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의 유쾌한 수다…“나에게 회복은 되돌아가는 게 아니라 알을 깨는 것입니다”
그녀들의 유쾌한 수다…“나에게 회복은 되돌아가는 게 아니라 알을 깨는 것입니다”
  • 박종언 기자
  • 승인 2019.08.27 02:1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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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혜경·이진순 패밀리링크 강사 공동인터뷰
‘이 또한 지나가리라’ 다짐…상황 변하면 다 지나가
주치의와 신뢰 관계가 큰 재산…책임 의식 가져
절망 속에서 쓴 ‘리커버리선언문’…조금씩 말 건네는 삶
우리는 모두 치유의 과정으로 가는 존재들
직업은 치유의 약…재능 펼칠 다양한 직업군 필요
결혼할 상대에게 자신의 병 오픈해야
돈보다 아픈 형제에 대한 병 이해시켜야
부모는 아픈 자식과 여행 다니며 작은 추억 만들어야
아픈 형제 돌보라고 재산 남겨주면 안 돼
병이 나았느냐보다 환경에 잘 적응했느냐로 판단
힘겨울 때 같은 환우 가족과 만나 이야기...위로
정신건강복지센터별로 표준화된 교육 동일하게 이뤄져야
박종언의 만남: 길을 묻다 (c) 마인드포스트
박종언의 만남: 길을 묻다 (c) 마인드포스트

두 명이 인터뷰를 요청했다. 한 명은 남편과 세 아이를 둔 당사자 여성이었고 한 명은 타계(他界)한 정신장애인 남편을 두었던 60대 여성이었다. 그 둘은 꽤나 친한 사이다(라고 나중에 생각이 들었다). 2주에 나눠 한 명씩 인터뷰를 할까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같이 하고 싶다고 했다.

자식을 정신장애인으로 둔 부모는 많이 만나봤지만 아내가 정신장애인 당사자고 남편이 당사자인 경우는 많이 접하지 못했다. 호기심이 생겼다. 무엇보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질 임무에서 물러서 있는 당사자들과의 인터뷰도 좋지만 생계를 책임져야 할 부모의 위치, 부부의 위치에 있는 이들의 이야기도 듣고 싶었다.

기자는 이 두 분의 인터뷰를 세 가지의 시선으로 나눠서 말하고 싶었다. 권혜경(46) 씨와 이진순(69) 씨를 개별 인터뷰한 후 마지막에 공통된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었다. 이 이야기는 그러므로 세 개의 시선으로 본 하나의 이야기다. 그들을 만난 건 가을 분위기의 바람소리가 들리는 26일 봉천역의 한 카페에서다.

#시선 하나.

권혜경 씨는 30대 초반 아이를 낳은 후 심한 산후우울증을 겪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다못해 이불 하나를 접는 것도 힘에 부쳤다. 30대 무렵, 부동산 광풍이 불 때 그는 남편과도 상의하지 않은 채 살고 있던 빌라를 팔았다. 그 돈으로 오피스텔과 변두리의 아파트를 샀다. 성공할 수 있다고 속삭이는 자기계발서를 부지런히 찾아 읽으며 그가 내린 결론은 주택을 보유함으로써 아파트 값에 따른 수익을 내겠다는 거.

권혜경 씨 (c)마인드포스트.
권혜경 씨 (c)마인드포스트.

그렇지만 새로 마련한 역시 변두리의 낡은 반지하 주택에 들어섰을 때 그녀는 자신의 꿈이 허황됐다는 걸 깨닫게 된다. 아이들은 아토피로 고생했고 남편은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냉담했다. 가족은 무언가 집안이 아닌 바깥에서 겉도는 기분이었다.

심리상담을 받았고 정신과를 찾아 약을 먹었다. 그때, 내가 누구 때문에 약을 먹는 줄 아느냐는 분노의 심정으로, 그것은 남편을 향한, 시댁을 향한 원망의 감정으로 약을 넘기고는 했다. 그리고 때로 약을 끊었고 그러면 어김없이 재발했다. 병과 싸우던 10년, 어느 날 그는 모든 것을 놓아버리는 심정으로 자기 선언문을 종이에 적었다. 리커버리 선언문. “나는 과거의 실수, 증상이 나타날 때의 모습을 부끄러워하거나 미래의 직업, 노후 등으로 불안해하기보다 ‘지금 여기’ 살고 있는 나에게 집중할 것을 선언합니다. 나에게 있어 회복이란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알을 깨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리커버리라고 부릅니다.”

가까운 지인들에게 이 글을 보였고 그는 지지와 위로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슬픔은, 또한 고통은 지나가는 것이라는 것 그렇게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지금 그는 정신장애인 가족 자조모임이자 연구모임인 패밀리링크 강사로 일하고 있다. 그리고 동료지원가로 일하기 위한 교육들을 배워나가고 있다. 자신을 이해해준 아이들과 남편에게 빚진 심정이다.

그렇다. 삶이라는 모든 것이 지나가는 것이다. 물론 지나가지 않는 것도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지나간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하나의 진리가 있으니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 그녀는 그걸 깨달은 것일까. 현재 <마인드포스트> 시민기자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녀를 만났다.

-30대 무렵, 성공신화와 부동산 광풍에 휩싸여 살던 빌라를 팔고 오피스텔과 아파트를 샀다고 했습니다. 본인은 정작 아이들을 데리고 반지하 재개발 아파트 전세로 들어간 순간 모든 게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고요. 당시 어땠습니까.

“요즘 애들이 현타 맞았다(현실로 돌아왔다)고 하죠. 그때는 막 뭔가에 쫓겼어요. 내가 투자를 잘 해서 가족을 풍요롭게 해야 되겠다는 신념이 있었죠. 나는 이게 옳은 신념이라고 생각해서 불도저처럼 추진을 했죠. 29평 빌라를 팔고 투자를 먼저 하고 돈이 조금밖에 없으니까 재개발아파트의 낡은 반지하에 들어갔죠. 화장실은 이상한 페인트를 칠해가지고 어두컴컴하고. 집도 좁고 제일 큰 문제는 습도더라고요.

눅눅하니까 사람이 들어가면 불쾌한 거죠. 그게 그때서야 눈에 들어온 거예요(웃음). 이후에 아파트 값은 더 이상 오르지 않았어요. 거기서 2년 살았는데 경제적으로는 바뀌지 않았어요. 애들이 커가니까 넉넉하게는 아니더라도 애들을 우선해야 했는데 돈이 먼저였어요. 주거가 불안정하니까 그걸 꿈꿀 여유도 없었어요. 애들에게 미안하죠. 남편에게도 미안하고 원망스럽기도 하고 복잡한 감정이 있었죠.”

