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숙 “글쎄, 인생이 어떤 건지는 몰라도 슬프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이인숙 “글쎄, 인생이 어떤 건지는 몰라도 슬프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 박종언 기자
  • 승인 2019.05.14 23: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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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장애인 시인 이인숙 씨 인터뷰
요양원에서 살 것…바깥 세상으로 나가고 싶지 않아
자유문예 신인상 수상…발간 시집 선물 많이 해
미당 서정주 시 읽으며 시인 꿈꿔
지금까지 모두 세 권의 시집 상재
시인된 걸 모르고 부모님 돌아가셔…후회돼
정신적으로 부지런하면 육체적으로도 부지런해져
성모 마리아상 현시(顯示) 보고 우연처럼 등단해
정신장애인, 위축되지 말고 자기 뜻 펼쳐야
박종언의 만남: 길을 묻다 (c) 마인드포스트
박종언의 만남: 길을 묻다 (c) 마인드포스트

그녀를 만나러 가면서 내가 그녀에 대해 가진 정보는 그녀가 시인이고 정신장애인이며 현재 정신요양원에서 지낸다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나이가 70대라는 것.

무엇보다 그녀를 만나고 싶었던 건 그가 ‘시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시(詩)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보냈던 시절이 있었다. 더 크게는 문학이 무엇이냐를, 더 크게는 삶 자체가 무엇인가를 질문하던 형이상학에 침잠했던 시절들이었다.

흐린 횃불을 켜서 세계를 확인하며 걸어가는 것. 그가 시인일까. 혹은 이데아의 그림자에 혹해 있는 이들을 향해 불빛에 의해 드러난 이데아의 이미지는 ‘거짓’이라고 외쳤던 미치광이의 진리에 대한 요청이 시일까. 무엇보다 나는 그녀에게 ‘왜 시를 쓰는지’를 묻고 싶었다. 그리고 이 세계가 당신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를 알고 싶었다.

시인 이인숙(70·여) 씨를 만나러 가는 길에 나는 그런 질문들을 머릿속에서 구상하고 있었다. 그녀는 20대 중반, 여느 사람들처럼 결혼을 했고 딸아이 두 명을 낳았다. 조현병이 뭔지도 몰랐던 그때 조현병이 찾아왔다. 정신적 장애를 갖게 된 후에는 이혼했다. 딸들은 남편이 키우기로 했다. 지금 딸들은 40살이 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도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녀 또한 그 아이들을 만나는 것이 죄스러워 피했다. 30대의 어느 날, 처음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리고 또 다른 병원을 거쳐 2005년 현재의 영보정신요양원으로 옮겼다. 그녀는 14년째 이곳에서 살고있다.

탈원화할 계획이 있냐고 묻자 그녀는 단호하게 ‘싫다’고 말했다. 그리고 기자에게 자신이 쓴 시집을 건넸다. 인터뷰가 끝나고 회사로 돌아와 시집을 읽어나갔다. 시인은 “정신지체(정신장애) 3급 장애자로 판명되었을 때 비로소 나는 자유를 느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사물들의 일상생활을 긍정적으로 보며 즐기기도 했다”며 “나의 글은 내 안의 순수한 망령”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나는 세계를 해석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역으로 세계 역시 나를 해석한다. 이 해석함과 해석됨의 지평에 시가 놓여 있는 건 아닐까.

그녀는 현재까지 세 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새벽을 바라며’, ‘달에 꽃피다’, ‘상아를 훔친 사람’. 2010년에는 자유문예 신인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녀를 만난 건 오전 하늘이 푸르게 맑은 14일이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시인 이인숙 (c)마인드포스트.
시인 이인숙 (c)마인드포스트

-첫 입원하기 전까지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서울에서 태어났어요. 중·고등학교 마치고 대학교는 방송통신대학 가정학과 다니다가 그만뒀어요. 요양원 들어오기 전에는 결혼생활을 했죠. 아이가 둘인데 40년 동안 못 봤어요. 앞으로도 못 볼 것 같아요. 이혼을 하고 남편이 아이들을 키우겠다고 해서 보냈는데 남편이 애들을 안 보여줘요. 딸 둘인데 지금 마흔 살이 넘었을 텐데.”

