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모두 귀하다"
"사람은 모두 귀하다"
  • 전민 기자
  • 승인 2019.01.02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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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정신장애인 범죄를 바라보며

 *이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불과 며칠 전, 안타까운 사건이 터졌습니다. 정신과 전문의를 환자가 살해한 사건입니다. 모두 보도를 통해 잘 알고 계실 것이고 이 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충격에 빠졌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환자냐 아니냐의 구분이 없을 것입니다.

정신장애인의 인권을 대변하는 것이 마인드포스트의 기조라고 한다면, 이 사건은 분명 기자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정신장애인의 인권을 존중하고 배려한 꼴이 결국 이런 범죄로 연결되었다는 논리를 쉽게 인정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작년에도 많은 정신장애인, 혹은 정신장애인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범죄를 접했습니다. PC방 살인사건이 있었고, 그 이전에 이미 강남역 살인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전과 후에도 크고 작은 정신장애인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들이 뉴스를 탔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엔 정신장애인을 치료하는 전문의가 환자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까지 생겼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종종 남을 죽이고 싶다거나, 죽을 만큼 패주고 싶다, 내가 받은 모욕을 배 이상으로 갚아주고 싶다는 복수심과 적개심을 느끼면서 삽니다. 그런 감정, 생각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복수상상이 자신의 감정을 해소시켜주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영화나 드라마, 문학 작품에서 적나라한 복수극을 많이 만듭니다. 그런 잔혹한 복수극을 보면서 관객은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그것이 복수자(주인공)의 행동에 감정이입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혹은 저토록 인간이 잔인해질 수 있을까를 보며 복수자의 행동을 제삼자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건 관객은 복수자의 행동을 보며 성찰 혹은 감정의 해소를 느끼게 됩니다. 내가 직접 할 수 없는 것, 생각은 하지만 감히 감행할 용기가 없는 것, 행동 후에 처벌이 두려워서 못하는 것, 혹은 내가 그런 생각을 할 때는 있지만 그렇다고 내가 직접 그렇게 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라는(나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 등등의 이유로 사람들은 가공의 세계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낍니다.

살면서 뜻대로 안 되는 상황을 맞이할 때, 나의 진심이 통하지 않을 때,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되레 범인으로 몰리는 상황을 맞을 때....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억울한 삶과 죽음이 이 인류의 역사를 물들이고 있습니다.

저 역시 그 중 한 명이고 또한 저 역시 누군가에게는 가해자로 기억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모르는 제 과오가 상대에게 견딜 수 없는 상처로 남았을 지도 모릅니다. 이 점은 모든 사람에게 예외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진정한 의인은 존재하지 않고 모든 사람은 다 불완전하고 모순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성인은 자신이 불완전하고 모순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인정한 사람일 것입니다.

물론 우리 대개의 범부들은 자신이 불완전하다는 것, 모순적 존재라는 것을 알고는 있으나 스스로에게나 다른 이들에게 드러내고 인정하기를 싫어합니다. 이 점에서 성인과 우리 범부들의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누구를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고 해서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직접 듣지 않은 이상 상대를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나 그런 마음이 있는데 밖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입니다. 적개심을 합법적으로 비난 없이 드러낼 수 있는 창구가 예술입니다.

예술작품으로 포장될 때 적개심, 복수심, 남을 파괴하고 싶은 욕구는 대개 가공의 창작으로서 이해되고 그 틀 안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드러내지 못했던 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저는 한 때 서구사회의 연쇄 살인마들에 대해 관심을 가졌었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상세한 이야기가 많이 올라와 있습니다. 사람들이 같이 있을 때는 이런 연쇄 살인마들을 욕하고 인간도 아니라며 비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자신만의 골방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은 낮에 그 연쇄살인마들을 떠올리고 그들에 대해 알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들이 왜 그런 끔찍한 범죄를 일으켰으며(그것도 주로 젊은 여성들을 상대로) 그들이 자신의 범죄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한 때 스트레스가 심할 때, 연쇄살인마들의 이야기를 밤새 읽어보면서 알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느낀 적이 있습니다. 그들과 저의 차이는 이것 하나뿐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했고’ 나는 ‘생각만’ 했습니다.