-몇 살 때 발병하신 건가요.

“그 전에도 기복이 심했는데 30대 초반에 (발병했어요). 그때는 1년 정도 심리상담하다가 그만 두고 다시 또 증세가 나타나고.”

-살아오신 과정을 듣고 싶습니다.

“고등학교 때 적성에 맞지 않는 이과를 선택했어요. 방황을 하다가 종말론에 빠졌어요. 그때 다미선교회라고 종말론에 몰입했는데 한 달에 살이 8킬로그램이나 빠졌어요. 그리고 집밖을 못 나갔어요. 바람 불고 이러면 휴거가 일어난다고 생각해서. 종말론 관련 책이며 비디오를 되게 많이 봤어요. 거기서 혼자 헤어나올 수 없을 지경에 됐을 때 기독교 단체로 전화를 했어요.

그때 한 분이 전화해서 자기가 그 이단 단체에 가봤는데 절대 성경적이지 않다고 해요. 그러면서 전도사님을 찾아가 보라고 그래요. 전도사님을 찾아가니까 그 분이 로마서 8장 32절을 보여주며 ‘하나님이 한 번 잡은 손은, 하나님의 사랑은 천사나 높은 피조물이라도 끊을 수 없다’라고 말씀을 해 주셨어요. 그때 제가 평안함을 느꼈죠. 재수생활도 편안하게 하고.

훗날 제가 아는 교회 사모님이 그게 혹 전조증상이 아니었을까 그래요. 왜냐하면 아무리 종말론에 빠져도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였다면 말이죠.”

-그때가 초기증상이고 발병은 이십대 후반?

“첫 아이 낳고 산후우울증이 너무 심했어요. 그때는 멘토인 전도사님이 심각해 보인다며 병원에 가보자고 그랬어요. 20대 말에 결혼해서 30대 초에 아이를 낳았는데 괜찮아지니까 병원에 가지 않았어요.

저희 가족 중에 넷째 삼촌이 정신요양시설에 계세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정신질환에 걸리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 있었어요. 신기하게도 같이 자란 언니는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대요. 넷째 삼촌이 주민등록 때문에 잠깐 (우리집에) 왔다가 간 적이 있는데 너무 무섭고 불안했죠. 그 불안감이 늘 있었는데 그게 실제로 나한테 온 거죠.

처음에 그런 마음의 편견이 있었기 때문에 병원을 찾아갔고 찾아가도 오래 지속도 못했고요. 실제 진단이 떨어졌을 때 충격적이었죠. 입원은 안 해 봤어요. 왜냐하면 아이가 있으니까. 입원할 상황이 몇 번 있었는데도 의사 선생님도 도와주시고 저 역시 애를 놔두고 입원할 수 없다 생각했죠. 모성애였던 거 같아요.”

-당시 누구에게도 지지받지 못했던 상황이었고 그 어둡고 습한 아파트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때 커튼도 다 닫고 살았어요. 엄마가 목화솜이 들어간 두꺼운 이불을 해 주셨는데 그걸 갤 힘이 없었어요. 아이 학습지 선생님이 왔는데 치워놔야 되잖아요. 그걸 치울 힘이 없어서 요를 반만 접었던 기억이 나요. 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데 비닐을 버려야 할 자리에 쓰레기를 버리고 쓰레기를 버려야 할 자리에 비닐을 버린 거예요. 그냥 치우면 되잖아요. 그런데 제 자신이 너무 비참한 거예요. 이것 하나도 못하구나.

남편도 속으로 화가 난 상태이기 때문에 대화가 없었고. 4층에 수녀님이 살고 있었는데 가끔 찾아와주셨어요. 수녀님이 순례의 길을 걸었는데 햇볕을 쬐니까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계속 걸어가다 보니 치유 받는 느낌이 났대요.

저를 위해 일부러 그런 얘기를 해 주신 거 같아요. 저도 신앙적으로 매달려보고 돌파구를 찾으려 했어요. 당시에 우리 가족 모두 집에서는 안 되니까 다 밖으로 돌았던 같아요. 동사무소에서 정신건강복지센터 브로슈어(안내문)를 보고 용기를 내서 전화를 했어요.”

 

권혜경 씨 (c)마인드포스트.
권혜경 씨 (c)마인드포스트.

-자기 계발서를 많이 읽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자기계발서가 인간의 심리를 조종하고 타락하게 만들어버린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어쩌면 정신질환으로 몰아가는 게 자기계발서의 본질인 거 같습니다.

“독소(毒素)가 있다? 그럴 거 같아요. 30대 때는 성공하고 싶은 욕구가 최고점인 시기잖아요. 그럴 때 자기계발서가 불을 지피는 거죠. 할 수 있어요. 브라이언 트레이시(캐나다 출신의 성공학 강사)도 가난한 농부의 아들인데 성공했어. 나도 할 수 있어. 안 하는 사람이 죄악이야. 이런 걸 믿고 달려왔죠. 그게 왜 문제가 되냐면 지금은 자기계발서가 없어도 엄청나게 심한 경쟁사회인데다가 성공지상주의 사회잖아요.

그러면 자기계발서는 이 사회의 프레임이 맞다는 걸 기본 전제로 하고 그러니까 더 해라 (이런 식이죠). 이런 방법론이 있어, 백 가지 방법이 있어. 그래놓고는 뒤로는 자존감 치료를 하겠다면서 병 주고 약 주는 사회인 거예요(웃음). 그럴 때 20~30대 청년들은 도대체 뭐가 맞는 건지 너무 혼란스러워할 것 같아요.

나의 멘탈은 너덜너덜한데 사회나 부모, 선생이 ‘조금만 더 해라’, ‘너만 참으면 되지 않냐’, ‘성공하면 누가 좋아, 네가 좋잖아’ 하거든요. 그럼 아이들은 ‘젊어서 성공할 수 있어’, ‘비트코인으로 성공할 수 있어’, ‘유튜버로 성공할 수 있어’, ‘성공하면 남들이 나를 알아줄 거야’ 이런 식으로 접근하니까 애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거예요. 20~30대가 예쁘고 멋질 때잖아요. 요즘은 스펙도 좋고. 그런데 불쌍하게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저한테 제가 20~30대로 돌아가고 싶은지 물어봐요. 저는 돌아가고 싶지 않더라고요. 자기계발서도 그렇지만 책을 볼 때 아무거나 보면 안 돼요. 내가 좋은 친구를 사귀듯이 책을 골라서 봐야 해요.”

