑요…. 그때 가봐야 알 거 같아요. 지금은 모르겠어요.”

-개신교도시죠. 종교가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줬습니까.

“종교는 제 목숨을 살려줬죠. 또 내 삶의 일부. 종교 아니었으면 벌써 전 자살했어요. 종교가 사실 나의 병을 완화시켜주는 데도 많은 역할을 했죠. 이상하게 성적(性的)인 생각이 들면 주기도문하고 사도신경을 외워요. 그걸 외우면 그런 느낌이 없어져요. 버스 타면 그런 성적인 생각이 막 떠오르거든요. 그때 사도신경이나 주기도문 외우면 효과가 있어요. 나에게는 그게 약이죠. 잘 듣는 약.”

-만약 일을 하게 되면 수급비가 끊기는데 그걸 감수하고 일을 할 수 있는가요.

“아뇨. 그럼 못하죠.”

-치유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치유는 그냥 하루하루 살면서 조금이라도 나아지면 치유죠. 근데 저는 좀 더 많이 나아지면 치유인 거 같아요.”

-정신장애인이 아니었다면 당신의 인생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정신장애인이 아니었다면 더 못 살고 나쁘게 살았을 거다 전에는 그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더 좀 잘 살았지 않았을까 생각도 들어요. 결혼도 하고 직장도 갖고. 결혼을 하면은 책임감을 강하게 느낄 거 같아요.”

-정신병원 강제입원해서 엄마 아버지에 대해 감정이 나빠지는 환우들도 있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쟤가 왜 그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자기가 잘못해 놓고 엄마 아빠한테 그러면 안 돼죠. 제가 아는 형 집에 갔는데 형의 어머니가 아들한테(형한테) ‘야, 너 왜 그러냐. 그러지 말아라’ 하니까 ‘한 대 또 맞고 싶어’ 그러는 거예요. 놀랐어요. 저번에는 어머니를 한 대 때렸대요. 그래서 어머니한테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싶더라고요.”

-정신장애인들에게 한 말씀 해 주세요.

“사실 전 내성적이었어요. 내성적이었고 좀 바보처럼 살았거든요. 근데 별로 할 말이 없어요. 근데 인생은 살면 배우는 게 있잖아요. 경험을 많이 해 봤으면 좋겠어요.”

-어떤 경험요.

“저처럼 어쩔 수 없는 경험도 좋고, 자기가 만들어가는 경험도 좋고.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할 말이 없네요. 저 같이 안 살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조현병 가진 분들은 저 같이 안 살았으면 좋겠어요.”

(c)마인드포스트
김덕수 씨 (c)마인드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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