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전문적서비스’와 ‘훈육과 통제’라는 간극이 존재하는 총체적기관에 대하여
[서평] ‘전문적서비스’와 ‘훈육과 통제’라는 간극이 존재하는 총체적기관에 대하여
  • 송승연
  • 승인 2019.05.27 20:1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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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빙 고프먼, 수용소(Asylums), 심보선 옮김, 2018, 문학과지성사
어빙 고프먼, 수용소: 정신병 환자와 그 외 재소자들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에세이 (c) 문학과지성사
어빙 고프먼, 수용소: 정신병 환자와 그 외 재소자들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에세이 (c) 문학과지성사

60년이라는 긴 시간을 돌고 돌아, 어빙 고프먼의 ‘수용소’가 한국에 상륙했다. ‘스티그마’와 ‘상징적 상호작용’ 개념으로 유명한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Erving Goffman, 1922-1983)은 학자로서 초창기 시절 ‘세인트엘리자베스병원’을 현지 조사하여 1961년 ‘수용소(Asylums, 대형정신병원)’를 출판하였고, 이후 실천현장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은 60년대 시작된 반정신의학(anti-psychiatry)운동과 당사자운동이 활성화되는데 기여하였으며, 미국 내 일부 주립정신병원의 문을 닫게 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고프먼의 책이 나온지 긴 세월이 흘렀지만,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정신장애인과 관련된 이슈는 여전히 복잡하며, 모순된 개념들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의료모델과 사회적 모델’, ‘자기결정과 강제성’, ‘정신질환과 사회심리적장애’ 등 다양한 요소가 얽혀있는 상황이다. 특히 ‘광기’(mad)와 ‘위험성’(bad)이 혼재되어 있는 회색지대의 경계는 지금도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첨예한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 책은 현재 한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다양한 모순과 관련하여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총체적 기관이 자아에 미치는 영향

고프먼은 이 책을 통해 ‘총체적 기관’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다. 사회 내 개인들은 일반적으로 서로 다른 장소에서, 서로 다른 공통의 참여자들과, 서로 다른 권위 아래, 전반적인 합리적 계획 없이 자고, 놀고, 일하는 경향을 지니며, 이것이 근대사회의 기본적 사회적 질서이다. 이러한 영역의 경계를 붕괴시키는 것이 바로 총체적 기관의 핵심이라고 설명한다. 즉 동일한 장소, 단일한 권위, 동일한 처우, 동일한 일, 이러한 강제적 활동들은 기관의 공식적 목표들을 수행하도록 고안된 단일한 합리적 계획으로 수렴된다는 것이다(어빙 고프먼, 수용소(Asylums), 심보선 옮김, 2018, 문학과지성사, 18-19쪽 참조. 이하 쪽수만 표기).

그렇다면 총체적 기관과 우리의 자아는 어떤 관계에 놓이는가? 고프먼은 자아의 소유자와 의미 있는 타인들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자아가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이 속한 조직(총체적 기관)에서 형성된 질서로부터도 생성된다고 주장한다(180쪽). 예를 들어 정신병원에 들어온 환자가 처음으로 경험하는 면담부터 자아 정체성에 영향을 미치는데, 면담을 통한 ‘도덕적 이력’(의료적 용어로 병력이라고 할 수 있다. 고프먼은 정신병원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행위가 처벌, 통제 훈육의 ‘성질’을 가지고 있더라도, 의료서비스 모델에서 그것이 어떻게 ‘번역’되는지에 대해 반복적으로 언급한다) 조사 과정은 환자를 위한 ‘더 나은 치료’라는 사회적 명분에 대한 헌신 속에서 이루어지지만, 역설적으로 그 병력은 그 개인의 품행이 전적으로 ‘병리적인 체계’가 된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지적한다. 즉, 겉으로는 일반적인 품행도 그 이면의 병적 본질에 대한 가림막이나 방패에 불과해지는 것이다(427쪽). 고프먼은 이 과정에서 ‘나의 과거’가 새롭게 재구성되며, 이로 인해 ‘부여 된 자아’는 한 사람과 그를 둘러싼 타인들과 관련되어 행사되는 사회적 통제의 패턴 안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고 언급한다(203쪽). 이와 관련하여 푸코 또한 개인적 고백이 전문지식과 전문언어로 ’무장‘된 전문인에 의해 ’과학적‘ 담론에 맞는 ’질병의 증후‘가 되어 치료활동의 형태로 재편성된다고 언급한 바 있다(남상희, 정신질환의 생산과 만성화에 대한 의료사회학적 접근, 한국사회학 38(2), 2004, 101-134쪽. 이하 남상희, 2004).

