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을 정신병원에서 보내고...“행복, 그런 거 모르겠십니더. 병원에서 먹고 자고 이라이께네”
35년을 정신병원에서 보내고...“행복, 그런 거 모르겠십니더. 병원에서 먹고 자고 이라이께네”
  • 박종언 기자
  • 승인 2020.03.25 19:0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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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정신병원·요양시설 거주하다 지역사회로 나온 곽석택 씨 인터뷰
28살 때 첫입원...이후 병원과 요양시설 떠돌아
나오고 싶었지만 의사가 만류...“그래도 나가고 싶었어”
시설 생활에서 시간 안 가는 게 가장 “답답”
가장 하고 싶은 건 “가정 이뤄서 사는 거”
“국가가 어려운 사람들 위한 정책 잘 펼쳐줬으며 해”
박종언의 만남: 길을 묻다 (c) 마인드포스트
박종언의 만남: 길을 묻다 (c) 마인드포스트

그는 자꾸 말을 멈췄다. 그리고 질문에 단답형으로 답했다. 기자는 어눌한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하는 그의 말을 못 알아먹어서 자꾸 되물었다.

자신을 곽석택(63)이라고 소개한 그. 경북 달성군 현풍면의 가난한 집안에서 3남 2녀의 넷째로 태어나 초등학교가 학력의 전부였다. 집안 일을 돕다가 15살 무렵 대구라는 대처로 나왔다. 거기서 금속 공장과 섬유 공장을 다녔다. 70년대 중반이었다. 못 먹고 못 입는 농촌의 아이들은 기초 교육만 대충 받은 채 타지로 흘러들었다.

그도 그랬다. 거기까지는 일반 농촌 출신 노동자들의 삶을 따라가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28살 되던 해 술을 많이 먹고 난동을 부리다가 경찰에 잡혀 들어간 곳이 대구 달성군의 희망원이라는 시설이었다.

그 안에는 노숙인 시설, 알코올중독자 시설, 정신장애인 시설, 발달장애인 시설 등을 갖추고 있는 대형 시설이었다. 그는 그 희망원을 중심으로 지금까지의 삶을 오롯이 시설과 정신병원에서 보냈다. 대구경북 관내의 세명병원과 청도대남병원, 대구정신병원 등을 전전했다. 그리고 희망원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관내 정신병원을 떠돌았다.

그에게 삶이란 자기의 의지와 무관하게 떠밀려 살아가야 하는 강제이자 명령이었다. 현재의 희망원은 전국의 시설 중 그나마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고 인권적 부분을 적용하고 있는 기관이지만 당시에는 폭압적 규율과 처벌이 벌어지던 공간이었다. 가두는 것만이 능사였던 그 당시 정신보건 시스템. 아니 그때는 그런 시스템의 작동조차도 없던 시기였다.

그는 그 안에서 서서히 잊혀졌고 배제됐고 비난당했다. 35년 동안의 시설 생활은 그를 세상물정이 뭔지를 모르는 삶을 살게 만들었다. 그리고 올해 2월, 정신건강전문요원협회와 새로돋는집의 도움을 받아 서울 관악구의 공동생활가정 새로돋는집에 입소했다. 지역사회로 나온 것이다.

한 인간이 죄 없이 정신적 질환이 있다는 이유로 공동체에서 분리해 격리당하는 정신보건 시스템은 전면적으로 변해야 한다. 그를 가둔 것은 폭력적 정신의학 시스템과 국가권력이었다. 그리고 그를 공동체로 나오지 못하게 외면하고 공모한 건 우리 모두였다.

24일 서울 관악구의 정신건강전문요원협회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틀니를 뺐다가 다시 집어넣고 있었다. 인터뷰 자리에는 한국정신건강전문요원협회 공공후견사업단 홍정기 사무국장과 강경원 새로돋는집 원장이 함께 했다. 기자는 그의 경상도 사투리를 그대로 옮겼다.

곽석택 씨.

-스물여덟 살에 첫 입원하시고 육십 세가 넘어 지역사회로 나왔습니다. 그 전에는 밖으로 나온 적이 없었나요.

“밖에요. 밖에 안 나갔어요. 계속 병원에 있었어요.”

-살았던 그 시설과 병원에서 폭력을 당하지는 않았습니까.