-사례관리 선생의 전화가 오면 “저도 자살하지 않고 오늘 하루 잘 버텼다”라는 말을 했는데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때 학습지 선생을 했을 땐데 계획에 없던 셋째 아이를 임신을 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진짜 하루 살기가 어렵더라고요(웃음). 그런데 어느날 사회복지사 선생님이 전화를 주셨어요. ‘권혜경님, 요즘 기분은 어떠세요’라고 물어요.

제가 그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오늘 하루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내 할 일 잘한 거야.'(웃음). 그런 생각을 하다가 그 말이 튀어나온 거예요. 사회복지사 선생님이 놀라서 아무 말도 못하더라고. 그냥 어색하게 끊었던 기억이 나요. 그때를 생각하면 그 분께 참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당시 주문으로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를 마음 속으로 외웠다고 했습니다. 모든 게 다 지나가고 말던가요?

“지나가는 것도 있어요. 예를 들면 불쾌한 기분. 저는 기분이 찬물로 끼얹은 것 같은 잔상이 남는 게 오래 가는 편인데요. 너무 괴로우면 전화기를 3~4시간 붙들고 살았어요. 그러면 딴 사람에게 피해를 주잖아요. 그래서 운동을 한다든가 하면 지나가더라고요. 아, 지나가구나. 감정이라는 썰물처럼 왔다가는 파도와 같구나. 처음에는 세게 왔다가 세게 돌아가고. 그 다음에는 서서히 돌아가고 이러면서 잦아지는구나라는 경험을 했죠. '

결국 가족과 나 자신이 중요하구나. 반면에 이 또한 지나가지 않는 것도 있더라고요. 상황이 바뀌지 않으면요. 뭐냐면 제가 병을 수용하고 관리를 해야 하는데 자꾸 조금만 나아지면 난 혹시 조울증이 아닌 것 아닐까 하고 생각해요. 그럼 약을 안 먹어도 되지 않나. 책을 보니까 ‘제약회사의 음모’가 있고(웃음). 유튜브에서도 정신과 약물의 부작용 이런 것들만 찾아 읽게 되고.

결국은 그거더라고요. 내 안에 약을 안 먹고 싶고 내 병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 그런 마음에 맞는 논리를 만들어서 핑계를 대고 안 먹어야되겠다하는 거죠. 그렇게 재발 과정을 수도 없이 거치면서 이제는 ‘아, 의사가 약을 그만 먹으라고 할 때까지 먹어야겠다’ 생각하죠(웃음). 제 주치의와의 신뢰 관계가 저한테 큰 재산이고 그럼으로써 제가 바른 병식(病識), 제 삶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가짐으로써 바뀐다는 거죠.

모든 게 다 지나가는 게 아니라는 거지. 만약 좋은 전문가 선생님, 멘토가 없었다면 계속 반복을 했겠죠.”

-회복이란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알을 깨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리커버리 선언문(권혜경 씨는 고통의 밑바닥에 있을 당시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적은 선언문을 만들었다. 발병 10년 뒤였다. 그는 전문에 병으로 인해 내가 고쳐야할 나쁜 습관과 잘못된 가치관을 알게 된 데 기쁘게 생각한다고 적었다. 이어 매일 약을 먹을 것과 실수 하고 증상이 있는 나 역시 나임을 인식할 것, 지금 여기 살고 있는 나에게 집중할 것을 선언하는 자기 고백과 행동요령 등을 적었다. 선언문은 그녀의 삶의 이정표로 작동하고 있다-편집주)을 쓸 당시에 무기력, 음성증상이 너무 심해서 집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어요.

그때 다음 카페 ‘사라의 열쇠’를 열심히 봤는데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에서 자기 이야기를 하며 접근하는 친구들이 많더라고요. 거기서 어떤 글을 봤는데 이러는 거예요. ‘20대건, 30대건, 40대건 발병한지 2년 됐건 5년 됐건 내가 내 병을 바르게 파악하지 못하고 계속 부모 원망, 남 원망하고 산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만성환자가 될 거다’라고요. 저한테 너무 충격이었어요.

저는 남편 원망하면서 살았는데 이게 남편과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애들한테 짐이 되겠구나라는 충격이 확 오더라고요. 그래서 안 되겠다, 뭐라도 해야겠다해서 최악의 순간의 그 바닥에서 선언문을 쓴 거예요. 그걸 냉장고에 붙이고 패밀리링크(정신장애인 가족들의 교육 자조모임)에도 올리고 하면서 저는 앞으로 이렇게 살겠습니다 하니까 사람들이 막 격려를 해 주는 거예요. 당장 좋아지지는 않죠.

예를 들어 하루에 한 번이라도 마트를 가고 아니면 애들 학교 준비물이라도 도와주고 하면서 조금씩 좋아지더라고요. 그 선언문을 쓴 계기로요. 회복이 알을 깨는 거라고 했는데 저도 몸으로 느꼈던 같아요. 옛날에 300만 원을 벌었는데 제발 300만 원 벌 수 있는 옛날로 돌아가게 해 주세요. 그런데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갈 필요도 없더라고요.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인사이트(통찰)로 인생을 재구성해서 살아야 된다는 거죠. 회복 너머에 있는 회복을 봐야 해요. 옛날에 200만 원 벌었는데 지금 다시 200만 원 벌게 됐어, 우리 아들이 취업했어. 물론 그것도 좋은 회복이지만 그 회복 너머의 회복, 인사이트 너머에 있는 인사이트를 봐야죠. 내가 여태까지의 삶을 나만 잘 먹고 잘 살고 그렇게 살았는데 회복을 해 보니 세상에 마음이 아픈 소수자들이 굉장히 많구나라고 생각하게 된 거죠.

그런 것에 눈이 떠진 거죠. 회복 너머의 회복, 어떤 승화. 그런 개념에서 알을 깨는 작업이라고 표현했어요.”

-남편과 아이들은 엄마의 정신적 상황을 잘 이해합니까.

“제가 아이들한테 감사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한 게 가정예배를 드릴 때 고민하다가 얘기를 했어요. 왜냐하면 제가 자꾸 집에서 노출이 되더라고요. 강의 PPT를 준비할 때나 제가 자주 가는 카페를 보고 아이가 조울이 뭐냐고 물을 때가 있었는데 제가 ‘엄마가 사실 조울병이 있는데 그래도 병을 잘 인지하고 있고 관리를 하고 있어. 그래서 매일 약을 먹는 거야. 그렇지만 엄마 때문에 너희들이 좀 힘들지 않았니’ 이랬어요.

