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가 쓴 치유 수기] '리커버리는 그 어디에나 있다'
[당사자가 쓴 치유 수기] '리커버리는 그 어디에나 있다'
  • 박종언 기자
  • 승인 2018.06.20 15: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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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시민기자 권혜경씨의 치열했던 병과의 싸움과 치유 과정 담아

 

이 글은 마인드포스트 시민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권혜경(45.여) 씨의 치유수기다. 그녀는 이 수기로 지난해 보건복지부 주최 정신질환 인식개선을 위한 사회복귀수기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그녀는 이 글을 더 많은 이들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마인드포스트에 기고했다. 여기, 그녀의 힘겨웠던 병과의 싸움과 치유의 전문(全文)을 싣는다.

<리커버리는 그 어디에나 있다>

지난 정신사회재활학회 세계학술대회 때 처음 들었던 심포지움의 제목은 “재난과 트라우마”였습니다.

우리는 세월호 사건이나 의정부방화사건 등 수많은 재난의 상황 앞에서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을 온 국민이 겪었습니다. 심포지엄에서는 그 가운데 경험하는 패닉, 공황상태, 무력감, 컨트롤 타워의 부재 등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 역시 정신증상의 경험이 마치 뇌 속에 폭풍이 훑어 지나간 것과 같다고 생생하게 떠올렸습니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갑작스럽게 나만이 이 엄청난 경험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공포에 압도되어 집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고 급기야 심한 무기력에 시달렸습니다.

개인적으로 바로 재난의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치 내 머리 속에 전쟁이 일어나서 폐허가 된 것 같았습니다. 심한 공황상태가 지속되어 공포에 짓눌려 마치 내가 내가 아닌 것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더군다나 나에게 조울병 진단까지 내려졌을 때 ‘내 인생의 최악의 재난을 겪은 시기였구나’라고 후에 떠올렸습니다.

저는 조울병을 가진 당사자로 현재 리튬 600밀리그램을 복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편과 세 아이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인터넷 캡처. 해당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인터넷 캡처. 해당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저의 내적인 경험의 변화를 바탕으로 저의 리커버리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의 리커버리 스토리를 읽으시면서 ‘회복의 비결’을 찾기보다‘회복의 실마리’를 발견하신다면 매우 보람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사실 사춘기 때부터 심한 감정의 업 다운을 겪었습니다. 성인이 된 후에도 그것이 주기적으로 반복되었지만 절대로 정신과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희 집에 넷째 삼촌이 20대에 발병하여 평생을 정신요양원에 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집안에서 넷째 삼촌의 존재는 금기된 인물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작은아버지들이 오시면 뭔가 작은 소리로 저의 아버지와 이야기하시며 저희들에게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존재는 뭔가 안 좋은 거구나.’

슬프지만 알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씀드리면 알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있어 ‘정신질환’이라는 네 글자를 내 인생에서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지고 있던 불안이라는 소인은 인생의 여러 사건마다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하였습니다.

그 후 결혼과 출산이라는 인생의 큰 일들을 겪으면서 불안의 증상들이 점점 저를 사로잡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결혼 초 시댁과의 갈등을 겪으면서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기 시작했습니다. 또 첫아이 출산 후 극심한 산후우울증과 육아 우울증을 겪으면서 나의 정신력은 바닥을 기게 되었습니다. 아이를 돌볼 힘도, 일상생활을 꾸려갈 힘도 없었습니다.

그 후에 저는 심리상담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절대로 정신과는 갈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상담을 받는 그 때뿐이고 또 다시 감정조절이 안 되어 일상생활을 할 수 없는 일들이 반복되었습니다.

극심한 산후우울증 겪었지만 정신과 찾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30대에는 갑자기 자신감이 넘쳐서 성공 신화와 부동산 광풍에 휩쓸려 당시 29평 빌라 전세를 팔고 오피스텔 하나와 변두리에 아파트 하나를 제 마음대로 샀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반지하 재개발 아파트 값싼 전세로 들어갔습니다.

곰팡이 나는 아파트에 이사 첫날 이 모든 것이 잘못되었음을 직감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경제적으로나 심리정서적으로나 돌아갈 출구가 없었습니다.

