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의 웃음을 이해하기 위해
E의 웃음을 이해하기 위해
  • 박목우
  • 승인 2018.12.19 23: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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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의 웃음을 이해하기 위해

E는 종종 웃었다. 특히 자유나 평등, 사랑과 정의 같은 이야기를 할 때면 그랬다. 말하는 사람의 감정이 고양되는 순간, E의 웃음이 터졌다. 처음에는 E의 웃음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E의 웃음은, 우리의 웃음이며, 그것은 ‘진실’을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종의 ‘행동’이라는 것을.

니나내나 공연

겨울의 초입이었다. 정신당사자 밴드 ‘니나내나’의 공연을 보기 위해 홍대입구의 ‘어쩌다마주친’으로 가는 길에 많이 헤매었다. 나중에 도착해서야 알았지만 ‘어쩌다마주친’ 클럽은 작은 곳이었고 주변에 큰 건물도 없었으며 도로명만 보고 찾아가기에는 인솔자가 필요했다.

비가 내리려는 듯 잔뜩 끄무러진 날씨 탓인지 마음이 많이 우울했다. 어딘가를 헤맬 때면 나타나는 불안도 한 몫을 해 나는 조금 ‘바보’가 되어 있었다.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사진=니나내나 페이스북
사진=니나내나 페이스북

그리고 도착한 클럽 ‘어쩌다마주친’. 조용하고 편안한 재즈곡이 흐르고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며 많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여전히 멍한 채 공연이 시작되기만을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다.

사회자의 멘트가 있고 김효연님의 ‘겨울’이라는 곡으로 무대가 열렸다. 효연님은 동화 같이 앳된 얼굴로 한 편의 동화 같은 노래를 들려주었다. 이어 김현웅님의 ‘저 산은’과 ‘그대를 사랑해요’라는 노래. 김민기 선생님의 ‘아름다운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서정적인 가사에 사랑의 아픔이 배어 있는 곡이었다.

이어 김혜린님의 ‘소원’은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사랑하는 이들을 지킬 사랑과 지혜를 구하는 노래였다. 강은일님의 ‘지하철’은 세상이 주는 피로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고 싶은 간절한 열망을 솔직히 드러낸 곡이었다. 마지막으로 김준세님의 ‘주님의 나의’라는 곡은 훌륭한 연주 실력으로 신앙 안에서 더욱 굳건해지는 삶을 노래했다.

사진=니나내나 페이스북
사진=니나내나 페이스북

그러나 당시의 나는 그저 웅얼거림만을 듣고 있었다. 노래하는 이들의 표정, 관객들의 박수소리, 그들의 목소리, 기타 연주, 간간이 귀에 꽂히는 멘트와 가사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이 무정형의 어떤 기운처럼 느껴졌을 뿐.

나중에 한국정신장애인자립센터에서 연 성과보고회 책자에 실려 있는 가사와 니나내나 밴드의 재공연을 보고서야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과 사념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무엇을 느꼈던 것일까?

하얀 방

은미와 함께 대학로에서 즉석떡볶이로 간단히 요기를 한 후, 정신장애인당사자예술단체 ‘안티카’에서 주최하는 ‘하얀 방’ 공연을 함께 보러 갔다. 어린 시절 왕따의 경험, 가슴 아픈 가족사, 강제입원이라는 폭력의 상황들이 당사자들의 목소리와 몸짓으로 표현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호했다. 왕따를 시키면서 크게 웃어버리지도, 술에 취한 아버지가 되어서도 험한 말을 입에 담지도 않았고, 강제입원을 한 당사자의 온몸을 묶을 때도 힘을 주어 결박하지 못했다.