또한 총체적 기관은 ‘자아의 축소’를 가져올 수 있다고 하는데, 예를 들어 일상생활에서 ‘나’의 자아는 다양한 역할로 구성되어 있다. 직장에서의 나, 학교에서의 나, 친구들 사이에서의 나, 가족들 안에서의 나, 혼자 있을 때의 나 등. 이것은 각기 다르지만, 동시에 하나의 ‘나’로 연결되어 있고, 유대관계를 유지시켜준다. 그러나 총체적 기관에서는 모든 역할이 박탈되며, 과거의 역할과 단절되고, 주어진 역할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퇴원 이후 축소된 자아의 복원이 가능할 것이라는 반박을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고프먼은 일상에서 수행해야 했던 시간들을 수용소에서 지내면서 잃어버리기 때문에 쉽지 않다고 지적하며, 이를 ‘시민권 상실(civil death)’이라고 표현한다. 예를 들어 “병이 호전되거나 또는 재원기간이 너무 길어지면 정신질환자는 대부분 병원에서 나오게 된다. 하지만 이들이 돌아온 곳은 예전 같지 않다. 집에 돌아오면 가족이 몰래 떠나버려서 아무도 없는 경우도 있고, 집에서 곧장 다른 정신병원으로 이송시키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집에서 살더라도 친구들이 ‘갑자기 사라져서’ 딱히 어디 갈 데도 없고, 집에서 정신질환자에게 거는 기대도 없고, 때로는 부모만이 병력을 알고 있어서 이들의 삶은 사회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심심해진다.”(남상희, 2004).

어빙 고프먼 (c) ThoughtCo
어빙 고프먼 (c) ThoughtCo

또한 고프먼은 총체적기관이 자아의 ‘주체성’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한다. 주체성은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 소유와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총체적 기관에서의 삶은 이러한 주체성을 서서히 감소시키는 것으로 작용된다. 예를 들어 바깥 세계에서는 자기 뜻대로 행했던 사소한 활동들(흡연, 면도, 전화, 지출, 편지 쓰기 등)에 대해 의무적인 허락을 받고 요청해야 하는 경우, 한 개인을 성인으로서 “자연스럽지 않은,” 즉 복종하고 애원하는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요청은 즉각적 혹은 자동적으로 허가되지도 않는다고 언급한다(60-61쪽). 이와 더불어 총체적 기관에서 이루어지는 신체적 멸시(예컨대 강제적 약물복용, 격리강박, 강제입원 등)는 당하는 사람과 더불어 총체적 기관 구성원들에게도 동시에 영향을 준다. 병동에서 벌어지는 폭력에 대한 목격(더 나아가 자신이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은 씻을 수 없는 모욕감을 부여한다고 설명한다(51쪽). 여기서 더 나아가 저자는 보다 디테일한 부분도 짚어주는데, 예컨대 ‘정보의 흐름’ 또한 금지되는 것을 언급한다. 예를 들어 직원들이 재소자에 대해 세운 계획들의 정보는 새어나갈 수 없는데, 이러한 배제는 재소자에게는 주체성(혹은 자기통제력) 상실을, 직원들에게는 통제력 강화를 제공한다는 것이다(22쪽). 이러한 측면에서 핀란드 ‘오픈다이알로그’(open dialogue, OD)를 다시 한 번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OD의 경우 당사자, 가족, 전문가, 그리고 사회적 관계자(친구, 동료, 이웃, 심지어 필요 시 경찰까지)가 모여서 회의가 진행되는데, 이 때 당사자(환자) 앞에서 치료계획을 포함한 모든 논의가 이루어진다. 이는 당사자로 하여금 ’통제력‘을 강화시켜준다. 여기에 참여한 한 당사자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예전에 저는 제가 말한 것이 평가될까봐 항상 두려웠어요. 저는 제 과거와 제가 얼마나 어두운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두려웠어요. 왜냐하면 그들이 저를 데려 가기 위해 구급차를 부를까 봐요. 그래서 저는 부정하기 시작했어요. (중략) 정신과의사와 간호사가 내 영역에 있다는 것이 도움이 되었어요. 전 언제든 그들에게 떠날 것을 요청 할 수 있었어요.” (「더 인디펜던스」, 2015년 12월 6일자 기사에서 발췌)

