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가로 데려가 자유롭게 물을 마시게 하라”
“강가로 데려가 자유롭게 물을 마시게 하라”
  • 박종언 기자
  • 승인 2019.01.28 2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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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질환자를 법적으로 구속할 수 있다는 생각은 억측
왜곡된 정치적 신념이 정신질환자들을 수렁으로 몰아넣어
정신질환자에 의해 피습 부상당한 의사께 사과드려
정신건강복지센터 예산 늘리고 인력 확충해야
정신병원이 치료의 대안될 수 없는 현실 직시해야
사회적 관계망 훼손되면 극단적 선택에 빠져

다시 사건이 터졌다. 지난 24일 서울 은평구의 한 정신병원 출입문에서 이 병원에서 전날 퇴원한 박모(57) 씨가 정신과 전문의 A(37·여) 씨에게 흉기를 휘둘렀다. 이 사고로 A씨가 왼손 손날 부분을 베여 길이 1.5㎝, 깊이 0.5㎝의 자상을 입었다.

박씨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병원직원 1명도 가벼운 상처를 입었다고 경찰은 설명했다.

박씨는 지난해 11월 이 병원에 입원했다가 범행 하루 전날 퇴원했고 병원 측이 보호시설 입소를 권유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박씨는 경찰 조사에서 “퇴원하고 노숙인 쉼터에 갔는데 숙식이 너무 불편해 다시 입원하고 싶어 찾아간 것”이라며 “(의사를) 찌르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해 12월 31일 강북삼성병원 임세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연락 없이 내담을 온 정신질환자의 흉기에 찔려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정신의료계와 정신장애계는 거대한 충격에 빠졌다. 어떤 이들은 “우려했던 일이 발생했다”고 토로했고 어떤 이들은 “병원 진료실 의사의안전은 애초부터 없었다”며 진료실 안전 강화를 주장하기도 했다.

국회도 발빠르게 대처했다. 모든 진료실에 비상벨, 비상 대피로를 만들어야 한다는 법안이 우선 발의됐다. 이어 퇴원한 정신질환자에 대해 1년간 강제로 외래치료명령제를 받도록 하는 법안 역시 발의됐다. 정신의료계에서는 사법입원을 통해 더 이상 환자의 입원을 가족과 의료진에게 맡겨서는 안 되다는 의견을 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당 차원의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현행 정신건강복지법의 대폭 수정할 것을 당론화했다. 더불어민주당은 개정 정신건강복지법에 중증 정신질환자의 개념을 확대하기로 했다. 현행 정신건강복지법에서 정의하는 정신질환자는 정신질환으로 독립적인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사람으로 한정하고 있다.

이 세밀화된 정신질환자의 개념 정의는 기존 간단한 우울증 치료만 받아도 정신과 상병 F코드를 받아야 하는 불합리한 제도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렇게 법을 만들어놓으면서 명백한 정신질환자에 대해서도 국가권력이 개입할 수 없는 허점을 만들었다는 지적도 나왔다.

더불어민주당은 이어 보호의무자에 의한 강제입원을 폐지하고 비자의입원 심사를 가정법원을 거치도록 했다. 이 사법 심사 없이 강제입원을 시킬 수 없도록 규정하는 법안이다.

여기까지다. 정신질환으로 표상되는 ‘위험성’에 대한 법과 국가권력의 치안적 개입은 이렇게 하나씩 만들어지고 있다.

정신질환자는 그 어감이 주는 ‘부정성’과 ‘두려움’ 때문에 일반 시민은 가까이할 수 없는 존재로 변질돼 버린다. 그러므로 한 명의 정신질환자가 저지르는 범죄는 모든 정신질환자들이 껴안아야 할 죄의식이 돼 버리는 것이다.

나는 그 정신질환자가 저지른 죄에 대해 아무런 관련이 없다. 거기에 개입해도 내가 범죄를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느낀다. 그럴 때 우리는 법적·도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나는 무언가 죄의식을 느낀다. 나는 그 의식을 ‘형이상학적 죄의식’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인간은 타자를 필요로 한다. 내가 존재하는 데 있어 타자는 절대적인 요건이다. 무인도에 가서 혼자 산다면 나는 문화와 문명이 주는 사회적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신을 그리워하면서 타자인 또 하나의 인간을 그리워한다. 혼자 있는다는 것은 그만큼 심리적·정신적 고독과 두려움을 만들어내게 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다. 왜 정신건강복지법을 개정하자고 하면서 정신장애인들이 겪어야 하는 심리적·관계적 의미에 대해서는 외면해버리는지 말이다. 외래치료명령제가 현실화 돼 강제로 치료를 받도록 한다고 해서 이 정신장애인의 사유가 자신의 치료의 필요성을 느끼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정신장애인이 진료실에서 사고를 칠 확률이 비정신장애인이 저지르는 병원 내 사건사고보다 많지 않다는 점에 대해서는 왜 침묵하는지 묻고 싶다.

정신질환자는 ‘두려움’의 표상이다. 그 표상은 이미 그가 위험한 존재라는 프레임이 놓여져 있고 그 표상의 행위 하나하나는 이 프레임 안에서 소비된다. 그 표상의 위험성은 비단 진료실뿐만 아니라 사회 속에서도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존재 자체가 위험이 되는 존재, 그가 정신질환자다.