저는 연쇄살인마들을 옹호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인간이기 보다는 하나의 ‘괴물’이 되어버린 존재들로 ‘인간’으로서 갱생할 가능성이 없는 존재들입니다. 다만 그들의 이야기를 읽어보면서 사람이 얼마나 셀 수 없이 다양한 환경에 노출되고 거기에 나름대로 적응하기 위해 애쓰는 존재인지, 생명이란 것이 무엇인지, 건강하게 자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과연 이 사회는 건강한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욕하고 비난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게는 그런 욕구가 전혀 없을까요? 누구는 ‘행동하고’ 누구는 ‘생각으로만’ 했을 뿐입니다.

예수는 말합니다. ‘누구든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범죄한 자라.’

또 다른 장면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간음한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가 어떻게 하나 시험합니다. ‘이 여자가 간음한 것이 들통났으니 이 여자를 유대의 율법에 따라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사람들을 향해 말합니다. ‘누구든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러자 아무도 돌을 던지지 못합니다. 간음한 여인은 분명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만 죄를 지었을까요? 둘러서 있던 사람들은 다른 죄를 지은 것이 없을까요?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죄에 대해서는 발뺌하고 지금 명백하게 죄를 지은 것으로 판명된 이 여인에게만 돌팔매질을 하려고 합니다. 예수는 그 사실을 상기시킨 것입니다.

어떤 남자가 한 여자에게 ‘너를 성폭행하고 싶다’고 했다고 칩시다. 여자는 열이면 열 남자 뺨을 갈기든지 경찰을 부를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남자는 그 여자를 보고 ‘저 여자를 강간하고 싶다’고 상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습니다. 둘 중 누가 범죄한 것입니까?

예수의 기준으로는 둘 다 죄입니다. 먼저 남자는 성희롱 범죄이고 다음 남자는 생각의 죄입니다. 생각으로 누구를 괴롭히고, 해코지하고, 복수하는 상상을 하는 것. 그러면서 만족감을 느끼고 적개심이 해소되는 이익을 누리는 것. 그것 역시 죄라고 예수는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그 죄는 원죄-아무리 애를 써도 저지를 수밖에 없는-라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기독교적으로 보면 원죄 아래 있습니다. 사람들이 약하고 이기적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기가 살려고 죄를 짓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어떻게 자기가 살겠다고 남을 죽이느냐고 항변하는 것이 인간적 감정이지만 실제로 그런 사례는 역사적으로 차고 넘칠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수없이 보고 듣는 일입니다. 그 죄의 결과 누구에게 이익이 되고 누구에게 해가 되는지는 생각해보지도 못한 채, 죄를 저지르고 맙니다.

우리가 예수처럼 죄가 없는 존재가 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존재 자체의 ‘원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자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모순적이고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런 자신의 존재-원죄-를 인정하고 스스로 받아들일 때 인간은 인간다워집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저는 피의자 박모씨를 변호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는 상상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도 있었습니다. 자기를 상담해주는 의사가 맘에 안 들면 별 생각이 다 듭니다. 의사의 일거수 일투족이 맘에 안 들고 자기를 생각해서 해 주는 말이 오히려 자기를 비난하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이것은 환자가 치료자에게 느끼는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투사감정입니다.

