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영 “치유란 일상의 회복이에요”
정지영 “치유란 일상의 회복이에요”
  • 박종언 기자
  • 승인 2019.05.29 23:56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지영 정신장애와인권 파도손 활동가 인터뷰
20대 후반에 갑작스레 찾아온 조울증
조증기에 내가 대단한 인물같이 느껴져
대학병원에 모두 여섯 차례 자의입원해
첫 입원했을 때 자신의 병 받아들여
취직 후 괜찮겠지 싶어 단약했다 재입원
가족 없었으면 회복 안 됐을 것…가족 신뢰해
사람들이 즐겁게 찾는 소설 스토리 만들고 싶어
정신적 질병에 대해 원망했지만 지금은 받아들여
노동과 노동을 통한 급여를 받을 때 치유로 들어가
사법입원제는 또 다른 낙인 되지 않을까 조심스러워
병원에서 상담과 심리치료 해야…약물로는 한계
절차보조 사업 꾸준히 할 수 있었으면
정신장애인 부부가 아이 낳는 건 자유…중요한 건 ‘책임’
용서는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먼저 용서해야
박종언의 만남: 길을 묻다 (c) 마인드포스트
박종언의 만남: 길을 묻다 (c) 마인드포스트

어린 시절 부모님은 불화(不和)했다. 그녀가 10살 무렵, 부모님은 별거에 들어갔다. 그 이후부터, 삶을 견뎌야 했다. 학교에 가면 친구도 사귀지 않고 멍하게 앉아 있다가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왔다.

살아간다는 건 일정 정도의 굴욕을 견뎌야 하는 일일 것이다. 너무 일찍부터 그녀는 삶의 굴욕이 어떤 것인지를 어렴풋이 느꼈을 것이다.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일자리를 구했지만 모두 몇 달 뒤면 그만둬야 했다. 직장 생활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입시 제도가 학력고사에서 수능으로 바뀌었을 무렵, 그녀는 한 전문대 일본어과에 입학했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좀 더 깊게 연구하고 싶었던 선택이었다.

그 소망 또한 모두 무너져내렸다. 병이 찾아온 것이다. 조울증이었다. 급성기 증상을 보이자 남자친구는 그녀의 어머니에게 얘기했고 즉시 대학병원으로 입원했다. 그리고 모두 여섯 차례의 입퇴원을 거듭했다. 어쩌면 모든 비과학적 치료법을 모색한 후에야, 돌고 돌다가 정신과를 찾는 어떤 사람들보다는 다행이었을 것이다. 한 번 입원하면 길어야 한 달. 병원에서 강박을 당한 적도 있지만 극심한 인신구속은 아니었다.

인연을 끊고 싶었던 아버지는 가난한 작가였다. 집안의 경제상황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그리고 어머니와 결별 후에도 자식들을 챙기지 않았다. 그녀는 그 아버지를 미워했다. 그 미움 뒤에는 젊은 아버지의 등을 굽히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모습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선망의식이 개입돼 있었다. 그녀가 지금 판타지 장르 소설가로 살아가는 건 바로 아버지에 대한 애증의 한 부분에서 발현된 의식이었을 것이다.

20대 후반, 그녀는 그녀의 모든 것을 인정해주고 지지해주었던 남자친구와 결혼을 했다. 그녀는 그 남편이 없었으면 지금도 정신병원에서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살아가면서 누군가 지지해주는 경험을 얻는 것은 귀한 사건이 된다. 그것도 삶을 함께 살아가는 부부에게서 피드백을 받는다면 그 또한 생의 소중한 힘이 될 것이다.

남편 역시 작가다. 그녀 말에 따르면 “그렇게 돈을 많이 벌지 못하는” 남편이다. 그렇지만 그녀가 남편에게 의지하는 건 그가 넘치는 경제적 풍요를 안겨주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자기 곁에 서 있어줬다는 심리적 위안과 감사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아침까지 글을 쓴다. 누군가 눈 밝은 이가 나타나 그녀의 글을 읽고 책으로 출간할 수 있게 도움을 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지금은 정신장애와인권 파도손에서 절차보조인으로 일하면서 집단적 치유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정지영(48) 씨를 만난 건 29일 오후의 서울 중구 파도손 사무실에서였다.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할 사항은 정지영 씨가 얼굴을 찍히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다음은 일문일답.

