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언의 만남-길을 묻다] 김미현, “나 스스로 변화되지 않으면 우린 늘 숨어서 지내야 해요”
[박종언의 만남-길을 묻다] 김미현, “나 스스로 변화되지 않으면 우린 늘 숨어서 지내야 해요”
  • 박종언 기자
  • 승인 2018.07.24 00:3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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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하던 라디오 디제이 떠나자 찾아온 우울증
삶에 환멸…수면유도제 페트병째 먹고 다시 살아나
아버지의 알코올의존증이 스트레스로 작동해
고등학교 때 맞이했던 ‘왕따’의 기억
자유 상실한 정신병원, 다시 입원하고 싶지 않아
커밍아웃 두렵지 않아…요청 오면 어디라도 갈 것
사람들에게 울림 주는 글 쓰고 싶어
나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회복되고 성숙해져

실업계 여고를 졸업한 후 그녀는 일 대신 라디오에 빠져 살았다. 좋아하던 라디오 프로그램 디제이(DJ)의 애청자였다. 스무 살 초반의 어느 날, 그녀는 디제이가 활동을 그만둔다는 걸 라디오를 통해 들었다. ‘멘붕’이었다. 며칠을 홀로 울었다. 슬픔을 충분히 애도한 후 디제이를 떠나보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우울이 찾아왔다.

다시 라디오로 빠져들었다. 어느 밤, 라디오를 듣는데 라디오 진행자들이 ‘자기 얘기’를 한다고 생각했다. 숨기고 싶었던 자신의 이야기들을 라디오 진행자들이 폭로하는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녀는 라디오 방송국으로 전화를 했고 “진행 좀 똑바로 하세요”라고 말한 후 힘차게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다시 입원. 20대 초반에 첫 입원한 후 40대인 지금까지 그녀는 여섯 번 입원했다. 그리고 지금은 글에 빠져 산다. 중고등학교 때 하지 않았던 책읽기와 글쓰기. 그녀는 이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의 전망을 하나씩 쌓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러 번의 문학상을 받았다. 그를 증명하는 것이 어찌 문학뿐이겠는가. 그녀는 “스스로를 드러낼 때 치유가 된다”는 자기 슬로건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었다. 봉천동의 한 카페에서 그녀, 김미현(43)씨를 만났다. 다음은 일문 일답.

김미현 ©마인드포스트.
김미현 ©마인드포스트.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정신장애인 당사자 김미현입니다. 1999년에 처음 병이 발병했고 이후 집에서 지내는 적이 많았어요. 은평구청에서 오랜 기간 동안 공공근로를 했어요. 공공근로 하다가 2012년에 불가피하게 저희 집이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돼서.”

-집 전체가?

“네 가족이. 그래가지고 일 하는 걸 그만두고.”

-아버지, 어머니하고?

“네. 아빠, 엄마, 저 이렇게 기초생활수급자가 돼서 2012년 이후로는 일을 한 적이 없어요. 지금은 병원 잘 다니면서 약도 잘 먹고 있고 입원은 한 여섯 번 했고, 현재는 서울시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기획을 한 텐데시벨이라는 팟캐스트 방송 작업을 하고 있어요. 정신장애인들끼리 모여서 같이 대본도 쓰고 녹음을 하고. 토요일에는 봉천동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자조모임 형식으로 하고 있는 문학교실 천둥과번개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발병했을 때 라디오에 자기 얘기하는 줄 알고 했다는 그 부분 좀 말씀 좀 해주세요.

“저는 1999년 초에 봄부터 우울증이 온 것 같아요. 그때가 스물네 살이었는데 그때부터 되게 우울했고 되게 가라앉아 있는 느낌.”

-갑자기 그렇게 된 거에요?

"네 서서히. 제가 그때 구직활동을 안 하고 집에 있었는데 그 당시에 라디오를 너무 많이 듣다보니까 라디오 디제이를 좋아하게 된 거에요. 그래서 우편으로 사연도 보내고 신청곡도 써서 보내고 했는데 정도가 지나쳐 가지고 디제이를 너무 좋아하게 된 거에요. 그래 갖고 디제이가 그만둔다는 소리에 충격을 받아가지고 막 계속 울었어요(웃음). 남자친구랑 사귀다가 헤어진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계속 울었어요. 너무 슬퍼서 눈물이 계속 나는데 어느 순간에 그 디제이는 그만 뒀고 저는 계속 우울해 있었죠.

