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현 “열애(熱愛)의 실패가 나를 예술로 이끌었어요…오히려 그녀에게 고마워요”
윤종현 “열애(熱愛)의 실패가 나를 예술로 이끌었어요…오히려 그녀에게 고마워요”
  • 박종언 기자
  • 승인 2020.03.18 19: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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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겪은 후 출가 결심..1년 6개월 뒤 환속
뭘 깨달았냐고?..나 자신에 대해 많이 알게 돼
깨달음 얻고 싶었지만 허상(虛像)임을 알게 돼..후회 없어
실연의 아픔 없었으면 그림과 예술 알지 못했을 것
폐쇄병동 모두 4번 자의입원..아픈 이들에 대한 연민 생겨
적극적으로 다 도전해보고 실패해도 인생에 후회는 없어
하고 싶은 예술하고 전시장까지 있으니 행복해
예술가들 중에 조울증 증세 겪는 이들 많아
목수일은 그냥 삶...직업이고 천직이라 생각해
자신감 있으면 주변 사람들에 병 오픈해도 괜찮아
살면서 주변 사람들 도움 많이 받았다는 걸 깨달아
나는 독신주의자...동거는 하겠지만 결혼은 ‘글쎄’
박종언의 만남: 길을 묻다 (c) 마인드포스트
박종언의 만남: 길을 묻다 (c) 마인드포스트

로스팅한 커피를 따라주는 그의 손은 오랜 목수 일로 상처가 켜켜이 새겨져 있었다. 인터뷰 말기에 그의 손을 언급하자 그는 “멋있고 자랑스러운 손”이라고 말했다.

레게 머리를 하고 귀와 입술에 피어싱을 한 그가 목수라는 직업에 어울리는 걸까, 기자는 고민했다. 지난 17일 서대문구 홍은사거리에 두 곳만 남아 한때의 목공거리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유진갤러리 목공소’를 찾은 건 55년의 장인(匠人)인 아버지를 따라 창호 전문의 목공 일을 하는 그를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획일화된 교육 체계에 환멸을 느낀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둔다. 영화감독을 꿈꾸고 바로 충무로로 들어가 고된 조명팀에서 5년간 일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하나의 ‘인생 성공 스토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계는 만만한 세계가 아니었다. 5년 뒤 영화를 접었다. 그리고 조울증이 찾아왔다.

믿는 종교는 없지만 이 세계를 지탱하는 진리(眞理)는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해인사로 출가를 하게 된 배경이었다. 행자로 수행을 하다가 1년 6개월 뒤 승려의 꿈도 접고 환속(還俗)했다. 조증과 울증은 수시로 찾아왔다. 그때, 한 여성을 만났다. 친구의 친구였다. 그리고 그 친구를 사랑하게 됐다.

사랑 역시 강고하지 못했다. 몇 개월 후 그녀와 헤어졌고 그는 실연의 슬픔을 잊기 위해 동네 미술화방에 들어가 그림을 그렸다. 10년 동안 그가 그린 주제는 ‘그녀’였다. 그리고 우연처럼 블로그를 통해 한 지인을 알게 된다. 미술 비평가 반이정(50) 선생이었다. 반 선생은 그의 예술성을 알아 봤고 갤러리를 도왔고 예술가들을 수시로 소개해줬다.

지난해 12월, 그는 생애 최초로 <<그녀에게 Her>>라는 개인전을 열게 된다. 삶이란 어느 정도의 굴욕과 고통을 지불해야만 건너갈 수 있는 세계다. 그는 고통을 지불했다. 정신과 폐쇄병동에 4차례의 입·퇴원. 그리고 응축되게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오랜 그리움. 그리고 허무(虛無)로 해석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슬픔. 그가 환속을 결정하고 내린 삶의 철학은 그랬다. 웃으면서 살기.

‘갤러리 유진 목공소’를 운영하는 윤종현(37) 씨를 만난 건 그의 삶의 족적을 조금은 따라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제 30대의 그에게 삶의 의미를 묻는다는 건 해석적 오류를 낳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특이했던 이력에서 그가 꿈꿨던 삶과 세계의 의미를 물어본다는 건 잘못된 질문은 아닐 것이다.