-지적장애입니까.

“정신장애 3급요. 젊었을 때 애기 있을 때 우울증에 걸려가지고 옥상에서 뛰어내리려고 한 적이 있어요.”

-몇 살 때 발병한 겁니까.

“잘 모르겠어요. 초등학교 때 머리를 다친 적이 많아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도 오빠가 동생을 자전거를 태워서 가는데 쫓아가다가 자갈밭에 넘어져서 기절했어요. 10살 전후로 해서 발병했어요. 환청 그런 건 없어요.”

-증상이 어떤 게 있었나요.

“머리를 자꾸 다치고 하니까 병이 있나보다 해서 병원에 입원시키고 절에도 보내고 그렇게 했는데 저는 모르죠.”

-몇 살 때 처음 입원했습니까.

“몇 살 때인지는 모르겠어요. 이혼하고 바로 했으니까. 27살에 애기 낳고 이혼하고 서른 살 넘어서 입원했어요.”

-증상이 어땠습니까.

“포악했다 그럴까. 식구들하고 잘 어울리지 못하고 근심만 끌어안고 살았어요. 성질이 순하지 않았어요.”

-몇 번 입원한지는 모르시고요?

“광화문에 있는 A병원에 한 번 입원했고 거기서 다시 대방동의 B병원. 여기가 세 번째예요.”

-여기 영보정신요양원 2005년도에 오신 거죠.

“네. 맞아요.”

-이쪽으로 오신 이유가 있습니까.

“그 이유는 모르겠어요. 내가 봉사를 많이 했어요. 서울 성모병원에서 간병도 하고 봉사하러 다니고 해서 돈도 좀 받고 했는데. 매점에서는 매점장을 했어요. 한 7년 정도 매점장을 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인계하고 그냥 평범하게 지내고 있어요.”

-그래서 이 병원하고 시설에서 산 게 한 몇 년 정도 됩니까.

“삼십대부터 일흔 살 지금까지 입원해 살고 있어요. 여기 오기까지 A병원, B병원 빼고 다른 데 간 적 없어요.”

-현재 지역사회에 집이 있으면, 만약에 그렇다면 밖에 나가서 살 계획은 있습니까.

“아니요. 그런 계획 없어요.”

-왜 그렇습니까.

“왜 그런 게 아니라 여기서 편하게 살고 있는데 굳이 고생하면서 사회 적응하고 살 이유는 없을 것 같아요. 제가 (지역사회에서) 부모형제를 찾으러 가는 건 아니잖아요. 부모님 다 돌아가셨어요. 언니도 돌아가고 남동생도 미국에서 목회했는데 암으로 돌아갔어요. 나 혼자 남았어요.”

-바깥에 나가서 살고 싶지 않습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바깥에 뭘 보고 나가 살아요. 싫어요.”

-왜 싫은 겁니까.

“하여튼.”

-시를 쓰게 된 동기가 있었습니까.

“동기는 A병원에 있을 때 간담회를 하면 제가 늘 시를 써가지고 가서 얘기를 했어요. 32살쯤일 거예요. 시를 써서 대답을 하니까 원장님이 ‘인숙 씨는 시를 잘 쓴다’고 칭찬을 해 주시는 거예요. 그때부터 시를 썼어요.”

-시집 ‘새벽을 바라며’ 출판했죠. 많이 팔렸습니까.

“팔리는 게 아니라 그냥 나눠줬죠. 시집을 사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500부 발간했어요.”

-만약 시를 안 썼으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밥 먹고 자고 씻고 그랬겠죠 뭐. 시 쓰고 있다고 해서 뭐 다른 거 없어요.”