-몇 살 때 발병하신 겁니까.

“입시가 수능으로 바뀌었을 때 이거는 좀 해 볼 만하지 않을까 싶어서 26살에 입시학원에 들어갔어요. 1년을 입시학원에서 공부를 했어요. 그리고 전문대 일어과를 들어갔죠. 대학 과정 마치고 졸업식이 끝나고 얼마 안 있어서 29살 때 조울증이 발병했어요. 급성기였어요. 점차적으로 온 게 아니라 갑작스럽게요. 그때 3개월을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다가 조울증으로 터지더라고요.”

-스트레스 받은 거 조금 더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저는 저를 굉장히 싫어하고 혐오했어요. 자학이 심했어요. 그런데 남자친구, 지금의 남편을 만나면서 남편이 저의 좋은 점을 계속 얘기를 해 줬어요. 나는 좋은 사람이다, 괜찮은 사람이다, 남들보다 이런 점이 훌륭하다라는 식으로 얘기했는데 그걸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사람들과의 원치 않는 이별도 겪으면서 그런 일련의 과정들이 조증을 유발시켰죠.”

-부모님은 이혼하셨습니까.

“이혼이 아니라 별거를 한 40년 가까이 하고 계세요.”

-병명이 조울증(양극성정동장애)입니까.

“조울증이요.”

-정신장애 첫 시작된 게 29살, 그때 증상이 어땠습니까.

“초발 때는 기억이 생생해요. 나 자신이 굉장히 대단한 인간같이 느껴지고 나로 인해 세상이 바뀌는 거 같고 여태까지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은 모두 거짓같이 느껴지고요. 그리고 환청으로 이웃집 수도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요. 엄마가 저를 붙들고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를 물어보시는데 낮인지 밤인지 구별을 못하는 거예요.”

-피해의식 같은 건 없었습니까.

“망상요. 내가 곧 엄청난 베스트셀러를 쓴 작가가 될 것이다. 전 지구적인 작가가 될 것이다. 누구도 나를 막을 수 없다. 그런 식의 망상이 있었어요.”

-그때 어머니 반응은 어땠습니까.

“많이 놀라셨죠. 어떻게 해야 되는지도 모르겠고. 초발 때 남자친구가 옆에 있었는데 병원에 데려가야 된다고 어머니한테 얘기한 거 같아요. 그래서 초발을 하고 하루 정도 있다가 너무 반응이 이상하니까 대학병원으로 갔죠.”

-29살에 초발해서 바로 병원에 들어간 겁니까.

“네 바로 갔어요.”

-몇 달 정도 있다가 들어갔습니까.

“아뇨. 초발한 그날 바로 병원으로 갔어요.”

-가족이 초기에 선생님을 비난하지는 않았습니까.

“아뇨. 비난 안 했어요.”

-바로 발병해서 병원 간 게 특이하군요. 발병하고 치료에 들어가는 기간인 정신증 미치료 기간(DUP·Duration Untreated Psychosis)이 우리나라의 경우 굉장히 긴데요.

“이상하게 느껴질 만했어요. 남의 집에 들어가서 소리치고 집 뒤에 대학교가 있었는데 그 대학교에 들어가서 막 소리 지르고. 경찰차가 와서 저를 데려가라고 집에 연락을 하고요.”

-강제입원이었습니까.

“강제입원은 아니고요. 남자친구가 어머니한테 이건 이상하다, 병원에 데려가야 된다라고 얘기를 했대요. 그래서 어머니가 그걸 받아들여서 저를 병원에 데려갔죠.”

-지금까지 몇 번 입원했습니까.

“여섯 번요.”

-다 강제입원이었습니까.

“아니요. 저는 전부 자의입원이었어요.”

-가장 길게 있었던 게 몇 개월이었습니까.

“몇 개월이 아니라 한 3주 있었어요. 보통 저는 1개월을 넘지는 않았어요.”

-입원이 다 대학병원이었습니까.

“네. 똑같은 대학병원요.”

-입원 후의 트라우마는 없었습니까.

“입원했을 때 강박 당해서 묶여 있었던 적도 있었고요. 그리고 굉장히 나가고 싶어 했죠. 들어가면 일단. 제가 다른 환자들하고 틀린 게 가족들을 굉장히 신뢰하거든요. 그래서 남편이나 엄마가 입원을 해야 된다라고 얘기하면 상황이 안 좋아서 입원을 해야 되는구나라고 생각하고 항상 자의입원을 했어요.”