종현 씨는 오랜 구도(求道)의 시간을 건너 지금은 아버지 밑에서 목수로 일하고 있다. 아버지 윤대오 사장은 전통 창호 전문가로 2019년 트럼프 미 대통령 방한 때 청와대 만찬장 상춘제의 전통 문창살 99짝 교체를 담당한 적이 있다. 종현 씨는 이제 11년차의 전문가가 됐다. 다음은 일문일답.

‘갤러리 유진 목공소’를 운영하는 윤종현(37) 씨

-출가(出家)를 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23살 때 5월에 (출가)했어요. 그때 처음으로 우울증을 심하게 겪었는데 이후에 세상이 달리 보이는 거예요. 너무 아파 보니까 충격을 받았죠. 종교나 철학에 눈을 돌리게 된 계기가 됐어요. 너무 큰 고통을 겪으면 사람이 생각이나 행동이 달라지잖아요.

사람은 왜 사는 걸까, 사춘기 때나 할 법한 생각들을 한 거죠. 지금까지 저는 종교를 가져본 적이 없어요. 불교를 믿어서 출가한 게 아니고 그때 명상 서적이나 불교 서적을 읽다가 수행을 하고 싶었어요. 인도에 가서 수행하는 걸 진지하게 고민하던 중 친형이 아는 스님과 만나게 해줬어요.

그 스님이 저한테 ‘네가 출가해서 스님이 되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수행을 하도록 도와주겠다’고 했어요. 원하면 인도에도 보내주겠다고 하는 거죠. 전 일주일 뒤에 오겠습니다, 하고 정말 일주일 뒤에 출가를 했어요. 제가 꽂히면 바로 하는 성격이거든요.

그 일주일 동안 집에 돌아와서 인생을 정리했어요. 사람들을 만나 인사하고 부모님과도 작별 인사 다 하고요. 약속을 지키려고 일주일 뒤에 기차 타고 해인사(海印寺) 지족암(知足庵)으로 갔어요. 지족암은 일타 스님이 계셨던 곳이에요. 거기가 제 친형이 제가 출가하기 6년 전에 출가했던 곳이에요. 형도 행자생활 하다가 내려왔는데 그때 알게 된 스님을 저한테 소개해 준 거였죠.”

-거기서 1년 반 정도 계신 거죠.

“절에서는 1년 정도 행자생활을 하게 돼 있어요. 제가 고등학교를 중퇴했잖아요. 행자생활할 때 (불가의) 법이 바뀐 거예요. 행자교육원에 결격 사유가 있는데 몸에 문신이 있으면 스님을 안 시켜줘요.

제가 머리 깎았을 때만 해도 고등학교 중퇴도 괜찮았는데 행자생활하면서 고교 중퇴자는 (스님이) 안 되게 법이 바뀐 거예요. 그래서 검정고시 준비를 했어요. 하면서 해인사 지족암에서 1년간 행자생활하고 불국사(佛國寺) 가서 6개월 행자생활 하다가 내려왔어요(환속했어요). 스님은 못 됐죠.”

-고등학교 검정고시 합격하면 계속 스님생활 할 수 있는 거죠.

“검정고시는 당시 상황으로는 무조건 봐야 되는 거죠. 고졸 자격증을 따야죠. 저는 준비만 하다가 시험 안 보고 내려온 거예요.”

-법명(法名)이 뭐였습니까.

“행자는 법명이 없어요. 그냥 ‘윤 행자’라고 불러요. 사미계를 받아야 법명을 줘요. 스님은 사미승이 있고 비구승이 있는데 일단 사미승이 되고 4년 후에 또 시험을 봐서 비구승이 돼요. 사미승도 스님이죠. 저는 스님이 못 되고 행자생활만 한 건데 불교에서는 행자는 사람도 아니고 스님도 아니라고 그래요. 전 그냥 성을 붙여서 윤 행자라고 불러요.”

‘갤러리 유진 목공소’를 운영하는 윤종현(37) 씨

-거기서 깨달은 게 뭘까요.

“누구라도 (절에) 1년 6개월 있었으면 작은 깨달음이라도 얻어서 내려왔겠죠. 한 달을 있어도 그렇고, 혼자 여행을 가서도 얻는 깨달음이 있어요. 저는 내려오면서(환속하면서) ‘많이 웃으면서 밝게 살자’였어요.