그런데 어느 날인지 모르겠는데 라디오 방송국에서 나를 흉보고 내 얘기를 하는 것 같고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부분까지 이야기하는 것 같았어요.

예를 들면, 예쁘지도 않은데 예쁜 척했다. 잘나지도 않는데 잘난 척했다. 그렇게 외모적으로 되게 안 좋게 얘기를 하는 것 같았어요. 그게 너무 슬펐고, 어느 순간 라디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을 했거든요. 그게 환청이었던 같기도 하고 저는 라디오를 사랑하고 좋아했던 사람인데 그렇게 안 좋은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을 하니까 너무 충격을 받은 거죠. 그때가 24살이었는데 집에만 있는 거예요."

 

충분히 마음에서 떠나보내지 못했던 라디오 디제이…찾아온 우울증

”혼자서 울다가 밤에 아무도 없을 때 맥주도 사다 마시고 그러다가 자살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1999년 한 시월 정도에 약국에 약을 사러 다녔어요. 그런데 약국에서 누가 수면제를 주겠어요. 잠이 안 온다고 수면제 달라고 했는데 안 주죠. 그런데 너무 잠이 안 온다고 하니까 수면유도제를 주더라고요. 근데 그게 물약이었어요. 다른 약국에 가서도 얘기해도 알약은 안 주고 수면유도제만 처방해주는 거예요.

그걸 다 모았어요. 그래서 그 약물을 콜라 1.5리터짜리 페트병에 넣었어요. 그걸 마시고 나면 ‘난 다음 날 일어나지 않을 거다’라고 생각을 한 거죠. 근데 웬걸. 아침에 일어났어요(웃음). 아무렇지 않게 일어난 거예요. 이게 뭐지? 난 뭐가 된 걸까? 하고 생각했죠.

제가 발병한 원인이 그런 이유도 있지 않았나 싶어요. 우리 병이 어떤 호르몬에 의한 그런 거잖아요. 그래서 그 약물 작용도 좀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아무튼 그렇게 자살 시도도 했었고 겁이 많으니까 심한 자해는 못했어요. 칼로 손목을 긋는다는지 아파트에서 뛰어내린다든지, 이런 거는 도저히 겁이 나서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제일 쉬운 게 약 먹는 거니까.

그렇게 시도를 했는데 성공하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조현병이 찾아온 거죠.

그때 증상이 밖에 나가 돌아다니면 망상이 오는데 누군가가 나를 도와준다는 생각이 들고, 누군가가 나를 위압한다는 생각도 들고, 그리고 자면서 꿈을 꿨는데 꿈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현실과 동일시한다든지 하고. 그래서 누가 날 도와주려고 하는 것 같고 모든 세상의 물건들이 다 내 것인 것 마냥 (느낌이 들고). 어떨 때는 버스비를 안 내고 버스를 탄다거나, 아니면 시장에 가면 그 물건들이 내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렇게 하니까 부모님이 걱정을 하시죠. 엄마가 이모한테 얘기를 하고 이모가 병원을 알아봤죠. 1999년 11월 시립은평병원에 처음 갔죠. 그런데 입원을 해야 되는데 입원실이 안 나는 거예요. 입원실이 다 차서 없어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약물 치료를 한 거죠. 입원은 안 하고 약을 먹고 상황을 살펴본 거예요. 그런데 약을 먹으니까 괜찮아지더라고요.”

-그때 무슨 약 먹었어요?

“그때 자이프렉사였던 거 같아요. 그게 저하고 잘 맞는데요. 2001년에 처음 재발을 하고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그때 저는 약을 잘 먹고 있었거든요. 근데 왜 입원을 했는지를 잘 몰랐어요. 생각해 보면 아빠한테 원인이 있지 않았나 싶어요. 아빠가 알코올중독 수준까지 갔어요. 그래 가지고 술이 많이 취하면 주사가 있었어요. 엄마랑 저를 괴롭혀요. 잠을 안 주무시고 소리를 지른다거나 계속 잔소리를 한다거나, 아니면 물건을 집어던진다거나 그렇게 주사가 있었어요. 심하면 엄마를 폭행하기도 하시고. 약을 먹는 도중이었는데 아마 그게 저한테는 스트레스였나 봐요. 그래서 병원에 입원하게 된 거 같아요.”

