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직 해방되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해방되지 않았다
  • 박종언 기자
  • 승인 2020.05.01 19:48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남 합천 정신병원서 정신장애인 사망
정신병원의 신체적 순종과 규율 위반하면 폭력 개입
헤겔 상호인정처럼 정신장애인과 비정신장애인은 상호의존적 존재

정신병원에 입원한 환자가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바닥에 넘어뜨려 숨지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경남 합천경찰서에 따르면 간호사 A(47·남)씨는 지난달 20일 오후 9시 6분쯤 자신이 근무하는 합천군의 한 정신병원 복도에서 환자 B(55·남)씨와 실랑이를 벌이다 B씨를 복도 바닥으로 넘어뜨려 의식을 잃게 한 혐의를 받고 있다.

머리가 바닥에 부딪치면서 의식을 잃은 B씨는 합천의 다른 병원을 거쳐 대구 지역 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받았지만 같은 달 28일 오후 1시 34분쯤 숨졌다.

사고가 발생한 정신병원에는 현재 200여 명의 환자가 입원해 있으며 숨진 B씨는 2003년부터 이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간호사 A씨는 2018년 8월부터 이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기자는 10년도 훨씬 전에 경기도 이천의 한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곳에서 4개월 정도 머물렀다. 그나마 그 병원은 당시 정신장애인에 인권적 감수성을 여타 정신병원들보다 많이 갖고 있는 곳이었다.

어느 날, 기자는 여성 간호사들이 있는 카운터에서 무언가를 질문을 하고 있었는데 이 여자 간호사가 신경질이 난다는 이유로 남자 보호사들을 전화로 불렀다. 나는 남성 2명에 제압돼 독방으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만 하루 동안 사지를 묶인 채 있어야 했다. 나는 풀려난 후 간호사에게 물었다. “나는 질문을 한 건데 왜 강박을 당해야 했냐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나는 많은 정신장애인들을 만났다. 그들 중에는 나처럼 괜찮은 병원에서 트라우마 없이 생활하다가 사회로 다시 복귀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소수에 불과했다. 대다수는 병원과 요양시설에서 학대받은 상처로 트라우마를 겪고 있었고 어떤 이는 병원 퇴원 후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했다.

치유되기 위해 병원에 들어갔지만 그곳에서 더 깊은 마음의 상처를 안고 공포와 두려움, 슬픔과 증오를 갖고 살아가는 이들 역시 많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었다.

왜 우리는 치유 받을 권리를 박탈당하고 끊임없이 통제와 예속, 복종과 순응에 익숙해져야 하는 것일까. 마치 어떤 질문을 했는데 목소리가 컸기 때문인지 혹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보호사들을 불러 기자를 납치하듯 격리병동에 집어넣은 그 간호사처럼 예속이 행위의 우선순위가 되는 것일까.

병동 내에서 신체적 순응을 보이지 않으면 느닷없이 격리병동에서 사지가 다 묶이고 밥 먹는 시간만 풀어줬다가 다시 묶고, 화장실 가는 대신 기저귀에 똥 오줌을 싸라고 말해 주는 공간에 머물러야 하는지 기자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물론 기자는 정신요양시설 몇 군데를 알고 있지만 그보다 많은 정신요양시설과 정신병원이 어떤 지역에 어느 정도 분포돼 있는지 모른다. 그 몇 군데의 정신요양시설은 그나마 인권적 가치가 존중되는 곳이었다.

그렇지만 기자는 가 보지 않는 시설들이 아직 너무나 많다. 그 시설과 병원 내에서 어떤 폭력이 횡행하고 있고 정신장애인은 어떤 방식으로 억압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지 알 수가 없다.

현재 전국 정신병원과 정신요양시설에 입원·입소해 있는 이들은 8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사건이 발생한 저 대형 정신병원처럼 한 병원과 시설 당 200~300여 명이 집단적으로 기거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곳에 폭력이 없을까.