그때가 24살이던 11월. 내려올 때 딱 그 마음이었어요. 불국사에 있을 때 같이 행자생활 하던 분이 ‘윤 행자, 그 동안 뭘 배웠냐’고 물어요. 제가 그렇게 말했어요. 나 자신에 대해 많이 알게 됐다고.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을 전 믿지도 않지만 제가 공부하면서 나 자신에 대해 많이 알게 됐다는 거죠.”

-예를 들면 나 자신에 대해 어떤 것을 알게 된 건가요.

“(출가하면) 정말 자신에 대해 많이 알 수밖에 없어요. 사람 만나 얘기할 일도 없고 절에서 밥하고 일하고 그냥 생각만 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다보면 기억을 계속 거슬러 올라가요. 해인사 지족암에서의 일 년 동안 제 과거를 봤어요. 생각하는 시간을 오래 가지면서 ‘아, 내가 이런 삶을 살아왔구나’ 하면서 자신에 대해 많이 알게 된 거죠.”

-환속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출가 전에 생각했던 게 (믿는) 종교는 없지만 깨달음이나 진리는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어요. 인도로 가느냐, 절로 가느냐의 문제에서 절을 선택했을 뿐이죠. 그 1년 6개월 동안 자신에 대해 알아가면서 그런 거(깨달음)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깨달음의 상태는 내가 만들어내는 상태가 아닐까. 그건 환상이나 환각 같은 거죠.

마음 한편으로는 내가 시간을 헛되이 보낸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나름대로 공부를 하면서 이 정도면 내가 할 수 있는 수행(修行)을 한 거 같다 싶었어요. 처음에는 깨달음을 얻고 싶었지만 그게 허상인 거 같고 나름대로 얻은 것도 많은 것 같다는 생각에서 고민하다가 자연스럽게 내려온 거죠.”

-반야심경(般若心經·불교의 경전)은 아직 외우고 있습니까.

“외울 수 있을 거 같은데요(웃음). 그런데 천수경은 안 되더라고요. 그런데 반야심경은 돼요.”

-진리를 추구했다는 이유로 선생님은 정신적 질병에 걸린 걸까요.

“아뇨. 전혀 아니죠. 진리를 추구하기 전에 저는 조증 상태에 있었어요. 21살에 처음 조증을 겪었고 울증을 22살에 겪었는데 진리나 종교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우울증이 끝나고 난 뒤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너무 아파 보니까 그랬던 거죠.”

-고등학교를 중퇴한 이유가 학교가 가지는 폭력성 때문이었을까요.

“전혀 아니에요. 그냥 주입식 교육이 너무 싫었어요. 그 대안으로 영화감독을 꿈꾸었죠. 영화감독이 되는 방법 중의 하나가 도제(徒弟)시스템이에요. 장인(匠人)이나 기술자 밑으로 가서 배우는 거죠. 그걸 알게 되면서 과감하게 학교를 그만 두고 충무로에 일자리를 구했어요. 제가 저돌적인 데가 있어요.”

-하여튼 제도적인 것들이 싫었던가 봅니다.

“다양한 개성이 있는데 그걸 주입식 교육으로 몰아넣잖아요. 당시 제가 알게 된 게 유럽에는 초등학교 졸업하면 자신의 성향에 맞게 선택해서 가르친다고 하더라고요. 우리나라는 왜 이런 시스템이 없을까. 그게 싫었어요. 내가 관심 없는 교육이.”

-10대 후반에 충무로 영화 일에 뛰어들었습니다. 조명팀에서 5년간 무슨 일을 한 겁니까.

“충무로의 영화사들을 찾아다녔는데 고등학생이니까 안 써줘요. 인터넷에서 영화 조명팀 사람을 구한다는 걸 보고 뭐라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조명팀 일을 하다 보면 아는 사람도 생기겠지 하는 마음으로 들어갔어요. 우연히 조명을 하게 됐는데 그게 너무 재미있어서 5년을 했어요.

조명은 필름에 빛을 담는 작업이죠. 드라마나 방송 쪽은 조명을 별로 신경을 안 써요. 영화는 한 컷마다 계산을 해서 그림처럼 조명을 해요. 한 컷 찍는데 2시간을 조명하기도 해요. 조명은 예술적인 작업이에요. 일반인들은 거기에 관심을 안 갖고 안 볼 뿐이죠.”

