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展 “고통스러운 가시를 제거하는 것은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
감정展 “고통스러운 가시를 제거하는 것은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
  • 박종언 기자
  • 승인 2019.11.20 23: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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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음의집·리아트리 주관 ‘감정展’ 25일까지 전시회
올해 5회째, 회원들 ‘감정’ 분석이 이번 전시회 주제
분노, 슬픔, 우울을 그림으로 표현하며 치유 모색
꿈은 무의식이 활동하는 영토…의식과 화해해야
미술치료는 무의식의 비언어적 영역에 집중해 공감 얻어

 

중곡동 국립정신건강센터에서 모임이 끝난 시간은 오후 4시였다. 기자는 부랴부랴 가방을 챙겨 대학로 혜화역으로 향했다. 거기 2번 출구로 나가면 ‘이음 장애인복합문화예술원’이 있다. 오후 다섯 시. 2층 이음갤러리로 들어서니 10여 명의 사람들이 웅성이며 벽에 걸린 그림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파장인가.” 기자는 급한 마음에 카메라부터 꺼내기 시작했다. 기우(杞憂)였다. 사람들은 그림을 보며 무언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날 행사는 정신재활시설 공동생활가정 한마음의집 전·현직 회원들의 미술치료프로그램 ‘집은 엄마다’ <감정展> 전시회다. 전시회는 한마음사회적협동조합이 주최하고 한마음의집, 미술심리상담센터 리아트리가 주관해 오는 25일까지 열린다. 서울사랑의열매가 지원했다.

기자는 행사장을 무심한 듯 그러나 초조하게 거닐었다. 파트는 1부터 4까지 주제별로 묶여 있었다.

우선 파트1. 거기에는 9가지 감정이 적혀 있었다. 분노와 슬픔, 두려움, 기쁨, 우울, 행복, 사랑, 혼란스러움, 평화. 닉네임이 ‘꽃님’인 작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그는 중학교 시절 또래 아이들이 자신을 산에 데려가서 공을 발로 차고는 주워오라고 했고 발로 자신을 밟았다고 한다.

그 폭행의 대한 두려움과 분노. 미술프로그램을 통해 드러난 그의 그림에는 3개의 산봉우리와 해와 별이 있었다. 이는 내면의 분노가 마치 다른 옷을 갈아입고 겉도는 느낌을 받는다는 해석도 들어가 있었다.

분노를 바라보는 우화도 내용이 들어가 있었다. 주인으로부터 도망친 노예 안드로클레스는 큰 가시에 찔린 사자를 만나 가시를 빼준다. 몇 년 후 안드로클레스는 주인에게 잡히고 사자우리에 던져졌다. 하지만 사자는 그를 알아보고 생명을 구해준다. 황제는 놀라 이들에게 자유를 준다. 마지막에는 뭔가 가슴을 쿵 치고 지나갔다. “고통스러운 가시를 제거하는 것은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

닉네임이 ‘길님’인 작가는 자신의 우울을 표현했다. 초등학교 시절 다녔던 합기도와 명상. 그때 먹었던 라면, 작년 말 병원 입원도 생각났다. 분노는 두 가지 성격을 가진다. 타인을 향한 분노와 자신을 향한 분노. 자신을 향해 분노의 화살이 겨눠질 때 우울이 찾아온다. 이 그림의 아래에는 다음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자신을 향한 분노는 자신을 무력화시키고 결국에는 모든 세상을 자신으로부터 사라지게 만드는 힘을 가진 모양입니다.”

9가지 감정 중 사랑이 나왔다. 작가들은 사랑을 이렇게 표현했다. 아이스크림, 제일 관심을 가지는 것, 모든 걸 아낌없이 주고도 아깝지 않는 것, 가족, 정말로 좋아하는 것, 달콤한 솜사탕.

이번 미술프로그램을 지도해온 김보영 리아트리 미술심리상담센터 대표는 <감정展>에 대해 “기억으로 소환되지 못한 과거의 감정 경험들을 이미지로 끌어올리려 애썼다”며 “자신의 내면에서 절로 일어난 감정을 인정받는 일은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받는 일”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곧 타인의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자는 15년 전 미술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 아주 내적으로 우울했고 괴로웠고 두려웠고 노여웠던 시절이었다. 미술치료사는 내게 그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하라고 했다. 나는 마음이 가는대로 그림을 그렸다. 함께 집단 미술치료를 받던 이들이 나의 그림에 대해 평을 했다.