그 후 남편은 냉담해졌고 아이들은 아토피로 고생을 했습니다. 저는 어둡고 습한 아파트에서 나오지 않는 날들이 많아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아파트 가격은 2008년 이후 떨어지기 시작했고 대출 이자와 세금 문제 등이 나를 짓눌렀습니다. 가족들과 더 이상 의논도 할 수 없었고, 저는 극심한 외로움과 소외감을 겪었습니다.

우연히 주민센터에 갔는데 지역 정신건강증진센터 안내문이 있었습니다. 나의 정신건강에 대한 문제를 의논할 수 있고, 더군다나 무료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지역 정신보건센터에 문을 두드렸습니다.

사회복지사 선생님께서 고맙게도 저의 집까지 직접 찾아와 주셨습니다. 정신과 치료를 받을 것을 권유하셨지만 병원에 몇 번 나가고 약을 먹지 않았습니다. 사회복지사 선생님은 계속 만나고 싶었지만 병원에는 가기 싫었습니다.

그 후에 계획되지 않은 셋째 아이까지 낳고 체력적으로 기력이 딸리고 남편과 경제적인 문제로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어느 날 길 한복판에서 숨을 쉬지 못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응급실에 가서 검사를 해보니 외과 내과 모두 이상이 없다고 정신과 외래를 권유했습니다. 그 때의 공황발작으로 본격적으로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약을 먹기 시작했고 진단명은 양극성장애 (조울병)로 나왔습니다. 사는 것도 힘든데 내가 정신질환에 걸리다니...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내가 정신질환에 걸리다니

어느 날 저희 사례관리 선생님이 저에게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권혜경님, 요즘 어떠셔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 선생님...저도 자살하지 않고, 아이들도 죽이지 않았으니 오늘 하루 잘 버텼어요.”

당시 20대였던 저희 사례관리 선생님이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진심으로 그런 마음으로 하루를 버텼습니다.

저는 그 시기에 이 주문을 늘 마음속에서 외웠습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고 주문을 외우면서 하루를 버텼습니다. 약도 처음에는 작은 알약을 삼키지 못할 정도로 거부감이 심했습니다. 입마름과 침이 고이기도 하고 머리가 균형이 잘 안 잡혔습니다. 또 약을 먹을 때 그때 원망의 대상이었던 남편과 시댁을 향해 ‘내가 누구 때문에 약을 먹는 줄 아느냐’하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라고 생각이 들었을 때 지역 정신건강증진센터에서 하는 정신질환 환우와 가족들의 교육과정인 패밀리링크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기초 과정, 심화 과정, 중앙심화 과정을 거쳐서 체계적으로 정신건강 지식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조금씩 제 안에 바른 지식이 쌓이면서 나의 병과 증상들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생겼습니다. 패밀리링크 안에서 소규모 스터디가 있어서 거기에 참여도 하고 있었는데 패밀리링크 교재 이외에도 정신건강 관련 책을 능동적으로 함께 읽으며 지식을 쌓아갔습니다.

예전 같으면 서둘러 직장을 구해야지 얼른 돈벌이를 해야지 이렇게 생각했을 텐데, 공부를 하고 나 자신을 관찰해 보니 나의 회복 수준이 아직 직장을 감당하기는 어렵다라고 판단이 됐습니다. 또 어느 교수님이 “교육도 재활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공부하면서 좀 더 있다가 취업을 준비하자라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러면서 패밀리링크 교육과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강의 준비를 하는 것이 너무나 부담이 되었지만 준비하면서도 공부가 되었고 발표하면서 여러 선생님들께 피드백을 받으며 확신이 생겼습니다.

서양 속담에 “가르치는 것은 두 번 배우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정말 맞았습니다. 막연하게 알고 있던 것을 발표를 하니 흔들리지 않는 지식이 되었습니다.

예전에 의정부 고시원 참사 때 비번 소방관이 거기에 있었다고 합니다. 모두가 패닉 상태에 놓였을 때 그는 소방도로를 알고 불길이 어떻게 번지는지 알았기 때문에 사람들을 대피시켰다고 합니다.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그 골든타임을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정신장애 당사자가 말했습니다.

