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조울러의 비밀이야기 제2탄] "한 차례의 폭풍우가 지나갔다"
[프로조울러의 비밀이야기 제2탄] "한 차례의 폭풍우가 지나갔다"
  • 앨리슨 기자
  • 승인 2019.12.18 19:01
  •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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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차례 폭풍우가 지나갔다.

잠을 이루지 못한지 나흘 정도 됐다. 2주째 집밖으로 나가보지 못했다. 평소라면 손에서 놓지 못하던 핸드폰도 꺼놓은지 오래다. 연재하려 마음 먹었던 글도 써지지 않는다. 그렇다. 증상이 시작됐다.

우울증이 찾아왔다. 이번엔 부디 가볍게 지나가길 원했던 나의 희망은 철저히 나를 배신했다. 나는 겨울이 고비다.

나는 무서워졌다. 아무것도 듣고 싶지 않았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마음속에 있는 나만의 철문을 걸어 잠그고 싶었던 것이다.

7살 유치원생인 딸아이를 챙기는 것 또한 힘겨워졌다. 엄마가 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지만 놀아주지 못해 방치된 듯한 내 아이를 보면서 미안하다며 아이를 붙잡고 엉엉 울었다. 아이는 “엄마, 내가 얼른 커서 의사가 되어서 엄마 병 고쳐줄게”라며 속 깊은 말을 해주었다. 하지만 그게 더 슬프게 다가왔다.

아이를 잘 돌볼 수 없는 상태가 되자 나를 도와주시려 친정엄마가 집에 오셨다. 각성 상태가 지속되면서 심장이 빨리 뛰고 숨이 차는 과호흡증후군이 재발했다.

나는 익숙한 듯 비닐 봉투를 찾아서 입에 대고 그 안으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나를 진정시켜야 했다. 엄마를 부둥켜 안고 울기 시작했다. “이 병이 정말 징글징글 맞다고,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냐”며 가슴을 치며 오열했다.

가장 힘든 이 시간이 하필 주말이었다. 결국 월요일에 응급으로 진료를 받고 강한 진정제 약 기운으로 인해 내게 이틀의 기억이 사라졌다. 꼬박 이틀 내내 잠을 잔 것이다.

일어나 보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거짓말처럼 다시 기분이 괜찮아졌다. 순간 나는 내가 조울증 환우라는 것을 한 번 더 느낀다. 기분의 '중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곤 이내 걱정을 한다. ‘남들이 나를 꾀병으로 볼까 봐, 그리고 관심 받고 싶어서 소위 ‘쇼’를 하는 것처럼 보이면 어쩌나’라면서 말이다.

조울증의 우울증은 단극성 우울증의 우울감과는 조금 다르다. 비유를 해보자면, 땅 위에서 발을 헛디뎌 맨홀에 떨어지는 것과, 땅에 부딛히는 것 만으로도 치명적이지만 가장 높은 빌딩에서 뛰어내려서 아스팔트 땅보다 더 깊은 맨홀에 추락하는 것과 같다. 즉, 롤러코스트 같은 감정기복은 단순한 우울감이 아닌 훨씬 더 심각한 증상이다.

우울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나는 세상에서 가장 기분 좋아 우울이 무엇인지도 느껴지지 않는 하늘에 붕붕 뜬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조울증 중의 우울삽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그림.(c)정신의학신문

 

보통사람들과 조울증 환우의 기분 변화를 묘사하고 있는 그래프.(c)정신의학신문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조울증 환자에겐 항우울제를 처방받는 것은 의미가 없다. 아주 잠깐은 호전된 것 같지만 별로 효과도 없을 뿐더러 자칫 잘못하면 조증으로 튈 수 있기 때문에 약물을 투여할 때 아주 신중해야 한다. 즉, 조울의 우울증은 약이나 의사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도움 없이 '텅빈 들판에 오롯이 혼자 서서 거센 비바람을 맞으며 대책없이 견뎌내야' 하는 것과도 같다.

조울증은 우울증으로 오진을 내리기 쉽다. 의사도 이 점을 꼭 명심하여 당사자가 신중한 진단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c)psychiatricnews.net

내 삶을 들여다 보자면, 나는 오랜 경력의 프리랜서 영어강사다. 초등 예비반인 7세부터 50대 성인까지 그간 가르쳐 보지 못한 나이대가 없다. 중고등학교 교사, 초등어학원 강사, 그리고 사원 교육을 맡아 기업에 출강을 하는 등 다양하게 경험했다.

