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삶을 응원할게”… 조울증을 겪는 엄마가 딸에게
“너의 삶을 응원할게”… 조울증을 겪는 엄마가 딸에게
  • 권혜경
  • 승인 2020.01.06 18: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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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지는 마인드포스트의 권혜경 기자가 자신의 첫딸에게 보내는 어머니로서의 마음 표현입니다. 마인드포스트는 정신장애인의 일상의 작은 일들에 대한 기록도 기사로 채택합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나의 사랑 루시(Lucy)에게.

나는 네가 첫딸이어서 너무 귀여웠는데 어느덧 철없는 엄마를 귀여워해주는 네가 됐구나.

첫 아이를 부모의 '페르소나(persona)'라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었을까. 아무튼 엄마의 불완전함을 대물림할까봐 불안하고 불안한 눈빛으로 너를 바라보았던 기억이 있어.

여자는 출산(出産)과 육아(育兒)로 엄청나게 큰 변화를 겪어서 성격이 변할 만큼 혼란을 겪지. 그리고 신체적으로도 호르몬 변화를 겪어서 누구도 그 혼돈의 시기를 쉽게 건너가지 못해.

엄마도 그 시기가 힘들었어. 힘들다고 인지하지 못하고, 도와달라고 말하지 못할 만큼 힘들었어.

당시 우리 집에서 가장 약한 존재였던 너는 그 탁한 공기를 그대로 흡수했을까.

엄마가 자신감 넘쳐 사업을 벌이다가 수습을 하지 못해 무기력하게 집에만 있을 때 여섯 살인 네가 유부초밥을 만들어서 접시에 담아 몰래 놔둔 적이 있었지.

엄마는 뒤늦게 발견했어. 유부초밥을. 아니 망가져 있는 내 현실을.

목이 메면서 먹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살아내야 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어린 딸에게 너무나 고맙지만 나 자신은 한없이 미운 그 날이었어.

2018년 이맘 때였지. 엄마는 현장에서 손을 다치고 아빠가 혼자서 그 현장을 감당했지.

엄마는 충격으로 불안과 공포에 압도되어 드디어 일상생활을 할 수가 없었지. 더 이상 요리를 할 수가 없어서 냉동볶음밥을 석 달 가까이 먹었어.

너의 막냇동생은 한 겨울에 머릿니가 생길 정도로 돌봐주지 못했고 너의 남동생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와도 난 내복을 입고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어.

크리스마스 예배를 혼자 아이들 데리고 겨우 드렸는데 7층 교회 복도 통유리를 깨고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혼이 났어.

1층 교회 카페에 혼잡한 가운데 있는데 마치 사람 숲에 혼자 고립되어있는 돌섬 같은 느낌이었어.

그래도 어느 집사님 가져다 준 아이스크림 케이크 덕분에 나름의 크리스마스를 보낼 수 있었어.

일주일 넘게 불면으로 불안과 공포에 떨어 더 이상 현실 감각이 없어졌지.

아빠는 현장에서 일하고 있어서 새벽에 잠든 너를 깨우며 ‘나 불안하다고’, ‘나 어떡하느냐고’

나보다 어린 너에게, 나보다 작은 너에게 매달렸지.

너는 졸리고 슬픈 눈을 하고 이렇게 말했지.

"엄마, 작년 이맘때도 불안해하지 않았냐. 근데 이렇게 살고 있지 않냐. 내년 이맘때도 오늘을 웃으면서 이야기 할 거다."

그 말을 듣고 난 뒤 이상하게 안도감이 들어서 약을 먹고 나도 모르게 잠들었던 기억이 나.

정말 네가 말한 내년 이맘때가 돌아왔네.

엄마는 회복되어서 바쁘게 살고 있고 이제는 너를 독서실에 픽업하기도 하고 집에서 요리도 하면서 지내지.

약도 잘 챙겨먹고 더 이상 감정의 파도에 휩쓸려 다니지 않아.

하지만 엄마는 알고 있어. 아마도 또 우리 가정의 고통이 찾아오겠지. 하지만 그럴 때 너의 말을 기억할 거야. 내년 이맘 때 이 일을 어떻게 기억할까. 웃으면서 기억할까, 아니면 울면서 기억할까.

첫딸은 원래 성숙하다고 하지만 왠지 루시(Lucy)는 엄마 때문에 등 떠밀려 성숙해진 건 아닐까 생각하면 미안해.

오늘이 크리스마스네. 오늘은 절대로 유부초밥과 볶음밥을 먹지 말자. 아주 아주 맛있는 걸 먹자.

크리스마스에 우리를 위해 말구유에 태어나신 예수님은 약속하셨어. "내가 너희를 고아(孤兒)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오리라"고.

불완전한 부모, 불완전한 너희를 위해, 완전하신 예수님이 오신 거야.

언제가 우리가 천국에 가는 날, 불완전한 모습에서 완전한 모습이 되는 날, 나에게 준 고통의 의미를 알게 될 거야.

루시(Lucy).

네가 일찍 철들게 해서 미안해. 그런데 얼마 전 가수 양희은의 ‘엄마가 딸에게’라는 노래가 마치 이런 나의 마음을 아는 거 같이 토닥여주었어. 못난 엄마지만 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쓰는 가사.

그중에서도. '너의 삶을 살아라.' 이 가사가 참 좋았어. 엄마가 줄 수 있는 최고의 격려의 말인 거 같아.

이 모든 짐을 내려놓고 너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항상 응원하고 지지할게.

너의 엄마 사라(Sar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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