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이 죽음의 원인이 되면 사회경제적 모순은 은폐돼"
"‘우울증’이 죽음의 원인이 되면 사회경제적 모순은 은폐돼"
  • 박종언 기자
  • 승인 2019.07.17 19:5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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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언 전 의원 죽음에 언론은 ‘우울증’을 원인으로 지목해
인간은 누구나 다 ‘죽음에의 충동’을 갖고 살아
삶과 죽음은 다층적이어서 하나의 원인만으로 해석 안 돼

정두언 전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 16일 극단적 선택을 했다. 그는 이날 오후 4시께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인근 북한산 자락길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기자는 최근 깜빡 잊고 약 복용을 하지 않은 채 잠을 잔 적이 있었다. 매일 먹어야 하지만 매일 깜빡 깜빡한다. 증상은 바로 나타났다. 약 복용을 않고 잔 이튿날 밤, 기자는 뭔가 알 수 없는 깊은 고통이 내면에서 올라오는 걸 느꼈다. 그건 ‘자살 충동’이었다.

그날 밤 내내 기자는 죽음의 충동과 마주해야 했다. 아, 이렇게 사람들이 자살 충동을 느끼는 거구나, 라는 걸 깨달은 날이었다. 기자는 살고 있는 임대주택 5층 창밖으로 어둠에 묻힌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죽어도 이 세계는 아무런 일도 없는 듯이 잘 돌아가겠구나.” 혹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자들인데 왜 악다구니를 쓰면서 살아야 하나.” 이 두 가지 질문이 뇌리를 맴돌았다.

무서웠다. 내면에서는 ‘죽어라’라는 환청 같은 비명소리가 들리고 내 안에서는 ‘죽어서는 안 돼’라는 당위와 같은 다급한 외침이 흘러나왔다. 그날, 어떻게 잠들었는지 모르겠다. 이후 기자는 약을 더 잘 꼬박꼬박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약이 좋아서가 아니다. 정신장애가 사회심리적 장애만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생물학적 문제도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을 다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정두언의 죽음을 뉴스를 통해 알게 된 시간, 그의 62년의 삶에 슬픔을 느끼면서 기자가 떠올린 건 한 문학비평가의 사색이었다. 그 문학비평가는 “내가 없어도 이 세상은 잘 돌아갈 것이라는 데 대한 슬픔”이라고 적었다. 그는 지금의 나의 나이와 비슷한 40대 후반에 타계했다.

요즘 기자는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거대담론 같은 질문보다 ‘내가 이 세계에서 사라져도 모든 것은 질서를 지키며 그대로 돌아가고 있을 것’이라는 데 대한 존재론적 슬픔을 많이 느낀다.

이 슬픔의 강도가 깊어지면 우울감이 찾아오는지 모르겠다.

정두언의 죽음을 생산하는 언론들은 그의 죽음의 원인을 ‘우울증’에서 찾고 있다. 그가 국회의원 4선에 실패하고 ‘정치적 낭인’이 된 이후 패배감과 무력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실제 정두언은 2018년 한 일간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본디 욕심덩어리인데 그 모든 바람이 다 수포로 돌아갈 때, 그래서 ‘내가 이 세상에서 할 일이 없겠구나’ 생각이 들 때 삶의 의미도 사라진다.”

그리고 덧붙인다.

“나를 기다리는 건 배신이었다. 이제 정두언은 끝났구나 생각했던 사람들이 등을 돌렸다. 평온이 깨지고 분노와 증오가 서서히 생겨났다.”

정두언은 행정고시를 거쳐 국무총리실 공보비서관을 끝으로 20년간의 공직생활을 끝내고 정치권에 발을 들였다. 이후 이명박 서울시장 후보 비서실장, 서울시 정무부시장 등을 거쳤고 국회의원으로 출마해 내리 3선을 했다.

어두운 부분도 있었다. 2013년 불법 정치자금 혐의를 받아 지역 1년과 추징금 1억4000만 원을 선고 받고 법정구속까지 당했다. 이후 이듬해 파기환송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4선 도전에 실패하면서 극심한 ‘우울증’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후 한 차례 자살 시도를 한다.

“낙선 자체는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문제는 낙선 뒤였다. 고통에서 피하려면 죽는 수밖에 없으니 자살을 택한 거야. 14층 건물에 불이 나서 불길에 갇힌 사람이 뛰어내리는 거나 비슷하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병원을 찾았다. 그냥 있으면 또 다시 스스로 해칠 것 같아서.”

