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기호 “사진은 내가 바라보는 세상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거예요”
권기호 “사진은 내가 바라보는 세상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거예요”
  • 박종언 기자
  • 승인 2019.09.17 23: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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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겸 사진작가 권기호 씨 인터뷰
척박한 땅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의지 촬영하고파
풍경 속으로 들어가야 하나의 사진작품 나올 수 있어
사진 찍는 정신장애인 동호회 있으면 언제든 도울 것
올해 5회째 사진전 준비…수익금은 정신장애단체에 기부
조울증 안내서 보고 자신의 병을 정확히 인식하게 돼
역경이 지나가니 편안한 밝음이 무지개처럼 찾아와
정신적 장애 결혼 파트너에게 알리고 이해 구해야
글을 쓴다는 건 사유를 밖으로 끄집어내는 작업
규칙적인 생활하고 할 수 있는 스스로 찾아야
인간은 모두 소중한 존재…서로 존중해야
박종언의 만남: 길을 묻다 (c) 마인드포스트
박종언의 만남: 길을 묻다 (c) 마인드포스트

고등학교 때 문학반에 들어갔다. 시(詩)는 그렇게 운명처럼 찾아왔다. 학력고사 시절, 국문과를 지원했지만 떨어졌다. 후기에는 국문과를 포기하고 경영학과를 지원해 합격했다.

시를 피했다. 그렇지만 대학에는 ‘어김없이’ 문학동아리가 있었다. 리얼리즘이 문학의 모든 접경을 선점했던 시절, 그가 쓴 시들은 선배들의 말 그대로 ‘순수시’였다. 문학을 피하기 위해 대학에 들어갔다가 그는 다시 문학과 조우하게 된다.

박노해를 필두로 시를 읽기 시작했고 80년대 후반의 그 시절을 사회과학 서적 속에서 살았다. 5학년까지 다닌 후에야 대학을 졸업을 한 그는 시나리오를 하고 싶어서 시나리오 학원을 찾았고 영화를 하고 싶어서 독립영화협회 단체에도 가입해 활동했다. 여전히 삶의 안개는 불투명하게 자신을 둘러쌌다.

사진을 해야겠다는 건 그 즈음에 든 생각이었다. 1990년대 후반에는 웨딩사진이 피크를 이룰 때였다. 결혼을 하면 야외에 나가서 포즈를 잡고 사진을 찍는 시절에 그는 웨딩 스튜디오에서 사진사로 밑바닥부터 배워나갔다. 그리고 삶의 물결이 치는 대로 살았다. 30살에 결혼해 아이 하나를 두었다.

사람들과 힘을 합쳐 사진 스튜디오를 차렸지만 여전히 삶은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서울 아현동 이대 드레스 거리에서 사진관을 차렸지만 먹고 살기에도 빠듯했다. 그 무렵 아내와 이혼했다. 그리고 조울증이 찾아왔다. 그는 그게 무슨 병인지도 몰랐다. 사람들에게 무조건 전화를 걸었고 경제적 사정을 생각하지도 않고 차까지 샀다.

병원에 입원한 후에야 그는 ‘내가 왜 그랬을까’라는 인지를 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담당 의사가 조울증에 관련된 포스터 하나를 건넸다. 읽어보니 자신이 겪고 행동하는 것과 그대로 포개졌다. 아, 이게 조울증이구나. 30대 후반에 병을 인지하면서 후배가 점장으로 있는 문고점에 가서 일을 시켜달라고 부탁했다.

다행히 일을 할 수 있었고 그런 과정 속에서 현재의 아내를 만났다. 술을 마시고 사귀자고 말했다가 이튿날 다시 전화를 걸어 만나지 말자고 말했다. 아내는 그를 이해했다. 둘은 그렇다면 100일만 사귀어보자는 말을 했다. 그리고 결혼하게 된다. 그는 현재 사진작가로, 활동보조사로 활동하고 있다. 곧 사진전시회도 할 예정이다.