(c)마인드포스트.
정지영 정신장애와인권 파도손 활동가 (c)마인드포스트.

-병식이 없을 경우 입원을 안 하려고 하거든요.

“저는 아플 때마다 저에게 문제가 있다라는 생각은 했었어요.”

-무슨 말입니까.

“아플 때마다 ‘나한테 지금 문제가 있다’, ‘난 지금 무슨 문제에 빠졌다’라는 인식이 있었어요.”

-그 아프다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

“재발했을 때 굉장히 혼란스럽고 한데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내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책을,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그런 책을 쓸 거다. 그리고 한 번은 새벽까지 밤에 걸어다닌 적이 있어요. 엄마가 전화를 하든 남편이 전화를 하든 무조건 안 받고 헤매고 다니다가 결국은 남편하고 어머니가 신고를 했죠. 경찰이 위치추적기를 통해서 저를 찾으러 왔어요.”

-스스로 자신의 병을 받아들인 게 몇 살 때였습니까.

“처음 입원했을 때요.”

-정신장애인은 보통 초기에는 병 인식을 못하거든요. 선생님은 발병하고 바로 입원하고 또 바로 자신의 병을 받아들였네요.

“네. 병원에서 주사를 맞고 이틀 만에 깨어났어요. 깨어나서 맨 처음 드는 생각이 ‘내가 정신병원에 왔구나. 이거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몰라. 왜냐면 내가 생각했던 게 전부 이치에 맞지도 않고 현실적이지 않으니까.’ 그런 생각이 잠에서 깨고 정신병원에 온 걸 확인한 후에 바로 들었어요. 그래서 어떡하지(웃음). 어떡하면 좋지.”

-정신병원 처음 들어갈 때 두렵지는 않았습니까.

“그때는 정신병원에 들어간다는 생각도 못했으니까요. 전혀 자각도 못했고.”

-발병했을 때 이렇게 대응할 걸 하는 후회는 없습니까.

“발병했을 때 제가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 거 같지는 않아요. 발병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어요. 저는 그래서 가끔씩 생각해요. 내가 어떻게 살아서, 어떻게 자라서, 어떻게 어른이 돼도 조울증을 피할 수 없지 않았을까. 그냥 그렇게 받아들였어요. 입원하고서 나한테 문제가 있구나, 난 지금 정신병에 걸렸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퇴원하고 취직을 했는데 일이 그렇게 힘들지 않아서 잘 적응을 했거든요. 주차징수원이었는데 월급도 나쁘지 않았고 근무 환경도 좋았어요. 이거 쭉 할까라는 생각도 했는데 그때 단약을 했어요. 증상도 없고 괜찮을 줄 알고 단약을 했는데 얼마 안 있어서 재발했죠. 그때가 30살 때쯤.”

-마지막으로 입원했을 때가 몇 살 때입니까.

“2014년요. 43살 때.”

-굿이나 종교의식 등 비과학적 치료법을 이용한 적은 있습니까.

“안 했어요.”

-종교가 어떻게 됩니까.

“저는 종교가 없어요.”

-가족을 원망하지는 않았습니까.

“아니요. 전 가족이 없었으면 회복이 안 됐을 거예요. 아버지는 원망을 했죠. 아버지는 거의 가족으로 안 치니까. 가족이라고 생각 안 해요. (저의) 병원비도 좀 도와주기도 했어요. 그런데 딸이라고 낳았으니까 그 정도는 해줘야 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래도 아버지로서의 감정은 없어요. 남 같아요.”

-마지막 만난 게?

“근래에 한 번 봤어요. 몸이 안 좋으셔서 병원에 계셔서 제가 찾아갔어요.”

-아버지의 어떤 부분이 그렇게 원망스러웠습니까.

“일단 우리를 버리고 떠난 게 그렇고요. 아버지가 좀 일반적인 스타일은 아닌 건 같아요. 좀 과격하고 분노조절장애도 있는 거 같고. 그리고 굉장히 본인이 잘났다고 생각하는데 그걸 세상이 못 알아줘서 억울해하는 스타일의 사람이었어요.”

-앞으로도 만날 생각은 없으시고요.

“아뇨. 굳이 만나야 하는. 별로.”

