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문영 “신(神)은 무능해요…하지만 위대해요. 왜냐하면 우리 고통을 경청(敬請)하잖아요”
남문영 “신(神)은 무능해요…하지만 위대해요. 왜냐하면 우리 고통을 경청(敬請)하잖아요”
  • 박종언 기자
  • 승인 2019.11.12 21:35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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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영 감리교신학대 종교철학과 학생 인터뷰
어린 시절의 집단따돌림과 가정 불화가 우울증 심화시켜
신학은 소수자·약자 위한 목회자 되고 싶어 선택
조현병 약도 축복?…반쯤 죽어가는 느낌인데 축복?
신의 이름으로 우울증 낫는다는 건 동의할 수 없어
정신질환 통해 사회적 약자의 낮은 자리를 체험해
사회의 억압적 시스템은 약자인 여성들을 상처입혀
직업재활프로그램 다양화해서 취업 문 넓혀야
혼자만의 목소리 아닌 다양한 사람과 연대해야
부끄럽지 않은 삶 살고 싶어…연대에 힘 기울일 것
박종언의 만남: 길을 묻다 (c) 마인드포스트
박종언의 만남: 길을 묻다 (c) 마인드포스트

태어나서 여덟 살 될 때까지 그는 외할머니 집에서 자랐다. 가끔씩 어머니와 아버지가 찾아왔지만 아주 짧은 대화 후 그렇게 떠나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비로소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됐다.

그렇지만 그 초등학교 시절이 그에게는 ‘지옥(地獄)’이었다. 아이들은 그를 ‘왕따’시켰고 집단적으로 괴롭혔다. 한번은 괴롭히던 친구에게 돈 5만 원을 빼앗겼고 이를 담임선생님께 말했지만 선생님은 가해자보다 피해자인 자신을 나무랐다.

집에 오면 위로받고 싶었지만 부모님은 늘 부부싸움만 했다. 우울했다. 그 우울감이 오래 지속되고 환청과 환시를 경험하면서 중학교 1학년 때 편집분열성 정신분열증(조현병) 진단을 받게 된다. 방학 기간을 이용해 그는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너무 일찍부터 먹기 시작했던 조현병 약. 그렇지만 먹어야 했다. 그것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마음에 소망 하나가 있었는데 바로 ‘목회자’가 되는 꿈이었다. 그래서 성 소수자, 사회적 소수자들, 약자들, 정신장애인들과 함께 어울리는 꿈을 꿨다. 감리교신학대를 선택한 이유였다.

대학 입학 무렵부터 약을 반 년 간 끊었다. 다시 증상이 나타났고 대학 동료들과의 사이도 틀어졌다. 다시 우울했다. 신이 있을까. 신이 있다면 왜 인간은 고통 당하는가. 그리고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 신을 어떻게 믿어야 할까. 그에게 신은 ‘무능(無能)한’ 존재였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무능한 신이라면 우리가 왜 믿어야 할까.

그는 그렇지만 그 이유 때문에 신을 믿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왜? 경청(敬聽)해 주니까. 들어주니까. 위로해주니까. 그 경청과 위로는 인간이 해 줄 수 없는 신의 고유한 영역이다. 그게 그가 신을 믿는 이유였다.

조현병이 신의 저주이고 죄의 문제라는 시각은 그에게는 하나의 ‘어리석음’이다. 목사들이 우울증을 기도로 극복해야 한다는 것에도 문제를 제기했다. 그건 위약을 먹고 다 나은 것처럼 느껴지는 플라시보 효과에 불과했다. 그리고 조현병이 신의 저주 때문이라면 그는 그런 신이라면 ‘믿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남문영(23) 씨는 자신의 신앙관을 그렇게 해석했다. 그는 현재 감리교신학대학교 종교철학과에서 공부하고 있다. 1년 간의 휴학 기간을 거쳐 지금은 4학년 복학을 준비하고 있다. 또 시민단체인 정신장애와인권 파도손에서도 일을 하고 있다. 그를 만난 건 입동(立冬)도 지난 12일 <마인드포스트> 사무실에서였다. 다음은 일문일답.

남문영 씨 (c)마인드포스트.