그래서 뒷좌석에 앉아 공연을 관람하는 나로서는 무대 앞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 감정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했다. 공연에 참여했던 미현은 ‘너무 공연이 일찍 끝나버린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그 이야기를 듣자 나는 비로소 내 모호함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들은 폭력의 일부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몸에 새겨진 기억은 어떠한 종류의 폭력이라도 거부하고 있었으며 설사 그것이 연극적인 상황일지라도 그랬다. 그런 그들이 그들을 감싸고 있던 정신과 병동의 벽을 찢으며―다른 공간을 열며―병동을 떠나갈 때 내가 느꼈던 해방감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2018년 편견차별대환영대회

이룸센터에 조금 일찍 도착해 자료집을 보았다. 그곳에는 참가자 네 팀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일본에 있는 ‘베델의 집’의 당사자연구모델을 빌려 국내에서 개최하는 대회라고 들었다. 객석을 꽉 채운 관객들이 네 팀의 퍼포먼스를 보고, 네 분의 심사위원님들이 공정한 심사기준에 맞추어 금, 은, 동메달을 가리는 행사였다.

일본 베델의집 '레츠! 당사자 연구' (c) 마인드포스트
일본 베델의집 '레츠! 당사자 연구' (c) 마인드포스트

당사자연구라고 하면 제일 먼저 당사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구술하는 것만을 생각했던 나로서는 뜻밖이었다. 각 참가자의 동료들이 함께 참여하여 당사자의 상황을 재연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당사자연구일까? 배움이 일천한 나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당사자연구가 개인의 고독한 자기추구가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그것은 일종의 당사자가 속해있는 공동공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행사였으며 그 속에서 당사자가 충분한 지지와 협력 속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아간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증언대였다. 순위와 관계없이 그 모습은 아름다웠으며 자신의 모습을 느리고 어눌한 목소리로라도 표현해 낼 수 있는 용기와 통찰력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들릴 수 있도록 하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땀방울이 있었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다시 E의 웃음을 이해하기 위해

E는 왜 웃었던 것일까? 나는 이 글의 장소마다 함께 했던 E의 웃음을 몸의 웃음이라 생각한다. 자유나 평등, 사랑과 정의 같은 단어들을 소유해 본 적 없는, 관념이 아닌 몸의 웃음. 그 몸은 그러한 관념이 사라진 곳에서 이미 어떤 몸과 몸의 소통을 열고 있었으며, 그것은 관념의 나르시시즘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가난하고 나눌 것 없는 것을 나누고자 함에 있었다.

그 속에서 관계는 명확한 언어로 지정되지도 어떠한 목적에 봉사하는 것도 아니지만 알 수 없는 침묵 속에서 급진적인 소통을 여는 듯 했다. 아마도 내가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 웅얼거리고 모호한 관계 속에 빠져 있었다면 그리고 조금씩 그 관계들을 이해해 나갈 수 있었다면 그것은 언어보다도 먼저 있는 몸의 소통 때문이었을 것이다.

쉽게 말해 ‘함께 한다는 것’. 관념으로 끝없이 상승하려는 욕구가 아니라 우리 존재의 바탕으로서의 소통으로 끝없이 하강하려는 욕구. 그랬기에 E는 관념의 허위에 맞서 체제에 포섭되지 않는 웃음으로서의 아마추어리즘을 긍정했던 것이리라. 사실 우리가 삶으로 더듬거리며 찾고 있는 것도 바로 우리가 울고 웃으며 살고 있는 바로 이 삶 자체가 아닐까? 거대한 체제도, 고상한 이념도 아닌, 이 삶 자체. E의 웃음은 그곳에서부터 흘러나왔고 그것은 잠자고, 일하고, 먹고, 마시고, 울고, 웃고, 살고, 죽는, 생명의 웃음에 가깝다. 우리가 오래 전에 폐기해 버렸던 웃음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E의 웃음을 불편해한다. 그들이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을 보게 하기 때문이리라.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쌓아올린 문명의 허위를 일순간에 무너뜨리는 웃음이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E의 웃음은 연약하지만 강하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다. 우리를 누군가가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그의 민낯을 보게 하고 마주하기 싫은 진실을 드러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 좀 더 자주 웃어보자.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하자. 우리의 웃음이 싹을 틔우고 잎을 내고 꽃잎을 펼칠 때까지. 그 대지가 우리에게 펼쳐질 때 아마 너와 나의 해방은 동시에 도래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우리는 조금 더 바쁠 것이다. 당신의 웃음에 함께 웃기 위해, 당신의 눈물에 함께 울어주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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