-영화 작업이 중노동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엄청 힘들어요. 지금도 생각하면 어떻게 했나 싶어요. 24시간 찍고 3시간 자고, 24시간 찍고 3시간 자고 그런 적도 있고요. 한번은 24시간 찍고 집에 가서 3시간 자고 나와야 되는데 (집에 가려고) 6호선을 탔어요. 지하철에서 잠들어 갖고 (내려야 할 곳에서) 못 내리고 순환을 하는 지하철에서 일어나서 바로 일 나갔어요. 진짜 힘들어요. 조명팀은 더 힘들고.”

-영화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조언을 해주고 싶은 게 뭐가 있을까요.

“솔직히 조언 자체를 하고 싶지 않아요.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제가 할 때는 젊은 사람들을 돈과 열정을 미끼로 부려먹고 결국에는 (버려요). 구조도 그래요. (누군가는) 떨어져 나가고 밑에서는 계속 치고 올라오고 해서 살아남기가 힘들어요.

제작사도 젊은 사람들 고혈과 청춘을 짜먹고 결국 나가떨어지게 만들어요. 얼마 전에 20년 전 함께 했던 촬영감독님과 조명하던 형을 만나서 밥을 먹었는데 그때 하던 사람들 거의 다 그만뒀다고 해요. 구조가 그래요.”

-그렇게 조명팀에서 일을 하면 얼마 정도의 돈을 벌 수 있습니까.

“요즘은 많이 나아졌다고 그러는데요. 제가 20년 전에 극영화를 찍었는데 두 달 찍고 50만 원 받았어요. 그땐 고시원에서 살았는데 영화 일 해서는 못 버텨요. 영화 끝나고 사이사이에 아르바이트를 안 하면 버틸 수가 없어요. 그때 3년 동안 얼마 벌었나 계산해 보니까 순수하게 영화 일만 해 가지고 번 돈이 970만 원이에요. 그걸 갖고 3년 동안 어떻게 살아요.”

-‘그녀에게 Her’이라는 개인전을 1월에 열었습니다. 헤어진 여인을 생각하면서 준비했다고요. 오래 사귀었습니까.

“한 4~5개월 만났어요.”

-응축된 사랑?

“네. 28살, 십 년 전이죠.”

-어떻게 만나게 된 건가요?

“사귀기 전에도 알고 있었던 사람이에요. 제 친구의 첫사랑이었어요. 일 년에 한두 번 만날까 하는 사이였는데 어느 날 그 여자친구가 핸드폰 가게를 했어요. 그래서 친구가 나를 데리고 거기 갔는데 제가 배려심이 많아요. 핸드폰 살 때 귀찮게 안 하고 '됐다, 됐다' 하면서 핸드폰을 샀죠. 여자친구가 나중에 얘기해요. 보통 아는 사람은 하나라도 더 가져가려고 하는데 나는 반대로 잘 해줬다고.”

-배려해 준 거네요.

“네. 나는 나대로 그녀가 예쁘기도 하고 매력이 있어 보였어요. 그렇게 많이 좋아했고 사귀다가 어떤 이유로 헤어졌죠. 그 관계가 끝나고 나서 다음날 제가 미치겠더라고요. 어딘가에 감정을 담아 놓고 싶었어요. 그게 그림을 떠올리게 됐고 동네 미술학원에 가서 어떤 사람을 그리고 싶은데 가르쳐줄 수 있냐 해서 10년을 그린 거예요. 반이정 선생님이 전시회를 열어주겠다고 해서 그때 첫 개인전을 열었어요.”

-연애의 실패가 선생님을 그림으로 이끈 건가요

“그렇죠. 그게 고마웠다는 생각이 들어요. 만약에 그 친구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림을 그릴 일이 없었을 텐데. 걔를 만남으로써 내가 사랑하는 그리도 그리고 예술도 알게 됐고 좋아하게 됐으니 고맙다는 일기를 쓴 적도 있어요.”

-뒤돌아 생각해 보면 사랑은 무엇이던가요.

“그냥 변하는 거 같아요. 연애나 사랑은 순수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걸 점점 더 잃어가고 있는 같아요. 이제는 연애가 쉽지가 않아요. 만나려고 하면 생각을 하게 되고 재게 되고 계산하게 되잖아요. 순수하게 진짜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인생을 살면서 그렇게 긴 시간, 많이 할 수 있는 게 아니구나 싶더라고요.”

-긴 시간 많이 하는 게 아니라고요?