-중학교 1학년 때 발생하고 부모님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부모님은 그때까지만 해도 조현병에 대한 인식이 없었어요. 진단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조현병 약을 먹음으로써 일어날 수 있는 리스크들에 대해서 부모님은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어요.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조현병 약을 먹다가 한 40킬로그램가량 엄청 쪘어요. 그런데 부모님은 그걸 저의 의지 부족이라고 생각을 한 거죠. 병원에서는 정확한 병명도 보호자한테 알려주지 않아서 어머니가 그때까지 단순 우울증이라고만 알았대요. 병원을 옮겼는데도 그 병원에서 또 제대로 된 병명을 알려주지도 않았어요. 지금 다니는 병원에서는 그나마 조현병이라고 병명을 똑바로 얘기를 해줬어요.”

-강제입원이었습니까.

“자의입원이었어요. 한 번 입원했어요. 그때 방학 기간 동안 입원해 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가족에게 서운했던 점이 있습니까.

“셀 수가 없을 정도예요. 전 가족에 대한 애착이 별로 없어요. 형제는 오빠 한 명 있어요. 오빠한테 하는 만큼 나한테도 기대를 해줬으면 좋겠는데 ‘쟤는 알아서 하게 내버려두자’는 식이었어요.

사실 오빠는 공부를 잘했고 저는 잘 못했으니까 가족들의 관심이 오빠한테 쏠린 거죠. 또 아들이기도 하고요. 부모님이 ‘너는 그냥 대충 살아라’는 식으로 얘기를 하니까 내가 과연 대충 인생을 살 사람인가라는 생각도 들었죠. 그게 서운했어요.”

-지금은 선생님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입니까.

“아직 분노가 좀 있죠. 저는 가족이 어쩔 수 없이 만난 존재들이라고 생각해요. 가족들이 아동 학대 주범들이었거든요. 저를 어렸을 때 엄청 때렸어요. 제가 학원을 가기 싫어서 빼먹었는데 학원에서 집으로 전화가 왔나 봐요.

놀이터에서 놀다가 저녁 먹을 때쯤 집에 들어갔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현관으로 나오더니 머리채를 잡고 방으로 끌고 들어갔어요. 제 뺨을 때리고 발로 밟고, 쇠파이프로 저를 때리려고 하는 걸 할머니가 막았거든요. 나중에 보니까 배에 큰 멍이 들어있었어요.

학교 가서 보건 선생님한테 보여주니까 경찰에 신고하려고까지 했었어요. 엄마도 내가 맞고 있을 때 딱 들어오더니 같이 때렸고.”

-전공을 종교철학과로 선택한 이유가 뭐였을까요.

“저희 학교가 일 학년 때는 학과가 없이 학부생이에요. 이 학년이 되면 전공을 선택해요. 학과가 신학과, 기독교교육학과, 종교철학과가 있는데 저는 처음에 신학과를 지원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뭔가 여길 지원하면 꽉 막힌 사람이 될 거 같고 종교철학과 가려면 애들이 놀릴 것 같았어요. 왜냐하면 종교철학과는 공부 못 하는 애들이 가는 곳이라고 우리들끼리는 그랬거든요. 전 애들 따라서 1지망을 신학과로 썼다가 떨어져서 종교철학과로 간 케이스에요. 얼떨결에 선택한 거죠.”

-고등학교 때 신학을 공부하고 싶어서 감리교신학대를 들어간 건가요.

“그렇죠. 신학을 공부하고 싶어서 갔는데 막상 대학 들어가니까 신학만 배운다고 해서 될 게 아니더라고요. 다양하게 배워야지.”

-왜 신학을 선택하고 싶었습니까.

“어렸을 때부터 그게 꿈이었어요. 모태신앙이에요. 목사가 되고 싶었어요.”

-목사가 돼서 뭘 하고 싶은 겁니까.

“저와 같은 정신장애인들이나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을 돕는 교회를 개척하고 싶어요. 예를 들어 성 소수자나 난민, 국가 폭력으로 인한 세월호 희생자나 유가족들, 정신장애인이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충분히 쉬었다 갈 수 있는 그런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그런 목회 일을 하고 싶어요.”

-신도는 몇 명이 목표입니까.

“(웃음) 10명 정도.”

-개신교에서 정신질환을 ‘죄(罪)’의 문제로 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멍청하다고 해야 되나? 아니면 바보 같다고 해야 되나?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는 담임목사님이 약 먹는 것도 하나님의 축복이다라고 얘기를 했어요. 글쎄 약을 먹는 사람은 반쯤 죽어갈 정도로 힘든데 그게 과연 축복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권사님이나 장로님들이 저를 향해 많은 상처 되는 말들을 남겼죠. 제가 환청하고 환각이 너무 심해지니까 저를 잡고 기도를 하는 거예요. 그리고 제가 원하지도 않는데 청년들에게 제가 조현병이라는 걸 알리고 다닌 거예요. 짜증이 많이 났죠.