-가족은 선생님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가족은 생명줄이에요. 되게 소중해요. 제가 재발하는 걸 잘 캐치(알아차림)를 잘 못해요. 남편도 제가 재발을 하는 걸 캐치 못하는데 대신 언제 퇴원해야 한다는 걸 잘 알아요. 그리고 결혼하고 나서도 꾸준히 당신은 그렇게 자학을 할 만큼 나쁜 인간이 아니다, 오히려 당신 생각보다 훨씬 나은 인간이다라는 걸 끊임없이 얘기해줬어요.”

-정신질환에 걸리면서 가장 괴로웠던 게 뭡니까.

“잠이요. 수면. 잠이 안 와요. 약하고 의사를 바꿨어요. 그 다음부터는 좋아졌는데 그동안 수면 문제가 굉장히 심했어요. 약을 안 먹으면 전혀 잠이 안 오고 약을 먹어도 잠이 안 올 때가 있고. 재발은 어김없이 잠이 안 오면서 시작해요.”

-요즘은 어떻습니까.

“요즘은 잘 자고 있어요. 약 바꾸고 의사 바꾸고 잘 자고 있어요.”

-지금까지 의사를 몇 명이나 바꿨나요.

“지금까지 네 번요.”

-지금의 의사가 마음에 들던가요.

“네. 아주 좋아요.”

-정신질환 질병과 싸우면서 가장 아쉽거나 후회되는 건 뭐였습니까. 어떤 분들은 병하고 싸우느라 아까운 청춘이 다 지나가 버렸다고 얘기를 하더군요.

“저는 병하고 안 싸웠어요. 내가 병을 어떻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안 했어요. 일단 그게 가능했던 게 백수였기 때문에 그래요(웃음). 오랜 시간 동안 백수였기 때문에 저는 주는 약 먹고 자고, 하고 싶은 거 했어요.”

-가장 하고 싶은 게 뭐였습니까.

“글을 쓰는 거요. 소설을 쓰고 있어요.”

-공모전에 투고는 안 해 보셨나요.

“저는 웹 장편소설을 쓰고 있어요. 작년에 세 권짜리를 완성해서 플랫폼에 원고를 줬어요. 원고료도 받았는데 플랫폼을 아직 못 만든 거예요.”

-플랫폼이 뭡니까.

“문피아라든가 조아라라든가 카카오페이지라든가 그런 게 있거든요. 회사에 원고를 냈는데 회사가 아직 사이트를 못 만들어서.”

-그 플랫폼은 회사가 만드는 겁니까.

“네. 개인이 만드는 게 아니고 회사가 사이트를 만들어요.”

-소설 제목이 뭔가요.

“은세계요.”

-줄거리 조금만 말씀해 주시겠어요.

“뱀파이어가 나오는 소설이에요.”

-전자책으로 내면 원고료도 나오는 건가요.

“네. 맞아요.”

-저작료 얼마 정도 받았습니까.

“많이 못 받았어요. 권당 백만 원 정도.”

-지금은 두 번째 소설 쓰고 있습니까.

“지금은 그걸 고치고 있어요. 은세계라고 그게 세 권짜리인데 세 권이 너무 호흡이 짧다고 이걸 다섯 권 정도로 늘렸으면 하더라고요. 그래서 다섯 권으로 늘리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오프라인 책으로 낼 생각은 없습니까.

“책으로 내면 좋죠. 근데 그게 제 맘대로 안 되죠.”

-어디 공모전에 출품해 본 적은 없습니까.

“그걸로는 공모전에 안 내 봤어요. 딱히 글쎄요. 공모전에 내 본 적은 있는데 그건 딴 걸 내봤고.”

-시는 쓰십니까.

“시는 아니요.”

-작가가 되려고 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아버지가 작가였어요. 소설 쓰시는 분. 아버지의 영향을 처음에 받았는데. 처음에 저는 아버지가 책을 쓰시는 게 좋고 멋져보여서 시작했어요. 이후에 아버지하고의 정이 완전히 떨어진 다음부터는 그냥 책 읽고 쓰는 게 좋아서 이걸 하면은 좋을 거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사실 쓰는 동안 치유도 많이 되고.”

-하루에 몇 시간 정도 작업하십니까.

“하루에 4~5시간.”

-약은 어떤 걸 먹고 있습니까.

“리튬 세 알, 자이프렉사 한 알. 그리고 이름은 모르는 알약하고 모두 다섯 알을 먹어요.”

