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승연의 비평] 페미니즘, 광기, 그리고 여성에 대한 체계적 차별과 억압에 대한 외침
[송승연의 비평] 페미니즘, 광기, 그리고 여성에 대한 체계적 차별과 억압에 대한 외침
  • 송승연 기자
  • 승인 2020.03.24 19:3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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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그레이스‘(Alias Grace, 2017) 비평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그레이스' (c) Netflix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그레이스' (c) Netflix

그레이스, 한 여성의 이야기

1908년 미국의 열악한 작업장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이 화재로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 해 3월 8일 미국 1만5000천여 명의 여성 노동자들은 뉴욕의 루트커스 광장에 모여 선거권과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3월 8일은 세계 여성의 날로 지정됐다.

그 이후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여성의 체계적 차별과 억압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성의 달’을 맞이하여 본 글에서는 정신건강 영역과 관련된 여성의 체계적 차별과 억압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가령 페미니스트 이론, 문학비평, 비판적 장애학 등에서 주로 사용하는 ‘MadWoman’이라는 메타포를 심도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페미니스트 사상가들은 ‘다락방의 미친 여자’(산드라 길버트 & 수전 구바, 2009)와 같은 저서를 통해 빅토리아 시대의 엄격한 성 이데올로기와 남성 중심적인 문학적 풍토 아래서 여성 작가들은 자신의 실질적인 모습과 강요되는 모습 사이의 괴리 속에 ‘미친 여자(Madwoman)’ 캐릭터가 출몰하게 됐다고 주장한다. 즉, MadWoman 메타포는 가부장적 질서에 저항하는 여성작가들의 사회적 대리자라는 것이다.

캐나다의 6부작 드라마이자,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그레이스(Alias Grace, 2017)>는 이러한 ‘MadWoman’ 메타포를 활용하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정신질환’이라는 현상에 가려진 여성의 억압에 대한 심도 깊은 질문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그레이스>는 캐나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소설을 기반으로 하며, 1843년 실제 일어난 악명 높은 살인사건의 범인인 그레이스 막스(Grace Marks)의 삶을 바탕으로 진행된다.

아일랜드 출신의 젊은 하녀 그레이스 막스(사라 가돈)는 그녀가 일하던 집의 주인인 토머스 키니어와 가정부 낸시 몽고메리를 살해한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지만, ‘미친 여자’라는 라벨링을 가지고 교도소에서 ‘치료’라는 이름으로 시행되는 잔혹한 고문을 받게 된다.

이후 그레이스의 무죄를 탄원하려는 위원회의 의뢰를 받은 정신과 의사 사이먼 박사(에드워드 홀크로프트)가 찾아온다. 폭력과 강제력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묵묵히 들어주는 사이먼에게 그레이스는 조금씩 마음 속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하지만 사이먼 박사가 상담을 진행할수록 사건의 진실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그녀의 삶을 보고 우리는 어느새 설득된다

<그레이스>의 표면적인 주요 플롯은 그레이스가 ‘범인인지 아닌지’에 맞추어져 있다. 더 나아가면 ‘진짜’ 정신질환자인지 아닌지, 그리고 그에 따라 그녀가 무죄인지 유죄인지를 추적해가는 흐름을 따른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찬찬히 비추어주는 그레이스의 삶을 보면서 우리는 어느새 설득된다. 그녀가 소위 ‘정신질환자’인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드라마에서는 그레이스와 관련된 주변 여성들의 죽음이 계속해서 묘사된다. 그 첫 번째는 바로 어머니의 죽음이다. 아일랜드에서 캐나다로 들어오는 허름한 배 안에서 어머니는 병들어 사망한다. 그레이스에 따르면 그 배는 “어머니의 영혼조차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습하고 냄새나는 곳”이었으며, 그 안에서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은 비참한 삶을 마감하게 된다. 캐나다에 도착한 아일랜드 출신 이민자 그레이스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버지의 폭력이었다.

결국 그레이스는 아버지로부터 도망치고, 동생들의 생계를 위해 저택에서 하녀로 일하게 된다. 여기서 두 번째 죽음을 목격한다. 바로 같이 하녀로 일하면서 만나게 된 절친한 친구 메리의 죽음이다.

메리 위트니는 그레이스에게 계급사회에 반기를 들라고 가르쳐주는 급진적이며 강경한 인물로 묘사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고 메리는 주인집 아들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고, 결국 버림받게 된다. 그레이스는 친구 메리가 거리로 쫓겨나지 않기 위해 불법 낙태 시술을 받도록 도와주지만 하혈 끝에 두 눈을 부릅뜨고 사망한 메리의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세 번째는 같이 가정부로 일하던 동료인 낸시의 죽음이다. 가정부 낸시는 주인인 키니어의 아내가 되고 싶어 하지만, 키니어는 결코 그 자리를 낸시에게 주지 않았고 낸시는 임신을 하게 된다. 낸시는 점점 초조해지며, 약한 모습을 보이고 그레이스를 경계하게 된다.