그것 때문에 청년부 생활이 쓸쓸했어요. 그 사람들은 나를 건드리면 문제가 커질 게 뻔하니까 안 건드려요.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장난도 치고 웃으면서 놀고 싶은데 왕따(집단 따돌림)당한 거죠.”

남문영 씨 (c)마인드포스트.

-목사들은 우울증은 기도만 하면 모두 낫는다는 편의적인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동의 못해요. 제가 아는 신(神)은 무능한 신이에요. 제가 아는 신은 고통스러움을 듣기만 하시지 실질적으로 그 고통에 대해 힘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에요. 우울증이 기도로 낫는다는 건 플라시보 효과에 불과해요. 신의 능력으로 우울증이 기도로 낫는다는 것은 맞지 않아요.”

-신이 무능하다면 어떻게 그게 신이 될 수 있습니까.

“듣잖아요. 경청(敬聽)하잖아요. 인간이 할 수 없는 걸 경청하잖아요. 그게 위대해요.”

-조현병은 신이 저주해서 내린 병입니까.

“아니요. 조현병은 가정의 환경이나 사회에 나가서 받았던 폭력들이 쌓이다 결국 폭발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조현병이 신의 저주라고 하는데, 신이 저주해서 내린 병이라면 저는 그런 신을 차라리 안 믿고 말겠어요.”

-교회에서는 선생님의 병을 뭐라고 정의하던가요.

“지금 다니고 있는 교회는 성소수자도 올 수 있고 여러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교회다보니까 저를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봐 줘요. 너무 감사하게도.”

-그 교회는 어떻게 찾아가시게 된 겁니까.

“제가 퀴어 축제(성소수자 축제) 열렸을 때 거기에 무지개오피스라는 부스가 있었어요. 갔더니 거기서 학교 선배를 만났어요. 거기서 전도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걸 보고 교회를 찾아가서 정착하게 된 거죠.”

-신도가 몇 명쯤 되나요.

“30~40명. 성 소수자, 가난한 사람들, 정신장애인들.”

-치유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종교가 필요할까요.

“종교는 일종의 도구일 뿐이죠. 그게 치유의 목적이 되면 그건 중세의 미신적인 신앙밖에 되지 않아요. 종교가 있으면 도움은 될 수 있지만 실질적인 치료의 핵심이 될 수는 없다고 봐요.”

-그럼 핵심은 뭡니까. 약 먹는 겁니까.

“아뇨. 약 먹는 건 아니고 주변 사람들의 지지와 응원이 필요해요. 같이 만나서 놀러 다니고 그런 공동체에 소속감을 느끼면 더 치유에 좋지 않을까요.”

-종교망상에 빠진 적 있으세요.

“종교망상요(웃음). 제가 고등학교 때 그랬죠. 신이 정의로우며 모든 걸 다 할 거다라고 생각했죠. 그렇게 깊게 빠지지는 않았어요.”

-인간은 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신을 이해 안 하면 되죠. 왜 굳이 신을 이해해야 합니까.”

-이해해야 기도를 할 거 아닙니까?

“아니요. 이해를 못 해서 원망하는 기도를 하는 것도 신은 그걸 다 듣잖아요. 듣고 위로해주는 위로자 역할이니까요. 저는 그래서 신을 굳이 이해하라고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이해하지 못해도 기도는 해라?

“그것도 아니에요. 그냥 신을 이해하려고 하면 할수록 자기 자신이 신이 되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요. 저는 그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봐요. 신을 이해하지도 말고 본인이 하고 싶을 때 기도하면 될 거 같아요.”

남문영 씨 (c)마인드포스트.

-아직 젊은 나이입니다. 정신질환과 싸우면서 인생의 어떤 부분을 배웠는지 궁금합니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정신장애인들은 사회적 약자의 자리에 위치해 있었잖아요. 정신장애인들은 취업에도 제약이 있고 하다보니까 낮은 자리에 있는데 저 역시 그런 낮은 자리에 있고 낮은 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봐왔어요. 그리고 우리 위에 기득권자들이 있다는 것도 봤죠. 저는 그 낮은 자리의 사람들과 연대하는 걸 배웠어요. 연대를요.”