그 시선 아래서 정신질환자는 하나의 ‘죄인’이 된다. 이 죄의식은 형이상학적 죄의식이다. 나는 인간이지만 인간의 지위에 올라서지 못하는 불편한 존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정신질환자는 그 존재성에 대해 마음 아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죄인됨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 형이상학적 죄인을 해방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법과 국가가 개입해서 만들어내는 저 폭력적 강제가 아니라 정신질환자 스스로가 자신의 병을 인지하고 사회적 관계망의 형성에 참여하게 하는 방법은 없는가.

왜 법과 국가는 이 같은 사회문화심리적 의미를 외면하고 정신질환자의 목에 끈을 묶어 강가로 데려가려 하는 것인가. 그렇게 끌고 가도 정신질환자가 물을 마시지 않겠다면 그 다음에 할 수 있는 일이 있는가. 그 정신질환자가 물을 마시지 않겠다고 하면 폭력을 행사해서라도 법과 국가, 이데올로기 앞에 무릎 꿇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가.

폭력은 이미 병원 안에서 시작된다. 폐쇄병동에 가두고 쥐죽은듯이 조용하게 의료 권력의 시선에 머물 때 힘겹게 외출과 면회를 허락하는 그 심리적 기제가 이미 내적 폭력이 아닌가.

국가가 예산을 만들어 우리가 그 돈으로 정신질환으로 표상되는 우리의 조직과 모임을 만들고 자발적으로 이에 참여함으로써 자유로운 치유의 길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왜 법과 정치는 무지한 것일까. 그것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또한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을 거라는 데에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것일까.

정신병원 유지 비용에 들어가는 국가비용을 우리 정신장애인들의 모임에 투자하라. 절차보조인제도, 동료지원가 제도를 강화하라. 그리고 그곳에 비용을 투자하라. 그리고 정신병원 퇴원 후 갈 곳이 없어 고립된 정신질환자가 언제라도 편하게 찾아갈 수 있는 정신보건의 대안적이고 가장 중요한 정신건강복지센터를 늘리고 충분한 인력을 확보하라. 그래서 정신건강복지센터가 정신병원을 대체할 수 있도록 정신보건 시스템을 강화하라.

2017년 의료기관 기물 파손과 의료인 폭행·협박으로 신고·고소된 사고는 893건이었다. 폭행이 365건으로 가장 많았고 전체의 67.6%(604건)는 술에 취한 상태(주취 상태)로 밝혀졌다.

나는 묻고 싶다. 이 중에 정신질환자가 저지른 사고는 몇 퍼센트인지. 그러나 모두 이 부분에는 침묵한다. 왜냐하면 정신질환자가 이 범죄률의 1%만 해당돼도 우리 정신질환자는 사회적 위협과 공동체의 두려움으로 수렴될 것이기 때문이다. 굳이 수치까지 알릴 필요까지는 없을 테니 말이다.

사고를 당한 여성 정신과 전문의 A 선생님에게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내가 한 건 아니지만 나의 동료일 수도 있는 정신질환자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 죄송하다는 생각뿐이다.

우리는 임세원 교수 피습 사건으로 깊은 충격을 받았던 존재들이다. 어떤 정신질환자가 의사를 폭행했다고 해서 우리가 잘했다고 말할 것 같은가. 아니다. 우리 또한 정신적 질병을 갖고 있지만 공동체의 질서를 위반한 정신질환자까지 옹호하는 건 아니다. 공동체가 충격을 받았다면 우리는 더 큰 충격으로 몸져누워야 했다. 왜냐하면 우리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법과 제도, 이데올로기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어야 한다. 정신질환자들의 진정한 욕구가 무엇인지, 그리고 국가가 어떤 정신장애의 부문에 집중 투자해야 하는지를 먼저 검토해야 할 것이다. 아까 말한 정신건강복지센터의 강화. 그것이 진정 우리 정신질환자들이 목에 끈을 묶어 강가로 끌고 가지 않아도 우리 스스로 목이 마르면 강가에 가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하는 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살자에 대한 전수조사에서 이들이 자살할 수밖에 없었던 최초이자 최고의 이유는 바로 ‘사회적 관계망의 훼손’이었다. 즉 나의 고통을 들어줄 사람이 없고, 내가 아프고 가난할 때 나를 위로하고 도와줄 사람이 없을 때 인간은 절대 고독을 느끼며 삶의 의미를 스스로 무장해제시켜 버린다는 것이다. 우리 정신질환자들도 수동적으로 이 절대 고독에 머물러 있다면 국가는 좀 더 심각하게 문제의 본질을 사유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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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랑제수민 2019-01-29 23:38:42
형이상학적 죄의식 나도 시달리며 가해자의 모습에 오버랩되는 내 질환 때문에 자살하고 싶기도 하다. 허나 부정마인드에 매인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사이코패스는 처벌추방격리 사법처리되야한다. 사이코시스는 치료받아 생존하며 약물과 심리사회관계적 치유에 이르러야 한다.

정치적으로 법적으로 올바른 이데올로기를 당사자도 가져야겠다. 자기결정권으로, 자존감을 갖고, 내 일을 하고, 내건강권을 요구하며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