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임세원법 특집] 어둔 밤과 반딧불
[칼럼/임세원법 특집] 어둔 밤과 반딧불
  • 김근영(가비노 김)
  • 승인 2019.02.10 23:0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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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가 쓴 『신곡』의 「지옥편」 제26곡에는 지옥의 여덟 번째 구렁에서 신음하는 죄인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사기와 기만을 교사한 죄인들”로, 민중에게 사기와 기만을 일삼던 피렌체의 부패한 권력자들이었다. 그 죄인들은 반딧불처럼 약한 빛을 발하며 고통으로 몸부림친다. 그 죄인들의 미미한 빛은 단테의 장대한 서사시 안에서 천국에 도달한 영혼들이 누리는 영광의 빛, 강력한 빛과 대조를 이룬다.

Gustave Doré illustrating Canto XXVI of Divine Comedy, Inferno, by Dante Alighieri. 'The Flaming Spirits of the evil Counsellors'
Gustave Doré illustrating Canto XXVI of Divine Comedy, Inferno, by Dante Alighieri. 'The Flaming Spirits of the evil Counsellors'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 세상은 단테의 세계관이 뒤집힌 모습이다. 우리의 세상에서 영광스러운 강한 빛은 천국이 아니라 부패한 권력자들의 것이다. 강력한 스포트라이트가 그들을 비추고 찬양한다. 게다가 연예인들의 삶은 영광의 빛을 발하는 별(star)이 되어 이 낙원의 영광에 봉사하고 있다. 우리의 삶은 아침에 눈을 뜨고 저녁에 눈을 감을 때까지 그 ‘스타들’에 대한 쓸데없는 정보들을 탐색하며 빛을 나누어 받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영광의 세계는 우리에게 오직 한 가지만을 요구한다. 그 영광에 만장일치로 박수갈채를 보내라는 것.

그러나 우리 세상에서, 어둔 구석에서 가장자리를 따라, 그 영광의 세계를 가로지르며 힘겹게 나아가는 반딧불들이 있다. 프랑스 미술사학자 겸 철학자 조르주 디디-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은 이 반딧불에 주목해서 ‘반딧불-민중’의 개념을 구체화하고 ‘이미지 정치론’을 전개한 바 있다. 필자가 보기에 그가 바라보는 반딧불-민중은 난민도, 인민도, 시민도 아닌, 정확히 우리나라 땅에서 '임세원법'의 발의로 또 한 번 희생을 치르게 될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대변한다.

Renata Siqueira Bueno, Lucioles (2008). courtesy by artist
Renata Siqueira Bueno, Lucioles (2008). courtesy by artist

반딧불은 어둠을 떠돈다. 그들은 약한 빛을, 미미한 빛을 발산한다. 생물발광 현상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발광의 목적은 먹이를 유인하거나 천적을 위협하거나 구애행동을 통해 번식하기 위해서다. 반딧불이가 발광하는 이유는 구애행동을 위해서다. 그들은 미광을 발산하고 춤을 추며 서로를 부르고 사랑하고 짝짓고 번식한다. 따라서 반딧불이의 춤은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아름다운 춤이다. 그들은 대기오염, 수질오염, 그리고 도시의 수많은 LED 조명으로 치명적인 생존의 위험에 처해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공동체를 형성하려는 욕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반딧불이 출현하기 위한 환경은 무엇인가? 그것은 더 환하고 강렬한 빛에 의해서가 아니라,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다. 밤이 어두울수록 가장 보잘것없는 미광마저도 타인에게 전달되어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할 불씨가 될 수 있다. 밤의 어둠은, 이제 더 이상 절망이 아니다. 그것은 미광이 출현하는 환경이며, 권력과 야망의 ‘강한 빛’에 대립하는 ‘약한 빛’이 더욱 생생하게 구성되는 조건이다. 강한 빛은 밤의 어둠을 몰아냄으로써 반딧불을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만든다. 어둔 밤이란 ‘이상적인 인간’이나 ‘정상적인 인간’의 범주에 포섭되지 않는 무의식, 수학적 공식으로 해답을 풀어나가는 과정으로 환원되지 않는 삶의 잔여들을 간직한 채 머무르는 터전이다. 만일 우리가 자본주의의 네온사인과 영광스러운 권력의 ‘강한 빛’ 이면에서도 밤의 어둠을 긍정한다면, 반딧불은 또 다시 어디선가 발광하며 예기치 않게 출현할 것이다.