“나는 그걸 많이 못 겪었는데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말 안 들으면 때리고.”

-부당하게 맞고 대우를 받았을 때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할 수 있는 제도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까?

“그런 거 알고 있었어요. 해 보지는 않았어요.”

-누가 가르쳐 줬습니까?

“거기 붙여놨고 벽에 붙여놓고. 말 안 듣고 술 많이 먹고 덩치 크고 우락부락하게 막 그런 사람들이 많았어요. 힘 쓰면 막 자기 자기 힘 쓰고 최고고 하는.”

홍 사무국장이 부언을 해줬다. “30년 전에는 아마 폭력이 심했을 거예요. 그런데 심한 걸 주위에서 보기는 했지만 거기서 직접적으로 크게 당하지는 않은 거 같아요.”

-요양시설에서 오전과 오후는 어떻게 지냈습니까.

“병원에 있으면 학생들이 실습을 많이 나옵니더. 이야기하고 놀고 또 같은 병원의 환우들끼리 이야기하고 놀고 뭐 거기 있으면 화투도 치고, 바둑 장기 뜨고 담배도 피우고. 시간 정해서 시간 시간마다 담배도 피우고 그 안에서 또 싸움이 일어날 수도 있고(웃음).”

담배는 두 시간에 한 번씩 피울 수 있었다. 그것도 바깥이 아닌 병동 흡연실에서.

홍 사무국장이 말을 이었다. “거기 희망원 아름마을을 가봤는데 아침 7시에 문을 열어 놓고 저녁 8시에 문을 닫아요. 엄청나게 큰데 다 개방해요. 공공후견사업 시작하면서 전국을 다녀봤어요. 희망원이 폐쇄는 아니에요. 제가 가 본 전국의 정신요양시설 중에서는 몇 개 안 되는 개방적 시설이에요. 외부에서 볼 때는 폐쇄라고 얘기하지만 제가 볼 때는 이정도는 개방이라고 봐요. 왜냐하면 우리도 밤에는 다 문 잠그고 자잖아요. 그거랑 똑같은 거예요. 그런 분들이 자유롭게 운동장을 다녀요. 지금은.”

곽석택 씨.

-예전엔 건물 밖을 못 나갔어요?

“못 나갔죠. 도망가면 경찰들이 많이 잡아 왔어요. 경찰에게 잡혀서. 거기 술 마시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많아요. 서울에도 갱생원이 있다하데. 갱생원이.”

-잠은 보통 몇 시에 주무셨어요?

“잠은 한 일찍 8시, 9시에 자는데. 안 자는 사람들도 있어요. 10시, 12시까지 텔레비전 보고 하는 사람도 있고.”

-그것이 허용이 돼요?

“네. 옛날에는 텔레비전도 못 보고 했는데 근래에 와서 텔레비전도 보고.”

-몇 시에 일어나세요.

“아침에 여섯 시 정도에. 그래가지고 거기서 작업도 많이 했어요. 차 부속 같은 거. 차 부속 부품.”

-노동하면 얼마 정도 받았습니까.

“거 돈 뭐 우리는 돈 주는 대로 받았어요. 얼마 안 돼. 그것 때문에 직원들이 막 돈을 해 먹어서.”

홍 사무국장이 “노동력 착취”라고 부연설명을 했다.

-얼마 받으셨습니까.

“기억이 잘 못해요. 담배 같은 거 사 피우고. 거기서는 돈 버는 것도 없고 담배 같은 거 사 피우고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은 한 몇 백만 원 모아가지고 밖에 나가서 술 먹고 다 써 버리고 또 오고 그랬어요.”

-약에 취해서 낮 시간에 잠만 자는 경우가 많았을 거 같습니다.

“거 사람마다 다 상태가 다르기 때문에. 마 심한 정신애(정신장애인)들도 많이 있고 정신애들 많고. 거기 아 또 정신아들 봐주는 사람도 많이 있고. 혼자 나두면 죽거든요. 밥 같은 것도 챙겨주고 옷도 갈아입혀주고.”

-누가요?

“원생들끼리. 원생들끼리. 거도 좀 뭘 알고 이러는 사람들이 동장 당번 책임자하고.”

