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 박정자의 수필] 새벽 산책
[당사자 박정자의 수필] 새벽 산책
  • 박정자
  • 승인 2020.02.12 19: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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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tronomer.roc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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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뜩 흐린 중에 주적주적 내리는 겨울비. 오늘도 빗방울을 연속 머금는 우산을 받쳐들고 걷기운동 -운동이라 하긴, 관절염 때문에 천천히 걷는 산책이라고나 할까-을 나섰다.

아직 날은 어두운 여섯 시 반쯤, 차갑게 엄습해오며 -겨울비치곤 의외로 따뜻한- 빗속을 한 발자국씩 내걷는다.

걷기운동을 두 번째로 시도한 지 거의 일 년이 다 되었다. 첫 번째는 운동을 하다가 엄마가 돌아가시고 조현병이 악화돼 병원에 입원해서 중도에 그만둔 적이 있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춥거나 덥거나, 휴일이거나 개의치 않고 발로 걷는 것은 쉴 틈 없이 걷고 또 걸었다. 거의 만보기로 만 보씩 기준으로 하여 걷는다.

딸이 출근하는 날이면, 출근한 다음 나 또한 나갈 채비를 서둘러 아직 새벽의 정적을 깨지 않은 거리로 나선다. 가로등불이 하나 둘씩 꺼질 때쯤이면 새벽의 새로운 정기를 몸과 마음을 정화시키는데 이럴 때 나를 정말이지 완전 매료시킨다.

새벽은 새로운 시작의 희망에 속삭임이라고나 할까.

전문가들은 오후 운동이 당뇨환자에게 좋다고 하지만 내가 왜 새벽운동을 고집하는지 말하고 싶다.

발이 아프면 약을 바르거나, 족욕을 하거나, 마사지를 하거나 하지만 더 힘든 건 먹을 것을 가려 먹는 것이다. 정제된 쌀, 밀가루로 만든 떡, 빵, 국수, 라면, 과일, 설탕 등등...

당뇨보다 더 나를 기진맥진하게 힘을 빼는 것은 몇 차례나 약을 나아지면 끊었다가 재발하면 또 먹고 하는 반복된 과정을 20여 년간, 그리고 그 후로 15년간 병동 생활을 하는 정신질환병이다.

친한 친구의 조언일지라도 “이젠 약 먹지 마” 이렇게 말하면 난 그 말이 긍정적으로가 아니라 날 악화시킬 유혹하는 말로 들린다.

왜냐하면 그 말을 수락하기엔 내가 너무 만성질환이 되었기에 그렇다. 하지만 나의 소원이 있다면 먹는 약이 조금씩 줄어들었으면 하는 건데 점점 더 늘어만 간다.

오늘도 난 아침, 저녁으로 한 움큼씩의 약과 씨름하며 보낸다. 요즘은 불면증이 더해 밤이면 잠을 이룰 수 없어 뒤척거리다가 12시가 넘어서 잠이 들고 새벽에 일찍 깬다.

그래도 약을 의지하나마 살아있다는 것으로 난 행복하다. 왜냐하면 나보다 더 희귀하거나 고약한 병에 시달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난 너무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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