-용인문학 회원이시죠. 회원들과는 자주 만납니까.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요.”

-어디서 만납니까.

“용인문학 회의실에서 만나죠. 거기서 공부를 해요. (시를 가르치는) 교수님이 계신데 시 쓴 걸 그 분에게 갖다 주면 20명 앞에서 낭송을 하고 합평을 해 주세요.”

-현재까지 쓴 시들이 몇 편 정도 됩니까.

“한 300편 넘겠죠. 왜 그러냐면 ‘새벽을 바라며’ 썼죠, ‘달에 꽃피다’ 썼죠, 세 번째는 상 탔던 ‘상아를 훔친 사람’ 썼죠. 책으로 나왔죠. 세 권 출간했는데 지금 다 남 주고 없어요.”

-지금도 계속 쓰시는 거죠.

“네. 지금도 쓰고 있어요.”

-시를 쓰면 행복하십니까.

“만족하는 게 행복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몰라도 내 시에 대해 만족했을 때 행복하다고해야 할까. 하여튼 좋은 기분은 들죠.”

-소설은 쓰지 않습니까.

“소설은 팔이 아파서 못 쓸 것 같아요. 2010년도 자유문예에 신인상으로 등단했을 때부터 소설을 쓰고 싶었는데 되지 않았어요. 팔이 아파서.”

-이 세계가 선생님에게 상처를 줬다고 생각하십니까.

“모르겠어요. 어렸을 때부터 머리를 잘 다치고 그랬는데 그걸 갖다가 다른 사람에게 핑계 댈 수가 없잖아요. 내가 다친 건데. 세상 사람에게 감정을 갖는다거나 그런 건 없어요. 사람을 상대할 때 미운 사람도 있고 고운 사람도 있잖아요. 그렇게 산 거예요.”

시인 이인숙 (c)마인드포스트

-사람들이 선생님 모습을 보고 웃습니까.

“내가 웃기긴 하지만 웃진 않아요. 내가 무슨 말을 하면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반응을 보이죠. 그렇지만 그게 흉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스러운 거죠. 남이 못하는 말을 했으니까. 신부님한테도 그런 말해서 신부님을 당황하게 했던 적이 있었는데 오히려 그런 말을 해서 수긍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종교가 뭐죠.

“가톨릭이죠.”

-하느님이 선생님을 정신장애인으로 만들게 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정신장애로 태어나게 했다는 건 말이 안 되고요. 그냥 하느님을 믿을 뿐이에요. 이유는 생활 자체에서 하느님이 현시(顯示)하시니까 그 하느님을 쫓으면서 사는 거예요.”

-비정신장애인이었으면 어떻게 사셨을 같아요.

“그게 상상이 안 돼요. 내가 어떻게 살 거라는 거. 병원에 들어오기 전부터 내가 어떻게 살 거라고 생각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걸 생각을 못해 봤어요.”

-하루 일과는 어떻습니까.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나십니까.

“5시 10분에 다 같이 일어나요. 씻고 아침운동하고 밥 먹고 약 먹고. 그 다음은 늘 하는 대로 일들을 해요. 특별히 빨래를 하든가 양말을 빨든가 하죠. 자기가 할 일이 있으면 하는 거죠.”

-점심 먹고는 뭐하십니까.

“점심 먹고 텔레비전을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다음날 할 일을 생각해 두든가 하죠.”

-몇 시에 주무세요.

“밤 아홉 시에요. 텔레비전 드라마 끝나면.”

-이 시설에서 마지막까지 사실 겁니까.

“네 여기서 살 거예요. 특별한 일도 없지만 특별하게 살고 싶지도 않고요. 나가서 고생하면서 억지로 살고 싶지는 않아요.”

-나가서 고생한다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

“사회와 부딪히는 게 고생이잖아요. 여기서는 그냥 생활하면 되지만 사회로 나가면 새로 시작해야 되잖아요.”