다시 홍 사무국장의 설명이다. “발달장애인이나 중증장애는 사회복지사가 2.5명 당 한 명인데 여긴 14명 당 한 명이에요. 복지사 선생들도 교대로 하니까 다음날 쉬니 더 적은 거죠. 그러니까 반장들을 쓰고. 통제라기보다는 인솔로 움직이는 거죠.”

-시설에서 담배 사거나 군것질할 돈이 있었습니까.

“거기 있으면 간식 같은 게 다 나오고 해요. 오전 오후 이래 가지고 간식이 나오고 해요. 초코파이도 나오고 과자도 나오고 뭐 고구마 감자 같은 것도 나오고 고기 같은 것도 나올 때가 있고.”

홍 사무국장은 “제가 볼 때는 최근 이야기를 하시는 것 같다”며 “지금 좋아진 것만 이야기하는 것 같다”고 조언을 했다.

곽석택 씨.

-담배를 살 돈이 있었습니까.

“거기 돈 버는 사람들은 그거 먹지도 않아요. 돈 벌어서 일하는 사람들은. 뭐 자기 먹고 싶은 거 사 먹고. 담배도 뭐 서로 막 주는 사람도 있고 돈도 어떤 사람은 돈도 필요 없고 돈도 주는 사람이 있고. 돈 다 다른 사람 쓰라고 주는 사람도 있고. 나는 일을 했기 때문에 담배 같은 거 많이 나왔니더.”

-누군가는 요양시설과 정신병원에서 돈이 없어서 컵라면 국물을 얻어먹기도 했다고 하네요. 선생님의 경우는 어떠셨어요.

“그런 사람들 많이 있어요. 딴 거 모르겠고. 과자도 얻어먹고, 있는 사람들은 사 먹기도 하고 없는 사람들은 얻어먹기도 하고.”

-거기 있는 사람들은 가족들이 돈을 보태준 거겠죠.

“가족이 보태주는 사람도 있고. 부모 없는 사람도 있고. 집에서 면회 안 오는 사람도 많이 있고.”

-수급비는 그때 나왔습니까.

“수급비 안 나왔어요, 거기 있을 때.”

병원이나 정신요양시설에 있을 경우 생계비는 나오지 않고 장애수당이 나온다고 홍 사무국장이 언급했다.

-지역사회로 나오고 싶지는 않았습니까.

“그게 뜻대로 안 되고 그래가지고 요번에 지역사회로 처음 나왔지.”

-나오고 싶지 않았어요.

“왜 안 나오고 싶어요. 도망도 많이 갔어요 거기서. 도망가고 한 몇 년 동안 안 잡히고(웃음).”

-잡혀 오지는 않았습니까.

“도망간 사람 많아요. 잡혀 와요. 경찰이 잡아와요.”

-지역사회에 나오고 싶다고 간호사나 의사한테 얘기해 보셨어요.

“그런 거 해도, 뭐 그렇게 해도 안 돼죠.”

-얘기는 해 본 적이 있으세요.

“네. 이야기했는데. 좀 보내 달라 하면 밖에 나가면 뭐하냐 하고. 안에서 그냥 살아라.”

-정신요양시설에 오래 있으면 지역사회로 나가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강해요. 선생님은 어떠셨어요.

“난 나가고 싶더라고.”

-동료들 중에는 나가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런 사람들 있어요. 밥 주고 옷 주고 하니까(웃음)”

-정신병원과 정신요양시설에서 생활할 때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무엇이었을까요.

“시간 안 가고, 뭐 시간 안 가고 답답했죠.”

곽석택 씨.

-그 무료한 시간을 어떻게 보냈습니까.

“밖에 산책 나가고 그러거든요. 그 사람들하고 밖에 나가면 노래 부르고 놀고.”

-새로돋는집에 온 거는 언제입니까.

“한 두 달 가까이 돼 갑니더.”

강 원장 설명에 따르면 지난해 새로돋는집은 한국정신건강전문요원협회와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그러면서 정신요양시설과 정신병원에 장기간 입원해 있는 이들 중 지역사회로 나오고 싶어하는 이들을 발굴해 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곽석택 씨는 그 과정에서 지역사회로 나오게 된다.

-지역사회로 나와 보니 왜 진작 나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은 안 들던가요.