그때 큰딸애가 ‘아프면 어쩔 수 없지 뭐’ 이러더라고요. 쇼크였죠. 왜냐하면 저는 아프면 어쩔 수 없이 약을 먹고 살면 돼라는 걸 십 몇 년만에 깨달았는데 딸애는 그걸 10초 만에 얘기를 하는 거예요(웃음). 충격도 됐지만 너무 고마웠죠.

지난해 12월에 제가 재발을 했어요. 지금은 회복이 됐는데 그 당시에는 굉장히 불안도가 높았어요. 한번은 가족이 외식으로 탕수육을 먹었는데 그때 아이들이 얘기를 해요. 엄마, 그때 진짜 대단했다고. 뭐냐면 남편이 12시가 돼도 집에 안 오니까 불안해서 아이들 붙잡고 같이 기도하자고 막 그랬어요. 그때 아들이 게임하고 있는데 엄마가 자기를 불러가지고 무릎 꿇으라 했다는 거예요. 그걸 웃으면서 얘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딸이 더 웃기는 게 뭐냐면 엄마가 얘기하니까 그냥 앉아 있어 이랬데요. 그걸 셋이서 웃으면서 얘기를 하더라고요. 저는 고맙고 그 시간이 좋았어요. 왜냐하면 아이들이 그런 얘기를 안 한다면 더 상처가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남편에 대해 고마운 건 남편이 늘 저보다 먼저 나가지 않았어요. 한번은 성령 체험을 한 적이 있어요. 갑자기 세상이 거꾸러지면서 천국으로 보이더라고요.

제가 남편한테 ‘여보, 나 성령님을 만난 거 같아’ 이랬어요. 남편이 아무 말도 안 해요. 그런데 이상하게 그날따라 성령체험 말한 후에 ‘나 재발한 거 같아’라고 얘기를 한 거예요. 그게 동시에 왔어요. 그때서야 남편이 ‘당신이 이제 당신을 객관적으로 볼 줄 아는구나’ 격려를 해 주더라고요. 제가 현실로 올 수 있게 되더라고요. 남편이 나보다 앞서 나가지 않고 긍정적인 포인트가 있을 때 잘 짚어주고 피드백을 해 준 점이 고마워요.”

이진순 씨 (c)마인드포스트.
이진순 씨 (c)마인드포스트.

-정신장애인에게 최고의 약은 ‘직업’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제가 직업은 자존감이자 최고의 약이라고 말했는데 맞는 거 같아요. 왜냐하면 직업을 가진다는 거는 내가 사회에 소속돼 있는 거죠. 정신장애인들은 굉장히 고립돼 있거든요. 소속돼 있다는 건 굉장한 힘이 돼요. 또 하나는 우리는 대체로 의존적이고 수동적인데 일을 한다는 건 기여를 한다는 거죠. 우리도 기여할 수 있다. 그러면 자존감이 굉장히 올라가죠.

제가 동료지원가 교육을 받고 있는데 동료지원가야말로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해요. 치료 효과도 높고요. 제가 아팠을 때 훌륭한 사회복지사가 왔지만 동료지원가와 같이 왔으면 정말 기뻤을 거 같아요. 정말 직업이 최고의 약인데 지금 직업의 종류가 너무 한정돼 있어요. 동료지원가, 바리스타 이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거죠. 정신장애인이 재능을 다양하게 펼칠 수 있는 직업군을 직업재활서비스에서 만들어야 해요. 그러면 정신장애인이 더 기쁘게 잘할 수 있겠죠.”

-선생님은 치유된 겁니까, 아니면 치유의 길로 가고 있는 존재입니까.

“치유의 과정으로 가고 있죠. 저는 신앙인이니까 말하고 싶은데 모든 사람은 치유가 돼야 돼요. 어떻게 치유가 돼야 하냐면 하나님이 만드신 형상을 되찾아야 돼요. 하나님이 우리를 처음에 형상을 만들었을 때 자기 형상을 따라서 만들었잖아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었는데 죄나 많은 것들로 인해 형상이 일그러졌어요. 하나님과 멀어졌죠. 그래서 하나님의 원래 형상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게 구도자의 모습인 거죠. 병으로든 죄로든 우리의 원래 형상을 찾아가는 과정이 치유의 과정인데 저는 죽을 때까지 찾아가야 되겠죠. 그래서 치유하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시선 둘

그녀는 선교사를 꿈꿨다. 36살 때 어느날, 자신의 시댁 가족 중 한 분이 정신병원에 있는데 같이 가보지 않겠냐는 지인의 말을 듣고 그저 생각없이 따라갔던 그 병원. 그곳에서 이종수(당시 46세) 씨를 만나게 된다. 중증 정신질환자였던 이종수 씨는 그녀를 보자마자 결혼을 결심했다. 아니, 자신과 결혼해 달라고 떼를 썼다. 당시 이종수 씨는 정신병원에서 27년째 생활하던 중이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나도 부모 밑에서 사랑을 받으며 컸는데 왜 저 사람은 정신병원에서 부모 사랑도 없이 그 긴 시간을 보내야 했을까. 그건 연민이었을까. 그는 그가 편안했다고 한다. 사랑보다 먼저 앞선 느낌인 편안함. 그 느낌이 그녀가 그의 손을 잡게 하는 원동력이 됐다. 시댁은 완강했다. 한 푼의 시댁 재산을 눈여겨보지 말라고 협박했다.

아픈 이를 보호하고 결혼해서 함께 생활하겠다는 여성이라면 오히려 시댁에서 재산을 나눠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시댁은 그녀에게 시댁 재산을 원치 않는다는 각서까지 쓰게 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그를 놓치지 않았다. 27년간 정신병원에 있었던 이종수 씨는 그녀와 딱 27년을 함께 산 후 타계했다. 27은 그 삶의 비밀 같고 상징 같았다.

이진순 씨는 남편의 타계 이후에 오히려 더 열심히 정신장애인 권리 옹호 운동을 해왔다. 자신의 케어(돌봄) 노하우를 가족들에게 전수했고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서 중요한 정신장애 관련 서적들을 사람들과 함께 학습했다. 이만큼 떠나온 길. 이종수 씨를 사랑한 것에 대한 미련은 없었을까.

그는 단연코 ‘아니’라고 답했다. 사랑한다는 건 받아주는 것이다. 이렇게 고치라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안아주는 것이다. 그는 사랑하고 위로했고 그만큼 깨달았다. 삶이 주는 아주 긴 호흡, 그것을 그녀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남편 이종수 선생님은 정신장애 1급의 중증 정신장애인이었습니다. 그를 케어하는 데 필요했던 건 이해였나요, 아니면 사랑이었나요, 혹은 운명에 대한 받아들임이었나요?