전문적 서비스 vs 훈육과 통제

고프먼은 정신병원의 독특한 ‘서비스 모델’이 의사, 직원, 환자 모두에게 박탈과 왜곡과 상처를 야기한다고 언급한다. 바로 ‘의료적 치료서비스’와 훈육 및 통제와 같은 ‘감호’ 기능이 혼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정신병원에서 의료적인 서비스(서비스 제공자와 수혜자)가 아닌, 통치자와 피통치자, 관리자와 관리당하는 사람을 발견한 ‘모순’을 상세히 설명한다(402-403쪽). 일반적으로 서비스모델의 경우 ‘자발적, 합리성, 선의에 대한 믿음’ 등이 작용한다. 그러나 이 모순(서비스모델을 정신병원에 적용할 때 발생하는)에서는 입원과 치료가 전반적으로 ‘강제적인 성격’을 지닌다(405쪽). 결국 이 한계(의료서비스인가 감금인가)에서 의사와 환자는 만나게 되는데, 이 때 의사는 의료적 관점이 아닌 다른 관점으로 자신의 행동을 해석하는 것에 있어 어려움을 겪고, 환자는 자신이 겪는 고난을 이해하기 위해서 자신을 가둔 이들에게 저항하고 증오를 표출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고프먼은 이를 ‘기괴한 형태의 서비스 관계’라고 정의한다(421쪽). 정신병원의 의료적 모델이 의사와 직원에게 ‘직업적 모순과 갈등’을 야기한다면 환자들에게는 ‘자아의 구속과 파괴’를 야기하는 것인데, 이는 정신병원의 이중적 목표, ‘훈육과 통제’라는 ‘규범적 목표’와 ‘질병치료’라는 ‘기능적 목표’ 사이의 모순이 깔끔히 해소될 수 없음을 고프먼은 사회학적으로 규명한다.

또한 흥미로운 사례로 제시하는 것은, 훈육과 통제의 기능이 ‘병원 밖’에서도 작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개인이 재소자가 됨으로써 낮은 사회적 지위를 선취하게 되면, 그는 사회에서 냉랭한 대우를 받으며, 특히 직업이나 살 곳을 구할 때 그런 경험을 하게 된다고 언급한다. 이것이 바로 낙인(stigma)이다. 심지어 재소자들은 자신의 자유 일부가 제한된 채로 자유 공동체로 돌아온다. 예를 들어 “퇴원할 때 정신병원직원은 환자나 가족에게 다시 문제가 생길 경우 연락을 취하라는 조언을 받기도 한다”는 고프먼의 예시는 날카롭다(97쪽). 남상희(2004)는 이와 관련하여 “학업중단, 강요된 미혼(이혼), 무자녀, 무주택, 부모에의 의존, 장기실업, 군대면제, 국가자격취득이나 생명보험 가입에도 제한을 당할 수 있다”고 언급하며, 이러한 “일탈의 생애사적 표식은 사회·경제적 지위뿐만 아니라 삶의 스타일(비규칙적 생활, 태만, 비만, 대인관계 기피 등)에 이르기까지 스며들어서 이들은 점점 더 비장애인과 교류할 수 있는 사회적·경제적·문화적 자본을 잃게 된다”고 지적한다.