지금까지 모두 4차례의 사진전을 열었고 그 수익금은 모두 정신장애인 단체에 후원했다. 그리고 잃어버렸던 시도 다시 쓰기 시작했다. 옛날 불교의 선사들은 눈 온 길을 함부로 걷지 말라고 했다. 그 뒤를 누군가가 따라갈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였을까. 그의 시에는 ‘길’이라는 시어가 유난히 많았다.

길은 개척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이미 만들어진 길을 따라가는 것일까. 그가 앞서 걸어간 길은 정신장애인 누군가가 따라서 발을 내디딜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길을 만든다. 집단적 길이면서 개인의 길인 그 길을. 길은 애초에 없어도 누군가가 걸어가면 길이 되는 것이다.

그가 겪어온 조울증과 삶과의 불화. 그리고 그 슬픔을 넘어선 이후 깨닫게 된 사소한 것에 대한 감사와 행복. 그가 만든 길은 그랬다.

시 쓰는 사진작가 권기호(49) 씨를 서울 봉천동 한 카페에서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사진작가 권기호 씨 (c)마인드포스트.
사진작가 권기호 씨 (c)마인드포스트.

-정신장애인 사진작가가 아닌 그냥 ‘사진작가’로 불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제가 정신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사진을 찍는다가 아니라 그냥 나는 사진을 하는 사람으로 되고 싶다는 거죠. 내 존재를 어딘가에 국한시키는 게 아니라 사진가 아무개가 되는 거죠. 한계를 두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작품의 주제가 ‘풍경’이 많더군요. 풍경은 어떤 의미입니까.

“그냥 삶의 풍경이죠. 제 사진이 보면 꽃을 찍든 뭘 찍든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요. 작품 하나하나에 촬영한 이유가 분명히 있어요. 그리고 내가 선택해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의미가 있죠. 시멘트 바닥에 핀 해바라기 한 송이.

그건 소외받는 사람들에 대한 것들이고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으려는 생명의 의지를 포함하거든요. 그게 사진적으로는 아름답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나는 그런 사진을 찍을 거예요. 계속.”

-2013년 한국장애인사진협회 주최 사진 공모전에서 ‘집념’이라는 작품으로 동상을 받았습니다. 사진 속에 사지마비 여성 장애인이 입으로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는 찰나를 잡았더군요. 인간의 집념이 참 강하고 무섭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권기호 作 '집념' (c)마인드포스트.
권기호 作 '집념'

“그 분은 제가 잘 아는 분이에요. 저의 아내도 활동지원사를 하고 있는데 그 이용자예요. 2010년에 만났는데 그때 양재동에 살고 있었어요. 내가 아내를 차로 데려다주고 하니까 알게 됐고 친해졌죠. 그런데 그 친구가 그림을 그릴 줄 안다는 거예요. 깜짝 놀랐죠. 무슨 그림이냐 그랬더니 보여주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진을 찍는데 햇살이 얼굴 쪽으로 해서 이렇게 들어오는 거예요. 그 모습을 100 컷 이상 찍었죠. 그 중에 하나를 골라서 냈는데 동상을 받았죠.”

-로버트 카파(헝가리 출신의 종군기자)가 얘기했죠. “사진이 불만족스럽게 나온다는 것은 당신이 그 풍경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요. 동의하십니까.

“어떤 의미로는 동의해요. 저는 그 속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글도 마찬가지인데 외부에서 쓰는 거와 그 속에 들어가서 쓴 거와는 천지차이에요. 옛날에 학생운동할 때 ‘현장 속으로’라는 슬로건이 있었잖아요.

그 당시에 박노해 시인, 백무산 시인, 김남주 시인 이런 분들이 다 현장에 들어가서 시를 썼어요. 외부에서 볼 때랑 실제로 들어가서 볼 때랑 틀려요. 저의 ‘집념’이라는 사진도 제가 그 친구와 모르는 사이였으면 그런 사진이 안 나왔을 거예요.”