-지금 정확한 병명이?

“병명은 조현병. 근데 우울을 동반한 조현병이래요. 정확히 조현병 중에서도 관계망상 그런 병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럼 서울에서 태어나서 중·고등학교 잘 마치고 24살 때 갑작스럽게 우울증이 왔었고, 그래서 사랑하던 디제이가 그만두면서 굉장히 힘들어했고. 그러다가 라디오 방송국에서 자기 자신을 욕하는 것 같고. 전화를 해서.

“CBS방송국이었는데 그때는 정말 열이 받았던 적이 있는데 제가 엽서에다가 신청곡을 써서 보냈는데 이 사람들이 이 내용을 오해를 한 것 같아요. 잡지인가 신문인가 그런 데를 봤는데 제일 깊고 넓고 뜨거운 바다는 사랑해라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저는 바다를 뜻하는 줄을 알고 그걸 적어서 보냈는데 이 사람들이 이상한 쪽으로 생각을 했나 봐요. 사랑해라는 게 내가 디제이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것도 여자를. 그런 식으로 보낸 거라고 생각을 했는지 아무튼 기분이 되게 안 좋았어요.

그날따라 방송에서 분위기도 쏴하고, 디제이가 멘트를 날렸는데 평상시와 다른 거예요. 제가 예민해 있었는데 전화를 했죠. CBS에 전화해서 ‘당신들 똑바로 방송하라고,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방송하는 거냐’고 그랬어요. 그리고 전화를 끊었어요. 그랬더니만 분위기가 금세 괜찮아지는 것 같아요. 이 사람들이 제대로 하겠군. 제 딴에는 그런 생각이 든 거예요. 그래서 그냥 그렇게 넘어가나 했어요. 근데 뭐랄까. 어느 순간 이 방송국에 있는 사람들이 제가 전화를 한 것에 대해서 되게 충격이었나 봐요.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해야 하나. 자기들이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한 거죠.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해요.”

 

페트병에 담긴 수면유도제 약물 다 마시고 자살 기도...다시 살아나

-라디오로 그렇게 나온 건 아니고?

“라디오에서 디제이가 사과를 하진 않았지만 왠지 그런 식으로 들렸어요.”

-미연 씨 그 부분을 디제이가 엽서를 읽었단 말이죠. 읽어 갖고 그걸 멘트를 했단 말인가요?

“그건 아닌데, 제가 엽서를 보내고 제 이야기가 나오나 안 나오나 들었는데 분위기나 디제이나 멘트나 그런 게 안 좋게 들렸거든요. 그래서 이 사람들 왜 이럴까라는 의문을 품게끔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되게 오래 돼서 그 사람들이 어떻게 얘기했는지는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아무튼 이 사람들이 내가 보낸 엽서라든지 글들을 갖고 자기네들끼리 충격을 받은 것 같기도 하고.”

-그건 미현 씨 생각이고?

“음. 그건 내 생각이죠. 그래서 제가 너무 깊게 생각을 한 것 같기도 해요. 그 사람들 얼마나 방송하느라고 바쁘겠어요. 한 사람이 엽서에 사연 써서 보낸 걸 그거에 너무 뭐,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렇지 않은 거잖아요. 그냥 한 번 읽고 쓰레기통에 집어던질 수도 있고,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 수 있는 거를 저는 그때 너무 예민했고 병이 오고 있었고 그러니까 심각하게 생각을 한 거죠.”

©마인드포스트.
©마인드포스트.

-방송 사건이 있었고.

“그래서 충격을 받아서, 그 충격 때문에 병이 온 것 같아요.”

-그래서 조현병이 시작됐고 병원과 약국에서 약을 타서 먹었는데 일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지금까지 살아왔고.”

-중고등학교 때 얘기 좀 해 주세요. 어땠는지.

“사실 중학교 때는 재밌었거든요. 공부를 잘하지 못했지만 친구들하고 되게 재밌게 지냈어요. 초등학교 때도 그랬던 거 같고. 근데 고등학교 때는 너무 애들이 다른 거예요. 제가 예일여자중학교를 나왔고 그 같은 재단에 있는 예일여자실업고등학교를 들어갔어요. 상업계 고등학교를. 들어갔는데 얘들이 중학교 때하고 다른 게 저를 왕따를 시키는 거예요.

