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형 기자의 변론] 왕자님이 되지 못한 슈렉은 행복할 수 없을까?
[이관형 기자의 변론] 왕자님이 되지 못한 슈렉은 행복할 수 없을까?
  • 이관형 기자
  • 승인 2020.03.31 18: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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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이 되지 못한 슈렉은 행복할 수 없을까?

지난 2001년 ‘드림웍스’가 제작한 영화 <슈렉>은 기존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와 다른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우선 등장 캐릭터부터 상식을 벗어납니다. 주인공은 못 생기고 배 나온 녹색 괴물인 슈렉입니다. 오히려 잘 생기고 키가 큰 차밍 왕자가 악역(惡役)으로 등장합니다. 게다가 피오나 공주는 밥을 짓기 위해 나뭇가지를 분지르고,  뱀을 잡아 입으로 불어 풍선을 만듭니다. 여성스럽고 청순가련한 기존의 공주들과는 너무나도 다르죠.

영화 '슈렉' 스틸컷
영화 '슈렉' 스틸컷

이 영화의 결말에는 반전이 있습니다. 관객들은 괴물인 슈렉이 멋진 왕자님으로 변해 피오나 공주와 사랑을 이루는 모습을 꿈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피오나 공주가 슈렉처럼 괴물로 변하고 말죠. 그리고 슈렉과 피오나 공주, 두 괴물은 서로 사랑을 하고 괴물 자녀를 낳으며 행복한 가정을 이룹니다.

당시 이 영화는 기존 애니메이션들이 심어준 상식과 편견을 넘어섰다는 호평을 받았습니다. 한 네티즌은 다소 거칠지만 핵심을 잘 요약한 다음의 댓글을 남겼습니다.

“디즈니 80년사를 한 방에 맥여버린 전설의 빅엿”

이는 상대적으로 작은 제작사인 ‘드림웍스’가 대형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디즈니’의 영화의 세계관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풍자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디즈니 영화를 포함한 대다수의 영화들은 사람들의 인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들은 키가 크고 힘이 세며, 왕자처럼 높은 신분을 가져야 하고, 여자 주인공들도 가냘프지만 아름답고, 마음이 착하며 헌신적이어야 행복한 결말을 맺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들은 백마 탄 왕자님, 어여쁜 공주님을 입에 달고 삽니다.

이처럼 <야수와 미녀>에 나오는 야수는 저주를 풀어 왕자가 되고, 마녀로 인해 목소리를 잃은 인어 공주는 왕자님과의 사랑을 이루어야 했습니다. 또한 피노키오는 나무로 만든 몸에 생명을 불어 넣어 완벽한 사람의 몸이 되기를 원했고, 노틀담의 꼽추는 착한 마음과 선한 행동을 보여줬을 때 사람들이 구성원으로 받아주었습니다.

영화는 다음과 같이 말해 주고 있습니다.

“야수처럼 외적으로 짐승의 모습에 머물면, 인어공주처럼 목소리를 내지 못하면, 피노키오처럼 나무로 만든 의수와 의족을 벗고 완벽한 사람이 되지 못하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그마저도 불가능하다면 노틀담의 꼽추처럼 마음이라도 착하게 행동해라. 즉, 너희가 가진 장애는 극복해야 할 문제다.”

꼭 애니메이션 영화가 아니라 다른 영화들, 방송 프로그램이나 뉴스 보도, 심지어 책과 같은 매체에서도 장애는 극복의 대상이 됩니다.

오체불만족을 극복한 일본의 오토다케 히로타다, 마찬가지로 사지(四肢)가 없는 닉부이치치, 사고로 인한 화상을 겪었음에도 교수가 된 이지선 교수, 네 손가락 피아니스트 이희아 씨, 그밖에 방송인 강원래 씨처럼 장애를 극복하고 이겨낸 사람들의 이야기가 뉴스로 알려지고, 영화와 책으로까지 만들어집니다.

'오체불만족' 저자 오토다케 히로타다
'오체불만족' 저자 오토다케 히로타다

물론 장애를 갖고 자아성취를 이루며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을 보면, 저도 존경심을 갖게 되고 마음에 도전이 됩니다. 또한 나도 할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을 갖기도 하죠.

그러나 그 이면에는 또 다른 부작용이 숨겨져 있습니다. 사실 모든 장애인들은 개개인마다 장애의 종류와 증상, 경도가 다릅니다. 또한 각자가 추구하는 삶의 목표와 지향점도 다릅니다. 그리고 착하고 선한 분들이 있는가 하면, 나쁘고 악한 장애인들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장애인에게도 비장애인처럼 자신의 삶을 자신이 원하는 방법과 모습으로 빚어나갈 권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공하지 못했다고 해서, 유명한 예술인이나 교수가 되지 못했다고 해서, 영화와 책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불쌍하고 연약하다고 함부로 평가하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장애인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평범하고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성공하거나 유명해지지 않고 살아갈 자유가 있습니다. 그런 삶을 살아간다고 해서 아무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존귀함을 깎아내릴 수는 없는 것이죠.

이런 맥락에서 휠체어를 앉아 이동하거나, 선글라스를 끼고 지팡이를 짚으며 지나가는 시각장애인을 보며, 보청기를 끼거나 수화를 통해 의사소통을 하는 장애인을, 혹은 팔이나 다리가 없는 분들을 바라보며, 결코 불쌍하거나 연약한 존재로 바라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지선 한동대 교수. 사진=SNS
이지선 한동대 교수. 사진=SNS

장애인 모두가, 무언가를 이루고 성취하며 장애를 극복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또한 장애를 극복해내는 게 삶의 목표도 아니고, 인생의 행복을 결정지을 요소도 더더욱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장애는 애초에 극복의 대상도 아닙니다. 남들과 다른 하나의 특징일 뿐이죠.

마찬가지로 정신장애인을 디즈니 영화 속 잣대로 평가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정신장애 당사자들은 더 많은 편견과 왜곡된 시선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일부 방송이나 뉴스 보도를 떠올리면 알 수 있습니다. 신체 장애인은 불편한 거동으로 바닥에 주저앉은 채 집안을 돌아다니며 생활하는 장면이, 조현병을 비롯한 정신 장애인은 마구잡이로 어질러진 집안에서 가족들에게 소리 지르고 폭력을 선사하는 장면이 상상됩니다.

배경으로 신체장애인에게는 슬프고 잔잔한 음악이, 정신장애인에게는 격앙되고 긴장된 음악이 깔리겠지요. 아마 얼굴에 모자이크 처리와 음성 변조도 함께 이루어질 것입니다. 신체장애처럼 정신장애도 완전히 치료되어야만 행복해 질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정신병원에 갇혀 평생을 불행하게 산다는 메세지를 전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슈렉 같은 방송이나 뉴스 보도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신체장애를, 정신장애를 극복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웃을 수 있는 미소가 있고, 기쁨을 만끽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때로는 울고 화나고 다툴 수도 있지만, 그것은 장애나 증상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처럼 일상에서 겪는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여겨줬으면 좋겠습니다.

80년의 디즈니 역사에 슈렉이란 영화가 참신하게 다가온 것처럼, 1956년부터 시작된 대한민국 텔레비전 약 65년의 역사에 전설의 '빅엿'을 먹일 방송이나 뉴스 보도가 나와 주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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