-사진은 동적(動的)이면서 한편으로 정적(靜的)인 풍경을 카메라에 잡지 않습니까. 그 찰나를 통해 영원을 꿈꾸는 게 사진일까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사진 찍을 때 같은 장소를 세 번 네 번 이상 가요. 똑같은 장소를 똑같이 돌아요. 계절마다 틀리죠. 어느 날 홍대 안에서 사진 찍은 적이 있는데 담쟁이가 너무 예쁘게 폈어요. 그런데 다음 년도에 가니까 없더라고요. 내가 봤던 그게 아냐.

그러니까 그 순간에 있을 때 카메라를 들이대서 찍어야지 며칠 있다 와서 찍지 뭐 그러면 그 다음에 가면 그게 없어요. 그 느낌도 없고. 그런 걸 알고 있어서 저는 사진 찍을 때 카메라가 없으면 핸드폰으로 무조건 찍어요. 눈에 보이는 대로.

저는 출사(사진 찍으러 나감)를 혼자 하는데 마음먹고 카메라 메고 사진 찍으러 가면 한 컷도 못 건질 때가 있어요. 찍긴 찍어요. 그런데 다 버려요. 그런데 우연히 어딜 가다가 딱 바라봐서 찍은 사진들이 더 전시를 많이 했던 거 같아요.”

-사진을 통해서 깨달은 삶의 의미가 있습니까.

“처음에 저의 사진은 영업 사진이 대부분이었는데 매형이 작품 사진도 찍어보라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때는 돈도 안 되는데 찍어서 뭐해요라고 생각했어요. 재발해서 이후 구로구공동희망학교를 다녔는데 거기서 사진을 다시 시작한 게 큰 성과였어요.

제 인생에서 사진은 많은 부분을 차지해요. 왜냐하면 내가 바라보는 세상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거거든요. 나는 이렇게 세상을 바라보는데 당신은 어떻습니까. 그런 거죠. 풍경 사진을 많이 찍는 이유는 그 풍경 속에 내 느낌이 들어가 있어요. 풍경이라고 해서 다 찍는 게 아니라 내 눈에 들어오는 걸 찍잖아요. 그런 걸 선택해서 찍어요.”

-정신장애인들 중에 사진을 취미나 여가 생활로 즐기는 이들이 많은 편인가요.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에는 거의 없는 거 같아요.”

-사진 찍기를 여가로 즐기는 정신장애인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습니까.

“저는 얼마든지 시간 맞춰서 같이 찍을 의향이 있죠. 배우고 싶다는 사람이 있고 동아리가 형성되면 전 언제든지 ‘콜’이죠. 내가 알고 있는 걸 다 줄 수 있어요. 요즘에는 제가 핸드폰 사진 강의를 하고 있어요.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하고 있는데 반응이 좋아요. 핸드폰 카메라 성능이 계속 좋아지니까 핸드폰으로 찍어도 충분히 A4용지 두 배 크기만큼은 얼마든지 사진이 잘 나와요. 그래서 그걸로 찍으면 돼요. 저는 얼마든지 도울 용의가 있어요.”

사진작가 권기호 씨 (c)마인드포스트.
사진작가 권기호 씨 (c)마인드포스트.

-올해 사진전이 5회째입니다. 사진전을 갖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2011년부터 조금씩 카메라 들고 다니면서 풍경을 찍어놓은 게 있어요. 이게 모이다 보니까 전시회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엄두가 안 났어요. 구로장애인자립생활센터 국장님이 도와줄 테니까 한번 해 봐라 해서 한 거예요. 아내도 해 봐라 해서 하게 됐는데 전시회에서 팔아야 되는데 누가 사겠냐. 후원으로 하자고 입장을 정리했죠. 정신장애인 단체에다가 후원을 하자. 재료비 빼고 나머지 금액은 얼마가 됐든 간에 후원을 하자. 그렇게 해서 하게 된 거죠.”