그는 사망 전날에도 지인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의 죽음의 뒷모습을 역추적했을 때 기자는 우울증을 가지면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웃고 떠들다가 한 순간에 죽음을 선택할 정도로 심한 질병인지 의심스러웠다. 그의 죽음이 우울증 하나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일까.

언론은 ‘우울증’을 두 가지의 프레임으로 본다. 하나는 극복 가능하다는 것. 또 하나는 죽음과 필연적으로 얽혀있는 심리적 질병으로.

인간의 죽음은 너무나 다층적이어서 하나의 원인만으로 해석될 수는 없다. 삶이 그토록 복잡한데 죽음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언론은 전후 사정을 다 없애고 ‘우울증’만 부각시킨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처리되지 않은 슬픔들을 겪는다.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친한 이들에게 상처를 입고 또 입히기도 한다. 이 슬픔과 고통들이 있다고 해서 모두가 우울증에 걸리는 건 아니다. 그리고 우울증에 걸렸다고 해서 다 극단적 선택을 하는 건 아니다.

가까운 지인은 평소 아무 일 없이 지내다가 어느 날 자신의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사망했다. 또 다른 지인도 그랬다. 둘 다 조현병 당사자들이었다. 황망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다급하게 삶을 정리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우울증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위험한 질환인 것일까. 기자는 모르겠다.

다만 언론에 요청하고 싶은 것은 우울증의 죽음의 원인이었다는 추측성 기사는 자제해 달라는 것이다. 한 정치인의 죽음이 우울증 때문이라고 설명된다면 노무현 대통령과 노회찬 의원의 죽음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다만 ‘정치적 상황에서의 심리적 압박감’이라고 분석할 것인가.

무엇보다 우울증을 죽음과 직접적 고리로 연결할 경우 우리는 이 세계가 가지는 첨예한 사회정치적 모순을 은폐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것이다.

정신질환은 국민의 25%가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걸리게 되는 질병이다. 우울증 역시 마찬가지다. 만약 우울증이 사망의 원인이 된다면 우리 국민의 4분의 1은 이미 극단적 선택을 했을 것이다.

언론은 우울증을 앓다가 극복한 - 사실 극복된 건 아니다 - 사람을 영웅화시키고 미화시킨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심리적 고통을 못 이겨 극단적 선택을 하면 그게 다 ‘우울증’ 때문이라는 방식으로 접근한다.

이 경우 우울증은 몹쓸 질병이 되며 극단적 선택을 한 사람은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는 나약한 정신의 소유자로 낙인찍힌다. 사람들이 우울증이 심해져도 상담기관을 찾지 않는 건 이 같은 ‘초인적 존재’에 대한 환상과 미련을 갖기 때문이다. 초인적 힘을 발휘해 죽지 않고 우울증을 이기고 고통의 세상을 정복했다는 만큼 영웅적 서사가 어디 있겠는가.

따라서 그 신화적 압박감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울증을 죽음과 결부시키지 말고 그 자체의 하나의 질병으로만 바라보게 하면 안 되는 것일까. 당신도 나도 우울증에 걸릴 수 있다. 그렇다면 정신과를, 심리상담소를 찾아갈 수 있는 통상적 질병의 하나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무릎이 까졌을 때나 다리가 부러졌을 때 의사를 찾아가듯이 말이다.

거기에 죽음의 이미지를 덮씌우는 태도는 우울증의 부정성을 증폭시키고 이 병 자체가 위험하다는 사회적 통념을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조현병이 그렇다.

파시즘은 인간의 자살을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보았다. 인민이 모두 잘 살고 있다는 파시즘 판타지에 ‘자살’은 체제의 정당성에 치명적 손상을 입히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지는 질환은 질환으로만 명명되어야 하며 죽음이라는 신화와 결부돼서는 안 된다. 질환이 죽음의 원인이 되면 공동체의 모순은 사라지고 오롯이 개인의 고통만 남기 때문이다. 정치적 공동체의 연대성은 이 같은 모순의 문제를 해석하고 분석할 때 더 나은 사회로 진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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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랑제수민 2019-07-21 00:11:34
다층적 원인을 검토해야 합니다. 그들은 왜 죽어야 했나? 정두언, 노희찬, 노무현, 전미선, 최진실, 웃음치료사마저 죽고, 금방 허허 웃던 사람이 죽어버리는 것.
사회가 국가가 시스템이 경쟁적 구조가 죽이지는 않았나 되돌아 볼 때입니다. 이코노사이드나 알콜릭으로 죽어가는 고독사나 독거노인의 미이라 죽음이나 냉막한 사회의 민낯입니다. 기득권은 좋은 사회 밝은 나라 건강한 국민만들도록 애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