기자는 폭력이 없을 가능성은 제로라고 본다. 어차피 정신병원과 정신요양시설은 폭력에 의한 규율, 복종하는 시선과 몸을 요구한다. 그곳에서 저항한다는 것은 막말로 계란으로 바위치기일 것이다. 그런 폭력적 공간들의 변화를 만드는 주체는 그 안에 살고 있는 이들이 아니라 그곳을 거쳐서 살아나온, 혹은 그곳에서 깊은 상처를 입고 퇴원한 이들이 만들어낸 연대에 의한 목소리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병원과 시설은 고여 있는 우물과 같다. 그 안에서 서서히 죽어가거나 복종하거나 지침에 따라야 하는 순응적 인간을 똑같이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악명 높았던 청량리정신병원이 지난 2018년 3월 문을 닫았다. 화가 이중섭, 시인 천상병이 거쳐간 공간인데 이 병원이 갖는 상징성은 폭력과 억압, 무수한 구타와 질서정연한 규율이 어떻게 병원 안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청량리정신병원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그곳의 ‘악명’은 비정신장애인들도 익히 들어 알 수 있을 정도로 높았다. 그곳이 개원 73년만인 그해 폐쇄될 때 기자는 “정신병원의 폭압성이 문을 닫는 상징적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아직, 여전히 폭력의 병원에서 순종을 배우며 살아가고 있다. 경남 합천군의 저 정신병원에서 숨진 정신장애인은 재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규율과 신체의 복종에 저항했기 때문에 사망한 것이다. 아무런 우군(友軍)이 없는 차가운 공간 안에서의 싸움은 아무도 알아 주지 않으며 알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장애계는 정신병원이나 정신요양시설에 들어가 실태조사를 할 수 있는 동료지원가와 인권 상담가를 육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그 공간으로 들어가서 어떻게 병원과 시설이 운영되는지, 그 안에서 정신장애인은 어떤 인권의 가치들을 누리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점검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빗장은 푸는 데는 너무나 많은 제약들이 따르고 있고 정신장애계는 여전히 이 단순하고 정당한 요구마저 병원과 시설로부터 묵살당하고 있다.

이번 사건이 포털에 올라오면서 댓글들은 두 가지 의견으로 나눠졌다. 한 진영은 이 사건에서 간호사에게 동정을 표하는 이들이 있는 반면 다른 집단은 정신병원의 폭력성을 비판하고 있었다.

한 네티즌은 “정신병원과 요양병원에서 폭행이 많이 일어난다. 환자들이 이상하고 어렵지만 알고 일하는 거데 왜 때려”라며 “안 그래도 불쌍한 사람들인데 (간호사를) 강력 처벌해서 (법의) 무서움을 보여줘야 안 그럴 것”이라고 전했다.

또 다른 네티즌은 “정신병자들은 일반인보다 힘도 세고 앞뒤 안 가리고 폭력을 심하게 행사하는 사람들이 많더라”며 “간호사도 위험했을 수도 있고 전 과정이 어땠는지 봐야 할 듯”이라고 의견을 남겼다.

몇 개의 댓글을 올려본다.

“병원 상황 모르는 분들은 저 간호사만 욕하는데 솔직히 위험에 노출돼 있는 사람이 의료진이다. 사망까지 하게 돼 안타깝지만 의료진이 사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저런 데서 일해 봐서 아는데요. 간호사만 욕할 상황은 아닐 수도 있어요. 목숨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이 많아요.”

“심적으로 아픈 사람들 남들이 보면 미쳤다고 무시하는 사람들이라고 쳐도 간호사라 불리는 사람들이 쉽게 대하면 안 되는 걸 언어 폭력에 무력까지 (사용하고). 소규모 요양시설은 오죽할까.”

“보호자가 자주 안 가면 환자는 간호사, 요양보호사의 분풀이 대상이다.”

“정신병원에서 일했었음. 10년 전까지 흔한 일이었음.”

“간호사들이 환자들 때문에 힘든 거 아는데 정신병원에서 일어나는 의료진의 폭행은 방어 차원이 아니잖아요.”