-한 번 전시회 하면 후원금은 얼마 정도 모입니까.

“이게 들쑥날쑥한데 40만 원이 될 때도 있고, 30만 원이 될 때도 있고, 20만 원 될 때도 있고 그렇더라고요.”

-사진전을 가지면 자존감이 올라간다고 했는데 이는 일에 대한 성취감의 의미입니까.

“그렇죠. 나는 사진하는 사람이다, 그걸 다시 한 번 나 스스로 확인받는 거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도 확인을 받고.”

-어두움이 있는데 밝음이 있는 사진을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제가 그런 얘기도 했어요(웃음). 아까 해바라기 사진을 얘기했듯이 삶에 대한 강한 의지, 혹은 역경을 조금씩 극복하려는 모습을 보면 카메라가 가요. 거기에 카메라가 가 있어요.

저도 살아온 과정이 평탄하지 않았잖아요. 그 힘든 시간을 지내고 견뎌내니까 또 밝음이 나한테 무지개로 오더라고요. 구로구공동희망학교 다닐 때 절망적이었어요.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그랬는데도 그 시간을 견디고 나니까 할 수 있는 일이 생기고 사진도 하게 되고 그러다보니까 너무 좋은 거예요. 그런 측면에서 말한 거예요.”

-조증과 울증을 넘나드는데 조증과 울증 중 어느 시기가 더 어렵습니까.

“조증요. 기분이 떠 있으니까 위험하죠. 목소리 커지고 돈 쓰는 것도 기분이 좋으니까 막 쓰게 되고요. 조증일 때 위험하죠.”

-울증 때는 어떻습니까.

“울증일 때는 가라앉아 있으니까 사고를 안 치는 거죠.”

-조울증이라는 질병을 어떻게 인식하게 됐습니까.

“처음 병원에 입원했을 때 조울증 증상이 담긴 안내지를 봤어요. 그때 정확하게 알았죠. 기분 좋을 때는 자신감으로 들떠있고 울증일 때는 집안에 처박혀 있다든가 하는 증상이 그대로 나와 똑같았어요.

그런데 두 번째 재발했을 때는 상상을 못했어요. 망상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내가 국가권력 기관에 취업을 하기 위해서 테스트를 받는다. 모든 게 다 테스트라는 망상이었죠. 그때 약을 십 개월 동안 끊었어요. 망상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조증이 올지 알았지 망상이 올 줄은 몰랐죠.”

-조증하고 망상하고 거의 비슷한 게 아닌가요.

“틀리죠. 망상은 내 생각 체계를 만들어서 거기에 따라 움직이는 거고 조증은 기분이 좋거나 돈을 많이 쓰거나 사람들에게 전화를 많이 하는 특징들이 있어요. 저는 그런 특징이 아니었기 때문에 망상이라고 생각도 못했어요. 그렇다고 제가 겪은 얘기를 사람들한테 할 수가 없잖아요. 말하면 미쳤다 그러죠. 나는 사실인데 다른 사람은 미쳤다고 얘기할 거 아니에요. 그래서 끝까지 그 얘기를 못 했어요.

나중에 구로구공동희망학교 가서 알고 있는 분을 만났는데 얘기하다가 그게 다 망상이다 하더라고요. 허무했죠. 망상 때문에 지방도 돌아다녔어요. 지방의 조상 묘지를 찾아간 적도 있어요. 그게 국가권력 기관에 들어가기 위한 테스트라고 생각한 거예요.

나중에는 환시(幻視)까지 왔어요. 할머니 산소에 찾아갔는데 산소가 없어졌어. 그리고 묘비명에 내 이름과 전(前) 부인 이름이 씌어 있는 거야. 나중에 형 얘기 들어보니까 할머니 묘소는 잘 있다는 거예요. 나는 영화 뷰티풀마인드 존 내시처럼 (환시를) 봤으니까 그게 사실이라고 생각을 했죠. 혼자 여관도 찾아가고 혼자 버스 타고 다니고. 그러니까 정신은 그 망상 체계만 있지 나머지는 다 현실적이잖아요.