성숙한 치료자는 그런 환자의 적개심을 적절히 통제하면서 감정을 폭발시키도록 하는 게 아니라 환자 스스로가 그런 의사에 대한 적개심이 근거없는 것이라는 사실-사실은 자기의 부모를 향한 미움이 치료자에게 투사된 것이라는 것, 그래서 의사는 자기를 도와주는 사람이고 의사가 미운 것은 사실 자기의 부모를 미워하는 마음이라는 것, 종로에서 뺨맞고(부모) 한강에서 화풀이하는(치료자) 행동을 자기가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환자 자신이 스스로 깨닫도록 함으로써 환자 자신이 자각하지 못했던 진짜 자기의 진실한 감정을 받아들이게 되면 치료는 성공하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박모 씨와 고인이 된 전문의 사이에는 이런 부분에서 어려움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물론 추측일 뿐입니다. 그렇게 의사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우면서 한 번도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알 수 없는 부분입니다. 아니면 또 다른 이유로 범죄를 저질렀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경찰조사에서 밝혀지길 기대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건이 터질 때마다 범죄자를 비난하고 정신장애인 전체를 잠재적인 범죄자로 보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시각은 사회를 경직시켜서 정신장애인을 사회에서 제거한다 하더라도 또 다른 사건이 터졌을 때 또 다른 희생양을 찾으려고 나설 빌미를 주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례는 역사적으로 많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재일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가 퍼뜨렸었죠. 대지진 후에 어디대고 풀 데 없는 지진피해자들의 적개심을 조선인들을 희생양 삼아 해결하려고 했던 사례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사회가 불안하고 존재가 위협받을수록 사회는 공공의 적을 찾으려고 하게 됩니다. 한때는 그것이 박정희로 상징되는 군사독재정부였고, 민주화 이후에는 재벌, 정치인 이렇게 가다가 지금은 사회적으로 가장 약자인 사람들을 상대로 쥐잡기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희생양이 필요한 것입니다. 현대인의 불안을 상쇄하기 위해서 가장 그럴듯한 희생양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문제다, 누가 없어지면 다 해결된다’식의 논리는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이며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급급한 근시안적인 해결방법입니다. 우리 근대사는 지금까지 이런 눈앞의 여우를 쫒아내기 위해서 더 큰 호랑이를 맞아들이는 어리석음을 반복해왔습니다.

현재 우리 사회를 보면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고 인간관계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쉽게 말 붙이던 것을 지금은 무슨 짓을 하지 않을까 경계합니다. 모든 것이 돈 논리로 흘러갑니다. 이런 사회가 과연 건강한 사회일까요? 건강하지 못한 사회에서 정신질환자가 늘어나고 정신질환자에 의한 범죄가 늘어가는 것, 당연하지 않을까요?

이 글을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정신질환 환우 분들에게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자기의 병을 가장 잘 알고 있고 또 해법을 알고 있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정신질환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남보고 해결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번 박모씨 사건 역시 자기 문제를 의사에게 투사하고 의사를 원망했던 것이 문제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인생이란 끝없는 고난의 바다입니다. 누구에게나 고난을 피해갈 수 없는 것이 인생이고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땅바닥에 넘어진 사람은 다시 그 넘어졌던 땅을 짚고 일어섭니다. 자기가 넘어졌던 그 곳에서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다는 것이 역경의 아이러니입니다.

병을 고칠 수 있는 것은 나의 마음속에 끝없이 흘러나오는 생명의 원천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 생명의 원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귀합니다. 아무리 갱생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사람이더라도 마음 한 구석 어딘가에는 그 생명의 원천이 아직 살아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이 생명이 없습니다.

치료자는 내가 생명이 있고 귀한 존재라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입니다. 나를 사람으로 대접해주는 사람입니다. 치료자는 그 외에는 달리 할 일이 없습니다. 치료자의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생명의 싹을 틔우고 자라가는 것은 환자의 몫입니다.

안타까운 사건을 연말에 접하고, 이 주제에 대해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미흡한 글이 된 것 같습니다. 제 마음속의 진심이 얼마나 글로 옮겨졌는지 자신이 없습니다.

다만 고인이 되신 전문의 선생님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 여러분께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마음의 질병을 앓고 계신 환우들께 반복되어 일어나는 사건들에 일희일비하기보다 자기 마음 치료에 더 집중하면서 무조건적인 정신장애인에 대한 배려와 대우를 외치기보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존재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비판과 노여움 섞인 마음으로는 어떤 옳은 일도 성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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