총체적 기관과 목소리의 가치

고프먼은 저서 수용소에서 ‘말할 수 있는 권리, 외침, 목소리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고, 이는 ‘인식론적 부정의’(Epistemic injustice, 부정적 고정관념 및 편견을 기반으로 특정 집단의 언어 신뢰성이 약화되는 현상) 개념과도 굉장히 밀접하게 연결된다. 예를 들어 ‘상황적 철회’라는 소통의 전술은 모든 사건으로부터 관심을 철회하고 다른 사람들의 관점을 무시한 채 자기만의 관점으로 그 사건들을 파악하는 소통행위 중 하나일 수 있다. 그러나 상호작용에 철저하게 참여하지 않는 행위는 ‘퇴행(regression)’이라는 명칭으로 정신병원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다고 설명한다(83쪽). 환자의 관점에서 보면, 직원이나 동료와 말을 섞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가 누구이고 무엇인지에 대한 병원의 정의를 거부한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병원의 고위 운영진은 이런 거리감의 표현을 그저 병원이 응당 처리해야 하는 증상으로, 환자가 비로소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있게 되었다는 최상의 증거로 간주된다는 것이다(348쪽). 고프먼은 이러한 상황을 “환자가 얌전하고 순응적으로 처신하면 병동 체계에서 그의 자리는 올라간다. 거칠고 단정치 못하게 처신하면 강등 당한다. 환자는 의사의 검진을 가장 필요로 하지 않을 때 의사를 만나곤 한다(412쪽)”고 묘사한다.

또한 고프먼은 인식론적 부정의가 병원 내부를 넘어서, 전반적 사회로 확대 재생산 되는 체제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한다. 예를 들어 정신병원의 ‘오랜 이야기들(traditional tales)’의 집합을 보면, 이 일화들은 반복적으로 이야기되면서 직원의 관점에 타당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들에는 이를테면 ‘너무 일찍 특혜를 받거나 혹은 의사의 충고를 듣지 않고 퇴원한 환자가 결국 자살을 하거나 살인을 한 사례들’이 담겨 있다. 담당 직원들은 ‘환자들의 야수적 본능을 묘사하는 농담들’을 이야기한다. 관계에 대한 이런 이야기들은 결국 직원들의 입장이 올바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425-426.p).

역자(심보선)는 이를 ‘말의 자유’의 불균형이라고 묘사한다. “환자는 전문가와 중재자와 보호자를 통해서만 말을 할 수 있다. 정작 사람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고 정신병 환자로 구성하는 것은 바로 그들인데도 말이다. 고프먼에 따르면 의사와 관리자는 환자들에 비해 더 많은 말의 자유를 갖는다. 반면 환자가 무슨 말을 하건 어떤 말을 하건 복종의 말이 아닌 모든 말은 ‘병의 증상’으로 취급될 뿐이다”(447-448쪽). 고프먼의 ‘수용소’는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목소리’의 중요성을 상기시켜준다. 만약 누군가 나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면,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어떠할까?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그 좌절감은 상상하기 힘들 수 있다.

(c) Metro
(c) Metro

총체적 기관의 대안은 무엇인가?

이 책을 통해 고프먼이 말하고 싶은 것은 병원이 환자들에게 혐오스러운 장소라는 것이 아니었다. ‘수용소’ 마지막 문단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요지는 환자가 병원에 혐오를 표하면 그것이 바로 그가 병원에 있는 게 마땅하고 그가 아직 병원을 떠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는 점이다. 이런 식으로, 병원은 타인에 대한 복종과 한 사람의 고유한 사적 적응이 뒤섞이는 것을 체계화하는 것이다. (중략) 정신과 환자들은 서비스라는 이상에 짓눌려 자신의 자아가 파괴됨을 경험한다. 다른 사람들의 삶은 같은 이상 때문에 안락해지는데 말이다.”

