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내가 정체성의 소유권을 쟁취하기 전까지, '정신질환자'는 나에게 부여된 꼬리표였다
[전문] 내가 정체성의 소유권을 쟁취하기 전까지, '정신질환자'는 나에게 부여된 꼬리표였다
  • 송승연 기자
  • 승인 2020.01.01 19:02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 글은 정신장애인 당사자이자 피츠버그 급진적 정신건강단체 '인사이드 아워 마인즈(Inside Our Minds)' 사무총장인 알리사 사이퍼(Alyssa Cypher)가 피츠버그 지역지 ‘퍼블릭 소스'에 게재한 칼럼이다. 사회학자 토마스 쉐프가 발전시킨 ‘라벨링 이론’에 의하면 일단 라벨이 붙은 개인에게 사람들은 그 라벨에 해당되는 반응을 기대하고, 대상자 역시 사람들의 기대에 일치하도록 행동하여 역할을 제한한 채 관계를 유지한다고 전제한다. 당사자운동은 자신들의 라벨링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 꼬리표는 누가 붙이는 것인가? 그리고 그 꼬리표가 기대하는 역할은 어떤 것이었는가? 그 꼬리표는 우리에게 정말 이익을 가져다주었는가, 아니면 피해를 주었는가? 이 글은 ‘라벨링’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정신장애인 당사자의 경험이 담겨 있기 때문에 많은 고민과 질문을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다. 마인드포스트는 전문을 옮겨 싣는다.
알리사 사이퍼 (Photo by Kat Procyk/PublicSource)
알리사 사이퍼 Photo by Kat Procyk (c)PublicSource.

‘정신질환’이라는 꼬리표는 내가 늘 알고 있던 것이지만, 이는 결코 나를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꼬리표는 내가 어렸을 때 주어졌고, 그때부터 난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 꼬리표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내 삶에 어떻게 들어맞는지 알아내기 위해, 머릿속에서 그 꼬리표를 이렇게도 돌려보고, 저렇게도 돌려보며 맞추어 보았다.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다는 것일까?”

‘정신질환’이라는 용어는 무언가 나의 내면에 잘못된 것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 같았고, 이는 무언가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야 하거나 최소한 그것을 관리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당신은 삶의 나머지 기간(평생) 동안 정신질환을 관리해야 합니다.”

정신건강전문가들 중 몇 명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문장을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되새겼다. 청소년에게 ‘당신 삶의 남은 기간(for the rest of your life)’은 매우 긴 시간이다.

나이가 들면서 점차 정신질환이라는 꼬리표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내 선택이 아니라 내 인생의 팩트로서 말이다. 그 꼬리표가 가진 선입견은 나 자신을 몰아붙이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내가 질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나는 정신건강 영역에서 영감을 주는 연사로 일할 수 있게 됐다. 나는 십대 청소년들 혹은 청년들이 가득 찬 강의실로 가서 나의 이야기, ‘나의 성공담’을 들려주었다. 그러나 나는 정말로 성공했다고 느끼지 못했으며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방법이라고 혹자는 말했다.

이것이 권한부여하는 것인지에 대해 나 자신과 논쟁했다. 여기서 ‘권한부여(empowerment)’는 마치 영감을 주는 방법을 아는 사람들에 의해 정의된 것 같았고, 질환을 가진 사람으로서의 내 삶에 대한 판에 박힌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나서 말을 해야 하는 것이 두려웠다. ‘성공담’은 내게 처방된 또 다른 ‘라벨’처럼 느껴졌다.

‘질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는 이유로 난 영감을 주는 사람이 됐다. 난 이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난 조금이라도 질환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인간으로서의 우리의 가치가 규범을 준수하는 것에 기반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때까지 그 꼬리표에게 쫓기면서 인생을 보냈으며 정작 나의 눈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시선에 순응하고 받아들여지려고 노력했다. 비밀리에 나 자신을 ‘매드(Mad)’ 혹은 ‘크레이지(Crazy)’라고 언급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어린 시절에 좋아했지만 ‘결코’ 큰 소리로 말하지 못했던 라벨이다. 이 정체성을 선택한 후, 이것은 마치 내게 지시하기보다는 내 마음과 나의 몸, 나의 현실을 가로질러 마침내 주체성을 획득했다는 느낌을 줬다.

그 이후 나는 증상들만을 말하는 것은 생산적이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게 됐다. 나는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것의 본질을 다루고 내 이야기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고 싶었다.