이 때 그레이스는 같이 일하던 제임스 맷더못과 함께 낸시와 키니어를 살해하게 되는데, 사이먼 박사는 이 당시 그레이스가 일종의 심신미약 상태(다중인격)였는지 여부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그레이스>의 삶을 지켜본 관객들은 당시 그레이스가 어떤 상태였는지에 큰 비중을 두지 않게 된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은 그레이스의 몸과 눈과 마음에 각인된 메리의 행위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낸시는 임신 중이었어요. 남자들은 자주 그러죠. 여자가 임신 중이면 상대를 홀몸인 여자로 바꾸잖아요. 그러면 낸시는 사생아와 함께 길바닥으로 쫓겨날 테니까.”

하혈하며 죽은 메리처럼 낸시 또한 그렇게 될 것은 자명했다. 사회적 구조에서 비롯되는 비참한 여성의 죽음이 또 다시 반복되기 전, 모든 것을 끝내려 했던 것은 어쩌면 그레이스에게는 당연한 행위였을 수 있다.

우리는 이제 그녀가 미쳤는지, 미치지 않았는지 여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로 자신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억압에 침묵으로 저항했다는 것을 말이다. 이민, 낙태, 차별, 폭력, 계급 등이 둘러싸고 있는 억압적 구조에 갇힌 비참한 여성의 삶을 ‘그레이스’라는 한 인물을 통해 보여준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그레이스' 스틸컷 (c) Netflix
넷플릭스 오리지널 '그레이스' 스틸컷 (c) Netflix

‘미친 여성(MadWoman)’이라는 메타포에 감춰진 억압의 역사

드라마에서 그레이스는 수감 된 후 정신질환자로 간주되고, 특수한 교도소(일종의 치료감호소)로 수감된다. 그리고 ‘치료’라는 명목 하에 다양한 고문을 받게 된다.

얼굴에만 구멍이 뚫려있는 관 속에 몇 시간 동안 감금되거나, 의자에 포박당하고 머리에 전기 충격 실험 장치를 쓴 채 이상한 실험을 당하기도 한다. 그레이스는 자연스럽게 겁에 질려 도망가려고 하거나, 소리를 지르며 저항하지만 그것은 그레이스가 ‘정신질환자’임을 더 강화시켜준다.

이처럼 MadWoman 메타포에 담겨져 있는 정신과적 억압은 저항하고 거침없는 여성을 시설화하고, 여성의 평등을 위한 투쟁을 악화시키고, 문화와 시대를 넘어서 여성에 대한 학대를 정당화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레이스에게 가해졌던 사회적 차별과 억압의 구조는 어느새 사라지고 모든 것은 ‘미친 여자’의 소행으로 간주된다.

근본적으로 이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한 명의 여성인 개인에게 귀속시키게 만든다. 비단 그레이스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 일명 ‘송백권 살인사건’이다.

여성의 체계적 억압과 트라우마와 관련된 비극인 ‘송백권 살인사건’은 "나는 짐승을 죽인 것이지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닙니다”라는 문장으로 알려져 있다.

1991년 1월 30일 어릴 적 자신을 성폭행했던 이웃집 아저씨를 21년 만에 찾아가 살해한 김부남 씨(당시 30세)가 법정에서 진술한 말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우물을 같이 사용하던 이웃집 송백권씨(당시 35세)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 그 끔직한 트라우마는 타인에 대한 분노와 불신을 형성했고, 대인관계와 결혼 관계에서 어려움을 초래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억압적 구조의 철폐’가 아닌 개인에게 부여된 ‘경계성 인격장애’라는 정신과 진단명이었다. 결국 그녀는 법으로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직접 살해를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다.

만약 이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다면 김부남은 또 다른 ‘MadWoman’이 되어 어디에선가 (혹은 시설 안에서) 조용히 숨죽이며 살고 있었을지 모른다. 살인이라는 행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지만, 어쩌면 송백권을 살인한 것이 그녀의 트라우마에 대한 진정한 ‘치유’였을 수도 있다.

이와 유사한 정신과적 억압의 사례들은 또한 존재한다. 정신과 약물과 관련된 광고에서 여성에 대한 억압의 역사들을 엿볼 수 있다.

