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치료 경험담] 첫 대면과 대면 후 꿈의 해석은 이후 치료에 대한 시사점을 준다
[정신치료 경험담] 첫 대면과 대면 후 꿈의 해석은 이후 치료에 대한 시사점을 준다
  • 전민 기자
  • 승인 2019.02.21 21: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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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부터 시작된 철저한 '고독감'
세상은 이기적...환영하지 않는다는 열등감 강화돼
자신의 고통의 근원은 부모라고 망상...병원 입원
정신과의사 A 선생과의 극적 만남...이후 치유의 길로

이 글은 <마인드포스트> 시민기자인 전민 씨가 발병 이후의 심리적 경험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술한 기사입니다. 그의 치유의 경험이 많은 이들에게 자기분석과 통찰을 통한 또 하나의 치유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나의 지금까지 정신치료 기간은 1994년 4월부터 26년째이다. 발병 당시에 처음 입원한 3주간의 경험. 이 경험은 광기일기 코너에 세 편에 걸친 글로 정리해 놓았다. 그 이후 처음 입원했던 병원 외래를 그만두고 국립정신병원 외래를 다니기 시작한 것이 1994년 6~7월로 기억한다. 여기서 A 선생을 만나게 되고 그 후 지금까지 계속해서 심리치료를 하고 있다.

본인의 심리치료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많은 당사자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처음 발병할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함이 먼저일 것 같다.

1991년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입학과 동시에 함구증이 생겼다. 새로 친구를 사귀고 해야 할 신학기 초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말을 하기가 굉장히 힘들어졌다. 사실 친구를 사귀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주위 친구들은 다 어른같고, 나만 어린아이로 남아있는 것 같았다. 중학교 때와는 다른 성숙한 분위기가 풍겼다. 거기서 나만 어린아이였고 그래서 아마 말을 하지 않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고등학교 삼년동안 아무하고도 친구를 만들지 못했고 왕따 아닌 왕따가 돼서 학교생활을 했다. 제일 괴로운 시간이 교련과 체육 시간이었다. 교련에서는 고문관 비슷했고, 체육 시간에는 혼자 운동장 구석탱이에 서서 있곤 했다.

점심시간에도 혼자였는데 친구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밥을 혼자 먹어야 했다. 몇몇 '날라리'들이 접근해서 놀리고 희롱하기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운 좋게 대학에 들어갔는데 실업계 출신이 대다수인 야간반이었다. 자연 소외될 수밖에 없었고 친구를 사귀는 기술을 전혀 익히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혼자가 되었다. 2주 뒤부터 학교를 가지 않기 시작했고 이후 4월 말 무렵부터 주위 가족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주로 하는 생각이 있었다. ‘세상은 나를 환영하지 않는다. 다들 이기적이고 자기만 챙기려고 한다. 소외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없고 자기가 주인공 되려고 한다. 그런 생존경쟁의 각축장이다. 나는 정글 속의 토끼와 같다.’

아무도 모르는 혼자만의 투쟁이 계속됐다. 학교를 가지 않는다고 해서 부모가 어떻게 한 것도 아니다. 그냥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건 옛날에도 마찬가지였다. 진짜 필요한 것에는 부모는 신경 쓴 적이 없었다.

4월 말에 내 모든 이 고통의 근원에는 부모, 특히 엄마가 그 근본 원인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엄마에게 따져물어야겠다 생각했다. 그냥 물어보면 대답할 리 없다. 지금까지 엄마가 취한 행동으로 볼 때 그냥 무시하거나 아무 말 하지 않고 자기 일을 하거나 성질을 부리거나 셋 중에 하나였다.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특단의 조치를 하지 않으면 말을 듣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일종의 충격요법이었다.

식탁위에 있던 과도를 집어들었다. 제대로 정직하게 대답하지 않고 또 속이려들면 그땐 가만있지 않겠다(찌를 수도 있다)는 표시였다. 그만큼 내 상황은 심각해져있었다. 부모의 침실에 과도를 들고 들어가서 엄마한테 왜 내가 이렇게 됐는지 말해보라, 이유가 뭐냐고 따져물었다.

그 상황에 부모는 놀랐다. 그것은 부모가 지금까지 취해왔던 양육 태도, 뭘 하든 신경쓰지 않는 태도, 정말 자식이 뭘 원하는지, 무엇을 어려워하는지, 자식의 고민이 뭔지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는 태도에 대한 대반란이었다. 지금까지 당신들이 내 문제에 대해서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있느냐? 계속해서 신호를 보내고 말을 하고 메시지를 보내도 무시하고 모른 척했던 것이 당신들이 아닌가? 당신들이 과연 부모라고 할 수 있는가? 부모라서 의무를 다했는가? 단순히 의식주를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녀의 정서적, 심리적 상태에 대해서 얼마나 신경썼는가? 심리적 학대가 아닌가? 방임 역시 학대의 일종이다. 그런 의미이다.

