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형 기자의 변론] 기억, 트라우마, 상처 그리고 삶
[이관형 기자의 변론] 기억, 트라우마, 상처 그리고 삶
  • 이관형 기자
  • 승인 2020.01.08 19: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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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Suermondt, Cambre, 2006. 200x280cm. oil on canvas. Courtesy of the Artist
Robert Suermondt, Cambre, 2006. 200x280cm. oil on canvas. Courtesy of the Artist

저는 기억력이 좋은 거 같습니다. 제가 돌 사진을 찍을 때 어머니가 저를 의자에 앉히고, 사진사는 카메라로 절 찍던 풍경이 기억납니다. 그때, 의자 옆에 화병에 담긴 빨간 꽃들이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남아 있는 돌 사진엔 앉아 있는 제 모습과 화병에 담긴 빨간꽃이 담겨져 있어요.

다섯 살 때도 기억이 납니다. 당시 서울엔 여러 가정이 한 지붕 아래 마당을 같이 공유하는 집이 많았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옆집에 사는 다섯 살 아이에게 주먹으로 코를 맞고 울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좋은 기억들도 있습니다. 유치원 때 재능잔치라는 행사를 통해 장구를 치는 공연을 하기도 했었죠.

그때 천장에 달린 모빌들이 너무 신기하고 예뻐서 쳐다보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제 머릿속에 남아 있는 기억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내용들이네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반 아이들에게 당했던 크고 작은 괴롭힘들이, 아버지로부터 혼나고, 겁 먹고, 주먹으로 맞고, 머리채를 잡혀 당기는 기억들이, 그 기억들이 아직도 제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 예전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살아 숨신다는 것.

만약 그 기억들에 행복한 추억들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니면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이나 영어 단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제 머릿속에 남아 있는 기억들은 아픔과 상처의 기록들입니다.

"소심하게 언제까지 마음에 담아 두려고 그래?"

"남자답게 떨쳐 버려!"

"누구나 그런 상처들은 안고 사는 거야. 잊고 훌훌 털어버려!"

이런 말을 들을 때 저는 어떤 생각이 들까요?

만약 같은 반 친구 길동이가 점심을 먹는 제게 "너는 뚱뚱해서 돼지 같아"라고 말했다고 칩시다. 당시 그 말을 들었을 때, 저는 기분이 나쁘겠죠. 그때 화를 내거나 아니라고 따지거나 하면 다행이겠지만, 저는 아마도 겁이 나서 그 말에 아무 대응도 하지 못하고 지나쳐 버릴 겁니다.

그리고 다음날 점심에 밥을 먹는데 김치찌개에 들어간 돼지고기를 보고 그 말이 떠오릅니다.

그럴 수도 있죠. 그냥 넘어 갑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 그 친구 길동이를 봤는데, 그 말이 또 떠오릅니다.

이것도 그냥 넘어 갑니다.

그런데 돼지란 말을 들은 날이 화요일이었고, 비가 내리는 날이라면? 매주 화요일마다 돼지란 단어가 떠오르고 비가 오는 날마다 돼지란 단어가 떠오른다고 칩시다. 그런데 일 년 뒤에 저는 어떻게 변해 있었을까요?

길동이를 마주칠 때마다, 김치찌개를 먹을 때마다, 화요일마다, 비가 올 때마다 그 말이 떠오를까요?

아마 돼지가 나오는 모든 음식을 먹을 때마다 그 말이 떠오르고, 비가 아니라 물만 봐도 그 말이 떠오르고, 화요일이 아니라 돼지라는 말을 들었던 점심 때마다 그말이 떠오른다면 어떨까요?

이건 어디까지나 예시일 뿐이지만 저의 실제 삶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Robert Suermondt, Ritournelle, 2006, 120x130cm. oil on canvas. Courtesy of the Artist
Robert Suermondt, Ritournelle, 2006, 120x130cm. oil on canvas. Courtesy of the Artist

하루의 시작을 아침에 일어나는 것으로 시작한다면, 화장실에 가서 씻을 때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들이 있습니다.

길동이가 제게 돼지 같아, 라고 한 것과 같은 기억들이 수십 개는 있어요.

처음에는 한두 개의 기억들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또 다른 기억들을 데리고 옵니다. 처음 한 개에서 시작해 두 개, 세 개, 다섯 개, 열 개까지 불어난다면 어떨까요.