-의사하고 약 바꾸기 전에는 부작용이 있었습니까.

“잠이 안 왔어요. 약을 먹어도.”

-정신적 질병을 갖지 않았다면 선생님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별로 좋지는 않았을 거 같아요. 병을 앓기 전에도 그렇게 좋았다는 생각이 안 들거든요. 그런데 병을 앓고 난 후에 우울 기간도 길었고 굉장히 침체된 시간이 길긴 했는데 병에 안 걸렸다면 아마 이런 거를 모르고 살았을 거 같긴 해요.”

-어떤 걸 모르십니까.

“정신장애인의 생활이라든가 상황을 모르고 살았겠죠. 당연히 모르겠죠. 어쩌면 남편도 못 만났을 거고. 안 좋네. 전 조울증이 낫겠네요(웃음). 남편과 못 만날 거면 차라리 조울증 걸리는 게 나아요.”

-지금 자신의 삶에 만족하십니까.

“네. 만족해요. 전 파도손 와서 절차보조를 하는 게 굉장히 좋아요. 제가 작가이긴 하지만, 제가 청소일을 하고 있을 때는 굉장히 자괴감이 있었어요. 난 이런 일밖에 못할 거야라는 생각요. 내가 쓰는 글은 형편없을 거야, 그리고 청소하고 있다가 날 아는 사람과 만나면 어떡하지, 내 대학 동기를 만나게 되면 어떡하지, 나랑 같이 글 쓰던 사람 만나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c)마인드포스트.
정지영 정신장애와인권 파도손 활동가 (c)마인드포스트

-일본어 전공하셨는데 지금 실력이 어느 정도 됩니까.

“다 까먹었어요(웃음).”

-일본어 전공과 관련된 일을 한 적은 있습니까.

“없어요.”

-일본어를 택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일본 만화랑 애니메이션을 굉장히 좋아해서 그걸 좀 알아들을 수 있을까 싶어서 갔더니만 일본어도 어렵고 공부도 힘들고. 전문대 졸업이야 누구나 하죠.”

-왜 내가 이런 질병을 겪어야 하는지 분노했던 시절들이 있습니까.

“예. 원망한 적은 있어요. 이게 없었으면 훨씬 더 많은 자유로움이 있었을 텐데. 좀 얽매여 있다는 느낌을 받긴 했어요. 그때는 제일 큰 문제가 돈이 없고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것도, 우울한 것도 다 병 때문이니까 병을 굉장히 원망했어요. 그런데 청소일이 자괴감을 주긴 했지만 동시에 노동을 해서 돈을 버는 귀한 경험도 했어요. 돌이켜보니 그래요. 그때 월급을 받고 그 월급으로 생활을 하고 그 월급을 통해 내가 하고 싶은 다른 뭔가를 또 하게 되고. 그러면서 조금씩 좋아졌어요.”

-크게 분노한 적이나 많이 울었던 적은요.

“주로 돈이 없어서 울었어요(웃음).”

-남편이 벌어다 주지 않습니까.

“남편도 작가예요. 남편은 글 써서 돈을 벌어본 적이 진짜 손에 꼽아요.”

-정신장애인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어떤 것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까.

“노동이요. 노동하고 리얼 페이(급여)요. 그게 있어야 돼요. 왜냐하면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아닌 거거든요. 아무것도 아닌 상태에서의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면 뭐가 돼야 해요. 그리고 그 뭐가 되는 걸로 그것의 대가를 받아야 돼요. 그게 전 치유라고 생각해요. 사실 기초생활수급 받은 분들이 적은 금액이라도 안정적으로 들어오잖아요. 그렇지만 수급을 받으면서도 그분들도 괴롭잖아요.”

-왜 괴롭습니까.

“액수도 그렇게 많은 게 아니고. 그리고 기초생활수급이 발목을 잡을 때도 많잖아요.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도 못 잡게 되고. 물론 이건 기초생활수급 외에는 답이 없다라고 할 때는 수급을 받는 게 마땅하죠.

그 외에는 좀 더 자기를 나은 방향으로 자기의 위치를 옮길 수 있으면 옮겨가는 게 좋죠. 그래야지 병이 있어도 나는 이만큼 계단을 올라왔어라는 긍정적 피드백을 줄 수 있죠. 그 계단을 올라가면 자기 자신에 대해 굉장히 만족하게 되거든요. 자기 자신을 좀 더 사랑하게 되고.”

