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 류원용의 일기장] 앗, 내게 천지개벽이 일어났다(4)
[당사자 류원용의 일기장] 앗, 내게 천지개벽이 일어났다(4)
  • 마인드포스트
  • 승인 2020.01.01 18:5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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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면 나는 지금 같은 언변(言辯) 실력이 없다는 이유로 나의 꿈과 야망을 영원히 버려야했다. 그리고 금쪽 같은 청춘을 정신병원에서 헛되이 허비해야만 했다.

내가 의사와 면담할 때 지혜롭게 말만 잘 했어도 나는 정신병원에 입원하지 않고 한참 두뇌 회전 빠를 때를 놓치지 않고 내 꿈을 향해 매진했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지금처럼 남들에게 낙오자처럼 비쳐지는 삶을 살지 않았을 거라는 말이다.

그러나 내가 부딪혀야만 했던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에누리’도 ‘관용’도 없는 살벌한 곳이었다.

사람들은 병원이 사람을 치료하고 살리는 곳이라고 믿는다. 나도 병원은 그러한 성스러운 곳이라 믿고 병원을 찾았다. 그러나 현실의 정신병원은 폭력과 억압 그리고 종사자들의 권위주의로 가득 찬 곳이었다.

의사는 의사에게 법을 말하면 으레 “나 법대생보다 공부 잘해!”, “어디 불만 있으면 네가 법대로 해봐!”라는 식의 막가파 근성이 배어있었다. 간호사에게 나이팅게일은 동화책 얘기였으며, 보호사나 주사는 사람이 아닌 깡패들이었다.

간혹, 정의와 인권을 찾는 이들의 절규가 있었지만 미친 자의 헛소리 그 이상의 취급도, 그 이하의 취급도 받지 못했다. 그때마다 의료 권력은 그를 보호실에 가둔 후 “잘못 했습니다. 살려 주십시오”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결박하면 그만이었다.

아무런 증상도 없이, 단지 아버지에게 강제로 떠밀렸기 때문에, 단지 주치의에게 내가 미쳤다는 말실수 하나 했기 때문에 강제입원 당한, 입원 당시 정신이 완전히 회복되어 있었던 정상인 류원용이었다.

나는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철저히 자기결정권에서 배제된 채, 어떠한 설명도 없이 처음 2개월 동안은 명백한 주치의 실수로 아주 독한 약을 죽을둥 살둥 고생하며 먹어야 했다. 어쩌면 진짜로 죽을까봐 약을 끊은 상태로 나머지 3개월 동안. 그리고 다 합쳐서 5개월을 국립XX병원에서 강제로 입원당해야 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우연히 그 때 주치의였던 젊고 화통했던 박모 선생님을 뵐 기회가 있어서 그분에게 “그때 왜 약을 끊으셨습니까?”라고 물었더니 그 분 말은 “류원용 씨가 너무 힘들어하기에 끊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너무 힘들어 하니까 약을 끊었다면 왜 그렇게 내가 힘들어 할 약을 굳이 처방했는지 알고 싶었다. 혹시 약물실험 마루타로 나를 이용한 건 아닌지?

또 약을 끊었고, 그 때문에 언젠가 반드시 재발할 거라고 신신당부하실 것이면 뭐 하러 3개월 동안이나 약을 끊은 채 방치하셨는지? 혹시 약을 끊은 채 병원에서 생활하는 동안 재발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어찌됐든 나는 아무것도 몰랐던 죄로 국립XX병원에 첫 번째 입원해 멀쩡한 사람 진짜 폐인 만들기 프레임에 갇혀 진짜 폐인이 된 채 5개월 만에 퇴원했다.

명의(名醫)는 죽을 사람도 살려 보고, 실수로 사람도 죽여 봐야 명의가 된다고 한다. 나는 그때의 나의 희생의 대가가 한 명의 명의 탄생으로 이어졌기를 그때의 주치의 선생님을 위해 기원 드려보는 것이다.

결박 사건

두 번째 결박은 24시간이었다. 나는 주치의 선생님께 마구마구 빌었다. “살려주세요. 선생님!” 주치의 선생님은 요지부동이었다. “원용님이 너무 큰 잘못을 했어요. 24시간 동안 묶여 있으면서 깊이 반성하세요.”

묶이자마자 나는 “사람 살려~ 나죽네”가 입 밖으로 나왔다. 약물 부작용으로 극심한 마음의 불편감, 안절부절증, 로봇처럼 몸이 굳는 증상이 생겨 가만히 있기도 힘든 상황인데 이런 사람을 묶어서 고정시켰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것도 24시간을 말이다.

24시간 동안 “사람 살려”라고 몇 번을 악을 썼는지 셀 수조차 없었다. 손목을 얼마나 비틀었던지 손목은 부러질 것 같았다. 시간은 왜 그리 안 가는지 엄청난 고통에 죽을 것 같았는데 시간을 물어보면 고작 몇 분 지나지 않았다. 하늘이 노랗다가 빨갛다가 제 멋대로 빙빙 돌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람 살려~”라고 악쓰는 것뿐이었다.