불과 2년 전, 우리는 반딧불의 출현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서울 광화문 앞에서 벌어진 수차례의 촛불집회는 미미한 불빛을 서로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권력의 강한 빛에도 굴하지 않고 각자의 미광으로 소통하며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고자 했었다. 오늘, 지금, 여기에, 또 다른 반딧불이들이, 정신장애인 당사자의 살아있는 목소리로, 불을 밝히려고 한다. '임세원법'이 되고 싶은 '윤일규법'이 발의됐다는 것은, 어둠에 어둠을 더하는 사건이다. 하지만 그만큼 반딧불은 우리 눈에 잘 띄게 됐다.

반딧불이들을 더욱 잘 관찰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그들을 하얀 실험실 안에 가두고 강력한 조명 아래 놓는 것은 사악하고 어리석은 처사다. 반딧불이들을 죽이고, 곤충학자의 작업대 위에 핀으로 고정시키고, 수억 년 전부터 화석화된 희귀한 별종을 이질적으로 응시하는 것과 같은 처사는 반딧불이들을 연구하는 데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반딧불이들을 알려면 그들이 잔존해 오고 있었던 현재 안에서 그들을 바라보아야 한다. 어두운 밤 한 가운데서, 그들이 얼마나 아름답게 살아서 춤추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간혹 사나운 서치라이트가 그 밤을 쓸고 지나갈지라도, ‘조현병 환자 묻지마 살해’와 같은 부정적 여론의 ‘강한 빛’이 그들을 삼킬지라도, 그래서 그들의 빛이 거의 보이지 않더라도, 마침내 우리 시야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일 지라도, 그들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박멸됐다고, 소멸됐다고 섣불리 착각해서는 안 된다.

반딧불들은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그들은 급성기 환자의 증상처럼, 갑자기, 예기치 않게 언제고 출현할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필요할 때마다 소환되어 실험실에서 해부되는 곤충으로만 머물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소비주의의 네온사인과 의료권력의 조명으로 과도하게 비춰지고 있는 공간 속에서, 반딧불의 출현을 알아보는 눈을 갖춰야 한다. 그들이 보이지 않는 것은 우리가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아서이지, 그들이 소멸해서가 아니다. 사실 그들은 우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고, 어둠 속에서 우리 곁을 스치듯 지나간다. 다른 반딧불들은 이미 지평선 저편으로 떠났다. 다른 곳에서 그들의 공동체, 그들의 공유된 욕망을 다시금 형성하기 위해. 파스칼의 다음 언급이 우리를 위로할 수 있다면 사치일까.

"어느 누구도 아무것도 남기지 못할 만큼 빈곤하게 죽지는 않는다."

가비노킴(Gabino Kim)

가비노 김은...

가톨릭대 신학과 졸업
홍익대 미술대학원 졸업
바티칸 뉴스 한국지부
정신장애 당사자 후견보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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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랑제수민 2019-02-11 11:28:59
야심유성휘~밤이 깊을수록 별은 오히려 더 빛난다
고난이 더할 수록 유익하다 축복이 더 크다
흑암과 사망이 깊을 수록 생명이 삼킨 바 되어 승리가 더 값진 것이다.

임세원법 아닌 윤일규법은 패망을 자초하고 있다. 촛불로 일어선 촛불권력이 촛불민심에 이반하고 촛불국민을 억압하고 있는 적폐로 회귀하고 있다.

생명공동체를 향한 반딧불이 조현당사자들의 생명 자존의 저항이 그들을 뚫고 외친다. 자유가치료다. 우리를 빼고 우리를 논하지말라.

우린 빈곤하게 죽어갈 존재가 아니며 잉여적 잔재로만 남을 수 없다. 조현당사자여 연대하라 전국조직을 결성하라 행동하는 양심으로 일어나라~승리를 쟁취하자~~

사악한 의료권력 무릎꿇게하고 국회 사법 농단의 주범들을 처단하며 적폐를 재생시키는 권력추종자를 추방하자~ 촛불민심승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