그때, 기자의 마음은 공평하지 못한 세상에 대한, 그리고 내가 실패했다는 것에 대한, 앞으로의 전망이 없는 삶에 대한 깊은 노여움과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것을 어떻게 그림에 담을 수 있는가. 미술치료를 내가 선택했지만 그 결과에 대해 나는 의아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8개월의 시간이 지났고 일주일에 한 번씩 참여했던 그 프로그램이 최종 종결을 선언했을 때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어떤 분노가 조금은 가라앉는 느낌을 가졌다. 그랬다. 어쩌면 그 미술치료 과정은 내 안에 깊이 멍든 곪은 ‘종기’를 짜내는 시간이었다는 것을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깨달은 것이다. 이번 <감정展> 미술치료 프로그램도 그러할 것이다.

이번 <감정展>은 한마음의집 전·현직 회원 13명이 참여했다. 한마음의집은 리아트리와 함께 지금까지 모두 다섯 차례의 전시회를 진행해 왔다. 이번 <감정展>은 특별히 회원들의 ‘감정’에 주목해 보기 위해 마련됐다고 밝혔다.

이어지는 파트2는 꿈에 관한 내용들이었다.

하나의 꿈은 하나의 세계다. 소개된 내용에는 이런 꿈도 있다. ‘나’는 친구와 같이 어느 건물에 들어섰는데 아무도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무 버튼이나 눌러 도착해 보니 서양 여자 두 명이 목줄을 매고 울고 있는데 바닥은 너무 뜨거운 아스팔트였다. 그런데 양복을 입은 건장한 남자들이 총을 들고 나왔다. 놀란 ‘나’와 친구는 다시 엘리베이터를 다시 탔다.

다른 꿈 소개도 있었다. 무인도에서 ‘나’랑 사람들과 식인종이 있었는데 식인종이 사람들을 잡아먹으려고 하는데 식인종 눈에는 내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다 죽었는데 나 혼자 무인도에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투명인간이 되었다.

또 하나의 꿈. ‘나’는 전쟁 도중 탈영을 했다가 잡혔다. 나는 처형당할 거라 생각했는데 미국 간부가 제안을 했다. 철봉에 묶여 있는 북한군 포로들과 중국군 포로들을 권총으로 쏴 죽이면 집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나는 포로들을 쏴 죽였는데 마지막에 중국 장군인 전호(친구로 추정됨)가 묶여 있었다. 나는 못 쏘겠다고 했다. 전호는 울고불고 난리였다. 나는 전호를 쏴 죽인 척하고 탈출했는데 갑자기 10년이 지나있었다. 전호는 나랑 같이 제주도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살았다.

기자는 자주 꾸는 비슷한 유형의 꿈이 있다. 대학생인 ‘나’는 졸업을 해야 하는데 학점 미달이었다. 강의실을 찾아가 교수님에게 사정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나는 수업이 어디서 진행되는지를 몰라 컴컴한 어둠 속을 헤맨다.

공부를 등한시했던 시절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제대로 살아오지 못한 삶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을까. 주제가 비슷한 꿈을 꾼 뒤에는 깨어나 자주 가는 한숨을 쉬고는 했다. 물론 기자는 안다. 무의식에 넘어갔던 어떤 에피소드가 현실의 어떤 충격을 받은 후 그와 관련된 무의식의 한 소재가 의식으로 넘어와 끊임없이 무의식과 의식의 중간 지대에서 ‘내’가 헤매는 것이라고. 여전히 나는 그 꿈의 의미와 상징을 찾기 위해 노력을 해야겠지만 말이다.

위의 세 작가가 꾼 꿈들의 상황도 그들의 무의식의 어디에 걸려 있는 ‘가시’일지도 모른다. 위 작가들 꿈에는 보편적 주제가 나온다. 바로 총과 죽음과 죽임이다. 누군가(식인종)가 ‘나’를 죽이려고 하거나 ‘내’가 누군가(북한군 포로)를 죽여야 하는 이중 모순의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나는 나를 죽일 수 없다. 그것은 너무나 두려운 일이다. 다만 나는 죽임을 당하거나 죽여야 한다. 그 죽음 안에 한 친구가 있다. 그 친구를 나는 살리기 위해 죽인 척한다. 양복을 입은 건장한 이들이 나와 ‘총’으로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나는 자리를 피한다.