“인내와 사랑이었겠죠. 처음에는 인내를 가지고 시작을 했는데 한 7개월 정도 지나니까 서로 사랑한다는 말은 안 하지만 눈을 마주칠 때 느낌이라는 게 오더라고요. 사랑이구나.”

-결혼 당시 남편에게 품었던 감정이 사랑이라기보다는 편안함이었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그토록 편안했습니까.

“지금도 그래요. 그 분이 ‘나한테 기대’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내 옆에 있었기에 나는 삶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같아요.”

-2013년 이종수 선생님 돌아가시고 이듬해 ‘종수 이야기 그 이후: 그는 사랑의 씨앗을 남기고 갔습니다’라는 후속 책을 발간했습니다. 남편이 어떤 사랑의 씨앗을 놓고 갔다고 생각하십니까.

“보통 사람들이 정신질환을 가지면 가정에서 살 수 없다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거죠. 왜냐하면 그 분은 한 가정의 가장으로써 보통 사람들처럼 돈을 벌어오거나 살림을 도와주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 자체가 가정을 지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거죠.”

-어느 누구도 선생님처럼 중증정신장애인을 돌보기 위해 결혼을 결심한다는 건 엄두를 내지 못할 일 같습니다.

“그 분을 처음 봤을 때는 외모상으로 그렇게 심한 정신질환을 가졌다고 못 느꼈어요. 제가 정신분석을 공부했기 때문에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은 아픈 사람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요. 그 분의 말이 어눌했지만 그 분에게 느꼈던 건 나도 부모 밑에서 자랐고 그 분도 부모 밑에서 자랐는데 왜 저 분은 병원에서 27년을 살았을까였어요.

그때 당시에 왜 내가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몰라. 나는 부모 밑에서 살았는데 저 사람도 부모님이 계셨는데 왜 병원에서 못 나왔을까. 그렇다면 공평하지 못하다. 내가 진짜 예수님을 믿는다면 저분하고 사는 거, 편안하게 받아들였어요.”

-결혼할 상대방에게 자신의 병명을 오픈하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상처가 될 수 있다고요.

“숨길 일은 아니죠. 아픈 거잖아요. 아픈 걸 숨기고 간다고 해서 병이 다 낫나요. 아니잖아요. 상대방에게 이 병이 어떤 병이라는 걸 교육을 좀 시켜줬으면 좋겠어요. 파트너에게 정확한 교육이 된다면 파트너도 냉정하게 가지는 않을 거 같아. 이해를 해 줄 수도 있고 친구라도 되어주지 않을까.”

이진순 씨 (c)마인드포스트.
이진순 씨 (c)마인드포스트.

-정신장애인은 자신의 병을 커밍아웃하지 않고 결혼하려는 경향이 강한 것 같습니다. 결혼 후에 알게 되면 이해를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살면서 좋은 일만 있는 게 아니고 굴곡이 있잖아요. 좋을 때는 괜찮은데 안 좋을 때는 왜 원망하고 속였냐 이래요. 그러면 아무리 진실을 얘기해도 저 사람이 또 속이는 거 아니야, 이렇게 나오는 거죠. 내가 진정으로 얘기하는데 저 사람이 또 부정적으로 들으면 어떨까 하는 거죠. 나는 완전 오픈하고 가야 한다고 봐요.”

-정신장애인이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격리되지 않기 위해서는 가족이 먼저 그들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고 싶고 실제 포기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죠. 미국의 한 정신의학자가 그래요.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어디 있냐. 그런데 너무 아프면 잘라버리고 싶다고. 그런데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부모가 포기한다는 거는 지금 현재의 당면한 일이 힘이 들어서 직면하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부모도 다시 한 번 숨을 쉬고 난다면 왜 내가 낳은 자식인데 버리고 싶겠어요.

버리는 분도 이유가 있을 거고 버리지 못하는 분도 이유가 있다고 봐요. 젊었을 때는 어떻게 자식을 버려, 막 이랬는데 제가 나이가 먹어가니까 조금은 이해가 가더라고요. 버릴 수도 있다고. 그런데 버릴 수도 있지만 당사자인 아픈 아이에게 내가 너를 버려야 된다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시켰으면 좋겠어요.”

-버리는 데에도 이유를 얘기를 해 줘야 한다는 말입니까.

“얘기를 해 줘야죠. 사정 얘기를. 그리고 버린다고 해서 아무데나 버리지 말고 당사자가 살만한 거처를 마련해 줘야죠. 거기서 살면서 집을 왔다갔다하든지. 아니면 내가 너를 만나러 오든지 이렇게 할 수 있는 관계가 됐으면 좋겠어요. 무턱대고 외면하지 말고.”

-정신장애인에게는 병이 다 나아졌느냐는 말보다 환경에 잘 적응해 가느냐는 말이 더 적당하다고 하셨습니다.

“병이 낫나요? 나을 수도 있겠죠. 그러나 안 낫는 사람이 더 많아요. 낫는다고 할 때 기준을 어디다 두고 말하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환경에 잘 적응하느냐가 중요한 거죠. 왜냐하면 사회를 나가서도 직장에서 적응을 잘 해야 되고 집에서도 마찬가지잖아요. 형제와 부모 관계도 적응을 잘 해야 되죠. 제가 생각할 때 낫다, 안 낫다 얘기보다 적응을 잘 할 수 있냐 그게 제일 중요한 거 같아요.”

-사람 욕심이 끝이 없지 않습니까. 병이 조금 나아지면 일자리를 가지길 바라는 게 가족의 욕망 아닌가요. 그걸 억눌러야 할까요.

“아니요. 맞는 직장을 찾아봐야죠. 부모들은 우리 아이가 병을 가졌지만 어느 직장에 갔어라고 말해요. 당장 아이는 직장에서 죽을 힘을 다해서 일하고 있는데 말이죠. 그 죽을 힘이라는 게 뭐겠어요.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들을 이해해주는 직장이 아니잖아요. 일반인들이에요. 그 사람들한테 내가 약을 먹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얘기도 못하고 일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런데 가족은 ‘우리 아이가 회복됐어’라고 말하면 주변 사람들이 회복됐네 하면서 부러워하죠. 그게 아닌데.”

-남편 이종수 선생님은 27년간 정신병원을 전전했고 선생님을 만나 27년을 함께 생활했습니다. 이제 혼자 남으셨는데 나머지 27년은 어떻게 살고 싶으십니까.

“나머지 27년은 정신질환 가족의 교육의 힘이 되어주고 싶어요. 또 나머지는 제가 믿는 하나님과 저와 정신질환은 어떤 관계인가에 대해 책도 좀 쓰고 싶고 그렇게 살고 싶어요.”