고프먼은 ‘전문적 서비스’와 ‘훈육과 통제’의 간극에 놓여 있는 정신의료기관의 본래의 역할과 기능을 되찾기 위해 이 책을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지원, 도움 혹은 진정한 ‘치유’가 필요한 정신장애인의 삶의 질 향상에도 본질적인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 이 간극(madness vs badness)의 관계는 명쾌하게 해결되었을까? 이를 위해 최근에 일어난 진주의 비극적인 사건을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신장애인의 범죄율은 극히 낮으며, 오히려 우리가 알고 있는 편견과 달리 정신장애인은 범죄의 피의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될 확률이 비장애인에 비해 약 4-6배 높다는 연구결과도 존재한다(de Vries et al., 2018; 이 연구자들은 정신장애인과 같이 사회적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은 주거부재 및 실업과 같은 사회적 요인들로 인해 범죄자와 만날 가능성이 더 높은 환경에 취하게 되므로 더 높은 위험에 놓이게 된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럼에도 진주사건 이후 대책은 ‘관리 및 통제’ 강화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렇다면 만약 그 범죄자에게 정신과약물을 꾸준히 강제적으로 복용시켰다면 이러한 비극은 없었을까? 만약 그를 미리 강제입원을 시켰다면 예방할 수 있었을까? 혹은 그 전의 범죄행위(스토커, 오물투척 등)에 대해 사법철자에 따른 형사처분을 했으면 어땠을까? 이 모든 것은 다 효과가 있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 강제입원 이후 퇴원하여 이러한 끔찍한 범죄를 일으켰을 가능성도 존재하며, 사법체계에 의해 처벌(벌금형, 복역 등)된 이후 이러한 끔찍한 사건을 일으켰을 가능성도 존재하며, 동시에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존재한다(우리는 미래에 대해 정확히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떠한 위협적 행위에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지만, 그것이 위험한 행위로 나아갈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쉽게 추측할 수는 없다). 여기서 우리가 좀 더 고려해야 보아야 할 부분은 경범죄 이후 강제입원이 된다고 가정한다면 그 때의 ‘정신병원’의 역할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즉, 정신질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기관이지만 동시에 ‘준교도소’의 역할이 될 수도 있다. 더 나아가서 지역사회 내 정신건강전달체계에 이러한 케이스에 개입하는 순간, 위기개입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치안 역할의 대리인’이 될 수도 있다. 고프먼이 이미 60년 전에 지적한 것처럼, 범죄자의 치안과 감금의 역할을 정신의료기관(혹은 정신건강관련기관)이 담당하는 순간 ‘서비스’와 ‘통제’의 경계선이 무너질 가능성이 농후해진다. 어쩌면 점차적으로 증가될 관리 및 통제의 강화 정책(지역사회영역까지)은 madness와 badness의 회색지대를 더욱 더 모호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럼에도 필자 또한 명확한 정답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다소 이상적이라고 생각될 수 있지만, 우리는 보다 근본적인 부분을 지속적으로 고민해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WHO(2008)는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을 언급하며 “왜 애써 사람들을 치료한 후, 그들을 아프게 만들었던 환경으로 돌려보내려하는가?”라고 지적했다. 즉, 어떤 개인을 치료하든 혹은 처벌하든, 사회구조적 환경이 변화되지 않으면 근본적 변화를 이끌어내기 어려울 수 있다. 이와 관련되어 영국언론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에 실린 기고문 ‘진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정신건강의 사회경제적 원인을 언급해야 한다’(2018.05.20. Annabel Head & Jessica Bond)는 흥미로운 의견을 제시한다. 만약 누군가의 정신적 고통에 대해 보다 광범위한 맥락을 탐색하지 않으면 ‘문제’는 결국 ‘개인’에게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더 나아가 ‘회복’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개인에게 지울 뿐만 아니라, 이들을 이러한 정신적 어려움의 상황으로 끌어오는데 작용한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요인을 외면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정신적 고통의 개인화’라고 표현하며, 정신건강에 미치는 다양한 사회적 요인들(부채, 불안정 고용환경, 빈곤, 실업, 열악한 주거환경, 불평등, 차별 등)이 증명되는 연구들이 있으므로, 정신적 고통을 개인의 문제(예를 들어 생물학적 요인)로 한정하기보다는 ‘정치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실제 산업재해, 실업, 빈곤, 고립, 양극화, 불평등, 슬럼화 등의 이슈들은 진주 사건을 둘러싸고 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이를 어떤 범죄의 정당화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광기와 범죄의 보다 명확한 부분을 위해 형법 제10조(심신장애인)에 대해서도 이제는 진지한 논의가 시작될 필요도 있다고 사료된다. 형법제10조는 일부 범죄자가 처벌보다는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선한 의도이지만, 정신장애인의 범죄에 대한 책임을 완화하기 위한 근거로 이러한 조항이 적용되면, 행위주체성이 사라질 수 있다. 즉, 주체가 없는 행위이기 때문에 책임이 사라질 수 있고, 범죄자와 정신장애인의 구분은 모호해질 수 있으며, 정신장애인이 위험한 존재하는 인식은 더욱 강화될 수 있고, 결국 강제는 정당화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치료와 공공안전이라는 명목으로 시민의 권리를 박탈하는 것에도 명분을 주고 당연하다고 여기게 만들 수 있다.