-그 조금씩 올라가는 데 가장 필수적인 게 노동이란 말씀입니까.

“전 그렇게 생각해요.”

-하루 일과는 어떻습니까.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새벽에 글 쓰고, 출근하고 5시에 퇴근하면 그때는 남편하고 저녁을 같이 보내요.”

-아침에 일어나서 몇 시간 정도 글을 쓰십니까.

“네 시간 정도. 소설.”

-주말에는 어떤 여가활동을 합니까.

“주말에는 취미활동으로 영화를 보러 다녀요. 극장에 가고 친구를 만나고.”

-친구들도 몇 명 있습니까.

“파도손에 있는 사람들이 친구고요. 비당사자 친구는 거의 없어요.”

-파도손에서 활동한 지 몇 년 됐습니까.

“제가 정식으로 근로계약서 쓰고 들어온 거부터 하면 작년 12월부터죠.”

-어떤 계기로 파도손에서 활동하게 됐습니까.

“(이정하) 대표님하고 6~7년 친분이 있었어요. 작년에 절차보조사업을 했어요. 시범사업으로 했었는데 그때 아르바이트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그리고 이게 정식사업으로 한다고 해서 들어오게 됐어요.”

-힘들지는 않던가요.

“전 그렇게 힘들지 않아요. 여태껏 살아왔던 거 다 생각하면은 지금 절차보조하는 건 힘든 게 아니에요.”

-절차보조에서 어떤 일을 합니까.

“저는 방문을 해요. 방문 가서 그분들이 뭐가 필요한가를 듣고 그분들에게 도움이 되게 타 단체에 연계를 시켜드린다거나 하죠. 일단 저는 그분들하고 친구하러 간다고 생각하고 가요.”

-하루에 몇 명 만납니까.

“보통 한 분 뵙는데 많을 때는 두 분.”

-사법입원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의료계에서는 사법입원 도입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는데요.

“책임을 떠넘기겠다는 걸로 보일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사법입원을 해서 병원에 들어간 환우들이 과연 치료가 잘 돼서 나올까라는 생각도 들고요. 그리고 안 그래도 낙인이 찍혀 있는데 또 다른 낙인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생각도 들어요.”

-어떤 낙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제는 아예 범죄자로 보는구나.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있어요.”

-사법입원에 대한 대안적 제도가 혹시 있을까요.

“그건 솔직히 모르겠어요.”

-정신건강복지센터를 이용한 적이 있습니까.

“아니요 한번도.”

-병원에 있을 때 그걸 소개시켜주던가요.

“아니요. 소개시켜주지 않았어요.”

-있는 줄도 몰랐네요.

“네. 몰랐어요.”

-언제 정신건강복지센터의 존재를 알게 됐습니까.

“파도손에서 이정하 대표님이랑 인연을 맺으면서 알았죠. 그런데 그게 저한테 크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저는 일단 필요한 게 다 옆에 있었어요. 저의 상담은 주로 남편하고 하고 저희 생활에 필요한 것들은 엄마가 제공해 주셨으니까요.”

-최근에 보건복지부가 병원기반사례관리, 낮병원 활성화를 대안으로 내 놓았습니다. 여기에 어떤 문제가 있을까요. 지역사회에 기반한 사례관리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생각을 못해 봤는데 근데 왜 상담이나 심리치료는 안 하는지 의문이에요. 병원에서 그걸 해줘야 하지 않는가 생각하는데요. 약물 가지고 치료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약만 가지고 치료했으면 저는 지금 훨씬 안 좋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정신적으로 건강해지기 위해 주변사람들과 끊임없이 피드백하고 연대하고 관계를 맺었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문제가 생기고 부딪히는 경우에는 주변사람들과 얘기하고 도움을 얻고요. 그게 저는 병원이 아니더라도 상담이나 심리치료가 들어가야 된다고 생각해요.”

-병원의 경우 의료급여 수가가 낮으니까 그걸 안 하려고 하는 거거든요.

“높여줘야죠.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말을 해도 들어줄 사람도 없고.”