-부모와 아내만 모든 책임을 지려하지 말고 형제나 자식들과 미리미리 책임을 분담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게 있을까요.

“부모가 굉장히 아픈 아이를 자꾸 숨겨요. 가족에게도. 그러면 가족 안에서 공동체 생활이 이뤄지지가 않잖아요. 그러니까 네 형이, 네 오빠가, 네 동생이 이러한 병이다, 그러니까 너도 아픈 아이의 형에 대한, 동생에 대해 그 병이 무엇인지를 알고 대화를 해주고 관계성을 가져라(라고 말해야죠). 그래야지 엄마 아빠가 떠나도 형제들이 아픈 아이를 만날 수 있지 않겠냐.

이 병에 대해서 모르면 부모가 떠나도 아픈 형이나 동생을 외면해. 그런데 부모가 있을 때부터 병에 대한 정보가 있으면 안 떠나. 전 그걸 알아요. 안 떠나요. 창피한 게 아니거든. 아픈 거지. 그러니까 내 형이 이런 병을 앓고 있어. 그럼 매스컴에서 정신질환 어쩌고 나오면 이거 우리 형에 대한 얘기인데 하면서 관심을 가져. 우리 형도 잘못하면 저런 무서운 짓을 할 수 있겠다라고 생각해요. 그럼 형을 보살피게 되고 전화하고.

그렇게 가족의 관계가 돼 있어야지 부모가 떠나도 이 형제가 그 아픈 사람의 생일날만큼은 찾아와줄 수 있다는 거죠. 어디 있는지 근거지도 모르고 살게 하지 말자 이거죠.”

-무조건 아픈 자식에게 돈을 남겨두면요.

“안 돼요. 살아 계실 때 갖고 있는 재산만큼 아픈 아이하고 아름다운 시간을 가지라는 거죠. 같이 있으라는 거예요. 형제한테도 주지 말고. 왜냐하면 부모가 재산을 동생한테 줬어. 형이 아프니까 네가 관리해. 그게 안 돼요. 그건 안 돼. 그러니까 같이 살 수도 없고, 형제의 삶이 있고, 아픈 사람은 또 아픈 사람의 삶이 있어요.

이 분이 공동체 생활에 들어가서 살 때 그래도 부모랑 아름다운 여행의 추억도 있고 형제가 찾아와주면 얼마나 좋아요. 당사자에게는 부모밖에 없어요. 부모하고 여행도 다니고 꽃이 피는 봄이면 뒷산에라도 김밥이라도 싸갖고 가서 먹었던 그런 추억이라도 갖고서 살 수 있게끔 만들어주고 갔으면 좋겠어요.”

#시선 셋.

인터뷰를 하면서 기자는 아팠다. 왜 정신장애는 이토록 선한 이들에게 찾아오는 것일까. 세상에 이유가 없는 고난은 없다고 하는데 한창 꽃필 나이, 그것도 20대 초중반에 찾아오는 이 반갑지 않은 질병에도 우리가 꼭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할까. 그것이 기자는 아팠다. 그런데 권혜경·이진순 씨는 의미를 부여했다. 현재 직면한 고통이 어떤 것이더라도 그것을 통해 우리는 세계를 다르게 보고 다르게 해석하고 결국은 그 세계와 삶을 껴안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패밀리링크 8기 동기라는 그 둘은 그저 엄마와 딸 같았다. 기자는 더듬거리며 공통된 질문들을 던졌다.

(c)마인드포스트.
(c)마인드포스트.

-가족이 화해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가장 필요할까요.

권혜경 “저는 모든 편견은 가족도 마찬가지고 나도 마찬가지고 사회도 마찬가지이고 무지(無知)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해요. 알지 못하기 때문에 편견이 생기는 거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외면하고 싶은 거죠. 그래서 교육을 통해서 이 병에 대해 알 수 있게끔 해야죠.

제가 교육을 받으면 받을수록 이 병은 질병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일반 시민도 미디어가 주는 공포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피해를 받고 있어요. 그러니까 가족이 화해하기 위해서는 무지를 깨는 교육이 제일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진순 “오픈을 가족 구성원에게 오픈을 해야겠죠. 특히 엄마의 외갓집, 아빠의 친가 쪽에 다 비밀로 하잖아요. 그런데 아픈 거잖아요. 이게 나쁜 병이 아니잖아. 범죄가 아니잖아요. 그리고 집안에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병이 아니라고요. 그런데 부모나 형제가 자존감이 떨어지게 만들어 버려요. 정신질환이라는 병식을 정확하게 안다면 그렇지 않겠죠.

그런데 대다수의 부모는 아이가 먹는 약 이름도 물어보면 잘 몰라. 내가 아프냐 이거야, 지가 아픈 건데. 그런데 이 아픈 사람이 어떤 병이냐면 뇌에 관련된 병이잖아요. 그렇다면 부모가 알아야 되고, 형제도 알아야 되고, 주변에 있는 가족들에게도 그걸 가르쳐서 편견을 깨야 하는데 사회의 편견만 자꾸 탓하고 있어요. 내 주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편견은 깰 생각은 안 하고.”

-마음이 힘겨울 때 어떤 방법으로 이겨내십니까.

권혜경 “제가 막내여서 의존적인 성격이 많았어요. 멘토나 친구들, 그 중에서도 날 잘 받아주는 애들만 골라서 전화를 해서 하소연하고 그래요. 그런데 남편이 그러더라고요. 당신은 나이 40 넘어서 엎어놓고 상담을 하고 있다고. 그러니까 나는 이러한 부분이 힘든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라는 조언을 구하는 게 아니라 무턱대고 전화해서 나 어떻게 살아야 되니 이러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방법은 옳지가 않구나 싶었죠. 왜냐하면 의존을 하면 그 안에서 또 다른 관계의 문제가 생기더라고요. 이거는 옳지가 않구나. 그렇다면 내가 나를 판단하고 나를 돌아보는 방법 중의 하나가 글을 쓰는 거더라고요. 글을 쓰면서 마음도 정리가 되고 신뢰감도 회복이 돼요. 그런데 마음 정리에 가장 빠른 게 뭐냐면 당사자들이 쓴 회복수기에요.

그게 그 어떤 어려운 책이나 유명 인사의 책보다 제 마음을 위로해주고 회복시키는 데 도움이 되더라고요. 일본 베델의집의 당사자 자기연구도 도움이 되고요. 또 서초열린세상에서 나온 책 '회복을 위한 자기관리(WSM)'도 많이 도움이 됐어요. 회복 고수들이 실천 노하우가 각 챕터마다 실렸는데 예를 들어 사회적 건강을 위한 실천방법의 영역에서는 그 영역에 맞는 인터뷰가 있어요. 정서 영역이라면 회복 고수들의 노하우가 실려 있는 챕터가 있어요. 이게 당사자들의 인터뷰잖아요. 너무 도움이 많이 됐어요.”