기차를 타고 가든, 버스를 타고 가든 그걸 하는 거예요. 그러다가 어느 여관에 가서 끝났다고 생각을 했는데 아무것도 안 끝난 거예요. 다시 집에 왔죠. 다 끝나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니까 도저히 안 돼서 정리를 했죠. 서류를 보고 책자를 보고 정리를 쭉 해서 이게 아닌가 보다 생각한 거죠.

그래서 A문고에 다시 취업을 했는데 이틀을 못 버텼어요. 머리가 안 돌아가요. 다 잊어먹은 거야. 옛날에 캔버스 팔고 했던 것들을 다 잊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난 못 다니겠다고 죄송하다고 하고 나왔죠.”

-권력자가 되겠다는 것 외에 다른 망상도 있었습니까.

“망상은 아니고 A문고에서 일할 때인데 한 손님한테서 엄청난 기(氣)가 막 느껴져요. 그 손님한테 다가가서 불편한 거 있으세요라고 물었어요. 왜냐하면 내가 힘드니까. 가슴에 막 꽂히는 거야. 그래서 도망나왔어요. 그만두겠습니다 하고 사표를 제출한 게 아니라 그냥 탈의실 와서 가방 들고 집으로 왔어요.

그때는 모든 게 다 걱정이야. 캠프를 가는데 신발하고 양말을 가져가야 하는데 그걸 가져가는 것도 걱정이 되고 불안감이 와서 못 가져가겠어요. 이해가 안 가지. 불안도가 올라오면 걱정이 계속 걱정을 낳아. 그러다가 이걸 펑 놓아버리는 거야. 그래서 집에 갔어. 집에 가서 아내한테 회사 못 다니겠다 하니까 못 다닐 줄 알았다고 그러더라고.”

사진작가 권기호 씨 (c)마인드포스트.
사진작가 권기호 씨 (c)마인드포스트.

-증상이 나타나면 어떻게 대처하십니까.

“저 같은 경우는 조증 증상이 나타나면 일찍 일어나요. 특징이 새벽 3~4시에 일어나요. 그때는 어떻게든 자려고 해요. 자고 나면 괜찮으니까. 우울은 별로 없었던 같은데 어쨌든 간에 내가 기운이 가라앉아 있으면 밝은 음악을 들어요. 좋아하는 음악을 유투브에서 찾아서요. 50~60년대 음악도 듣다가 목포의 눈물 등으로 거슬러 올라가. 요즘은 한국 재즈를 듣는데 어떤 사람 노래는 마음이 편안하더라고. 그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편해져요.”

-정신장애가 발생하면 가까웠던 인적 네트워크가 다 끊겨버립니다. 그리고 정신장애인을 중심으로 새로운 인연들이 만들어집니다. 선생님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저는 사진할 때 함께 했던 사람들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요. 직장 다닐 때 사람들도 그렇고. 대학 문학 동아리 때 만난 친구들은 지금도 만나고 있어요. 고등학교 친구 한 명하고 대학교 친구 세 명 정도 만나고. 장애인 쪽에서 한 둘, 정신장애인 쪽에 한 둘.”

-그만한 관계에 만족합니까.

“네. 저는 더 이상 관계를 만들고 싶지도 않아요. 만들어지면 만들어지는 건데 별로 내가 나서서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그냥 있는 사람으로 충분하고 그 관계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아내는 비정신장애인입니다. 이런 결혼도 흔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죠. 아내는 내가 나랑 사귈 때 제가 조울증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제가 다 밝혔죠. 내가 상태가 좋다고 생각했을 때는 거의 비정신장애인이라고 생각을 하고 만났는데 아내는 나중에 아니었다고, 장애인처럼 보였다고 얘기하더라고요.”

-벚꽃 아래에서 청혼을 하셨다고.