학부 때부터 영어교육이 전공이었기에 수능이 끝나자마자 19살 때부터 과외 등 강사 일을 시작했다. 지금의 나이가 30대 중반이니 1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영어를 가르쳐 온 것이다. 나는 강사 일이 천직이었다. 설명하는 걸 좋아하고 학생들의 니즈를 잘 파악하여 재미있는 수업을 꾸려가곤 했다. 경력이 쌓여 갈수록 수입도 좋아졌다.

하지만 이 강사란 직업은 나에게 때론 독으로 돌아오곤 했다.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강사 일의 '천적'인 우울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앞서 묘사했듯이 조울증의 우울증은 나를 아무것도 못하도록 만든다. 그 압도적인 무기력감은 삶의 의지를 바닥나게 한다. 한마디 말을 할 때에도 너무나 힘에 겨워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꿈을 꿀 수도 없다. 그런데 남들 앞에 서서 강의를 한다는 것이라니.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굳이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상상이 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적지 않은 나이이지만 아직도 나의 성격을 잘 모르겠다. 너무나 극과 극이기 때문이다. 다만 증상이 거의 없는 나의 겉모습은 발랄하고 명랑한 편이다. 분위기 메이커다. 그래서 남들은 나의 성격이 밝은 줄만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나의 반쪽 모습만 알고 있다. 어두운 면은 의사, 그리고 같이 사는 가족들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우울한 모습은 볼 수가 없다. 아니, 나 자신이 보여주지 않는다. 우울이 찾아오면 말도 어눌해지고 심한 무기력감으로 외모를 신경쓰지 못해 행색도 추레해지며 마치 꺼질 듯 말 듯 한 전구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대인기피증상이 심해진다. 그래서 집밖으로 나가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게 돼 아무도 만나지 않게 된다.

이것은 단순한 성격 문제나 주변인들과의 친목 문제 그 이상의 심각성이 있다. 학업을 중단하게 되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게 되거나 연락 두절로 오랜 인연을 맺어왔던 인간관계도 박살이 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번 무너진 황량한 나의 삶에, 그 사막과 같은 세상에서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다시 걸어야 한다. 그리고 다시 쌓아 올려야 한다. '언젠가 다시 무너질지도 모르는 그 모래성'을...

중단했던 학업도 다시 도전해야 하고 병가를 너무 길게 써서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일자리도 다시 알아봐야 한다. 친했던 사람들에게 용기내어 전화해 그동안 아파서 연락을 못했다며 미안하다는 아쉬운 소리도 해야 한다. 그들이 어디가 아파서 그랬냐고 물어도 속 시원히 대답해 줄 수도 없다. 그렇게 쉽게 내 병을 커밍아웃할 수는 없다.

우울증을 겪고 있지만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없는 나. 그리고 나의 답장을 기다리다 지쳐 언제나처럼 떠나버리는 내 주변 사람들. (c) 지인과의 대화 화면 켭쳐

직장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학원이나 학교는 선생님이 자주 바뀌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학생들에게 혼란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경력이 오래되고 일을 해 본 곳도 다양히 많이 있지만 나에게 묻는다. “왜 이렇게 직장을 자주 옮기느냐고....”

조울증인 것을 밝힐 수 없는 보수적 집단인 이 교육 현장에서 나는 또 다시 거짓말로 내가 살아온 삶을 꾸며야 했다. 세상으로부터의 '나의 부재의 이유'를 애써 지어내야 했다. 운이 좋아서 가까스로 들어간 일자리도 재발을 하면 다시 처음부터 같은 싸이클을 돈다. 나는 그렇게, 조울을 온몸으로 겪어내야 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던가. 이런 나의 삶에 한 줄기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재능기부를 시작했다.

온라인에서 가장 큰 조울증 커뮤니티에 내가 살아온 이야기와 함께 조울증 관련 외국 서적을 번역하여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많은 분들이 나의 이야기에 공감해 주었고 응원 댓글이 예쁜 열매처럼 주렁주렁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 달디단 열매들을 먹으면서 성장했다. 위로 받았다.