-그게 두렵습니까.

“두려워요. 그렇게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밥해서 먹고 혼자 살고 그런 게 좋지 않을까요.

“옳지 않아요. 혼자서 먹는 거잖아요.”

-삶을 제대로 살아보지 못했던 인생에 대해 원망은 없습니까.

“원망이 드는 건 내가 시집을 쓴 걸 보고 부모님이 돌아가셨으면 했는데 그렇게 못했어요. 그랬다면 마음이 그렇게 아프지 않았을 거예요. 내가 시를 쓰기 전에 다 돌아가셔서 그게 섭섭해요. 하느님이 나를 왜 야박하게 하시나 그런 쓸쓸함이 있어요.”

-용서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만 내가 나를 용서 못해요. 왜 진작 부모님과 형제들과 잘 지내지 못했던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젠 그런 생각을 할 시기도 지나갔어요. 그런 생각을 하지도 않아요.”

-용서를 다 했습니까.

“그 사람들이 잘못해서 용서를 한 것이 아니라 나하고 뜻이 안 맞아서 그렇구나 생각하죠.”

-어떤 뜻이 안 맞았습니까.

“식구들이 화합을 안 하고 각자 놀았던 거 같아요. 동생들도 더 돌봐주고 윗사람에게 순응하고 해야 했는데. 그리고 일찍 성경을 알았으면 좀 더 생활하는 방법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인생을 살아오면서 절절하게 깨달은 삶의 철학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제가 꿈을 먹고 삽니다라는 글을 쓴 적이 있어요. 고등학교 때 성적은 자꾸 떨어지고 친구들하고도 친하게 지내지 못하고 대학교 갈 생각도 못했어요. 그런데 집에서는 자꾸 대학을 가라고 그러는데 무슨 수가 있나. 관심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대학을 못 갔어요. 결혼하고 나서 방통대 들어가서 몇 달 다니다가 관뒀어요.”

-집은 좀 부유했나 봐요. 대학 가라고 하시는 걸 보니.

“집이 커요. 어렸을 때부터 2층집에서도 살았고 3층집에서도 살았어요. 부자라고 그러는데 제가 그걸 못 느껴요. 내가 부자라는 걸 마음 편히 느껴야 하는데 항상 쫓기는 마음으로 살았거든요. 말하자면 부모형제간에 우애가 있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없었던 거 같아요.”

-깨달은 게 있습니까.

“부지런해야 한다는 거. 정신적으로 부지런하면 육체적으로 부지런하게 돼요. 부지런한 생활을 하면 거기서 얻을 수 있는 게 많은 것 같아요.”

-뭘 얻을 수 있습니까.

“대인관계도 좋아지고 좋은 지인들 만나서 좋게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죠. 그리고 학교에서 배운 걸 잘 활용하면 좀 더 나은 생활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선생님은 인생의 실패자로 생각하십니까.

“글쎄, 인생이 어떤 건지는 몰라도 슬프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실패자라고 생각하면 우울해지고 또 하나의 병을 얻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죠.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싶지 않아요.”

-지금 이 삶에 만족하십니까.

“몸이 좀 피곤해서 그런데 만족한다기 보다는 잘 지내고 있어요.”

-장애인 문학상을 받았죠. 상금이 얼마던가요.

“돈으로 받은 건 없어요. 책으로 다 받았어요. 100권, 50권 이렇게요. 나는 책만 내면 돈이 막 쏟아질 줄 알았어요(웃음). 근데 그게 아니고. 서점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느낌이 오는 거죠. 이름이 있는 사람들 시집만 뽑아가지 이름 없는 시인들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죠. 그래서 나눠준 책을 그나마 잘 읽기만 해도 그걸로 감사해야죠.”

-선생님을 도와준 사람들이 있습니까.

