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인권친화적 정신병원은 언제 가능할까
자유로운 인권친화적 정신병원은 언제 가능할까
  • 박종언 기자
  • 승인 2019.03.05 19: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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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원은 개방병동으로 전환돼야
정신병원 본질은 ‘폭력’과 ‘억압’으로 작동
자유가 곧 치료…국가가 당사자에 지원해야

장사를 할 때였다. 그때 기자는 삼십대였다. 트럭에 사과를 가득 싣고 동네를 돌아다니며 전단지를 돌렸고 그 전단지를 보고 전화를 해오면 사과를 갖고 가서 파는 일이었다. 그때 기자는 엄청난 대인공포와 망상을 갖고 있었지만 이를 내색할 수는 없었다. 몇 년 후 첫 입원을 했지만 그때 삼십대의 기자는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을 쳐야 했다.

경기도 북부의 한 마을로 기억된다. 임대아파트촌의 각 집의 문에 전단지를 붙이던 중 한 40대의 남성이 7층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집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엘리베이터에서 노부부가 내렸다. 노부부는 남성을 보더니 “집에 빨리 들어가”라고 윽박질렀다.

그러자 남성은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말하며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노부부는 완강했다. 그들은 아들인 남성을 향해 “어제도 나가서 사고 치고 왔잖아. 들어가, 빨리”라고 말했다. 아들은 노부부의 손짓을 거부했고 거의 끌려가다시피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그 집에서는 이상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기자는 그 남성이 정신장애인이라고 직감했다. 기자 역시 입원 전의 정신장애인이었지만 그날, 그 남성의 행동과 괴상한 비명 소리를 들으며 정신적 장애에 대한 깊은 회의감을 느꼈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도 가끔씩 그 남성이 생각난다.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간 몇 번의 정신병원 입원을 한 건 아닐까. 어쩌면 그는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됐을 수도 있고 불행히도 그렇지 못하다면 그의 노부모에게서 경제적인 모든 것을 의존해 살아가고 있을 지도 모른다.

노부부는 아들의 증상을 관리하면서 우울증을 느꼈을 것이고 어쩌면 그 돌봄에 지쳐버렸는지도 모른다. 가장 쉬운 방법은 아들을 정신병원에 강제입원시키는 것이리라.

인간은 자유를 원한다. 헌법에서도 자유로운 사상과 표현을 허용하고 있으며 이를 국가 의무로 간주한다. 물론 종교적 이유에서건 정치적 이유에서건 복종과 예속을 명예로 여기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본성상 자유를 갈망한다.

18세기 후반 프랑스 정신의학자 필립 피넬은 비세트르 정신병원에 감금된 정신장애인들의 발에 묶인 쇠사슬을 끊어주었다. 정신장애인이 흉악한 범죄자들이고 충동적이라서 그들의 신체의 자유를 법적 근거 없이 묶어놓았던 것에 대한 혁명적 조치였다.

이탈리아 정신의학자 바살리아 역시 20세기 중반 이탈리아 정신병원을 모두 폐쇄하도록 했다. 그는 그의 말대로 ‘자유가 치료’라는 의미의 소중함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피넬과 바살리아의 기저에 흐르는 이데올로기는 ‘자유’일 것이다. 그것은 곧 인간 존엄에 대한 확인이다. 따라서 억압과 예속은 인간의 정신을 병들게 하고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다.

정신병원이 그렇다. 한국의 정신병원들은 기본적으로 ‘폭력’이라는 본질적 성격을 띄고 있다. 정신요양시설은 그 강도가 더 높다. 1995년 정신보건법 제정 후 정신병원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8만 병상을 넘어섰고 강제입원률은 전체 입원의 90%를 넘었다.

인간이 정신적 병이 있다는 이유로 신체의 자유를 억압하고 정신병원에 그 정신을 가두어두는 것이 21세기에 가능한 일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핀란드의 오픈 다이얼로그처럼 급성기 때 그의 주변 관계자들이 모두 모여 회의를 거치고 입원과 약물은 최종 수단으로 남겨두는 인권친화적 발상을 우리나라는 할 수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정신병원을 모두 개방병동으로 전환해 자신의 안정을 위해 스스로의 의지로 정신병원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제안은 여전히 무의미한 것일까.

기자는 정신병동과 정신요양시설에서 ‘탈출’했던 많은 사람들을 기억한다. 이들에게 정신병원은 치료의 공간이 아니라 억압과 복종의 기제로 작동하는 전근대적 폭력의 자리였다.

지난 3일 경기 의정부에서 아들(28)이 아버지(57)를 흉기로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언론들은 흉기를 휘두른 아들이 조현병 환자였다며 일제히 기사를 송고했다.

사건 당시 아들과 아버지는 정신병원 입원 문제를 놓고 다투었다고 했다. 아들 A씨에게 정신병원은 어떤 의미였을까. 한 예로 정신요양시설에서 퇴소한 한 청년은 아버지와 말다툼을 벌이다 아버지가 정신요양시설로 다시 넣겠다고 말하자 그 자리에 꿇어앉아 ‘싹싹’ 빌었다고 한다.

얼마나 폭력적이고 자유를 억압하는 공간이었으면 그렇게 했을까.

만약 정신병원이 개방병동이고 치료를 위해 내가 원할 경우 가서 안정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라면 아버지를 살해한 아들이 그런 행동을 취했을까. 어쩌면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정신병원에 스스로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치료의 공간을 억압과 폭력으로 만들어놓고 그곳에서 치료받으라는 것에 누가 순응할 수 있겠는가.

국가는 외래치료명령제를 비롯해 감금과 배제에 기반한 법안들을 상정하면서 정신장애인 복지에 대해서는 왜 그토록 외면하는 것일까. 정신병원에 들어갈 예산을 정신장애인 당사자와 가족의 복지에 사용한다면 정신장애인은 더 일찍 치유됐을 것이다.

그리고 언론은 왜 ‘조현병’으로 추정이 되면 그토록 ‘악랄하게’ 조현병 당사자를 범죄자로 분류해 버리는 것인가. 미디어가 생산하는 이미지에 따라 조현병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됐다는 응답은 열 명 중 여덟 명이 그렇다고 답했다는 보고도 있다.

모든 인간은 자유를 추구한다. 정신장애인 역시 그렇다. 이 자유의 확보를 위해 국가와 언론은 무엇을 해야 할지 진실로 고민해야 할 때다. 자유로운 자유로움. 그것이 치료다. 정신병원은 그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전환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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