“저런 병원에 보호사라는 사람들 있습니다. 자격증도 없고 병원에 빽 있는 쓰레기라고 보면 됩니다. 물론 좋으신 분도 많겠지만 절반 이상은 인간 말종들입니다. 모든 책임은 병원에 있습니다.”

기자는 다음 댓글에 눈이 머물렀다.

“정신병 환자는 패야 된다. 인권이고 나발이고.”

“조현병 환자들은 패야 말 듣는다. 간호사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선처받을 것입니다.”

다른 댓글은 더 강하게 눈길이 머물렀다.

“저 유족은 땡잡았네. 골칫거리 처리하고 보상으로 돈도 생기고.”

정신장애인들은 자신이 병에 걸리고 싶어 걸린 것도 아니고 생애주기의 어느 지점에서 찾아온 환청과 망상, 조증과 울증으로 고통받는 존재들이다. 왜 내가 정신질환에 걸려야 했는지 가슴 아파하고 왜 정신질환이라는 병이 있다는 이유로 죄 없는 죄인으로 공동체에 표상돼야 하는가를 질문하는 존재들이다.

그 질문을 우리는 여전히 하고 있다. 공동체가 이들을 사회 생태계와 질서를 훼손하는 존재들로 볼 때 정신장애인은 해방될 수 없다. 즉 정신장애인의 내적 투쟁이 필요한 만큼 이를 지지하고 옹호하는 공동체의 목소리가 높아질 때 우리 정신장애인은 해방적 삶을 요청하고 만들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한 진영의 싸움만으로 이 모순은 해결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텔레비전 광고와 포스터 등을 통해 정신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일하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들이라는 권리를 공동체에 요청하는 것이다.

이번 합천 정신병원 사건을 통해 우리 사회는 정신장애에 대한 어떤 민도를 갖고 있는지 재차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동정할 수 있지만 지역사회에서 비정신장애인과 어울려 살아서는 안 되는 위험하고 폭력적인 존재들. 그가 정신장애인이다.

플라스틱 통으로 누군가를 향해 휘두른 것도 주요 뉴스 가치로 인정돼 언론에 보도되는 존재들. 그가 정신장애인이다. 정신병원에서의 일탈적 행위가 ‘탈출’로 규정돼 범죄적 시선으로 포착되는 존재. 그가 정신장애인이다. 두들겨 맞아야 하고 이성적으로 무언가를 요구할 수 없는 존재. 그가 정신장애인이다. 대중에게 잊혀져 있다가 사건사고가 터지면 공동체로 소환돼 비난받고 잊혀지는 존재. 그가 정신장애인이다.

합천 사건은 여전히 정신장애인의 해방의 길이 멀다는 것을 보여준다. 말을 듣지 않는다는 이유로 폭력이 먼저 앞서는 정신병원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정신장애인의 해방은 없다. 공동체가 우리를 적으로 규정하는 시선이 바뀌지 않으면 정신장애인의 해방은 없는 것이다.

헤겔의 인정 투쟁처럼 노예와 주인은 서로에게 상호 의존한다. 인간과 인간은 서로에게 의존한다. 마찬가지로 정신장애인과 비정신장애인의 공동체는 상호 의존하고 있다.

정신장애인의 해방 없이는 공동체의 해방이 없다. 우리는 아직 해방되지 않았다. 누군가가 정신장애인의 존재를 훼손한다면 우리는 해방될 수 없다. 정신병원과 정신요양시설에서 인간의 내적 속성인 고통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합천에서 숨진 저 정신장애인은 17년을 정신병원에서 보내다가 사망했다. 누가 울어줄 것인가. 그런데 저 댓글은 그렇게 말한다. 정신장애인 가족은 정신장애인이 일찍 죽기를 바랐을 건데 그렇게 사망했고 병원으로부터 보상금까지 탈 수 있게 됐다고.

슬프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조호연 2020-05-03 02:05:16
,“정신병 환자는 패야 된다. 인권이고 나발이고" 라고 한 사람을 한 번 정신병원에 가둬봐야 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