-우리 같은 ‘꼰대’들이 정신질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게 불편할 수도 있겠습니다.

“불편하죠. 너무 쉽게 얘기하니까요. 이게 쉬운 주제가 아닌데 마치 본인이 인생을 다 살아봤다는 것 마냥 얘기하는 건 그들이 오류를 범하는 거라 생각해요.

제 친구 중에 한 명은 우울증 약을 먹으면서 병원 다니고 있는데 어른들이 ‘내가 살아봐서 아는데 그건 일하고 사람 만나고 하면 그 우울한 생각에 빠질래야 빠질 수가 없다. 바빠져야 된다’ 이렇게 얘기했다고 해요. 정말 바보 같은 말이죠.”

-꼰대들에게 뭐라고 얘기해주고 싶습니까?

“본인이 한번 (정신질환에) 걸려보세요. 너희들이 직접 겪어보는 수밖에 없다."

-대학 친구들은 선생님의 병을 이해해주고 있나요. 혹은 차별은 하지 않던가요.

“그래도 제 친구들은 이해를 해주는 편인데요. 저한테 울타리를 치지는 않아요. 그런데 저랑 친하지 않은 사람들은 안 좋게 보죠. 안인득 사건으로 조현병 환자 기사가 나가면 저에게 거리감을 두려는 사람이 있었어요. 그런 부정적 뉴스가 보도된 이후에는 저에게는 제 곁에 남아줄 수 있는 사람과 남아줄 수 없는 사람들로 걸러지는 느낌이 들어요.”

(안인득 사건은 지난 4월, 경남 진주시 가좌동의 한 임대아파트에서 주민 안인득이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고 대피하던 주민들에게 흉기를 휘둘러 20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을 의미한다-편집주)

-그런 방송이 나오면 뭔지 모르겠지만 거리감이 느껴지고 하는 건가요.

“그렇죠. 아무래도.”

-정신장애인이라고 사람들에게 밝힙니까.

“저는 처음 만난 자리에서는 밝히지 않고요. 어느 정도 신뢰가 쌓이면 내가 사실 이런 장애가 있는데라고 얘기를 하는 편이에요.”

-좋아하는 철학자나 신학자가 있나요.

“없어요. 제가 학교에서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을 연구하면서 책을 읽는데 이게 학과의 과제물이 돼 버리니까 다 싫어지더라고요. 대신 우리나라의 문익환 목사님을 존경해요. 1987년 독재시절에 그렇게 목소리를 낸 목회자들이 드물었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 목사님은 목소리를 냈고 아무도 얘기하지 못하는 것을 목소리를 높여 얘기했죠. 그 용기가 존경스럽죠.”

-여성 정신장애인은 남성 정신장애인보다 더 깊은 차별을 받는다고 생각합니까.

“아무래도 그렇죠. 사회적인 시스템으로 봐도 비정신장애인 여성들도 차별을 받고 있잖아요. 정신장애을 갖고 있는 여성들은 더 차별이 가중되겠죠. 여성들한테 이런 얘기를 많이 하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집안일을 잘 해야 되고 남편 뒷바라지 잘 해야 되고 내조해줘야 된다고요. 그리고 여자가 어딜 4년제 대학에 들어가느냐고 하죠. 이런 게 차별이고 억압이잖아요.

그리고 제가 회사 다니고 학교 다니고 하다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 경력 단절이 돼 버려요. 여성 정신장애인은 더 심해요. 일단 직접을 선택하는 데 제약이 있죠. 또 제가 보험회사를 다녔는데 정신과 약 먹고 있다는 자체만으로 보험 가입이 어려워요.

그 때문에 정신과 가기를 꺼리는 사람들이 많아요. 정신적 치료의 ‘골든 타임’을 놓치는 경우가 그래서 많아요. 이런 시스템이 여성 정신장애인들에게 더 심하지 않나 싶어요.”

-국가가 정신장애인들의 존엄한 삶을 위해 무엇을 해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일단 쉼터 마련이 중요해요. 그리고 직업에 대해 많이 열린 구조가 됐으면 좋겠어요. 조현병 환자들은 요리사 될 수 없잖아요. 직업의 폭이 열렸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직업재활 프로그램도 다양했으면 해요. 조현병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잖아요. 직업도 그렇게 다양하게 만들어지면 좋겠어요.”

남문영 씨 (c)마인드포스트.

-인간은 존엄(尊嚴)을 침해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정신장애인의 존엄은 언제나 훼손되고 차별받고 배제받습니다.