“긴 시간, 많이 경험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회생활 하면서 때도 묻고 나이도 들어가고. 자신이 변해가잖아요. 좋으면 좋은 대로 사랑할 수 있는데 나이가 들면 뭔가를 (이해 관계를) 생각하게 되죠. 첫사랑은, 이십 대의 사랑은 그 시기에는 그냥 하면 되잖아요. 자연스럽고 순수하게 하는 그게 사랑의 모습에 가까운 거 같아요.”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거 같습니까.

“이제 좀 힘들지 않을까 싶은데요. 또 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죠. 그런데 쉽지는 않을 거 같아요.”

-조울증은 언제 찾아온 겁니까

“27살이던 1월에 우울증으로 입원을 하면서 (조울증을 알게 됐어요). 그때 3개월 동안 입원하면서 상담을 많이 했어요. 폐쇄병동에서는 맥시멈(최대 입원기간)이 3개월이에요. 입원해 있으면서 병에 대해 알게 된 거예요.”

-조증 증상은 어땠습니까.

“아이고, 전형적인 조증의 증세였죠. 한 시간만 자도 안 피곤하고 생생하고 폭력성이 증가하고요. 음주 운전 막 하면서 사고 치는 게 조증 증세들이었어요. 진짜 자신감 넘치고 그랬죠. 많이 겪어 본 사람들은 알잖아요. 지나고 보니까 그랬다는 걸. 울증은 23살 때 왔어요.”

-울증일 때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잖아요.

“그래서 영화 일을 그만둔 거예요. 영화 일 하면서 막판에 잘 안 풀리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그러면서 울증이 찾아온 거예요.”

-약은 드십니까.

“우울증 약을 먹고 있어요. 재밌는 건 20대까지 우울증이 오면 마음으로 왔어요. 말 그대로 마음이 우울해지는 거죠. 그런데 30대가 되고 나서부터는 마음은 괜찮은데 몸으로 와요. 몸이 피곤해지고 무기력감을 느껴요. 우울하지는 않은데 그냥 몸만 만성피로가 심한 거예요. 그래서 처음 일 년은 우울증과는 관계가 없는 줄 알고 양방·한방 병원 엄청 가봤는데 다 소용이 없어요.

마지막에 혹시나 해서 신경정신과를 가봤더니 우울증이 몸으로만도 온다고 그래요. 어떤 사람은 위가 아파서 검사를 해도 (병명이) 안 나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우울증 때문에 위하고 자율신경계의 이상이 오는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약을 먹으니까 예술성이 떨어지던가요?

“조증 상태에서 약을 먹으면 잡히잖아요. 약으로 증상적인 상태를 눌러주죠. 그런데 약 안 먹고 조증 상태가 되면 아이디어가 더 잘 떠오르고 또 글도 되게 잘 써지고요. 창의력이 올라가요. 경험으로 그건 확실한 거 같아요.

제가 7년 다닌 화실 선생님이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화실 다니면서 세 번 입원했는데 퇴원할 때마다 그림 그린 종이를 이만큼씩 들고 나와서 선생님께 조언을 구했어요. 그 선생님이 ‘종현씨가 조증이 와서 폐쇄병동에 한 번씩 갔다오면 그림이 확 달라져 있어요’라고 말해요. 그림 수준이 확 올라간다고. 조울 시기에는 그런 게 있어요. 표현력도 좋아지고.”

-예술 창작을 위해서는 약을 안 먹는다?

“아니요. 그래도 약을 먹는 게 낫죠. 예술가적인 꿈이 크니까.”

-한 번 입원하면 몇 개월 정도 계십니까.

“입·퇴원을 반복했어요. 저는 자의입원을 했거든요. 안 되겠다 싶으면 입원을 했어요. 특이하죠. 의사도 놀라더라고요. 상담실 가서 저 입원하러 왔는데요. 뭐예요? 조증이요. 그럼 놀라요. 병원에서 저도 도움을 받고 싶어서 매일 제 상태를 글로 적어서 그분께 보여드렸거든요.

어느 날 의사 선생님이 ‘자기 자신에 대해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절에 있었던 시간이 헛되지 않은 거 같다’고 얘기를 해줬어요. 절에 있으면서 자기를 관찰하는 능력을 배웠던 거 같아요. 그러니까 감이 오면 자의입원을 하는 거죠.”

-폐쇄병동은 직접 겪어보니 어떻던가요.