(c)koreahealing.net

나와 같은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과 그들의 곁에서 울고 있는 보호자들을 위해 온힘을 다해서 정성껏 글을 써내려갔다. 사람들은 도움을 받았고 나는 기쁨을 받았다. 그 글들을 접한 출판사들과 언론사가 같이 일을 하자며 손을 내밀었다.

처음이었다. 나의 삶에 대해, 그리고 자꾸만 무너지는 내 모래성에 대해서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가슴 먹먹한 그 따뜻함이. 태어나서 가장 따스했던 순간이었다. 내가 믿는 신의 은총을 이렇게 받는 구나 하면서 감사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 소중한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마인드포스트>에도 당사자 이야기를 용기내어 연재를 하고자 마음먹었다.

사람이 한 가지 일을 10년 이상 하게 되면 전문가 수준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17년 간의 조울증 경력을 가진 나를 '프로'라고 지칭하고 싶어졌다. "진짜 끝은 넘어질 때가 아니라 포기할 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언급한 '프로'는 실수를 하지 않는 완벽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엊그제도 무너져버린 나의 삶도 나는 꿋꿋이 견뎌냈고 이렇게 나의 몸을 일으켜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며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이것이 더 프로답다고 생각했다.

많은 이들이 나의 조언을 고깝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낀다. “제 코가 석자인 주제에 누가 누구를 돕느냐”며 나를 지탄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살아있다. 살아있는 것만큼 생산적인 것이 어디 있겠는가.

나와 같은 우울증을 겪어내고 있는 분들께 말하고 싶다. 애써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 생산적이지 못한 자신의 삶에 죄책감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 두려움과 자책감은 같은 가지에서 나온다. 이 가지들을 베어내고 베어버려야 한다.

그러니 늘 아픔을 품고 살아야 해서, 그 어느 것도 제대로 해 내지 못한 자신이 스스로를 '최악의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계실 수도 있는 당사자 분들께 나는 감히 말씀드리고 싶다.

"숨쉬는 것 자체가 이미 충분히 생산적인 일"이며, “살아있는 것 만으로 충분하다”라고...

나는 오늘도 이 글을 읽어주실 독자분들께 따뜻한 다독임을 드릴 수 있는 좋은 글귀를 적으며 이 글을 마치려 한다.

당신, 참 애썼다.

 

나는 이제 안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야 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에 지쳐,
당신에게 눈물 차오르는 밤이 있음을.

 

나는 또 감히 안다.

당신이 무엇을 꿈꾸었고,
무엇을 잃어 왔는지를.

 

당신의 흔들리는 그림자에
내 그림자가 겹쳐졌기에

절로 헤아려졌다.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뛰어갔지만
끝내 가버리던 버스처럼

늘 한 발짝 차이로
우리를 비껴가던 희망들.

 

그래도 다시 그 희망을 쫓으며
우리 그렇게 살았다.

 

당신, 참 애썼다.
사느라, 살아내느라,

여기까지 오느라 애썼다.


부디 당신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
아직 오지 않았기를 두 손 모아 빈다.

 

정희재 / 어쩌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 中

어쩌면 당신에게 삶을 살아갈 ‘용기’란 ‘기적’과 같을 수도 있다. 알고있다. 용기는 가지기 힘든 것이다. 하지만 어디선가 기적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여전히 ‘기적’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 않을까. (c)글맛그림캘리그라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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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민규 2019-12-22 12:24:26
지인들과 공유해서 읽었습니다. 글을 정말 잘쓰시네요.

전규현 2019-12-22 12:16:08
귀하고 중한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김율리아나 2019-12-20 23:49:04
1탄부터 읽어온 당사자독자입니다.
저 기억하실지요..
얼마전에 진단받아서 앞이 깜깜했는데
글을 읽고 저도 기록하는 습관을 길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위의 글을 읽으니 친한 언니가 경험담을 얘기해주면서
토닥토닥 조언을 해주시는 것 같아 눈물이 계속나네요ㅜ
저는 드리는것없이 좋은 말을 받기만해서
죄송하기도하고 감사하기도하고..
기자님같은 친언니가 있음 좋겠어요ㅋ

(마인드포스트 정말 좋은 곳 같아요.
번창하세요~)
그럼3탄 기다릴게요♡

김도윤 2019-12-20 23:32:56
다음글이 기대됩니다!얻는것도많고요,,

이지수 2019-12-20 18:57:41
감동적이고 좋은글 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