이 꿈 속에는 법이자 이데올로기인 ‘아버지’가 들어있지는 않을까. 그 아버지를 죽이는 것은 상징권력을 아버지로부터 빼앗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윤리적’으로 아버지를 죽일 수 없다. 어쩌면 아버지를 죽인 후 권력을 빼앗은 아들이 그 아버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벌이는 일종의 애도의식, 즉 축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법을 어기고 싶지만 법의 상징인 아버지를 죽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래서 그 꿈이 전환돼서 자신을 그 상징권력이 자신을 죽이도록 방조하는 것. 그러나 ‘나’는 살고 싶다. 그래서 투명인간이 돼 버린다. 물론 가설이다. 이는 미술치료사가 해석할 영역이다. 기자의 어줍잖은 꿈 해석이다. 해량(海諒).

이어 파트3. 자기 인식. 캔버스에는 온통 나무들로 채워져 있다. 그룹홈 나무, 행복한 나무 친구, 문화나무, 사랑나무, 성장나무, 불타는 숲속 나무, 더위를 피해갈 수 있는 느티나무, 꿈꾸는 나무.

기자는 나무 그림 옆에 있는 감정가면들을 바라보았다. 색칠을 한 가면들이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가면을 얼굴에 쓴 채 살아간다. 가면 안에 있는 ‘나’의 참 모습과 가면 바깥의 또 다른 ‘나’의 모습이 뒤틀릴 때 우리는 감정적 어려움을 겪는 건 아닐까.

가면에는 작가들이 이름을 달고 있었다. 매우 화가 난 가면, 반토막 나고 상처도 난 사람이 쓰던 가면, 장군 가면, 기쁘고 행복한 가면, 광대에서 피에로가 된 가면, 눈을 감고 생각하는 가면, 우울한 마음 가면.

이어 파트4. 연상. 질문은 ‘천국’에 관한 느낌들 적기였다. 작가들은 하나씩 자신이 사유하는 천국을 도화지에 그려 넣었다. 슬픔이 없는 곳, 푹신푹신한 구름 위에서 노는 곳, 엄청 잘 사는 곳, 아픔이 없는 곳, 걱정이 없는 곳, 남자 천사와 여자 천사가 있는 곳, 기쁨과 사랑이 넘치는 곳.

기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천국’이 가지는 상징성 안에서 고통 받는 이가 바라는 삶의 지향점이 묻어 있기 때문이었다. 슬픔도 아픔도 걱정도 없는 곳. 그것은 정신장애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정체성의 고통을 누군가가 대신 처리해주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일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장애인은 누구보다 ‘신(神)’의 현현을 바라는 것이리라. 신을 통해 세속적 영토에서 고통당하는 자신의 삶을 위로해주기를 바라는 소망. 그것이리라.

한 바퀴를 돌며 작품을 감사한 후 기자는 카메라로 하나씩 장면을 담았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김보영 리아트리 대표와 인터뷰를 했다.

김 대표는 “숨겨뒀던 것들을 다시 꺼내는 게 더 힘들지 않을까 생각했다”며 “작품이라기에는 말하기 어려운, 순간적으로 그려낸 낙서다. 그걸 돋보이게 해주려고 애를 썼다”고 말했다.

그는 또 “미술치료는 언어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무의식적으로 표현하는 비언어적인 것들에 집중한다”며 “말로 만들어지지 않는 것들을 이미지로 표현하고 이를 서로 확인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본마음을 확인해 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김소연 한국정신장애인복지협회 교육이사는 “오랫동안 준비해 온 정신장애인들의 감정이 아주 그림에 잘 드러났다”고 평했다.

한마음의집 근처에 살고 있다는 지역주민 박인자(66·여) 씨는 “정신장애인들이 미술치료를 통해서 자신들의 감정을 표현하는 작품들이 나왔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에게 정신장애인이 이웃으로 사는 것이 불편하지 않는지 물었다. 그는 “전혀”라고 답했다.

이어 최동표 한마음의집 대표는 “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보고 정신장애인에 대한 인식 개선이 되길 바란다”며 “정부 차원에서도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개발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림을 통해서 지역주민으로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 봐주면 고맙겠다”며 “정신장애인이 아니라 지역주민으로, 시민으로 살아가는 순수한 모습으로 봐줬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시계는 얼추 오후 6시30분을 지나고 있었다. 기자는 다시 카메라로 풍경을 찍기 시작했다. 문의 02-391-2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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