-당사자나 가족이 힘들 때 어떻게 극복해야 합니까.

이진순 “제일 좋은 방법은 가족은 가족에게 얘기하는 게 좋아요. 아픈 가족에게. 제일 친한 친구도, 친척도, 하물며 같이 사는 남편도 아이의 병을 엄마만큼 모른다면 환우 가족에게 말을 하는 게 좋아요. 일단 얘기를 하면 쉬운 말로 2박 3일로 모자라. 할 얘기가 너무 많은 거예요.

그래서 쌓여 있는 얘기를 환우 가족끼리 만나서 나누고 또 울고 하면서 이해가 되잖아요. 정신질환을 가진 가족끼리 만나서 얘기하는 게 가족 같은 느낌이 들어서 좋아요. 당사자도 마찬가지고. 제가 정신장애인 남편과 안 살았다면 권혜경 선생님을 이해를 못했겠죠. 그래서 들어주고, 또 언제까지나 들어줄 수는 없으니까 야단도 칠 때가 있고.

섭섭한 것도 느끼지만 어느 날은 ‘선생님, 그때 그래서 정말 섭섭했지만 그래도 이만큼 왔어요’ 할 때는 정말 안아주게 되죠.”

-어떻게 두 분은 아시게 된 겁니까.

이진순 “패밀리링크 8기 동기야. 그리고 제가 스터디를 시작할 때 같이 와서 공부를 하게 됐죠.”

권혜경 “선생님이 소규모 스터디를 시작하셨거든요. 큰아버지(이종수 씨) 돌아가시고 나서 보통 다른 사람은 이제 편하게 살겠다 하실 건데 선생님은 그 어떤 슬픔을 정신질환 환우 가족을 교육하는데 쏟았어요. 저희가 그때 2주에 한번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굉장히 집중적으로 공부를 했어요. 선생님이 밥을 다 사주시고. 한 과목을 공부를 하고 강의를 해야 하니까 시연(試演) 도 하고요.

‘사랑하는 사람이 정신질환을 앓을 때’라는 책이 있었어요. 그리고 ‘정신병인가 귀신병인가’ 하는 책도 있었어요. 그런 책을 가지고 공부했죠. 보통 많이 모일 때 한 여덟 명 정도. 스터디도 집중적으로 소그룹으로 한 게 도움이 됐던 거 같아요.”

이진순 “그러면서 지나온 얘기를 하고 위로도 해주고 했죠.”

-그럼 국가가 뭘 해줘야 합니까.

이진순 “제 입장에서는 교육인 거 같아요. 산간벽지에라도 정신질환 가족이 없다면 감사한 일이잖아요. 그런데 한 가족이라도 있다면 국가는 의무교육을 시켜줬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초발이 생기고 급성기가 있잖아요. 그리고 중증으로 넘어가잖아요. 그럼 초발 때 정신질환에 대한 교육이 있다는 걸 알아서 부모님이 교육을 받는다면 급성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초발 쪽으로 내려와요. 절대 중증으로 안 넘어가요.

중증으로 넘어가게 되면 정말 힘들어지잖아요. 가족도 힘들지만 아픈 당사자는 더 힘들어. 그런데 부모가 이 병을 안다면 이 병의 문제는 사회와 가족의 문제라는 걸 알게 돼요. 외모는 변화가 없잖아요. 행동과 생각에 문제가 있지.”

권혜경 “외모도 살이 찌고 이렇게 어눌해 보이게 되잖아요.”

이진순 “일단은 부모가 병이라는 걸 알아야 돼요. 우리 아이는 어떤 약을 먹고 그 약을 왜 먹어야 되는지를 알게 되면 아이하고 대화가 되는 거죠. 그래서 저는 긍정적인 대화를 당사자랑 했으면 좋겠어요."

 

(c)마인드포스트.
(c)마인드포스트.

-우리가 보건복지부에 무엇을 요구해야 합니까.

이진순 “가족에게 필요한 교육. 당사자와 사는데 필요한 교육을 시키라는 거죠.”

권혜경 “그런 표준 교육을 지금 정신건강복지센터별로 표준화된 교육이 동일하게 이뤄지게끔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진순 “지금은 보건복지부 정책과에서 보건복지인력개발원이라는 데 교육을 위탁해 교육을 하고 있거든요. 교재가 계속 나오고 있어요. 이게 표준화돼서 전국적으로 교육이 이뤄졌으면 좋겠어요.”

권혜경 “우리가 지금 국가 교재가 없고 가족에게 국가 교육이 없어요. 그 교육을 패밀리링크 교재처럼이라도 만들어줬으면 좋겠어요. 당사자로서 국가에 원하는 건 제가 서울광역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정말 훌륭한 동료지원가 교육을 받고 있어요.

제가 알기로는 9월에 면접과 서류준비를 하고 10월에는 취업과 연계되게끔 한 대요. 취업과 연결되는 프로그램이어서 굉장히 좋아요.

저도 교육을 4시간 정도 하게 되는데 서울에서만 하지 말고 지역적으로 확산이 되면 좋겠어요. 유치할 수 있지만 사람들이 집집마다 두 마리 개(犬)를 키운대요. 편‘견’과 선입‘견’이라는 두 마리 개를 키우고 있대요. 그런데 그 개를 잡아먹는 개가 있는데 그게 백문이 불여일‘견’이래요. 그러니까 치료가 돼서 당사자를 돕는 당사자를 보여준다면 그것만큼 사회 인식이 좋아지는 게 없다는 거죠.

그런데 우리 일반인들은 아닌듯하지만 조현병하면 다 안인득(지난 4월 경남 진주의 한 임대아파트에서 42세의 거주민 안인득이 자신의 아파트에 불을 지르고 화재를 피해 나오던 주민들에게 흉기를 휘둘러 15명의 사상자가 난 사건-편집주)처럼 생긴 걸로 알 게 아니에요. 좋은 이미지, 치료받은 이미지, 열심히 일하고 있는 이미지를 보여줘야 된다는 거죠. 그거에 가장 좋은 모델이 일차적으로 동료지원가다. 이차적으로는 동료지원가 하나만으로는 직업군이 약해요.

직업재활서비스를 조금 더 욕구조사를 해서 정말 모든 정신장애인 당사자가 종이접기를 좋아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욕구조사를 확실히 해서 많은 직업군을 개발하고 사람에게 투자를 해야죠. 창의성이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그런 통로를 만들어줘면 좋겠어요.”