“들었습니다. 밖에 다닐 수 있고요. 병원에는 안에만 있어야 되기 때문에 답답하고 밖으로 지역사회로 나오니까 낫데예.”

-어떤 게 낫던가요.

“밖에 마음대로 다닐 수 있고 맛있는 거 사먹을 수도 있고 밖에 다니고 하는 게 낫지. 병원은”

강 원장이 말을 이었다. “어른신 말로는 병원에 있을 때는 너무 답답하고 자유가 없었는데 지역사회로 나오니까 자유로워서 좋았다는 거 같아요.”

-정신보건법이 정신건강복지법으로 바뀐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정신보건법예. 정신보건 선생님들이 많이 있데예. 정신과 복지예. 정신건강복지법은 여러 가지로 붙여놓기도 하고 그러데예.”

-들어보지는 못하셨고?

“정신보건 뭐 교사 이런 사람들이 있데예.”

-선생님을 돌봐주는 가족이 있습니까.

“지금예. 옛날에는 면회도 오고 이랬는데 지금은 내가 나이도 많고 또 형제들도 나이도 많고 아들딸 놓고 자기들 살기 바쁘고.”

-옛날에 오시던 분들은 부모님이셨습니까.

“동생도 오고 엄마도 오고.”

-지금 부모님 다 돌아가셨겠네요.

“집에 안 가봐서 몰라요.”

-집에 어머니 아버지 아직 돌아가신 걸 모르신다는 말입니까.

“몰라요.”

-확인해보면 되지 않아요?

“확인 안 합니더.”

-왜 확인 안 하십니까.

“확인 그거 뭐 집에 내가 안 가니까, 내가 생활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서.”

-부모님 보고 싶지 않으세요.

“그건 뭐 그전에는 보고 싶고 그랬는데 요새는 뭐 전부 다 나이가 많고 이래가이(이래서) 동생들도 또 형제간들도 육십(세) 다 이러고.”

곽석택 씨.

-가족에게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가족도 어떤 마음 안 듭니다. 자기 살기 바쁜데 뭐. 나도 나대로 살아야 되고.”

-선생님을 도와주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도와주는 사람예. 여 와서는 맨 또...”

-가족한테는 한 번도 도움을 못 받으신 거죠.

“가족예. 부모님예. 내가 지금 전부 나이도 많고 해서 내가 내대로 살아야지예.”

-가족한테 미운 감정 없으세요.

“그런 거 없어요.”

-부모님 하면 어떤 감정이 떠오르세요.

“그런 감정 없어요. 나는 내가 남동생이 있는데 우예(어떻게) 됐나, 남동생이 다 해줘요. 집에 제사 지내고 이런 걸 다.”

-형제 집에 한번 찾아가보시지 그러셨어요?

“집 앞으로 뭐 시간이 생기면 한 번 가보려고.”

-부모님은 면회 자주 오셨어요.

“가끔 한 번씩 왔어요. 뭐 사갖고 올 때도 있고 그냥 올 때도 있고.”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을까요.

“행복 그건 뭐 그런 거 모르겠십니더. 병원 생활하고 이라이께네(이러니까). 병원에서 먹고 자고. 그 뭐 학생 간호사들이 나와가 이야기하고 뭐 그런 게 좀 좋고 그러데요.”

-가장 즐거웠을 때는 없었어요.

“즐겁고 뭐 즐거우면 또 환우들끼리 모여가지고 놀 때가 그때가 즐겁고.”

-뭐하고 놀아요?

“가라오케(웃음) 가라오케. 가라오케 노래 있지 않십니꺼. 그걸로 노래 부르고. 사람들 많아예. 노래 부르는 사람들. 몇 백 명씩 되기 때문에.”

-연애를 해 보셨어요.

“네. 여자하고는 많이 안 해봤어요. 그 안에, 그 병원 안에 아는 여자들 많지예. 연애 그런 거 안 했어요. 그냥 보면 인사나 하고.”

-그 요양원이 몇 백 명 있었다는 얘기죠.

“요양원이 그때 사람 많을 때 한 2천 명, 1천팔백 명 돼서. 지금도 한 1000명 넘을끼라.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많아예.”

