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봄은 결국엔 참 눈부시더라는 이야기- Part 3
그 해 봄은 결국엔 참 눈부시더라는 이야기- Part 3
  • 전민 기자
  • 승인 2019.01.07 19: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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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원 - 그 후에 맞이하는 세상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으니 딱히 상담을 하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의 시간을 하릴없이 TV를 보거나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왔다갔다 하는 것으로 소일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점점 여기 있다 보면 미칠 것 같다. 빨리 나가고 싶다. 그럴려면 앞에서 말한 대로 병원생활을 잘 협조해야 한다. 그래서 하게 된 게 미술치료와 음악치료다.

정신병원이다 보니 상담 외에도 무슨무슨 프로그램을 운영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입원했던 3주 동안 두 번씩 왔던 것 같다. 처음엔 미술치료였다. 도화지를 한 장씩 주고서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미술치료였다.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크레파스를 다시 보게 된 게 초등학교 졸업 이후 처음이다. 유화에 캔버스를 나눠주고 그려보라 해도 안 할 판인데 도화지에 크레파스라니. 만약 자기들 보고 하라고 하면 하겠나 생각이 들었다. 정신질환자라고 무시하는 것 아닌가? 어린 아이 수준이라고 아주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다.

또 한번 음악치료 강사라는 여자가 왔었는데 마이크를 붙잡고 무슨무슨 트로트를 부르자고 하면서 혼자 신나는 척 연기를 하는 것이다. 뒷자리에 앉아있던 한 환자가 술집여자같다고 중얼거렸다. 이 카바레에서 막 튀어 나온 것 같은 아줌마는 혼자 뭐가 신났는지 계속 억지웃음을 만면에 띄우며 노래를 불렀다. 이러다 내가 내 명에 못 죽을 것 같다. 이런 답답한 상황을 어떻게든 탈출해야 했다.

생활은 모범적으로 했다. 독한 약 때문에 변비에 걸려서도 꼬박꼬박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변비 치료를 하려고 애썼다. 열 시면 잘려고 안 해도 잠이 왔고 여섯 시면 저절로 눈이 떠졌다. 잠에서 깨자마자 대청소를 해대는 통에 안 그래도 약 때문에 아침잠이 많은데 진공청소기 소리가 너무너무 귀에 거슬렸다. 환자들을 편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환자 중에 알콜중독환자인데 아무하고도 말을 안 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 사람은 항상 만면에 웃음을 띄우고 있었다. 그 사람은 취침 전에 이부자리 속에서 기도를 드리고 잠이 든다. 의지할 데가 없어서 그런 곳에 의지하는 것이다. 종교는 정신질환자치고 탐닉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나 역시 면회시간에 아버지한테서 성경책을 받았다. 읽어볼 생각은 사실 없는데 워낙 심심하기도 하고 그래서 달라고 했다.

그리고 결국엔 그게 기회가 되어서 아버지가 다니는 교회의 담임목사가 강권해서 병원을 퇴원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목사 말로는 정신질환은 의사가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치료된다는 것이다. 전문가의 입장에서 보면 위험한 발언이다. 원장은 최소 두 달은 지켜보다가 퇴원 시기를 결정하자고 했는데 아버지가 의사보다 목사 말을 더 신뢰해서 의사 말을 무시하고 나를 퇴원시키려고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병원측에 각서를 하나 썼다고 하는데 퇴원 후에 내 병이 더 나빠지더라도 병원측은 잘못이 없다고 하는 내용이었다. 거기에 아버지가 서명을 하면서 퇴원이 이루어졌다. 그 때 난 병원을 하루라도 빨리 탈출하고 싶었다. 그대로 있는 것이 병이 더 심해질 것 같았다.

결국 5월의 어느 날 봄 햇살이 찬란히 부서지던 아침에 나는 병원을 나와서 원래 내 옷을 입고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 뒷자석에 앉아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차창 밖으로 비취던 햇살과 맑은 공기, 거리의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지금도 기억난다. 나는 다시 태어난 것 같았다. 병들었던 과거의 나는 이제 없다. 퇴원과 함께 내 인생의 2막이 시작된 기분이었다.

퇴원 후, 나는 학교로 바로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아버지가 어떻게 어떻게 휴학신청을 대신 해 놓았다. 2학기를 기다리며 나는 주로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마침내 2학기 개강일이 되어 나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생각으로 등교를 했다.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심정이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학교를 다시 다니는 것이 당시 나에게는 엄청난 과제였다. 정신병원에 갔다 온 경험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자신을 다잡았다.

이제 이십사년 전 이야기이다. 그때 경험을 재해석하면서 이 글을 썼다. 당시에 이해되지 않던 일들, 억울했던 일들도 기록했다. 일부는 이해되는 면도 있다. 하지만 정신보건서비스가 당시 상당히 형편없는 수준이었다는 것은 내 경험을 볼 때 맞는 말이다.

앞으로는 환자의 인권을 최우선적으로 존중하고 치료를 핑계로 환자의 자유를 구속하지 않는 정신병동과 관련종사자들이 많이 생기기를 바란다.

- 연재 끝 -

 

마인드포스트는 앞으로도 꾸준히 정신장애 당사자들의 용감한 고백에 마음의 문을 열겠습니다. 당사자의 입원생활의 민낯을 고발하는 글이라면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열악하고 불의한 지난날을 떠올리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앞으로 이 기록들은 역사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날 우리를 가둔 그 역사를, 그 참혹함을, 그 악마적인 시스템을, 글로 써내려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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