“이게 가장 중요한 얘기인 거 같아요. 제가 그동안 한 많은 경험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경험이 폐쇄병동이었어요. 거기는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다양하게 있잖아요. 병동에 있으면 사람에 대해 많이 느끼고 배우고 생각하게 돼요. 처음 보는 타인 수십 명과 좁은 공간에서 생활하는 게 일반적인 경험은 아니잖아요.

있는 그대로의 사람의 모습도 배우게 되고 사람에 대한 연민의 감정도 느끼게 돼요. 어느 날엔 한 여고생이 내게 ‘아저씨, 절대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있는데 어떻게 해야 잊을 수 있냐’고 물어요. 저는 ‘시간이 지나는 방법밖에 없다. 나도 똑같다’고 말해줬어요. 저도 그때 실연의 상처가 클 때여서 아픈 대답밖에 못해 줬어요. 느낌에 혹시 성폭행이 아니었을까 싶었죠.

제일 마음이 아팠던 건 저랑 동갑내기 조울증 여성이었어요. 임신을 했는데 남편이 칼을 들고 아이랑 다 죽여버린다고 하니까 조증이 유발된 거예요. 이 여성은 미술심리치료사였고 남편은 내담자(환자)였거든요. 그렇게 결혼을 했대요. 여성은 남편을 더 이해하려 하고 더 안으려고 했을 거 같은데 이 남자는 여자에게 행동이 더 거칠어진 거예요.

그리고 성관계도 연애할 때는 안 그랬는데 결혼하고 나서는 싫은데도 강제로 한 거예요. 그게 스트레스가 된 거죠. 폐쇄병동에 있으면 사람들 다 마음이 아픈 거예요. (질환이 발병한 게) 그 사람들의 잘못이 아닌 경우도 되게 많았어요. 그런 사람들이 사회나 가정에서 환대(歡待)를 받는 것도 아니고 사랑을 받기도 힘들잖아요.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저는 친형이 만성우울증을 갖고 있었어요. 나도 그때 아팠고 형은 당시 일 년 동안 집에 누워만 있을 때였어요. 아들 둘 다 그러고 있으니 아버지가 ‘뚜껑’이 열린 거죠. 막 폭력적인 말을 우리에게 한 거예요. 둘 다 그러니 상황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우리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잖아요. 아빠 마음도 알죠. 아빠도 화내고 싶어서 냈겠어요. 참다 참다 그런 건데. 장애인들이 모두 힘들고 마음이 아프지만 정신적인 어떤 거는 더 그런 거 같아요. 마음이 아파요.”

-그 안에서 폭력은 없던가요.

“저는 대학병원에 있어서 좋았어요. 스트레스 받는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까 상태가 안 좋은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폭력이 심한) 경우는 없었어요.”

-질풍노도의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다시 스무 살로 돌아가면 그렇게 살고 싶습니까.

“그렇죠. 음, 반반이죠. 좋은 건 저는 하고 싶은 것은 다 해 보고 살았어요. 지나고 나서 해 볼 걸 하는 후회가 하나도 없거든요. 성격이 적극적이고 진취적이어서 다 도전했고 그게 좋았어요. 비록 실패했을지라도 삶에 후회가 없는 거죠. 조울증 때문에 부모님과 남에게 상처를 주고 나 자신을 필요 이상으로 괴롭힌 것은 있지만요.”

-돌아갈 수도 있고 안 돌아갈 수도 있다?

“돌아간다면 그래도 돌아갈 거 같은데요. 그렇게 할 거 같아요.”

-어떤 글귀에 보니 이런 게 있더라고요. 하고 싶은 일을 하자. 왜냐하면 적어도 미련은 남지 않으니까라고. 동의하십니까.

“그럼요. 그게 제일 제 좌우명이었죠. 항상 마음속에 그런 사고방식을 갖고 살아온 거죠. 그런데 내가 그런 환경이 안 되는데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안 되죠. 그 말의 의미에 따라서 그렇죠.”

-아직 30대의 젊은 나이입니다. 인생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습니까.

“꿈이 그렇게 거창하지 않아요. 내가 하고 싶은 예술을 하고 언제든지 전시할 수 있는 전시장도 생겼잖아요. 반이정 선생님이 도와주고 함께 하니까 와서 봐줄 사람도 있고 또 천직인 목수일도 하고 있고. 그냥 제가 꿈꾸는 것들이 다 펼쳐졌어요. 예술도 하고 돈도 벌고 좋은 차는 아니지만 차도 한 대 있어서 어디든지 갈 수 있고.