“네, 있어요. 여기 원장 선생님이신 수녀님이 계셨는데 수녀님이 ‘이인숙씨는 시를 잘 쓰니까 시집을 만들어주겠다. 모아서 가져와라’ 그래요. 갖다드렸더니 시집 ‘새벽을 바라며’가 나오게 됐는데 이 책으로 등단한 건 아니고 그냥 출판사 없이 나왔어요. 실망스러웠어요.

다음에 어느 지인 선생님이 문예지에 한 번 공모를 해 보라 해서 이력서하고 시 쓴 거 하고 해서 냈어요. 그랬더니 그쪽에서 등단을 했다는 소식이 와가지고 그때부터 시를 더 가까이 했어요. 그때 용인문학에서 인터뷰가 들어왔어요. 그때 ‘내가 시 창작 공부를 못했다’라고 하니까 용인문학 쪽에서 ‘우리가 시 창작이라는 아카데미를 열고 있으니까 들어와라’ 해서 용인문학쪽으로 간 거예요.

사실 전 자유문예에서 등단했는데 거길 왜 못 갔냐면 거리가 너무 멀어요. 인천이에요. 등단해서 상 받으려 갈 때는 원장 수녀님이랑 식구들하고 같이 갔는데 두 시간이 넘게 걸렸어요. 제가 혼자 다니기엔 벅차요. 선생님들께 죄송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요. 용인문학에 다니니까 거리도 맞고 내 취향에도 맞게 가르쳐 주시고 길을 열어주시니까 마음을 붙이고 다니는 거죠.”

-좋아하는 시인이 있습니까.

“좋아하는 시인은 미당 서정주. 미당 시인 읽을 때 감흥이 왔어요. 이렇게 글로 좋게 표현할 수 있구나, 사람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구나 생각을 했어요. 그렇게 생각했지 내가 시인이 될 거라고 생각을 못했어요. 이해인 수녀님 시도 보면서 감흥을 많이 받았어요.

이해인 수녀처럼 시를 쓰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사람들이 이인숙 씨가 이해인 수녀를 뛰어넘는다는 소리를 해요. 아무렴 그러겠냐고, 이해인 수녀님이 더 낫다고 하니까 아니래요. 이인숙 씨가 쓴 시들이 훨씬 더 낫다고, 그런 칭찬을 여러 번 들었어요. 그래도 전 이해인 수녀님을 존경해요. 서정주 시인의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라는 시가 제겐 너무 파격적으로 다가왔어요. 미당 시를 좋아하는 이유예요.”

시인 이인숙 (c)마인드포스트.
시인 이인숙 (c)마인드포스트

-정신장애를 겪으면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게 뭘까요.

“밤에 잠을 못자는 거. 밤이 되면 다리가 저린다든가 머릿속이 어지럽다든가 팔다리가 아리고 해서 몸부림을 치는데 그때가 제일 괴로워요. 오래 그랬는데 약을 바꾸고부터는 안 그래요. 잠을 푹 자고 일어나니까. 그렇게 괴로운 기분이 안 들죠.”

-그런 거 몇 년 겪었습니까.

“한 일 년가량 계속 그랬어요. 팔다리 저리고 잠을 못자고 혼돈이 오고 그랬는데 아침이 오면 괜찮아요. 그 아린 증상을 낮에는 잊어버려요. 약을 바꿔달라고 해서 먹었는데 근래에 그게 없어졌어요.”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습니까.

“초등학교 때 짝사랑했던 남학생이 있었고 고등학교 때는 체육 선생님을 좋아했죠. 그리고 나서 남편을 만나서 결혼을 했어요. 그런데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아서 이혼했잖아요. 누굴 좋아한다는 건 남편한테 실패했기 때문에 남자라는 이성에 대해서 감정을 못 느껴요.”

-시인으로서 어떤 삶을 살고 싶습니까.

