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 류원용의 일기장] 앗, 내게 천지개벽이 일어났다(1)
[당사자 류원용의 일기장] 앗, 내게 천지개벽이 일어났다(1)
  • 류원용
  • 승인 2019.12.16 19:4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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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정신장애인 당사자이자 마인드포스트 시민기자인 류원용 씨의 치유 과정을 담은 회복기입니다. 마인드포스트는 정신장애인 창작 진흥 차원에서 당사자 원고를 검토해 기사로 싣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독자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꽃다운 시절, 나는 기계체조도 했고 군대도 다녀왔고 일용직 노동자 경험도 했고 헬스도 했다. 그리고 칸트의 정언명령, 인류의 존엄과 자유, 평등, 민주라는 단어도 들어본 나름 개똥철학을 가진 방정한 사내였다.

한마디로 나는 평범하고 소시민적이고 남다를 것 없는 군 제대 후 복학한 대학생이었다는 것이다.

꿈도 있었고 야망도 있었다. 눈을 반짝반짝하게 뜨면서 나름 열심히 공부하며 입신양명과 부귀영화를 위해 분골쇄신(粉骨碎身), 주마가편(走馬加鞭)하고 있었다.

아무런 불만 없이 김치에 물 말아먹고서 공부와 운동만 했다. 평행봉에 물구나무서기도 했고 거꾸로 매달려 윗몸 일으키기도 했다. 수많은 여학생들의 시선도 받았으며 친구들은 나를 좋아했고 공부 열심히 한다고 응원을 보내주기도 했다.

이런 내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흔들리는 청천벽력이 찾아올 줄 나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하루 열 시간 넘게 공부하는 내게, 이상하게 말이 어눌해지는 증상이 시작됐고 나를 아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어! 저 사람이 어떻게 나를 알지?’하는 의문도 품게 됐다. 병을 앓은 지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알았다. 나는 무리하고 있었고 서서히 관계망상부터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이상해 미칠 것 같았다.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서 내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것 같았고 나는 뭔가 큰 소명을 부여받고 이 땅에 태어난 것도 같았다. 어느날부터는 음치(音癡)인 내가 가수 못지않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이미 의문사했던 사람의 평소 즐겨하던 말을 얼굴 한 번 안 본 내가 그대로 되읊기도 했다.

또 교수님 앞에서 샤머니즘에서 말하는 ‘그 분이 임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야유회를 갔다가 자고 일어났더니 교수님과 후배 녀석이 내 앞에서 손을 부들부들 떨기도 했다. 몇 번 귀 흘려들었던,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는 노래 가사를 친구 앞에서 노트에 적어내리기도 했다.

집안에 있을 때면 집밖으로 탱크가 지나가는 소리, 군인들이 바리케이드를 치는 소리도 들렸다. 샤워하는 수도꼭지에서는 구정물이 나오는 것 같았다.

엄청나게 이상하고 무서웠다. 어찌나 무서웠던지 온 마음이 부들부들 떨었다. 공포장애가 찾아온 것이다.

아버지는 “네 눈빛이 너무 예리하고 사람 마음을 꿰뚫는 것 같으니 아무래도 이상하다”며 “병원에 가봐야 하지 않겠냐”고 말씀하셨다.

나도 “아버지, 이상합니다”라며 “갑자기 제 주변에 이상한 일들이 생기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나는 “입원하는 게 아니고 그냥 정신과 의사 한번 만나보고 필요하면 약이라도 먹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나중에야 알았다.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말을 했는지를. 내가 1994년 시대 상황에 정신과 의사와 상담하고 싶다고 말한 것이 얼마나 내 인생의 ‘자살 골’이었는지 말이다.

아버지와 나는 집 근처에 있는 신경정신과를 찾았다. 잠시 대기실에 앉아서 진찰 시간을 기다리는데 한 나이 먹은 분이 다가오더니 아버지에게 “이런 새끼 낳고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라고 말했다.

25년 전에 들은 말이지만 아직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기억하고 있는 말이다.

병이 찾아오기 직전, 과장을 좀 하자면 내 가슴은 내 또래 여성 가슴보다 조금 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배에는 다섯 줄의 임금 왕자가 새겨져 있었으며 돌려차기 한번 날리면 화장실 문짝이 내 발목으로 움푹 파일 때였다.

만일 그때 일주일여를 잠 못 자고 어마어마한 정신적 스트레스에 근육들이 녹아내리지 않았더라면 묻지마 살인이 아닌 모독죄 살인이 일어날 뻔했다.

“이 XX야, 너 방금 뭐라 했어? 이 XX가 뒈질려고 환장을 했나?” 그렇게 돌진하던 나는 주먹이 쥐어지지 않고 다리는 휘청거리고 있었다. 나는 이미 탈진한 환자였던 것이다.

조금 기다리니 진찰실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와 나, 그리고 어떤 남자 한 명 이렇게 세 사람이 대면했다. 나는 이 남성이 정신과 의사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고 의사의 피고용인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아버지는 “이 의사 선생님도 같은 기독교인이니까 안심하고 다 말해라”고 했다. 나는 잠깐 마음이 편해지며 정신이 돌아오는 듯했다.

지금도 나는 그 순간이 안타깝고 치가 떨린다. 그때 내가 지금 정도의 언어구사력만 있었다면 나는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일 없이 행복하게 내 인생을 살았을텐데라고 말이다.

당시 나는 “휴, 이제 좀 살겠네”라고 엉뚱한 말을 했다. 그 남자는 더 들어볼 필요가 없다는 듯이 “입원시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선생님, 저 입원 안 합니다”라고 소리쳤다.

그 남성이 당시의 내게 자해나 타해의 가능성을 따졌겠는가? 돈을 따졌겠지 뭐!

평소에 나를 미워하던 아버지는 바로 나를 입원시켰고 나는 이름 모를 주사를 맞고 약을 먹고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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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랑제수민 2019-12-17 16:17:38
폐쇄병동의 하루하루가 눈에 선합니다. 아직도 그들은 그리 살고 있으리라. 나도 멀쩡한 것으로 생각하건만 간호사 복지사 보호사 의료진은 한글자마다 병증을 기록했다. 간섭병 오지랖병 강요병 신경질병 폭언병 ......난 단지 친절하게 설명하고 도와주고 했을 뿐인데. 기록자들은 감시글로 치료했다.

약이 많아지고, 나도 쇠잔하고 굴종하며 빨리 나갈 날만 기다렸다. 6개월 지나 병식 조금 들고 의료진과 타협하고 1년반 뒤 퇴원했다. 생존 탈출이었다.

글쓴 류샘도 생생한 고통을 말하고 있다. 그때 그순간 아니었다면. 그 약만 조절되었더라면.
다행히 류샘이 이글 쓰며 회복재기를 말해주니 감사하다.
많은 이들에게 힘이 되어줄 것이다. 류샘도 마인드포스트도 조현당사자 모두 화이팅 ^^

장한탁 2019-12-16 21:38:40
이렇게 당사자의 생생한 경험을 기사로 실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