내가 불안감에 사로잡혔을 때 가슴이 쿵쾅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에 대해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설명이 완벽하지 않다. 그 불안감은 어렸을 때 의료 전문가 손에 아버지를 잃은 것에 의해 야기된, 그러니까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혹시나 가족 중 누군가 죽어있는 것을 발견할까봐 생긴 유년의 두려움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떨까?

‘죽은 아버지를 둔 소녀’ 그리고 ‘트라우마를 가진 소녀’라는 꼬리표는 초등학교까지 나를 따라 왔다. 그리고 이는 1학년 때부터 나를 다르게 대우하도록 만들었고, 혹여 스트레스를 줄까 두려워 영재학급으로부터 나를 배제했다. 수업시간에 지루하게 앉아서 내가 뒤처지는 동안 친구들이 앞서 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내가 왜 벌을 받아야하는지에 대해 궁금해했다.

우울증이 어떻게 내 마음속의 모든 것을 잿빛으로 변하게 하였는지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내 마음이 잿빛으로 변한 것은 고등학교 때 남자친구에게 학대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고교 선생님들과 학교 상담사가 인식하지 못한 것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받았다.

나는 학교에 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하지만 학교의 관리자들은 나에게 무엇이 문제인지를 묻기보다 법적 조치에 대한 위협적인 편지를 어머니에게 발송했다. ‘정신질환자’, ‘위험한 청소년’, ‘관심끌기 행동(attention-seeking)’ 등의 꼬리표는 내가 필요로 하는 지원과 정신건강 케어에 접근하는 것을 방해했다.

대학을 다닐 때, 내가 가지고 있는 자살 생각과 자해 등에 대해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도움을 요청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캠퍼스 경찰은 내가 가지고 있던 아스피린과 버터나이프를 압수하기 위해 내가 다니던 오벌린 대학(Oberlin College) 기숙사로 찾아왔다. 대학 관리자들은 24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나에게 학기 중 휴학을 강력히 제안했는데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의견이나 도움을 위한 최선의 방법을 묻지도 않았다.

친구들과 룸메이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물을 흘리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해 하며 지켜보는 동안 나는 기숙사 방을 비웠다. ‘골칫거리’, ‘자살 위험’, ‘경계성’이라는 꼬리표들은 내가 평생 동안 노력했던 어떤 학업적 성취들보다도 훨씬 강력했다.

그리고 5년 후 대학원 마지막 학기 중 내 주치의는 태연하게 중퇴를 제안했다. 내가 전액 장학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계속 공부하는 것이 나를 지탱해주는 유일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 당장 이 일들을 당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라고 말했다. 지금 나의 학위는 안방에 자랑스럽게 진열되어 있고, 그 학위를 받기 위해 무대를 가로질러 걸었을 때 나는 안도와 반항의 눈물을 흘렸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들이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에게 ‘아프다’는 꼬리표를 붙였을까? 왜 트라우마에 대한 후폭풍을 해결하는 것을 내가 책임져야 했을까? 트라우마에 대해 정신적 고통과 눈물보다는 침착함과 회복탄력성(resilience)으로 대응했어야 했을까?

나는 증상이 인생에서 가장 큰 장애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 또한 인터넷에서 읽을 수 있는 우울증의 심화 혹은 불안감의 메스꺼움과 같이 완벽하고 명료하게 묘사된 이야기들과도 분명히 연관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왜 그런 이야기들이 항상 정신건강에 관한 우리의 대화에서 가장 앞에 제시되는 유일한 이야기인지 결코 이해하기 어렵다. 내게 있어 인생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꼬리표(label)’였다.

꼬리표는 언제나 나의 승인 없이 붙어 있었다. 라벨들은 진정한 나 자신이 되기 위해서, 과거의 트라우마로부터 치유되고 싶을 때마다 나를 괴롭혔다. 마침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선택권을 얻었을 때, 나는 ‘매드(Mad)’ 정체성을 선택했다.

매드는 정신질환과 다른 방식으로 내게 말했다. 매드는 나에게 일어난 것에 대한 나의 반응보다 나에게 일어난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언어를 줬다. 매드는 질병모델이나 의료모델보다 내 마음과 경험을 훨씬 더 잘 설명해줄 수 있는 개념들(신경다양성, 정신건강의 사회적 결정 요소, 트라우마의 충격 등)로 안내했다.

나는 정신질환을 나의 경험과 내가 속한 공동체의 경험에 권한을 부여하는(임파워링하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싶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매드’는 나에게 부여된 꼬리표가 아니라, 내가 연관시키고, 연결시킨, 내가 선택한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원하는 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나 자신이 되는 것이다.