행동의 결과는 쓰라렸다. 다음날 낮에 잠에서 깼을 때, 내 앞에는 모르는 두 건장한 남자가 서 있었다. 아, 경찰이구나, 순간 생각했다. 그리고 병원 후송된 내용과 이후 퇴원하기까지의 과정은 이미 기사화된 광기일기 – 그해 봄은 결국은 눈부시더라는 이야기-에 포함되어 있다.

퇴원 후 집에서 지내게 됐다. 학교는 아버지가 휴학을 신청해 놓았다. 2학기가 개강하기까지 몇 개월을 놀게 생겼다. 퇴원하게 된 데에는 아버지의 단서가 있었다. ‘교회를 다녀라’ 그것을 한다면 퇴원하게 해주겠다는 단서가 있었다. 지금도 나는 내 아버지가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교활한 면이 있다는 것을 가끔 느낀다.

아버지 나이대의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아버지 역시 남의 집 머슴살이를 초등학교를 나온 이후 했고,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 집이란 것은 집 구실을 못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자기들 자식을 제대로 건사도 못 하면서 살았다.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가정이었지만, 나라 상황 역시 무능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가난은 늘 사람들을 따라다녔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기도 쉽지 않았다. 문제는 돈이었다. 그런 환경속에서 꾀를 부리고 제 밥그릇을 챙기지 않으면 생존하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었다. 지금도 그점에서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난 교회 따위는 관심이 없었지만, 병원을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갈급했던 터라, 아버지의 조건을 수락하고 말았다. 그 이후의 교회라는 조직을 경험하면서 받은 상처와 절망감에 대해서는 후술하겠다. 퇴원 후에는 교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교회친구라는 것을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2학기가 되어 복학을 했고 학교생활을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처음 입원했던 병원에서 외래치료를 그만두고 국립정신병원 외래로 옮겼다.

옮긴 이유는 아버지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내 의사는 무시됐다. 지금까지 글로 예상하겠지만 내 아버지는 독재적인 면이 강했던 사람이다. 지금은 많이 약화되었지만 한때는 대단한 독재자였다. 나는 A 선생과의 면담시간에 그를 히틀러에 묘사하곤 했다. 또는 박정희.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었다는 점에서 아버지는 히틀러나 박정희와 비슷한 면이 있었다.

국정(국립정신병원)에서 외래를 다니다가 A 선생을 만나게 됐다. 사실은 아버지가 접수하는 곳에 잘하는 선생으로 부탁한다고 미리 말을 해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진짜로 제일 잘하는 선생이 내 담당이 되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운이었다.

A 선생과의 첫 면담이 기억난다. A 선생은 자신에 대한 인상을 물었다. 나는 ‘조금 무뚝뚝해보이고 그러면서도 성실할 것 같다’고 대답한 기억이 있다. 이는 A선생에 대한 정확한 첫인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후 내 부모 역시 A 선생과의 치료를 진행한 적이 있다. 이때의 A 선생에 대한 부모의 느낌 또한 나와 거의 비슷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A 선생은 두 번째 면담에서 꿈꾼 것이 있으면 얘기해보라고 했는데 거기서 이런 꿈을 보고한 기억이 있다.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사람들이 자기를 기계(프레스같은 것)에 올려놓고 기계를 작동시켜 자기 몸을 친다. 이런 행위를 공장 내 모든 사람들이 반복하는데 그 속에 나도 그렇게 하고 있다’

이 꿈을 보고할 당시에는 꿈의 의미, 무의식 이런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를 때이다. 전에 다녔던 문OO정신과에서도 이런 얘기는 한 적이 없었고 관련 서적을 읽어보기도 했으나 역시 꿈분석이나 무의식에 대한 이야기는 찾기 힘들었다. A 선생을 통해 꿈의 무의식적 의미와 무의식에 대한 것을 이해하게 되었고 본격적인 자아탐구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설명: 치료자를 대면하고 첫 치료 이후의 꿈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꿈의 의미가 치료자에 대한 인상과 앞으로의 치료에 대한 전망을 환자 스스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꿈의 의미에 대해서 환자는 알지 못하며 치료자는 꿈을 해석함으로써 환자가 모르고 있는 치료자에 대한 기대와 치료에 대한 기대를 일깨워줄 필요가 있다. 이는 치료가 계속 진행될 수 있는 중요한 동기가 된다.

A 선생은 나의 꿈 이야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놓았다. ‘환자 본인이 지금 상당히 정신적으로 힘든 상황이다. 억압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해석에 반신반의했다. 아니 사실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그런 해석에 대해서 그런가보다 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도 이 꿈 해석을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때의 그 해석이 내가 A 선생과 면담을 지속시켜 나갈 근본적인 동기가 됐다는 점을 강조해야겠다.

A 선생은 내가 모르는 내 상태를 정확하게 지적했으며, 그 점이 내가 스스로 A 선생과 상담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각인시켰다는 점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최초의 꿈 보고를 통해 A 선생과의 긴 여정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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