1967년 항불안제 세락스(Serax) 광고 (c) Serax
1967년 항불안제 세락스(Serax) 광고 (c) Serax

1967년 항불안제인 세락스의 광고다. 이 광고는 가정용품을 가지고 있는 여성을 빗자루와 대걸레 등으로 이루어진 감옥 뒤에 배치하고 있다. 이는 언뜻 평범한 주부에게 주어진 임무가 억압적이고, 극단적이며, 갇혀있는 것과 유사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광고의 메시지는 교묘하다. “당신은 그녀를 자유롭게 해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녀가 덜 불안해질 수 있도록 도울 수는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세락스가 그녀의 환경을 바꿀 순 없지만, 대응 능력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며, 이는 계속해서 감옥에서 지낼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결국 가사 업무는 정당화되며, 본질일 수 있는 가부장적 권력과 같은 사회적 구조는 모호해지고, 모든 것은 개인의 문제로 귀결된다.

1960년 항정신병약물 소라진(Thorazine)의 효력을 선전하는 초기 광고 (c) Thorazine
1960년 항정신병약물 소라진(Thorazine)의 효력을 선전하는 초기 광고 (c) Thorazine

1960년 항정신병약물 소라진(Thorazine)의 효력을 선전하는 초기 광고다. 소라진이 가지고 있는 진정 효과 때문에, 흥분해서 아내를 때리는 경향이 있는 남편을 억제시키는 데서 발휘되는 가치를 내세우고 있다. 이 광고에서 가부장적 구조에서 비롯되는 여성의 억압은 사라지고, 남편의 폭력은 정당화된다.

‘그레이스’에 나오는 담당 변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그레이스는 정말 대담한 여자였습니다. 남자였으면 변호사로 성공했을 것입니다.”

그 누구보다 변호사가 되었으면 잘 했을 것이라는 그레이스. 그 누구보다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메리. 그녀들의 잠재력은 체계적 억압과 차별의 역사 속에서 ‘MadWoman’이 되거나, 아니면 죽음으로 돌아왔다.

지금 현실은 어떨까? 정신장애인의 범죄 피해를 분석한 연구(Kamperman et al., 2014)에 의하면 거의 절반(47%)이 범죄의 피해자임이 나타났다. 특히 주목할만한 것은 여성 정신장애인의 경우 남성 정신장애인과 비교했을 때 성적 폭행(성폭행, 성희롱 등)의 피해자가 될 위험이 3배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여전히 여성 정신장애인은 큰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레이스> 마지막 화에서, 각종 부조리에 조용히 저항했던, 불순응주의자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시 435번’가 나온다.

 

구별할 줄 아는 눈으로 보면,

깊은 광기는 가장 신성한 감각이다.

깊은 감각은 순전한 광기일 뿐이다.

항상 그렇듯이 여기에서 우세한 것은

다수이다.

동의하면 당신은 제정신이다.

반대하면 당신은 즉각 위험한 존재가 되어

쇠사슬을 차게 된다.

시 435번 (에밀리 디킨슨)

주류적인 헤게모니에 저항한 여성은 ‘MadWoman’으로 인식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어쩌면 쇠사슬을 차게 돼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밀려날 수도 있다. 그레이스는 말한다. “죄는 제가 한 일이 아니라 타인이 저에게 한 일에 따라 결정되는 거예요.”

이제는 그들의 진정한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사실 그레이스는 처음부터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폭력을 사용하거나 행동을 강요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말을 묵묵히 들어주는 사이먼 박사에게 처음으로 마음을 열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에게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지만 자신을 끝까지 ‘정신이상자’로 의심하며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이먼에게 그레이스는 절망감을 느끼게 됐다.

“처음에는 거기가 좋았죠. 큰 소리로 말할 수 있고, 공유할 수 있었거든요. 하지만 아무도 날 믿지 않았죠. 아무도 듣지 않았어요. 내 말을 들어 주지 않았죠. 당신도 똑같아요. 당신도 내 말을 듣지 않고, 나를 믿지 않죠. 내 말은 듣지도 않고...”

그녀가 확실하게 무죄였어야만, 확실한 ‘정상인’이었어야만 사랑이라는 것이 이뤄질 수 있었을까? <그레이스>는 그 경계를 무너뜨리고 사람과 사람으로 만나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넷플릭스 드라마 <그레이스>는 정치적, 사회적 의미를 떠나서 긴장감과 흥미로움을 끝까지 유지하는 매우 훌륭한 작품이다. 꼭 한 번 그레이스를 감상하고 이 깊은 여운을 천천히 곱씹어보는 시간을 향유하기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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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율 2020-03-25 10:20:41
넷플릭스에 가입하지 않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 ㅠㅠ

권혜경 2020-03-30 09:01:17
깊이 있는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