“서정주같이 빛나는 아름다운 시를 쓰고 싶어요. 서정주 시인의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은 송창식이 노래로 만들어서 불렀잖아요. 그 노래가 참 좋았어요.”

-지나온 시간들은 선생님이 생각할 때 어땠습니까.

“후회스럽죠. 남들과 같이 외출도 해 보고 또 남자친구도 가져 보고 구경도 가 보고 놀러도 다니고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그걸 못했어요.”

-혹시 아름다웠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저는 지나온 시간이 아름다웠다기보다는 굴곡이 많았어요. 우리집이 어려서부터 복잡해요. 빵집도 했고 설렁탕집, 여관에 아이스크림까지 팔았어요. 가게가 찻길 가까이 있어서 생업을 위해 가게를 봐야 했어요. 그런 거 안 하고 순탄하고 평범한 가정에서 살았으면 좋았을 거예요. 사업 같은 거 안 하고. 아버지하고 어머니가 사이좋게 살았다면 좋았을 거예요.”

-혼자 산 적이 있습니까.

“혼자 산 건 이혼하고 엄마랑 같이 산 게 전부예요.”

-부모님한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부모님한테 너무 죄스럽다는 거. 제가 부모님을 좀 가깝게 대했으면 좋은데 맨날 나 위주로만 생각했으니까 부모님이 힘들었을 거 같아요.”

-기초생활수급권자시죠. 한 달에 얼마 정도 받습니까.

“장애인연금 2만 원. 다른 건 없어요.”

-2만 원 갖고 생활이 됩니까.

“그거 갖고 생활이 안 되는데 어머니가 저에게 유산을 남겨두고 돌아가셨어요. 제가 여기 있을 때, 병세가 악화되지 않았을 때 유산을 남겨주시고 가셨어요. 그래서 그걸로 쓰는 거예요. 그 유산이 없었으면 전 아직도 고생했을 거예요.”

-유산을 무엇으로 남겨주신 겁니까.

“현금으로.”

-살아오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이 있었습니까.

“가장 기뻤다기보다는 슬프면서도 놀라운 경험은 첫 딸애를 낳아 그 얼굴을 바라봤을 때 너무 이쁘고 그런데 내가 슬픈 생각이 들더라고요. 얘가 행복하게 자랄 수 있을까. 그때가 제일 기쁘면서도 슬펐던 혼합된 감정을 가졌던 거 같아요.

또 자유문예지에서 등단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요. 그때 성모님이 반응을 해 주셨어요. 서울성모병원 간병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있었는데 성모님이 거기 계셨거든요. 병원 안에 큰 성모님 상이 있어요. 에스컬레이터 타고 내려오는 데 주위에 아무도 없었어요. 그런데 그때 성모님이 손을 들어서 저한테 표시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얼떨결에 손을 흔들었어요.

집에 가는 도중에 전화가 와서 받아보니까 인숙 씨 등단했다는 그 소리를 듣게 됐어요. 이게 웬일인가 하다가 아 참, 내가 조금 전에 성모님 계시(啓示)를 본 것은 아닌가. 성모님의 뜻이구나. 그때 가장 감격적이었던 거 같아요.”

-정신장애인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정신장애인들이 너무 위축돼 있어요. 위축되지 말고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뜻을 펴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너무 거만하지도 말고 겸손하게 자기 삶을 살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그녀의 시집을 재차 읽었다. 그리고 그녀의 시 한 구절을 올린다. '요양원에 뼛속 깊이 감사의 삶을 살며 잃어버린 정신들을 꽃잎에서 아침 이슬에서 인연으로 맺힌 기도로서 새 삶을 이어가 자신이 은혜로운 병이었음을 따스한 손길에 닿았을 때 클로로포름 꿈을 꾸며 죽음 그게 아니었어 젊음에게도 비애가 있었기에 더 이상 뒤에 머무를 수가 없어 삶을 노래하는 진실을 말할 수가 있어.' <난 그게 아니었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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