이 선택은 많은 사회적 결과를 가져왔다. 혼자 힘으로 정신질환이라는 꼬리표를 거부한 이후 이것이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거나 심지어 화나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특히 정신건강 영역에서 더 전통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더 분노했다. 그건 마치 나의 정체성이 그들의 정체성을 덮어쓰는 것 같았다.

어떤 사람들은 “넌 지금 정신질환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있는 거야”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정체성을 나에게 강요했다. 나는 스티그마를 영속시키는 사람이라고,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주고 있다고, 그리고 여기서 자세히 서술할 수는 없지만 그 외 내용들로 나를 잘못된 사람이라고 부르는 항의 메일(hate mail)을 받았다.

나는 ‘매드’라는 정체성을 선택했다는 이유로 피츠버그 지역 정신건강 필드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해고됐다. 곧, 법적 재량권을 위한 많은 기회가 배제된 차별을 당했다. 이러한 부정적인 상호작용이 있을 때마다어린 시절에 경험한 그 부당함과 무가치함의 감정들이 되살아났다. 그 시절과 지금의 차이는 이제는 숨이 턱 막히는 감정을 훨씬 덜 느낀다는 것이다.

나는 이 사회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그리고 나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방법의 선택에 대해 받아들이기를 원한다. 내 친구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다고 밝히고 있으며 나는 그들의 경험과 관련이 있는 그들의 정체성을 존중한다. 그들이 나의 경험과 관련된 나의 정체성을 존중하는 것처럼 말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들여 정신건강을 바라보는 대안적 방법들에 대해 배우기를 바라며, 왜 나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이런 방식으로 정체성을 선택했는지 듣기를 바란다. 나는 항상 행복한 것도 아니며 항상 잘 지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가 나를 위해 만들고 정의해준 낯선 정체성보다는 내가 정의한 나 자신 속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내게 의미가 되는 것을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재정의했다. 이 꼬리표는 ‘내 삶의 남은 기간 동안(for the rest of my life)’ 괜찮다.

 

*역주: ‘매드(Mad)’는 정체성의 일환이므로 ‘미친, 정신나간’ 등의 본래 의미로 기술하는 것보다 ‘매드’라고 표기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는 퀴어(Queer)라는 용어가 성소수자 운동의 맥락에서 재탄생한 것과 유사하다. 퀴어는 ‘괴상한, 이상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과거 동성애자를 가리키는 멸시적인 속어였으나 1980년대 미국의 급진적인 동성애자 인권운동진영에서 이 용어의 개념을 긍정적이며 전복적인 방식으로 사용하여 오늘날 부정적 함의는 사라졌으며, ‘퀴어’라는 원문그대로 표기되고 있다. ‘매드’ 정체성 또한 현재 부정적, 비하적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언어를 정치적으로 되찾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다시 말해 정신적 고통에 대한 생의학적 설명에 도전하기 위해, 정신과의사와 같은 전문가그룹에 의해 부여된 정체성에 저항하기 위해 ‘매드’라는 정체성을 만들어낸 것이다(LeFrancois et al., 2013). 오해하지 말 것은 ‘매드’가 기존 정신의학의 영역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견딘 정신적, 물질적 고통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당사자가 경험한 것을 진정으로 인정함과 동시에 정신장애인을 병리화하고 비하하는 임상적 꼬리표를 거부하는 것을 추구한다(Cresswell & Spandler,2016).

 

원문보기(클릭)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인랑제수민 2020-01-01 05:53:44
해피뉴위어. 새해 첫날 좋은글 읽어 감사.
극히 공감해요. 알리사처럼 라벨링 반대합니다. 꼬리표로 정체성 매기는 거 싫어요. 나로나된것 하나님 주신 것 교회에서 배웠지요. 나로나된것 내가 정체를 매겨야 합니다. 자기결정권으로 셀프아이덴터티 확고해야 삶에 휘둘리지 않지요.

경계성장애, 당신은 매드야, 장애도아니고 일반인도 아냐. 별 이야기가 내 아닌 남이 떠들어댄다. 매드이든 크레이지든 온기를 녹이는 광기가 될 수 있고, 불행을 논하기 전에 천재성으로 이웃에 공헌할 수 도 있는게 나. 임파워먼트 역량강화가 님들이 주는게 아니어야 하며 권한부여가 내 속에서 절로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내 정체가 확정되며 트라우마에서 이긴다.

난 초등6 아버지죽음이 술로 자살한 것으로 충격받았고 아스팔트가 일어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