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번을 외쳤다, 우리는 범죄인이 아니라고…다만 아픈 거라고
천 번을 외쳤다, 우리는 범죄인이 아니라고…다만 아픈 거라고
  • 박종언 기자
  • 승인 2018.12.17 19: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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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정신병원 나간 당사자에 ‘탈출’ 프레임
위험성과 두려움은 정신장애에 대한 두려움 강화
폐쇄병동 존재하는 한 같은 기사형식 이어질 것
고민하지 않는 사유는 특정 인구집단에 치명적
정신장애 집단의 정치적 투쟁 역량을 성장시켜야

그 신문은 이렇게 적었다. “병원 정신병동을 몰래 빠져나가 잠적한 40대 조울증 환자가 탈출 40시간여 만에 경찰에 붙잡혔다”고. 또 이렇게 적었다. 병원의 “관리가 소홀한 틈을 타 병원 담장을 넘어 탈출을 감행했다”고. 또 있다. “추적에 나선 경찰”은 “이틀 만에 붙잡았다”고.

그리고 그 조울증 환자는 “폐쇄병동에서 탈출한 전력”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또 경찰은 병원 관계자들을 불러 “탈출 경위를 조사할 방침”이라고.

이 기사의 텍스트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범죄’와 ‘정신장애’가 교묘하게 포개지는 어떤 지점을 발견하게 된다. 정신장애인이 병원을 걸어나간 것은 사회적 위험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그 ‘위험한 자’를 발견해 체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관리가 소홀한 틈을 타서 조울증 환자 A씨가 ‘탈출’을 했다고 하는데 A씨는 범죄인이 아니며 자신의 의지로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어했을 뿐이다. 거기에 ‘탈출’이 왜 개입해 들어오는 것인가.

도대체 언론은 왜 정신장애인에게 이토록 사회적 낙인을 찍어주려고 ‘안달’을 하는 것일까.

A씨는 이전에도 서울 구로구의 한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전력이 있다고 했다. 이 ‘전력’은 구치소의 한 인간이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구치소 담장을 넘어 탈옥했다는 의미와 이미지가 겹쳐진다. A씨는 아무 죄 없이 정신질환이 있다는 이유로 ‘범죄인’이 됐고 자신의 치료를 위해 들어간 곳을 교도소로 인식하게 만들어 버렸다. 누가? 언론이 그렇게 프레임을 만들어 버렸다.

언론, 당신들에게 한번 물어보자. 정신장애인은 범죄인인가. 범죄인이 아니라면 뭔가. 정신장애인을 범죄인으로 동일시했기 때문에 정신장애인은 잠재적 범죄자가 되어 버린다. 언론은 이 같은 사회적 프레임 조성에서 자유로운가.

언론이 정신질환을 다루는 시선은 두 가지다. 하나는 두려움의 이미지로 표상해 정신장애인을 가두는 것에 아무런 죄의식이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약을 잘 먹고 관리하면 위험한 짓을 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동정론’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는 공적 영역에서 늘 충돌을 일으킨다. 너는 도둑놈이고 나쁜 놈인데 약을 잘 먹으면 괜찮다는 이상한 이중구조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정신장애인의 병리적 문제와 그들의 욕구, 그들의 소망에 대해 귀 막고 이들을 범죄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고 싶어하는 것이 언론이 구축해왔던 보도 태도 아닌가.

나는 많은 정신장애와 관련한 토론회와 심포지엄을 취재했다. 이따금 그곳에는 현역 일간지 기자들도 참여해 발표를 했다. 그들의 이야기는 하나였다. 정신장애인을 범죄자로 만드는 프레임을 벗어나야 한다고. 그리고 그들이 의학전문기자일 경우 이들은 사회부 기자들이 정신장애인과 관련한 선정적 기사를 내보내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쉽게 말하자면 이들도 자신들의 보도 태도가 뭔가 잘못돼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똑같은 방식의, 똑같은 위험성 이데올로기의, 똑같은 범죄인 프레임의, 똑같은 기사 작성이 반복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어쩌면 정신장애인들의 정치적 운동과 관련돼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신장애인은 그 질병적 속성상 공적 공간으로 나오는 걸 두려워한다. 그리고 자신이 정신질환을 겪고 있다는 걸 타인에게 밝히는 걸 꺼린다. 정신질환자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 경우 사회는 이들을 소외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신장애인들의 정치적 투쟁은 미미하거나 거의 없는 수준이다.

