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형 기자의 변론] "정신과 의사의 진단명만으로 자기 인생을 정의내리지 말아야"
[이관형 기자의 변론] "정신과 의사의 진단명만으로 자기 인생을 정의내리지 말아야"
  • 이관형 기자
  • 승인 2020.01.29 1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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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진단하고 함부로 처방하는 정신과 권력에 문제 제기
말 몇마디로 진단명 내리는 의사... 당사자 진정으로 알지 못해
조현병 진단명이 내 인생 운명까지 결정짓지 못해

저는 10년이 넘게 동네의 같은 정신과 의원을 다니고 있습니다. 큰 대학병원이 아닌, 할아버지 의사 선생님과 두 분의 간호사가 계신 곳이죠. 외관상 작은 동네 병원에 불과하지만, 사실 이곳 의사 선생님은 내세울 게 많은 분이십니다.

그분의 아버지는 우리나라 1세대 정신과 의사로서 일제 해방기부터 치료를 시작하셨습니다. '사이코 드라마’라는 정신치료 기법을 최초로 도입한 분이시죠. 또한 본인이 저술하거나 소장한 1만여 권의 자료들을 서울대병원 박물관에 기증하신 분이기도 합니다. 그분이 담당한 환자들 중에는 화가 이중섭처럼 유명한 분들도 계셨구요. 자녀들 역시 아버지처럼 정신과 의사로서 유업을 이어받았으며 그 자녀들 중 한 분이 저를 진료해 오신 것입니다.

조현병 진단 (c) wikihow
조현병 진단 (c) wikihow

이젠 70세에 가까운 할아버지가 된 의사 선생님은 아직도 저에 대해 확실한 진단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조현병 약을 먹고는 있지만, 전형적인 조현병은 아닐 수 있다는 애매모호한 진단을 하시죠. 진단서를 요청할 때마다 1년 전에는 조현병이었다가, 지금은 외상 후 스트레스에 따른 조현병 증상인 것 같다고 하시는데 여하튼 여전히 애매한 진단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책상 위에는 늘 진단 기준에 대한 표준 책자가 있습니다. 그 책은 족히 2천 페이지는 넘는 두꺼운 책자지요. 아마도 환자들을 마주할 때마다 그 책자를 펴서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의학적 지식 부족하거나 기억력이 떨어져서 일까요? 전 아니라고 봅니다.

똑같은 환자라 하더라도 진단을 할 때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며, 좀 더 정확하고 객관적인 진단명을 내리시는 겁니다. 그리고 본인이 확실하게 판단이 서지 않으면 진단을 보류하기도 하죠. 또 한 번 내린 진단으로 수년을 그 환자에 대해 판단하고 정의내리지 않습니다. 증상이나 건강 상태가 언제든 변할 수 있기에 진단 결과도 바뀌는 것입니다.

한번은 저도 괴짜로 유명한 다른 정신과 의사선생님을 찾아 간 적이 있습니다. 어떤 일로 왔냐는 의사의 질문에 조현병 때문에 왔다고 했죠. 그러자 의사는 거리낌없이 3초만에 바로 대답하더군요.

“말이 어눌한 거 보니, 조현병 맞네!”

저로서는 이런 의사에 대해 신뢰를 갖기 힘들었습니다. 말 몇 마디로 진단명을 내리는 의사보다는 차라리 이것저것 확인해 가면서 진료하는 의사 선생님을 저는 더 믿겠습니다. 물론 누군가는 3초만에 진단하는 의사가 더 용하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요.

우리나라에는 정신의학 분야에 대해선 나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외과, 내과, 피부과, 비뇨과, 성형외과 등등 다양한 의료 분야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정신과에 대해서 만큼은 전문가 아닌 전문가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 St John Ambulance Australia
© St John Ambulance Australia

특히 누군가 우울증 때문에 힘들다고 하면 주변사람들은 갑자기 정신과 전문의로 돌변하게 되죠. 그리고 이런 말을 합니다.

"너만 힘들어? 누구나 겪는 일이야."

"나도 너처럼 힘든 적이 있어서 잘 알아.”

"힘들어도 참어, 다 시간이 해결해 줄거야."

"강한 정신력으로 이겨내야지, 그래 가지고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래?"

"밖에 나가서 시원한 공기 좀 쐬고 와. 걸으면서 운동도 좀 하고."

"감사 일기를 써보는 건 어때?"

"그런 생각들은, 사탄이 시험하는 거야"

"기도를 해봐, 약에 의지하지 말고 신앙에 의지해야지."

이런 처방전이 효과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이런 처방전은 사실 당사자에게 약보단 독이 되기 쉽습니다. 돌팔이 의사가 문제되는 건, 치료에 효과가 없어서가 아니라 목숨을 빼앗을 정도로 생명을 위협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c)brunch.co.kr
(c)brunch.co.kr

당사자가 아닌 당신은, 어쩌면 생각만큼 당사자의 아픔과 고통을 알지 못합니다. 유감입니다만, 의사도 종사자도, 관련 분야 교수들도 생각만큼 우리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우울증이나 불면증에 시달린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약이 아닌 독약이 되는 처방을 내리는 것은, 언론에서 보도하는 일부 사건 사고들을 바라보며 조현병 당사자를 살인마나 사이코패스라고 규정짓는 것처럼 매우 성급하고 단순한 생각에서 나오는 겁니다.

저 역시 이전 글을 통해 여러 증상들에 대해 말해 왔습니다. 트라우마, 관계망상, 불면증, 우울증 등. 17년 전, 조현병 진단을 받는 날 제 진단서에 써 있던 증상들이죠. 실제로 지난날 제가 겪었던 증상들이기도 합니다. 또 삶에 영향을 받은 것도 사실이고요.

(c) National Osteoporosis
(c) National Osteoporosis

하지만 그 증상들이, 조현병이라는 진단명이 제 인생의 운명까지 결정짓지는 않았습니다. 일부 증상은 남아 있고, 일부 증상은 해결되어 사라졌겠지만, 중요한 건, 그것들이 저를 의학적 당사자로 규정 지을지언정, 제 인생의 삶마저 병들게 하지는 못하니까요.

다른 당사자들 역시, 병원에서 의사가 내려준 진단명으로 자신의 인생을 정의내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증상들은 언제든 나아질 수 있으며 진단명도 언제든 변화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당신의 인생과 당신의 가치를 하루에 먹어야 할 알약의 갯수와 종이에 적힌 병명으로 판단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병명과 증상을 보고 판단하면 안 되는 것처럼, 당신 스스로도 자신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의 행복은 어떤 가치관으로 무엇을 추구하며 어떤 열매를 맺느냐에 달려있으니까요.

© 2020 Regents of University of California
© 2020 Regents of University of Califor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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