그러니까 저는 혼자 다니는 아이였어요. 무용실이나 음악실, 미션스쿨이라서 예배를 다니러 간다거나 그럴 때마다 아무도 저하고 같이 가자는 소리 안하고 자기들끼리 모여서 가고. 중학교 때는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없거든요. 근데 고등학교에는 그러니까 너무 슬프고 우울했어요.

근데 공부는 잘했거든요. 오히려 중학교 때는 공부 안 했는데 고등학교 때는 공부를 하게 되더라고요. 물론 친구는 있었어요. 근데 애들이 나랑 잘 놀아주지도 않고 나 혼자 다니고 하니까 할 게 공부밖에 없더라고요. 잘 해야 좋은 데 취업할 거 같기도 하고. 그래서 되게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상도 타고 매번 10등 안에 들었어요. 그렇지만 대학을 갈 생각은 못했어요. 왜냐하면 저는 취업을 할 생각이었거든요. 상업계를 나왔으니까.

상업고등학교는 대학을 가는 게 아니라 취업을 하는 거니까 회사에서 취업의뢰가 들어와요. 반에서 공부 잘 하고 자격증도 많이 따고 그런 애들을 골라서 면접을 보내거든요.

근데 저한테는 담임선생님이 한 번도 추천을 안 해 주는 거예요. 공부도 잘 했고 자격증도 많이 땄는데도 불구하고 선생님이 추천을 안 해 주는 거예요. 제가 생각할 때 그 당시에는 이렇게 뚱뚱하지는 않았지만 외모가 좀 문제가 되지 않았나. 저는 제 스스로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편이거든요. 회사에서 외모를 많이 보잖아요. 키는 몇 센티 이상 돼야 하고 몸무게 몇 킬로 이하 뭐 외모는 어떻게 해야 되고 이런 조건이 붙더라고요. 그러니까 선생님이 추천을 안 해 준 거예요. 그래서 대기업에 면접을 간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러다가 선생님이 면접을 가라고 한 데가 있었는데 제가 오만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갔는데 회사가 너무 형편없는 거예요. 무슨 이런 회사가 다 있지하는 곳에 나를 면접을 보라고 선생님이 보낸 거예요. 전 그 당시 주제 파악을 못한 거 같아요.”

 

고교 시절 겪었던 ‘왕따’의 슬픔

-어느 정도 형편없었습니까?

“보통 회사라면 좋은 건물에 사람들도 많이 있고 시설도 깨끗한 데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갔던 곳은 사람도 한두 명. 사장님하고 여직원 있고, 많으면 남자 직원 한 명 더 있고. 그리고 보기에도 되게 초라하고 되게 취약한.”

-공단 지역?

“그런 곳을 떠올리게끔 하는 그런 것이었거든요. 저는 오만했던 거죠. 그런 데라도 들어갔어야 됐는데 저는 왜 이런 데 나를 면접을 보라고 했을까. 너무 화가 난 거예요. 그래가지고 어느 회사에 갈 때는 껌을 짝짝 씹으면서 면접을 봤어요(웃음). 껌을 씹고 면접을 보니까 얼마나 애가 건방져 보이겠어요. 아무리 성적이 좋고 자격증이 있어도. 그랬던 적이 있어요. 그래가지고 취업을 못한 채 졸업을 했어요.”

-19살 때 졸업하고 24살 우울증 오기 전까지 그 기간은 어땠습니까?

“회사를 다닌 적이 있어요. 그때 엄마 아는 분의 소개로 택배회사를 들어갔어요. 거기서 전화 받고 접수하고 경리도 보고, 그런 데 들어간 적이 있고. 회사를 오래 안 다니고 그만둔 이유가 지금 생각하면 열심히 안 살았던 것 같아요. 20대 때. 30대는 그나마 구청에서 일하면서 지냈는데 20대 때는 그냥 집에 있는 게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가지고 20살부터 24살까지 택배회사 들어간 1년 한 거 말고는 없죠. 티비 보고 엄마가 부업을 하셨는데 부업하는 걸 도와드리고. 그리고 라디오 듣고.”

-어머니가 부업을 뭐하셨습니까?