-선생님은 여성이고 정신장애인으로서 소외돼 있고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최약자라고 생각해요. 아무래도 저는 제 인권이 제대로 존중받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제일 중요한 게 저 같이 정신장애인이고 여성이라면 가족의 울타리 안에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일차적으로 가족 울타리가 있어야 돼요. 만약 내가 가족의 울타리가 없었다면 어떻게 흘러갔을지 눈에 훤히 보여요. 아마 지금도 병원에 있었을 거고 퇴원하고 석 달 지나면 다른 병원으로 옮겨가 있겠죠. 저는 굉장히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가족 피드백이 있었다는 거.”

-여성이자 정신장애인으로서 차별받은 기억이 있습니까.

“참 어렵네요. 전 이런 문제에 부딪히면 난감해요. 나름대로 보호를 잘 받고 있었기 때문에. 남자 당사자가 아닌 게 다행이다 싶어요.”

-그건 무슨 의미입니까.

“남자당사자들은 다들 뭔가 힘들었어요. 도움을 드리는 것도 그렇고 뭔가 커뮤니케이션이 힘들었어요. 그런데 여자 당사자를 보면 서로 무엇이 필요하고 얘기를 하고 친근하게 다가가고 그게 용이했어요.”

-여성들만 가지고 있는 특징들 아닙니까.

“여성들만 갖고 있는 건 아닌 거 같아요. 사람이라면 어떤 사람은 갖고 있고 어떤 사람은 안 갖고 있는 거지 여성들만 갖고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정신장애인을 격리해야 한다는 사회적 혐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큰일이죠. 우리를 격리해서 안 보이는 데로 치우면 된다고 하는데 그럼 그 치우게 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거죠. 그 사람이 보기 싫어서 누군가가 치우고 싶어한다면 그 사람은 자기가 ‘나는 치워져야지’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좋아요.

우리가 불편해서 안 보이는 데 가둬두겠다? 그럼 치우자고 말했던 사람은 그 보다 더 높은 계층의, 계급의 사람이 나타나서 ‘네가 보기 싫으니 너를 안 보이는 데다가 치우겠다’ 그러면 그 사람이 순순히 그걸 받아들이겠어요? 우리를 치우려고 하는 사람 당신은 한 번도 그런 지적을 안 받고 살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자신하죠?

그 유명한 얘기 있잖아요. 당신이 노동자를 비난하면 노동자는 노동자가 치워지고 당신이 동성애자를 비난하면 동성애자가 치워지고 그리고 나중에 당신밖에 안 남았을 때 당신은 누구에 의해 치워질 것이라는 말이요.”

-그 이야기인가요. 유대인이 잡혀갈 때 나는 가만히 있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니까. 노동자가 잡혀갈 때 나는 가만히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노동자가 아니니까. 마지막으로 내가 잡혀 갈 때 내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말이 연상되네요.

“네. 맞아요. 그거에요.”

(c)마인드포스트.
정지영 정신장애와인권 파도손 활동가 (c)마인드포스트

-추구하는 꿈이 뭐가 있습니까.

“일단 절차보조를 잘 하는 거. 저는 이 절차보조 활동이 너무 좋기 때문에 계속 지속적인 사업으로 유지됐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늙어서 정년퇴임할 때까지 이 일을 계속 하고 싶어요.”

-작가로서의 꿈은 뭘까요.

“제가 쓴 글을 누군가가 책으로 내줬으면 좋겠어요. 크게는 안 바라고 소소하게 저의 이야기에 재미를 느끼는 분들이 사다주는 그런 책을 썼으면 좋겠다.”

-선생님에게 치유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치유란 일상의 회복이요. 일상이 망가질 때마다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게 돼요. 일어나서 밥 먹고 세수하고 출근하고 퇴근하고 같이 차라도 마시고 그런 일상들이 아무 것도 아닌 거 같은데 저는 이걸 하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시간이 걸렸어요. 이십대 후반에 발병해서 지금 마흔여덟 살이 될 때까지 이 일상을 갖기 위해 진짜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그런 일상을 지금 보내게 되니까 과거도 그렇게 힘들었다라는 생각이 안 드는 거예요.”

-과거가 힘들지 않았다고요.

“저는 제가 아팠던 거보다는 남편이 아팠을 때가 더 힘들었어요. 남편이 결핵이랑 당뇨가 동시에 왔는데 그게 너무 힘들었어요. 다행히 치료도 잘 되고 케어도 잘 받고 해서 지금은 건강해요.”

-아이는 낳을 생각이십니까.