저는 그것들에 휩싸이고 떨쳐내기 위해 괴성을 지르곤 했습니다.

이러한 증상들이 걸을 때, 자려고 누울 때, 밥 먹을 때 반복되죠. 그 기억들이란 것들도 시기마다 계절마다 제 컨디션에 따라 로테이션을 돌더군요. 아마 다 합쳐 놓으면 족히 100개는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것들이 서로 번갈아가면서 지들끼리 손에 손을 잡고 저를 찾아 와요. 앞서 말했듯이 저는 환청이나 환시를 겪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보지 않고도, 들리지 않고도, 제 머릿속에는 3D 입체로 증강 현실을 보듯이 그때의 사건과 말들이 계속 떠오릅니다.

보는 것처럼, 들리는 것처럼 매우 생생하고 현실 같죠. 그래서 전 늘 이어폰을 갖고 다니면서 음악을 들어요. 가끔 가요를 듣기도 하지만 대부분 찬송가를 듣습니다.

살기 위해서지요.

씻을 때, 걸을 때, 차 탈 때, 언제나 늘 제 귀에는 이어폰이 꽂혀 있습니다. 그나마 떠오르는 증상들을 줄일 수 있으니까요. 심지어 잠을 잘 때는 티비를 켜 놓습니다. 눈을 감고 잠에 드는 순간까지 그 기억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제가 소심하고 쪼잔해서 옛날 일들을 잊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근데 이건 그냥 병의 증상이라고 생각해주세요. 그리고 제게 그런 기억을 안겨  준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렇게까지 미워하는건 아닙니다.

어쩌겠어요, 그냥 제 병이고 증상들인 것을요.

Robert Suermondt, Lente, 2006, 200x280cm. oil on canvas. Courtesy of the Artist
Robert Suermondt, Lente, 2006, 200x280cm. oil on canvas. Courtesy of the Artist

그래도 저 딴에는 살 방법을 찾겠다고 최근 다짐한 것이 있습니다. 누군가 상처주는 말이나 행동을 할 때, 그러지 말라고, 내 기분이 나쁘다고, 마음이 아프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과거의 그 상처에 대해 너무 괴로웠고 힘들었다고 누군가에게 표현했습니다.

물론 감정적으로 욕을하거나 비난을 하거나 그런건 아니였지만, 표현을 하면서도 너무 미안하고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정말 미안하고 죄송스러웠습니다.

다만 고통과 괴로움으로 부터 너무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최소한의 내 상태를 알리고 표현을 하고 싶었어요.

이젠 좀 더 즉각즉각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나 힘들다고, 나 상처입는다고,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표현하는 연습을 해나가고자 합니다.

기억력이 좋다는 건 뭘까요.

제게 한 가지 좋았던 점도 있습니다. 바로 책을 쓸 수 있었다는 거죠.

지금 다시 쓰고 있는 바울의 가시란 책. 페이지 수를 세보니 외부 원고랑 부록 빼면 250페이지를 넘겠더라고요. 상식적으로 아무리 자기 경험담을 써도 250페이지 분량의 기억을 쏟아 놓긴 쉽지 않잖아요? 그것도 너무나 디테일하고 생생하게 쓰는게 말이나 됩니까?

물론 그런걸 기억하고 있어서 제가 이런 병을 갖고 있는 거지만요.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여러가지로 많이 건강해 진 것 같아요. 증상들은 여전하지만, 좀 더 나에게 솔직해지고 사람들에게 표현하는 연습을 하면 더 나아지겠죠.

이 글을 쓰는 것도 그 과정 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다음엔 또 다른 증상인 불안, 우울, 경도의 관계관념, 망상 등등에 대해 하나씩 써보고자 합니다.

증상명만 들어도 참 힘들고 안쓰럽단 생각이 들지 않나요? 그래도 솔직 담백하게 써나가고자 해요. 혹시 압니까? 나중에 제 글을 통해 의사나 약사, 심리상담사, 사회복지사나 시설 종사자, 교수나 전공 학생들이 조현병과 당사자에 대해 이해하고 연구하고 치료하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요.

Robert Suermondt, Cramolsle, 2006, 110x90cm. oil on canvas. Courtesy of the Artist
Robert Suermondt, Cramolsle, 2006, 110x90cm. oil on canvas. Courtesy of the 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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