‘무지가 병보다 무섭다’

정신건강 지식은 이제 전문가들뿐만 아니라 가족과 당사자가 열심히 깊이 있게 공부하고 관찰해서 전문가와 함께 이 병과 싸워야합니다, 그래야 위기를 넘기고 재발을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현병에 대한 무지는 병보다 무섭다

저는 나 자신에게 다짐하는 의미로 <리커버리 선언문>을 써보았습니다.

<리커버리 선언문>

저는 조울병을 인식하기까지 편견과 선입견으로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음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병으로 인해 내가 고쳐야할 나쁜 습관 (책임전가 ,회피반응 등)과 잘못된 가치관이 있음을 알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나는 이제 나의 병을 받아들이고 이제부터는 이전과 다른 삶을 살 것을 선언합니다.

1. 나는 매일 약을 먹어야한다는 부담감, 환자라고 느껴지는 자괴감, 평생 약을 먹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지만 나의 일상을 유지시켜주는 최선의 방법이기에 내가 선택했습니다. 따라서 주치의와 상의 없이 약을 중단하지 않겠습니다. 또한 몸을 많이 움직이고 규칙적인 생활로 뇌 활동에 도움을 주겠습니다.

1. 나는 환자라는 슬픔과 수치심, 다른 사람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마음보다는 실수 많이 하고 증상 있는 나 역시 ‘나'임을 인식하고 격려하고 지지할 것을 선언합니다.

1. 나는 과거의 실수, 증상이 나타날 때의 모습을 부끄러워하거나 미래의 직업, 노후 등으로 불안해하기보다 ‘지금 여기’살고 있는 나에게 집중할 것을 선언합니다.

1. 밤하늘에 혼자 빛나는 별처럼 유명해지고 다른 사람의 관심을 받으려하기보다 세 아이와 남편과 함께 나누는 저녁 밥상, 옆집 사람과 나누는 짧은 수다, 소박한 일상이 기적임을 알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1. 나에게 있어 ‘회복’이란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알을 깨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리커버리’라고 부릅니다.

인터넷 캡처.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인터넷 캡처. 사진은 기사와 관련 없음.

'지금, 여기'에 집중하기

나는 혼자가 아니고 세상엔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점점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갈 것을 선언합니다.

또 당사자로서 이 사회에 드리는 제언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먼저, ʻ편견의 눈ʼ이 아닌 ʻ발견의 눈ʼ으로 우리를 바라봐주시길 바랍니다. 누구보다도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정신장애인의 새로운 발견에 힘써 주시고 재능 있는 당사자들을 발굴해 주세요. 수많은 예술가, 사업가, 정치가들 중에 정신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ʻ상처 입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ʼ 로서 동료지원전문가(정신장애를 경험한 사람들이 다른 정신장애인을 돕는 사람)는 치료 효과가 매우 탁월합니다. 동료지원전문가를 교육, 양성하여 실제 치료 현장에 협업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부디, 부디 우리를 비웃지 말아주세요. (Don't laugh at us) 정신질환자를 백안시하기보다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병과 싸우는 것만으로도 힘겹습니다.

돌이켜보면 리커버리는 그 어디에나 있었습니다.

단순히 예전에 병 나기 전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안에 압도되어 당장 하루 앞을 알 수 없는 인생길을 걸을 때도, 정신건강에 대한 지식이 없어 이리저리 치료법을 찾아 헤맬 때에도, 지루하리만큼 평범한 일상에도, 너무나 무기력하여 바지 하나 입을 힘조차 없을 때에도, 가족들 가운데에 소외감으로 몸서리쳐질 때에도, 당사자 동료의 변한 모습에 감동할 때에도, 나의 작은 변화에도 기뻐하며 칭찬하는 전문가 선생님들 눈빛에도 리커버리는 그 어디에나 있었습니다.

리커버리를 폐부 깊숙이 원하는 가슴 가운데 희망의 씨앗을 품고 있는 한 리커버리는 그 어디에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어코 그 씨앗을 싹틔웁니다.

우리 모두는 그 작은 씨앗의 소중함을 알고 함께 손을 모아 그 씨앗을 보호하고 가꾸어야합니다.

리커버리는 우리 주변에 그 어디에나 있습니다. Recovery is that 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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