“아뇨. 마흔여덟 살이나 됐는데 무슨. 원래는 낳으려고 했어요. 약 조절도 하고 가지려고 했는데 미뤘죠. 또 주변에 아이가 없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굳이 또 낳아야 할 생각은 안 들더라고요. 저도 좀 부담되고. 이건 편협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어느 정도 경제력이 갖춰져 있어야 되지 않을까 싶어요. 어떤 분이 그러는데 가난한 집에서 애를 낳는 건 애에게 굉장히 미안한 일이라고 하더라고요. 저도 사실 그렇게 생각해요.”

-어머니하고 남편에게 어떤 마음이 듭니까.

“저를 돌봐준 것에 대해 많이 감사해요. 고맙고. 제가 힘들 때 옆에 있어준 것도요. 사실 엄마 같은 경우에는 정말 남이라면 절대 이렇게 해주지 않을 거라는 것들을 해주잖아요.”

-결혼은 하되 아이를 가지지 않으려는 정신장애인들이 많습니다. 선생님은 어떤 의견이십니까.

“자유죠. 꼭 애를 낳아야 하나요. 낳아도 그분들의 자유고 안 낳아도 그분들의 자유죠. 다만 자식한테 어떻게 해 주겠다라든가, 자식이 클 때 어떻게 해야겠다라든가, 만약 자식이 나처럼 아프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것에 대한 중심만 잡혀 있다면 아이를 가져도 상관없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건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판단되면 못 낳는 거고요.”

-정신장애인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어렵네요. 이 순간은 지나갑니다. 모든 것은 지나가리라.”

-고통은 그대로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자신을 괴롭히지 않게 살아야죠. 저는 소중한 일상을 갖게 되면 많은 것이 용서가 된다고 생각해요. 평화를 갖는 거죠. 그리고 사실 내가 고통받았던 걸 되돌려주고 싶을 때도 많죠. 저는 지금도 초등학교 5학년 때 저를 왕따(집단괴롭힘) 시켰던 애들을 생각하면 뒤집어질 때가 있어요.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되고 화가 나고 분노하기도 하고. 하지만 제가 그들을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요. 그러면은 다른 걸로 해야 돼요. 결국 할 수 있는 게 글을 써서 해소를 시키든가, 자기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아픔을 순화시켜야 돼요. 고통을 좀 희석시켜야 돼요.”

-선생님의 경우 글을 쓰면서 그 아픔을 견디는 겁니까.

“글을 쓰는 것과 절차보조인. 그 두 가지가 저한테는 많은 고통을 희석시켰어요.”

-용서가 뭘까요.

“용서는 남을 용서하는 게 아니라 자기를 용서해야 돼요. 그 순간에 그렇게 된 자기 자신을 용서해야 돼요. 그때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해야죠. 그러니까 나를 용서해야 돼요. 나를 용서하면 돼요.”

-그 대상은 그대로 남아 있지 않습니까.

“제가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요.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거기에 집착하거나 빠져들면 괴롭고 고통스러워요. 그렇게 되면 힘든 건 자기 자신이잖아요. 어느 순간 더 이상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 싶은 때가 와요. 그때 그 애들에게 왕따 당했고 그 애들에게 얻어맞았고 그 애들에게 돈을 뺏긴 나 자신을 미워하지 말고 용서해야 돼요.”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인랑제수민 2019-06-01 18:49:51
정지영님 너무 고생하셨네요. 맘으로부터 우러나는 경의를 표합니다. 어려움 뚫고 일어서는 지영님의 삶이 우리 조현인들의 빛이 될것입니다. 님이 던지는 말한마디 한마디가 현실의 경종이요 현정부를 울리는 정책의 방향입니다.
25년을 정신장애법안을 누더기 만들고 허식의 복지만 내세운 법을 만들고 누리고 당사자를 괴롭힌 기득권세력을 징치해야합니다. 그들의 반성없이는 당사자의 삶이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의료권력을 설득해 갈 우리 조현당사자들의 의식과 정신 무장.
극렬하고도 첨예한 정치적 운동으로 당사자모임이 나아가야 합니다. 님이 하시는 일처럼, 마인드포스트처럼.
지난한 투쟁이 됩니다. 아무것 가지지 않은 당사자는 오로지 자기재활과 동료지지 절차보조 권익옹호로 나갈 수 밖에는 없지요.
당사자의 본이 되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