이진순 “저는 안인득 사건이 그 부모가 아픈 아이의 병을 알고 약을 지속적으로 챙겨주고 했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산간벽지에라도 정신질환자가 한 분이라도 있다면 가족 교육을 시키라는 거예요. 교육을 통해 부모가 병을 인식해야 된다는 거죠.

제가 2017년에 인권으로 보건복지부장관상을 탔어요. 그걸 받으면서 조금 부끄러웠어요.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이런 걸 받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국가가 가족에게 가족은 또 국가에게 꼭 필요한 거를 서로가 요구를 했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아이가 오랫동안 아프니까 경제적으로 집안이 어렵겠지만 무턱대고 국가는 뭐하냐 하지 말고 국가가 할 수 있는 계획안을 넣어서 받아냈으면 좋겠어요.”

-정신장애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한 이 세계를 향해 무슨 말을 해 주고 싶습니까.

이진순 “정신병이라는 건 무조건 무서운 병이라는 거라잖아요. 왜 무서운 거예요. 편견을 가진 사람들에게 묻고 싶어, 왜 무서운데? 정신장애인들이 살아갈 수 있는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아프지 않은 사람들도 앞장서 줬으면 좋겠어요. 왜 아픈 사람들은,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은 가족끼리만 뭉치고 있어야 되냐 이거죠. 이 병이 전염병이냐고요.

옛날에는 옆집에 결핵환자가 있으면 어디 병원이 좋다더라, 어디 가면 무료라더라 하고 정보를 전달해줬어. 그런데 왜 정신병은 옆집에서 전달이 없어? 무서워 피해 다녀. 왜 피해 다니는 건지.

제가 나미(NAMI·전미정신장애연대) 아틀랜타 지부에 간 적이 있어요. 거기서 한 당사자가 자기가 여기서 최고래. 그래서 담당자한테 왜 저 사람이 최고냐 물었어. 그랬더니 동료지원가로서 최고래. 자기가 3형제인데 언니와 남동생이 있고 엄마, 아버지 계신데 집에서 7~8년을 보냈대. 그래서 병원을 들락날락했는데 어느날 엄마가 나미 가족교육에 갔다와서 많은 사람들이 아프다는 걸 알게 된 거야.

그래서 가정을 변화시켜야겠다 생각하는 마당에 애가 재발해서 병원에 갔대. 그때 간호사가 그 아픈 애를 보고 ‘너는 어떻게 내가 보고 싶어서 좀 와라 할 때까지 못 기다리냐’ 그렇게 말했대. 그 애가 내가 환자고 아파서 왔는데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하지 생각했대요.

다음날 간호사가 그 애를 불러서 내 말에 상처받았니? 앉아서 얘기 좀 하자. 나는 네가 이렇게 올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너한테 뭘 잘못해 줘서 얘가 또 왔나. 그랬더니 아이가 정신이 번쩍 들더래요. 나도 여기 병원에서 시키는대로 안 했다. 나도 잘못이 있다. 그래서 나도 이제 당신이 오라고 할 때까지 밖에서 생활하겠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 물었대요.

그래서 간호사가 동료지원가 프로그램을 소개시켜 줬어요. 그래서 그걸 열심히 하면서 몇 년 동안 한 번도 입원한 적이 없고 오히려 자기가 간호사를 만나러 가고 바깥에서 만나 차도 마시고 한 대요. 우리나라는 왜 그런 제도가 안 되냐 이거죠.

제가 인권강의를 하면 그 얘기를 해요. 여기 병원 종사자들도 계시고, 의사도 계시고, 정신보건사회복지사도 계시지만 조금만 더 관심을 베풀어주시고 조금만 더 사랑을 베풀어주시고 이해를 해 주신다면 가족과 당사자는 사회에서 일원이 돼서 자존감을 갖고 살지 않을까 하고요. 우리는 자꾸 필요없는 자존심만 늘어나는 거예요. 자존감이 늘어날 수 있는 건 여러분의 힘도 필요하다고 말해줘요.”

권혜경 “카나리아라는 이론이 있대요. 광부들이 광산에 갈 때 카나리아를 들고 간대요. 카나리아가 광산 안에 환경을 가장 먼저 감지해서 카나리아가 거기서 죽으면 사람들이 들어가지 않는대요. 그런 것처럼 정신장애인은 이 사회의 카나리아 역할을 한다고 봐요.

이 사회가 얼마나 각박하고 경쟁이 심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잔인함을 제일 먼저 감지하는 게 정신질환자이지 않을까. 정신질환자들이 많아진다는 거에 대해 그걸 단지 네가 문제야, 네가 집에만 조용히 있으면 돼, 다 성공하면서 잘 살고 있다는 식으로 바라보지 말고 왜 정신질환이라는 사회 문제가 생기고 정신건강에 어려움을 겪는 청년들이 많을까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하지 말고 우리 사회의 문제는 아닐까라고요. 정신건강의 중요성을 알고 우리 사회가 정신건강을 위해서 좀 더 힘써야 할 부분은 없나, 그런 넓은 시각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이진순 “패밀리링크 교육을 받아왔는데 10년 동안 제대로 업그레이드 된 교육이 없어서 복지부를 찾아갔고 그동안의 패밀리링크의 과정을 정책과에다 말씀을 드려서 2017년부터 4가지 교육이 이뤄지고 있어서 그나마 감사해요. 그리고 국립정신건강센터가 가족지원활동가 양성과정의 실습과정을 맡아서 시범적으로 해주신다는 것에 대해서 정말로 감사한 마음이 들어요. 작은 시작이지만 그래도 국가가 노력해주는 것에 대해 감사하고 가족들이 이런 정보를 알고 교육을 차근차근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인터뷰가 끝난 이후 아주 길게 더 수다를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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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랑제수민 2019-09-02 07:33:40
패밀리링크 두분 리더에게 박수 보냅니다. 늘 따뜻한 말로 당사자들 북돋우며 각 단체 기관들이 일할수 있게 돕는 모습도 고마왔습니다.

당사자가 손내밀면 가족 패밀리링크 손잡아주고 의사들 치료자들 종사자들 복지요원들 이어이어 감사의 세상 만들기를 기대합니다.

단체마다 헐뜯고 손가락질 말아야죠 뭉쳐도 위에서는 비웃고 조롱하는데, 약자끼리 지지고볶고 안되죠, 돈보다는 사람, 최고약자 당사자중심 연대 그리고 당사자중심의 문화가 만들어져야겠어요.

겸손 섬기는 리더들이 많아지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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