“아닙니다. 사귀자는 말은 편의점 파라솔에서 얘기했죠. 내 병이 있고 애도 있고 그렇다. ‘나랑 사귈래’ 말했어요. 그 다음날 술 먹고 깨서 바로 정신 차리고 나서 우린 안 되니까 만나지 말자 그랬죠(웃음). 그랬더니 100일만 사귀자 얘기를 했어요. 다 필요 없고 100일만 만나보고 결정하자. 그렇게 해서 자연스럽게 결혼하자 얘기까지 한 거죠.”

-아내는 선생님의 질병을 이해하고 도움을 많이 주는가요.

“그렇죠. 제가 재발했을 때 조울증에 관해서 책을 사더니 쭉 보더라고요. 나를 알게 모르게 관찰을 하고 있다고 봐야죠.”

-정신장애인이 결혼을 할 때 자신의 병을 상대방에게 알려야 합니까.

“알려야죠. 알리지 않으면 안 좋아요. 그게 빌미가 돼서 깨질 확률이 많아요. 그리고 증상이 오면 대처를 해야 되는데 그걸 알게 되잖아요. 알게 되면 왜 속였냐 이렇게 되는데 요즘 같은 세상에 굳이 같이 살려고 하겠어요. 남자건 여자건 간에.”

-시를 쓰고 있습니다. 시와 사진은 어떤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시와 사진은 함축미가 똑같은 거 같아요. 그것을 글로 보여주느냐 아니면 사진으로 보여주느냐의 차이인 거 같아요. 그리고 내가 정확하게 의도하는 걸 하는 게 똑같아요. 주제가 있으면 그 주제에 맞게 자기가 알아서 취합 선택해서 만들어 내는 게 똑같아요.”

사진작가 권기호 씨 (c)마인드포스트.
사진작가 권기호 씨 (c)마인드포스트.

-정신장애인 당사자가 취미를 갖는 것은 회복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좋죠. 사진이 아주 좋죠. 왜냐하면 사진 찍으러 가면 자연과 함께 있잖아요. 나무도 보고 풀도 보고 꽃도 보고 강물도 보고 계곡도 보고 연못도 보고. 도심을 빠져나가 자연을 보니까 일상생활의 환기를 시켜주잖아요. 그러면 아주 힐링이 되죠. 그리고 자신이 찍은 사진이 있으면 인스타그램에도 올리고 페이스북에도 올려도 되고요.”

-사진 취미 외에 다른 취미는 어떻습니까.

“저는 글 쓰는 걸 추천해요. 글 쓰는 거는 자기 상태가 정확하게 나와요. 내가 글 쓸 당시에 머릿속에 있던 게 그대로 물화(物化)가 되거든요. 그대로 나와 있기 때문에 내 생각을 정확하게 알 수가 있죠.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끄집어내는 거니까. 차 있는 걸 끄집어내고 하다 보면 머리가 비잖아요. 머리가 비면 아주 편안한 상태가 와요.

저는 고통스러울 때 시를 많이 썼어요. 처음 발병하고 한 달 사이에 시를 백 편 정도 썼던 거 같아요. 그게 다 끄집어져 나온 거예요. 병원에 있을 때도 막 썼거든요. 연필로 담뱃곽에다가도 쓰고. 그런데 그걸 다 잃어버렸어요. 아깝죠. 되게 중요한 기록인데. 그러니까 글을 쓴다는 건 사유를 밖으로 끄집어내는 역할도 하고 며칠 뒤에 봤을 때 아,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하는 걸 알 수가 있거든요.”

-조증에 대한 예방도 되겠네요.

“될 수 있을 거 같아요.”

-생활비는 어떻게 충당하고 있습니까.

“활동지원사를 하고 있어요. 아내가 또 돈을 벌고 있으니까. 아내는 활동지원사 교육강사를 하고 있어요.”

-정신장애인에게 회복의 한 조건은 취업입니다. 그런데 취업률은 전체 장애계에서 꼴찌입니다.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까요.