새벽이 되자 남자 직원이 "이 XX 저 XX" 씩씩대며 보호실 문을 열고 침대로 올라오더니 여러 차례 온 체중을 실어 사정없이 발로 내 허벅지를 밟아댔다. 그러면서 “잠 와 죽겠는데 이 XX 때문에 잠도 못 자겠네. 너 조용히 안 해. 또 악쓸 것이여? 안 쓸 것이여?” 그러는 것이었다. 나는 얼마나 아팠던지 ”악 안 쓸게요. 안 쓸게요”라고 말하면서 속으로 울었다.

국립XX병원에서는 직원들이 나이트 근무 시, 병원에서 '자기 위해' 출근하고, 병원에서 실컷 자고 나이트 근무수당까지 합쳐서 보수를 받는다는 것을 나는 그때서야 알았다.

다음날 주치의 선생님이 바쁜 시간을 쪼개서 나를 보기 위해 왔다. 얼마나 고생이 많았냐며 위로하면서 나를 유심히 보더니 갑자기 “어? 허벅지가 부었네. 무슨 일 있었어요. 바지 한 번 내려 봐요”라고 말했다. 내가 바지를 내려 보니 허벅지가 온통 피멍이 들어 있었다. 주치의는 “누가 그랬어요? 내가 꼭 주의를 줄게요”라고 건조하게 말했다.

어찌됐던 그때 내 허벅지 밟은 직원이 미워서 한때 나는 공무원 노조를 극도로 싫어했었다. 그 직원이 공무원 노조원이었기 때문이다.

공수부대원이 한 번 낙하산을 타고 나면 세상에서 무서운 것이 없다고 한다. 나도 극심한 마음의 불편감, 안절부절증, 로봇처럼 몸이 굳는 증상을 지닌 채 24시간을 결박당하고 나니 결박에 관해서는 무서운 것이 없어졌다.

그렇게 24시간을 죽을 고생을 다하면서 결박당하고 나니 나의 육체는 한계가 왔다. 몸은 아예 로봇보다 더 굳어서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안절부절증 때문에 직원이 강제로 의자에 앉혀도 20초도 앉아 있지 못하고 일어났다.

이 두 번째 결박에서 풀려난 지 며칠 후 전술했듯이 내가 죽을까봐 겁났던지 병원에서 투약을 멈췄다.

나는 약물의 부작용, 즉 극심한 마음의 불편감과 극도의 안절부절증, 몸이 로봇처럼 굳는 증세로 인한 모든 고통에서 해방됐지만 내게는 국립XX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부터 종종 나를 찾아오는 가위눌림 비슷한 것이 있었다. 정말 부끄럽고 너무 부끄러워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억이 떠오르는 것이다.

바로 내가 막 발병했을 당시 만취한 사람보다 더 횡설수설하면서 언어폭력을 행사하며 친구들과 교수님 그리고 후배들에게 엄청난 민폐를 끼쳤던 기억이다. (고의성은 없었다) 그 외에 엉엉 울고 다니고, 악을 고래고래 지르며 다니기까지 했었다.

너무 부끄러워서 모교 근처에도 못갈 것만 같았다.

퇴원 후 나의 실상은 갈 곳 없는 불청객 아닌 불청객이었으며, 병원에서부터 줄곧 생각해왔듯이 “내 인생 이렇게 끝나는 구나. 아! 내 인생 끝났다. 아! 파토난 내 인생이여”라고 되뇌며 좌절 속에 묻혀 사는 이방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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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랑제수민 2020-01-02 07:22:42
안타깝고 공감이가고 같은 입장에 눈물이 배입니다.
나도 굴종을 배웠고 나의 상관 청소부 간병인 보호사 간호사 복지사 상담사 의사 치료진 서열대로 충성과 복종의 날들 보냈습니다. 빨리 퇴원하려는 잔꾀를 쓸 수 밖에요.

똑똑한체 하면 오지랍 넓은 놈으로 간섭쟁이로 꼬리표 라벨링해서 그들끼리 주고받았지요. 퇴원해서 장애등록 때문에 떼본 진료기록지에 반복기록된 나의 악행(?)들....아. 그때문에 내가 오래 갇혔구나....그래도 장애등록을 받지 못하지요. 우울강박은 장애 안줍니다.

내 의견 내 감성 내 제안이 받아들여지는 삶을 만나는데 꼬박 8년이 걸리더군요 그래도 비실비실 아부 아첨 눈치를 봐야 기초수급받습니다. 내가 나를 라벨링해야 대한민국에 숨쉴 수 있는 거지요. 정신병자야 라고.

그래도새해소망이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