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묻는다] 우리는 ‘탈출’하는 게 아니다, 그냥 자유롭게 걸어다니는 것뿐이다
[우리는 묻는다] 우리는 ‘탈출’하는 게 아니다, 그냥 자유롭게 걸어다니는 것뿐이다
  • 박종언 기자
  • 승인 2018.11.30 20: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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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원 환자 병원 나가자 ‘탈출’로 언론 프레임
정신병원은 왜 억압의 장소로 해석될 수밖에 없나
국가가 자유를 지켜주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국가는 없어
정신병원과 사회적 억압으로 주체는 이중 분열

지난 27일 전남 해남군의 한 정신병원에서 조현병 환자가 ‘탈출’했다는 보도를 이 지역 언론이 30일 보도했다. 연합뉴스도 같은 기사를 내보냈다.

그 달아난 조현병 환자는 ‘탈출’ 2시간 뒤에 병원에서 수킬로미터 떨어진 고갯길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기사에는 조현병 환자 A씨(46)가 산책 도중 철조망 사이로 몸을 빼내 달아났다고 보도했다.

그 조현병 환자는 무엇으로부터 '탈출'했는가? 사진=연합뉴스 해당 기사 갈무리
그 조현병 환자는 무엇으로부터 '탈출'했는가? 사진=연합뉴스 해당 기사 갈무리

물어보자. 저 조현병 당사자가 병원을 나간 것은 마치 영화 ‘쇼생크 탈출’처럼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자유’를 찾아 달아난 것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왜 언론은 ‘탈출’이라는 용어를 검증 없이 써버리는 것인가.

정신병은 고유하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A씨가 달아난 장소는 산책로였는데 왜 그곳에 철조망까지 쳐져 있었던 것일까. 정신병원 외부를 철조망으로 쳐서 아무도 허락 없이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는 곳이 있다는 걸 사진으로 본 적이 있었다. 저 병원 철조망도 그렇게 외부를 갈라놓은 것일까. 마치 외부에서는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는 아우슈비츠의 철조망처럼.

나는 조현병 당사자로 B 대학병원과 그나마 인권준칙이 개입되는 C민간병원에서 6개월을 보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모든 병원이 다 그런 줄 알았다. 물론 나는 C병원에서 강박을 한 번 당하긴 했지만 그래도 병원들이 나름의 인권의식을 갖고 환자들을 대한다고 ‘오해’했다.

그런데 나와 같이 입퇴원을 반복했던 조현병 당사자들의 말을 들어보면서 나는 그 많은 정신병원들이 하나의 거대한 ‘수용소’라는 걸 깨닫게 됐다. 폭력과 억압적 훈육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곳이 바로 정신병원이었고 그 보다 폭력의 정도가 더 심한 공간이 정신요양시설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좀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만약 정형외과나 피부과, 내과 치료를 받는 이가 어느 푸르른 날 자유가 그리워서 병원을 걸어나갔다면 병원은 이들을 ‘탈출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는 잠시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병원 바깥으로 걸어나갔다. 그의 ‘탈출’은 용인될 수 있는 치료의 일탈이었다. 그러나 정신장애인이 병원을 걸어나가면 그는 수용소를 벗어나듯이 ‘탈출’해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이성이 용납할 수 없는 비이성의 탈선인 것이다. 거기에 사회적 치안을 위해서는 이런 위험한 부류의 ‘환자’는 반드시 ‘검거’되어야 한다.

우리는 왜 이토록 범죄자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일까. 인간은 누구든, 그가 어떤 일을 하건, 어떤 장소에 있건 자유를 원하는 존재들이다. 자유에 대한 갈망은 인간이기에 더 강렬하다. 왜냐하면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 정신병원은 사람이 다니는 산책로마저 철조망으로 막아 버렸다. 정신질환자들을, 특히 조현병 환자들을 바라보는 권력자의 시선은 위험성과 관련된다. 이 이데올로기는 사회적 안전을 위해 조현병 환자들을 사회 저 너머의 자리로 배제하고 격리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분명히 치료를 위해 우리는 정신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그곳에 입원하는 순간 우리는 범죄자와 동급으로 취급된다. 이때 주체는 의식의 분열을 일으킨다.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 단순한 정신병원 하나를 넘어 사회 전체가 폭력적 억압의 가해자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가 바라보는 권력자의 시선에서 우리는 움직일 수 없이 ‘비인간화’ 되어 버린다.