소박하고 소소한 것들을 좋아해요. 막 인기 있는 예술가, 돈 많이 버는 예술가를 꿈꾸는 게 아니잖아요. 삶 속에서 내가 예술을 하고 있고 전시도 하고 직업도 있고 다 이뤄졌어요.”

-정신적 질병이 생기면 가까운 친구들이 다 떠납니다. 선생님의 경우는 어떤가요.

“오히려 제가 다 떠났어요. 원래 성격이 좋아서 친구가 되게 많았는데 인간관계 정리를 제가 많이 했어요. 사람들이 저를 떠난 적은 별로 없어요. 제가 착하고 잘해 주고 다정다감하고 누가 싫어할 짓은 안 해요. 정신병이 와도 술만 안 먹으면 절대 그런 행동을 안 하는 캐릭터라서.”

-얼굴을 보니 약물에 찌든 모습이 아니라 평범한 비장애인처럼 보입니다.

“조울증을 가진 분들이 주변에 많아요. 예술가들이 조울증 가진 분들이 되게 많거든요. 그런 분들이 조증 상태일 때 좀 들떠 보인다거나 말을 많이 한다거나 하는데 그걸 빼면 제가 봤을 때 얼굴이 그렇게 보이는 사람들은 못 봤어요. 제가 궁금해서 그런데 약을 오래 먹으면 얼굴이 약에 찌드는 것도 있나 봐요. 제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이 하나도 없어갖고.”

-약을 지나치게 많이 복용하면 약에 취해 있을 수가 있죠.

“그건 알죠. 저는 원래 저녁 약만 먹었는데 지금은 아침·저녁 약으로 바꿨어요.”

-인터뷰 요청을 받고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을 생각해 봤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정신장애인입니까.

“맞죠. 사회적 규범으로 보면 당연히 장애인이 맞죠. 병원에서도 테스트할 때 당신이 조증 맞느냐고 하면 맞다고 해요. 실제 그렇게 생각하고요.”

-정신장애인이라고 하면 차별받거든요.

“그런데 그런 게 있어요. 뭐냐면 환경이 말해도 되는 환경이니까 말을 하는 거죠. 예술계에서는 (정신장애를) 오픈하는 게 내가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득이 되기도 해요. 대한의사학회에서도 권고를 하잖아요. 조울증이 있는 사람은 자신감만 있으면 주변에 그거를 오픈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전 친구들한테 잘 오픈을 했어요. 내가 조증 때 실수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는데 좀 이해받고 도움 받으려고요. 한 명, 한 명에게 얘기를 했어요. 내가 이상한 말 할 때가 있는데 그럼 조울증이라고. 그러면 관계가 나빠지지 않아요. 그래서 친구들이 안 떠나고 있는 거 같아요.

제가 그런 건 잘했어요. 먼저 밝히고 양해를 구하고. 그리고 친한 친구들이니까 평상시의 제 모습을 알잖아요. 그리고 그런 경험을 하니까 술 먹고 다른 때보다 조금 실수를 하거나 말을 많으면 오히려 친구들이 걱정해주면서 말할 정도에요. ‘너 혹시 조증 온 거 아니야?’ 아 그럼 조심해야겠다. 저는 그걸 권하는 편이에요.”

-선생님의 예술혼은 혹 광기(狂氣)가 아닐까요.

“그냥 한 부분이죠. 광기도 저는 한 에너지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런 광기는 예술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정신병 없는 사람들도 다 있어요. 그러니까 광기는 예술의 한 부분이죠.”

-목공예 하면서 깨달은 게 있습니까.

“많죠(웃음). 밥 먹고 이것만 하잖아요. 되게 고독해요. 사람들은 목공 일에 대해 낭만을 많이 갖는데 이걸 직업으로 하루에 10시간, 14시간, 일주일에 6일을 하잖아요. 저는 11년 했거든요. 고독해요. 맨날 생각만 해요. 아버지랑 둘이 하면서 저 자신에 대해 많이 알게 되고요. 약간 수행하는 거랑 비슷해요. 정말 고독한 일이라서 쉴 때 아빠하고 대화하지, 일할 때는 계속 나무를 다듬으면서 생각을 하는데 명상하는 듯한 그런 직업인 거 같아요.”

-만족하십니까.