“정신장애인에 대해 인식이 안 좋은데 국가가 인식 개선을 해서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방법밖에 없는 거 같아요. 사기업(私企業)에서 하기에는 힘들잖아요.”

-정신장애를 겪지 않았다면 선생님의 삶은 어떻게 진행됐을 거 같습니까.

“지금보다 더 못 지냈을 거 같아요.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그렇게 구성돼 있잖아요. 돈 많고 좋은 직장 다니고 자녀 교육 잘 시키고 유학 보내고 하는 사회적 기준에 끌려다니며 살지 않았을까. 그래서 불행해하지 않았을까.”

-지금은 행복하십니까.

“지금은 행복해요. 지금 하고 싶은 사진도 있고 글도 있고 일도 있고.”

-사소함 속에서 행복이시네요.

“네.”

-깨달은 겁니까.

“아니, 깨달은 건 아니고(웃음).”

-선생님의 시에서 ‘길은 원래 길이 없다고 길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거’라고 적었습니다. 정신장애인은 그 길을 찾기 위해 너무 많은 고통을 지불해야 합니다.

“(웃음) 맞아요. 그러니까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라든지 현장에서 활동하는 분들이 있잖아요. 그분들이 잘 합심해서 길을 만들어야 하지 않나 생각해요. 중요한 이슈는 같은 마음 아니겠어요.”

-정신장애인이 자기 삶을 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기 노력이 있어야 해요. 일단 규칙적인 생활을 스스로 만들어야 되고요. 그리고 좋아하는 걸 찾아야 되고 그 다음에 찾아야 돼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그걸 해 나가는 방법밖에 없는 거 같아요.”

-돈에 상관없이 일을 해야 된다?

“돈도 중요한데 일단 일을 먼저 해야 돼요. 무슨 일이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게 중요해요. 그걸 하다가 일이 숙련이 되면 월급도 올라가는 거겠죠. 단숨에 뭘 내가 뭘 하겠다? 안 되죠. 기본이 안 돼 있는 상황에서 어딜 들어가 봐야 일주일도 못 가요.

저 같은 경우는 체력 키우려고 석 달 동안 산에 올라갔는데 그게 도움이 됐거든요.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면 좋겠죠. 정신재활시설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고요. 거기에서는 취업 연계도 있으니까. 장애등록이 돼 있으면 그렇게 찾아가는 방법도 있죠.”

-살아보니 인간은 어떤 존재 같습니까.

“누구나 다 소중한 존재예요. 인간적으로 모든 인간이 존중받았으면 좋겠어요.”

사진작가 권기호 씨 (c)마인드포스트.
사진작가 권기호 씨 (c)마인드포스트.

-삶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습니까.

“목표는 소박한데 시집 한 권 냈으면 좋겠고요. 전시회는 계속 잘 유지됐으면 좋겠고요.”

-선생님은 치유된 겁니까, 아니면 치유의 길을 여전히 걷고 있는 겁니까.

“치유의 길을 걷고 있는 거죠. 저는 아직도 증세가 있고 외부적인 충격에 대해서 상당히 조심하거든요. 사람을 많이 안 만나려는 이유도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과 어떤 일로 부딪히게 되면 그게 계속 나한테 남아요.

내 증상인지 내 사고 구조인지 모르겠는데 그런 감정이 계속 남아서 나를 괴롭혀요. 그래서 사람을 최대한으로 줄여서 만나요. 제가 현재 하는 일을 그만둘 나이가 돼서 그만두면 회복됐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완전 회복은 없어요. 회복되어 가는 과정인데 완전 회복은 없다는 거예요.”

-정신장애인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을 좀 찾아보고 그걸 우선 열심히 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하다보면 본인도 안정화가 되고요. 절대로 혼자라고 생각하지 말고 동료들을 만나고 얘기하고 같이 뭔가 해보다 보면 회복의 길로 오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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