왜 철조망으로 산책로를 둘러쳐야 했는지 묻고 싶다. 우리가 범죄자가 아닌데 왜 시설은 폭력적 감금의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것인가.

정신질환은 범죄의 형식으로 사회에 소환되고 두려움으로 소비된다. (c) 연합뉴스TV
정신질환은 범죄의 형식으로 사회에 소환되고 두려움으로 소비된다. (c) 연합뉴스TV

처음 입원해 폐쇄병동에 들어갔을 때 나는 자유가 그리웠다. 담배도 그 병동 안에서만 피워야했고 쉬는 것도 병동 안 소파에 앉는 것이 전부였다. 끼니때가 되면 밥을 먹었고 시간이 되면 일사분란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우리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일어나 함께 레크레이션 춤을 춰야 했다.

나의 폐쇄병동 기억은 그렇다. 정신적 질환이 있다는 이유로 우리는 감금의 대상이 돼 버렸다. 거기에 자유는 개입될 수 없다. 아니 비이성은 이성의 시선 안에 반드시 머물러야 한다. 왜냐하면 비이성은 위험하기 때문이다. 비이성은 죽음과 맞닿아 있다. 그것은 두려움이라는 흔적을 남긴다.

지금은 폐쇄된 서양의 한 정신병원 병상 (c) Squirrels Boutique
지금은 폐쇄된 서양의 한 정신병원 병상 (c) Squirrels Boutique

삶이 그렇듯 죽음 또한 하나의 삶의 연장으로 받아들여지던 시대가 있었다. 나의 어린 시절, 어떤 노인이 세상을 떠나면 마을 전체가 장사를 지내며 애도했다. 그를 기억하는 것은 가족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였다. 그러나 근대의 기제가 강화되면서 죽음은 일상에서 지워져 병원이나 의료권력으로 넘어가게 된다. 죽음은 이제 사회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정신질환이라는 이유로 마을이 함께 치료하던 근대 이전의 시대가 있었다. 같이 밥을 먹고 같이 뛰어다녔다. 그러나 근대는 이 질환을 죽음의 이미지로 부각시켜 공동체에서 완전히 거세해 버렸다. 이제 정신질환은 정신병원에서만 소비된다. 비이성인 주체는 다시 분열된다.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은 정신적 질환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과 관련된 모든 법과 제도, 이데올로기, 종교, 문화 등이 집단적이고 동시적으로 인간을 병들게 해 버린다. 정신질환은 저 다층적 폭압 안에서 의식의 분열을 연쇄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다.

근대의 시민국가들은 여성과 아동을 시민적 자질이 없다는 이유로 근대 국가 구성원에서 배제했다. 정신질환 역시 근대의 이성적 주체의 범주에 포섭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들을 감금해 버렸다.

그 이데올로기적, 문화적 사유들이 역사적으로 흘러오면서 저 사유는 구체적인 물리적 행동을 낳는다. 바로 정신병원의 수용화가 그것이다. 정신질환은 감금되는 존재이며 산책로에 철조망을 쳐서 이들의 움직임을 통제해야만 하는 존재로 변해간다. 이 배제와 감금은 역사적 연속성을 가진다. 그리고 역사적 흐름 속에서 더 강화, 발전하게 된다.

정신질환이라는 타자가 쇠창살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그 대상을 즐긴다. (c) Kina Choi
정신질환이라는 타자가 쇠창살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그 대상을 즐긴다. (c) Kina Choi

정신질환이 그토록 두려운지 나는 솔직히 묻고 싶다. 이성의 통제는 개개인의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자기결정권을 훼손해 버렸다. 그래서 정신질환자는 언제나 미성년이며 위험한 존재이며 사회적 타자로 인식된다.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우리는 탈출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잠깐 자유를 찾아 걸어나간 것뿐이다. 병원과 언론은 우리를 범죄자로 바라보지 말라. 정형외과에서 내과에서 답답하면 환의를 입고 돌아다니듯 우리 역시 그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끊임없이 우리를 범죄화하면서 ‘우리’라는 공동체의 외부의 적으로 우리를 구성하지 말라. 우리는 인간이다. 그리고 자유를 원한다. 만약 그 자유를 국가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국가는 없다. 왜냐하면 그 국가가 존엄의 가치인 내 자유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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