강 원장이 말을 이었다. “그게 인제 노숙인, 알코올중독, 발달장애 다 합쳐서 이야기하는 거죠.”

-거기 생활이 어떻던가요.

“여러 종류의 사람 많아예. 술 먹는 사람도 있고 정신병도 있고 막 정신아(정신장애인)들도 많이 있고. 정신아들.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애들). 그런 아들은 여러 종류의 사람들 많아예. 바보도 많이 있고.”

곽석택 씨.

-요즘 하루 일상이 어떻습니까.

“하루예. 뭐 요새는 코로나 때문에 밖에 안 나가고 산책 같은 거 하고. 그 전에는 코로나 많이 안 걸릴 때는 여기 복지센터 같은 데 가고 그런 데 댕기고. 지금은 산책 같은 거 하고 운동하고 그러지요.”

-정신장애인으로 40년 동안 병원 생활을 했어요. 억울한 점은 없을까요.

“(웃음) 그거 뭐 동네 사람들 많아서 여러 섞여 있으니까. 그거 뭐 내보다 더한 사람도 있고 못한 사람도 있고 이러니. 생각하며 그렇기는 그렇지요 뭐. 잘 사는 사람에 비하면, 다른 사람에 비하면 조금.”

홍 사무국장이 말을 이었다. “왜 억울한 게 없겠어요.”

-가장 하고 싶은 게 뭡니까?

“하고 싶은 거 앞으로 가정 이뤄서 살랑가 모르겠십니다. 그게 제일 하고 싶은 거.”

-정신적으로 힘들 때 어떻게 이겨내십니까?

“지금은 정신적으로 괜찮십니더.”

-생활비는 어떻게 충당하세요.

“생활비는 수급비가 나오데요. 60만 원 그 정도 나와요.”

홍 사무국장이 말을 이었다. “통장 관리는 제가 후견인이다보니 제가 관리를 하고 체크카드를 만들어서 쓰실 만큼 드리죠. 그걸로 갖고 다니면서 필요한 거 사고, 먹고 싶은 거 사 먹고. 그 전에 병원이나 시설에 있을 때 그만큼 안 썼어요. 지금 사회로 나오면서 필요한 것도 있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아서 쓰시지 않을까.”

-60만 원 받으면 새로돋는집에 한 달 생활비 30만 원. 나머지 30만 원 갖고 생활해야 되는데 생활이 됩니까?

“지금은 뭐 되지예.”

-최근에 산 거 중에 기억에 남는 거 있습니까.

“산 거 없십니더. 전부다 거기 희망원 거기 있을 때 옷 신발 이런 게 다 있었거든요.“

-요즘 어디 나가서 식사하십니까.

“식사 안 합니더.”

-밥은 어떻게 해결하세요 점심은?

“점심은 거기서 다. 새로돋는집에서.”

-요양시설이나 정신병원에서 투표 해 보셨어요?

“투표 안 해 봤십니더. 희망원에 있을 때 몇 번 해 봤어요. 네.”

-국가에 바라고 싶은 게 뭐가 있을까요.

“어려운 사람들 좀 정책을 잘 써서 잘 해줬으면 좋겠십니더.”

곽석택 씨.

-60대 노년의 시기에 접어들었습니다. 돌아보니 삶이란 무엇이던가요.

“(침묵) 인생이 그거... 좀 뭐 섭섭한 점도 있고 허전한 점도 있고 생각하면 그렇죠. 아쉽기도 하고.”

-자기 인생에 화는 안 나세요?

“화는 안 납니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싶으십니까.

“앞으로 노력해서 살아야 안 되겠십니꺼.”

-어떤 노력요?

“사람들과도 어불리고(어울리고), 지역생활하면서 앞으로 무슨 일거리라도 생길랑가 모르겠심니더.”

-더 하시고 싶은 말씀 없으세요

“할 거 없심니더.”

국가는 응답해야 한다. 왜 정신적 질병이 있다는 이유로 한 개인의 삶을 이렇게 철저하게 유린해야 했는지. 왜 정신병원과 정신요양시설에 권력을 쥐어주고 폭력적 환경을 묵인했는지. 기자는 녹음기를 껐다. 사무실 너른 창으로 햇살이 와와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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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ㅇ 2020-03-26 10:16:03
좋은 기사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