“답답하죠. 그게 제가 될 수도 있잖아요. 나의 존엄성이 침해받는다는 건 무서울 거 같아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선택 못하게 되고 억압받는 거죠.”

-앞으로 사랑을 하게 된다면 어떤 대상을 만나고 싶습니까.

“(웃음) 생각을 안 해봤어요. 부드럽고 너그러운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또 경청해주는 사람.”

-선생님은 젊은 시절 원치 않던 정신질환에 걸렸고 치유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아직 살아갈 푸른 날들이 더 많습니다.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요.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고 싶어요. 사회에서 내 역할 다 하고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가서 도움을 주고요. 나를 필요로 하지 않더라도 그런 자리에 가서 연대하는 삶을 살고 싶어요.”

-‘연대’라는 말씀을 많이 하시네요.

“연대가 중요하죠. 나 혼자서 목소리를 내는 것보다 많은 사람들이 같이 목소리를 내는 게 더 크게 들리잖아요. 그게 중요해요. 그렇게 해서 정권교체도 됐고 수면 위로 문제들이 떠오르는 것도 있죠.”

-가까운 사람이 정신질환에 걸린다면 선생님은 어떻게 행동할 겁니까.

“저는 그냥 있는 그대로 대해주겠죠. 또 약을 먹어야 되고 치료가 필요하다면 같이 병원에 가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현재의 정신건강복지법은 정신장애인의 돌봄을 가족에 모두 떠넘기고 있습니다. 이럴 때 어떤 역효과가 발생할까요.

“문제죠. 이걸 가족에게만 떠넘기면 그건 국가가 개인에게 폭력을 가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국가가 나서서 해결책을 마련해줘야 하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일단 지역사회가 잘 움직여야 해요. 여태껏 지역사회에서 움직인 게 없잖아요.

안인득 사건 때도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사건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지역사회에서 막지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했잖아요. 귀찮게 생각하고요. 그리고 정신장애인들이 응급상황일 때 왜 경찰이 오는지 모르겠어요.

친구에게 들은 얘기인데 내가 정신적으로 응급한 상황이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인데 119구급대가 오는 게 아니라 경찰이 와요. 심정지가 되면 119구급대원들이 오잖아요. 그런데 정신과적 응급상황에서는 경찰이 와서 데려가거든요. 왜 그런 걸까 싶죠.”

-그럼 소방대원들이 와야 되는 건가요.

“경찰도 오긴 와야 되지만 제 친구가 거기서 경찰에게 뭔가 차별을 느꼈나 봐요. 언어 폭력도 있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안 좋게 쳐다봤을 수도 있고. 그런 거 때문에 차별을 느꼈다고 얘기하더라고요.”

-응급상황에서는 경찰보다 구급대원이 오는 게 더 낫다?

“같이 출동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경찰이나 구급대원, 혹은 사회복지사가 같이 출동해서 진정시켜주면 좋지 않을까.”

-정신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은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건 한 개인의 존엄과 가치이기 때문에 자기결정권이 당연히 필요해요. 그렇지만 지금의 한국사회는 그런 게 아니잖아요. 끊임없이 자기 결정권을 침해받고 내가 원하지 않는데 강제입원 당하고 내가 원하지 않는데 약을 억지로 먹고 주사요법을 받아야 하고. 과연 이게 자유로운 걸까 생각이 드네요.”

남문영 씨 (c)마인드포스트.

-선생님이 겪었던 고통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뭘까요.

“지옥 같은 순간, 지옥. 잘못 태어났다.”

-정신장애인 당사자 운동과 관련해 어떤 역할을 맡고 싶은가요.

“제가 파도손 단체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주로 환청, 환시를 주제로 그려요. 그러다보니까 그림이 조금 차갑게 느껴질 수 있는데 당사자가 이런 걸 느끼고 있다는 것들을 그림을 통해서 같이 움직이고 싶어요.”

-정신장애인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습니까.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어요. 정신적 질환이나 장애가 창피한 게 아니거든요. 힘 없는 개인의 목소리를 내는 것보다 옆에서 같이 싸워줄 사람들이 있으니까 너무 혼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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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한탁 2019-11-13 20:57:36
기사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다양한 저희들의 목소리를 많이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물론 저희도 더 공부하고, 더 고민하고. 또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도 더 넓혀가야겠지요.

권혜경 2019-11-14 03:07:49
감사합니다. 감동적인 글 잘 읽었어요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