(c) 국가인권위원회
(c) 국가인권위원회

정신장애인 당사자활동가이자 심리학자인 패트리샤 디건(Patricia Deegan)은 정신장애인에 대한 전문적 서비스의 도움은 ‘치료’를 강조하지만, 당사자들은 그것을 ‘도움’으로 경험하기 보다는 ‘처벌’로 느껴진다고 언급했다. 현재 한국사회는 고프먼이 이야기한 ‘기괴한 형태의 서비스 관계’ 속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안에서 당사자, 가족, 전문가 등 모든 사람들은 어쩌면 지속적으로 상처를 받고 있을 수 있다. 진주사건 이후 나오고 있는 대안들에 대해서도 여전히 간극은 존재한다. ‘인권충’과 ‘당사자의 분노, 저항, 상처’로 표현되는 간극이며, 이는 외면할 수 없는 현실적인 문제이다. 고프먼의 수용소는 이 간극을 어떻게 좁혀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진지하게 모색하는 것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생각할 수 있는 많은 것을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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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랑제수민 2019-06-02 16:43:49
나는 조현당사자 인권충 기괴한형태의 서비스를 받는 사람. 왜 이리 되었을까? 사회가 문화가 정치가 나를 감싼채 기울어진 운동장 한켠으로 내밀었다. 미친놈. 매드 보다는 배드라고. 감옥에도 폐쇄병동도 경험했다. 준교도소 정신병원은 내게 굴종을 가르쳤다. 빨리 나올수 있었다.
사회에서 낙인은 나를 더 위축시켰고 전문가에게 전문요원에게 굽실거리게 했고 분노 저항은 악에받쳤다.60년전 고프먼의 지적대로 선진대한의 현실이 그러하다. 시빌데드한 나는 동창회에 오픈마인드로 갔지만 냉대만 받았다.
하여 당사자목소리를 내야한다.말리던시누이처럼 제 잇속만 챙기는 25년짜리 사회복지인간들과 의료세력. 누군가 그들이 상장 훈장 상훈을 재평가해야한다. 당사자의 자살위에 핀 꽃으로 잔치하는 사람들에게 당사자는 목소리를 낸다.각성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