소리내지 않는 자들을, 소리쳐서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지 않는 이들을, 사회적 저항이 가장 약한 집단의 목소리를 누가 들어 주겠는가. 따라서 언론은 이들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있다.

언론이 정신장애인을 바라보는 태도는 또한 시혜적이고 동정적이다. 그 동정도 정신장애인이 혹시나 범죄를 저지를 경우 위험성 이데올로기로 재빨리 갈아타게 된다. 그리고 그 ‘마녀사냥’이 끝나면 다시 정신장애인에 대해 동정론이 개입하게 된다. 이 시선들을 바꾸어야 할 정신장애인의 정치적 투쟁은 너무나 미약하다. 그래서 기자는 안심하고 기사를 자기 욕구대로 쓸 수 있다. 잘못은 오직 범죄를 저지른 정신장애인에게만 있는 것이다. 윤리적 고민은 작동하지 않는다.

A씨는 병원 관리가 소홀한 틈을 타 병원 담장을 넘어 탈출을 감행했다고 한다. 여기서 병원의 관리는 어떤 형식의 관리였을까. 죄수 번호를 외치면서 한 명씩 입감됐는지를 확인하는 관리 시스템인가. 그렇다면 그곳은 병원이 아니라 감호소가 돼 버린다.

또 일반병동과 달리 잠금장치가 있는 폐쇄병동을 어떻게 빠져나갔는지를 경찰은 확인할 예정이라고 했다. 외과적 손상이 심한 이들도 이렇게까지 ‘감금’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들은 위험한 치료 시기를 넘기면 자유롭게 병원을 돌아다닐 수 있다. 어쩌면 집에 일이 있으면 잠시 갔다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주치의에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주치의는 그 사람의 ‘귀가’를 인정해 줄 것이다. 만약 그가 주치의에게 말을 하지 않고 병원 밖을 나갔다면 의료진이 경찰을 부를지 생각해 보자. 그들은 물론 부르지 않을 것이다. 잠재적 위험성이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정신장애인은 이성이 왜곡돼 있는 사회적 집단이다. 이성을 벗어난 비이성은, 혹은 광기는 이성에게 위협이 된다. 따라서 그 비이성은 반드시 빠른 시간 안에 ‘체포’해서 ‘감금’의 장소로 이동시켜야 한다. 그 ‘감금’의 장소에서 빠져나갈 경우 이 정신질환자는 범죄인으로 존재 이전해 버린다.

언론에 묻고 싶다. 당신들이 ‘정신질환자 탈출’이라는 프레임으로 엮었을 때 시민사회 구성원들이 정신질환자를 어떻게 바라볼지 생각해 봤는지 말이다. 당신들의 무지(無知)가 정신장애인의 삶과 운명을 얼마나 훼손하는지를 알고 있는지 묻고 싶다.

탈출이 아니다. 그것은 자유로운 자유로움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욕망이다. 정신병원을 개방병동으로 만들지 않고 폐쇄병동을 두는 이상 이 같은 사건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그리고 언론은 똑같은 프레임으로 ‘탈출’ 기사를 내 보낼 것이다.

언론인, 당신들은 진정 잘못이 없는가. 시민사회는 당신들이 진실을 이야기한다고 믿기 때문에 당신들의 행위를 지지하는 것이다. 담론을 생산하고 사회적 의제를 발굴하기 때문에 당신들의 존재 이유를 시민사회가 지지하는 것이다. 그 담론을, 엉뚱하게 정신장애인의 범죄성으로 왜곡시키는 데 쓰고 있다면 지금 이 순간, 당신들은 기자가 아니라 기레기다. 고민하지 않는 사유는 반드시 특정 인구 집단을, 혹은 한 개인을 공동체가 제거해버리도록 만들어 버린다. 언론인, 당신들은 이 과정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다시 묻겠다. 언론인, 당신들은 정신질환을, 정신장애를 알고 있는가. 안다면 이런 식의 기사를 쓰지 않을 것이며 모른다면 당신들은 직무를 유기하고 있는 것이다. 천 번을, 만 번을 외쳤다. 우리는 범죄인이 아니라고. 우리는 다만 아픈 것일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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