“만족하죠. 대단한 만족은 아니고 자연스러운 만족인 거 같아요. 우리가 살려면 의식 안 하고 숨 쉬잖아요. 목공일이 저한테 그래요. 의식 안 하고 호흡하듯이. 그림도 저한테 그렇고요. 공기가 좋고 말고 없잖아요. 저한테는 그냥 삶이에요. 물론 돈을 벌기 위해서 하는 거지만 직업이고 천직인 거 같아요.”

-일하시면서 한 달에 얼마 정도 버십니까.

“많이 벌 때는 400만 원, 450만 원도 벌었는데 지금은 예술하면서 일을 좀 줄이고 있어요. 처음에는 200만 원 못 벌 때도 있었고 그 다음에 200만 원. 11년 경력이니까 조금씩 올랐죠.”

-주문이 의자 만들어 달라 이런 겁니까.

“창호 전문이에요. 인터뷰하면서 저도 새삼 느낀 건데 제가 좀 특별한 경우이기는 한 거 같아요. 조울증 있는 사람들 중에서 그래도 아빠의 도움을 많이 받고 예술의 도움도 받았잖아요. 친구와 인간관계도 그렇고요. 이 글 읽으시는 분들이 공감이 안 되는 얘기들이 있을 수 있잖아요. 전 솔직하게 제 입장을 얘기한 건데 한편으로는 내가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구나 되돌아보게 되네요.”

-선생님한테 부모님은 어떤 존재일까요.

“아버지의 경우는 그냥 신이죠, 부처님(웃음). 성격이 너무 인자하시고 동네에서도 별명이 부처님이에요.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이 아프니까 아픈 손가락처럼 데리고 있으면서 혼자 자립할 수 있게 했잖아요. 그동안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겠어요. 자식이 자랑스러워하는 아빠의 모습이 있잖아요. 다 공감할 수 있는 자랑스러움. 첫 개인전 할 때 아빠가 처음으로 자랑스러워고 뿌듯해 하는 결실을 보여드리는 자리였죠.”

-조증 걸리고 우울증 걸려서 청춘을 다 떠나보내고 일도 못하고 돈도 못 벌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건 모르셨죠.

“아빠한테 그런 얘기를 하죠. 가끔 아빠가, 나를 힐난만 할 때 ‘아빠, 아빠가 잘 몰라서 그렇지 사실 조울증이라 게 생각보다 심하다. 나도 아빠가 데리고 있으니까 지금까지 한 거지 사회 일도 꾸준히 못하고 지내는 (정신장애인들이) 많다’라고요. 저도 사실 그랬을 거 같아요. 아버지가 이런 환경을 만들어주지 않았으면, 예술 안 했으며 솔직히 그랬을 거 같아요.”

-손에 흉터가 많아요. 본인 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목공일해서 그런 것도 있고요. 저는 얼굴에 다친 건 약을 바르는데 손에 생긴 건 좀 멋있는 거 같아요. 아빠 손이 멋있거든요. 사람마다 시각의 차이인데 일하다가 생긴 목수의 손이라는 게 자연스럽고 멋있게 느껴져요. 얼굴은 싫죠(웃음).”

-사람은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요? 누구나 상처나 외로움을 안고 살아가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말이나 글로 알고 이해하는 것과 실제 그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공유하는 건 다르잖아요. 직접 경험해 보니까 사람들이 누구나 갖고 살아가는 상처와 외로움을 제대로 볼 수 있었어요. 그걸 경험하고 나서의 나와, 그 이전의 나는 좀 다른 거 같아요. 나쁜 사람도 있고 싫은 사람도 있겠지만 인간에 대한 연민이 폐쇄병동에 있으면서 생겼던 거 같아요. 이해하게 된 거죠.”

-결혼은 언제 쯤 하실 겁니까.

“어릴 때부터 독신주의였고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예술가들은 그런 사람들이 많아요. 동거하는 거. 서구의 한 형태 있잖아요. 유럽에서 사람들이 잘 하는 비(非) 결혼하고 동거하고 애 안 갖고 그런 건 괜찮아요. 외로우니까 그런 정도는 괜찮은 거 같아요. 결혼하고 애 낳고 할 생각은 없어요.”

헛헛한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기자는 돌아오는 길에 그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슬픔이든 아픔이든 기억은 시간이 지나는 방법밖에 없다는 그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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