“야구선수들이 쓰는 모자 있잖아요. 그 헬멧이라고 하는데 타자들이 쓰는 모자 있잖아요. 챙 있고. 그 모자 안에 들어가는 걸 내피라고 하는데 그 모자에 들어가는 것을 세세히 만드는 거예요. 세부적인 것들은 다 공정이 있거든요. 그거를 다 만들고 포장까지 해가지고 완성하고 그런 거를 저희 이모가 하셨어요. 이모가 하시다가 저희한테 같이하자고 해서 저희가 되게 오랫동안 그 일을 했거든요. 그래서 엄마가 하시는 일을 도왔어요.”

-그래서 24살 때까지 그렇게 하시다가 우울증이 오고? 입원을 지금까지 여섯 번 하셨단 말이에요. 강제입원 몇 번 하셨어요?

“없어요. 여섯 번 다 자의입원.”

-어떻게 그게 가능하죠?

“그러니까 저는 처음에 병이 재발했을 때도 누가 강제로 가자고 한 게 아니라 내가 이상하다고 스스로 판단을 했어요. 그래서 나 병원에 가야 될 것 같다고. 그렇게 엄마한테 얘기해가지고 병원에 입원했거든요.”

-보통 가면 몇 개월씩 있었어요?

“최고 길게 있었던 게 한 달. 나머지는 보름 입원한 적도 있고 일주일 입원한 적도 있고. 그 정도.”

-정신병원에서 견딜 만하던가요?

“아니요. 견딜 만하지 않고 너무 답답하고 빨리 퇴원하고 싶었어요. 자의입원을 했어도 어느 정도 기간이 있어야 퇴원을 시켜주더라고요. 좋진 않았죠.”

-입원 과정을 거치면서 고통스러웠을 거예요. 그 과정 속에 깨달은 게 있습니까?

“다시는 입원을 하지 말아야겠다(웃음).”

-왜요?

“요즘에 제가 여러 가지 교육을 받으면서 들은 얘기에 의하면 재발을 하면 뇌에 손상이 온대요. 그래서 뇌가 치매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대요. 그 소리 들으니까 충격이 와서 약을 빠지지 않고 열심히 먹어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됐죠. 그런 사실들을 몰랐을 때는 진짜 병원에 입원한 게 얼마나 답답한 일이에요. 장소도 제한돼 있고 자유롭지 못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죠.”

 

입원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아

-지금 문학소녀시죠?

“네.”

-문학청년인가요?

“청년. 청년이라고 얘기하고 싶지만 이미 마흔세 살이나 돼가지고 청년은 지난 거 같기도 하고. 문학소녀도 아닌 것 같고. 그냥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

-어떤 글을 쓰고 있습니까?

“제가 전자책 시집을 출간을 했어요. 제목이 ‘눈을 감으면’.”

-그 책 아직도 판매 상위권이에요?

“지금은 잘 안 팔리고 있는데 처음에 베스트셀러였어요. 근데 많이 안 나갔어요. 전자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니까 돈을 많이 버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나 돈방석에 앉는 거 아닐까 이런 생각까지 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베스트셀러 지속된 게 몇 달 됩니까?

“한 삼 개월 정도였나.”

-시집을 낸 이유는 있습니까?

“이유는 제가 항상 꿈은 가지고 있었어요. 전자책으로는 생각하지도 못했고 종이로 된 책을 내고 싶었거든요. 근데 생각만 했죠. 언제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마음속에 갖고 있었고 과연 내가 책을 낼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했었죠.

제가 사용하는 블로그가 있어요. 근데 말이 블로그지 제 일기장 같은 거였어요. 그날 일어났던 일들 간단하게 쓰기도 하고, 남기고 싶은 것들 블로그에 남기고 이런 수준인데 거기에다가 시를 써가지고 올렸거든요. 그게 한 백 편 정도가 넘었어요.

근데 제가 텐데시벨 교육 도중에 함출판사 대표를 만났는데요. 그 대표님이 어느 날 강의를 하다가 텐데시벨의 일정이었는데 제 블로그를 봤나 봐요. 그래서 글 써놓은 게 있냐고 해서 시를 좀 써놓은 게 있다고 하니까 책을 내보지 않겠냐 이렇게 말을 했어요. 그래서 제가 쓴 걸 다 정리해서 보내줬어요. 다 읽어봤대요. 그랬더니 책을 내도 되겠다고 전자책을 내보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게 된 거에요. 제가 내야지 해서 낸 게 아니라 먼저 권유를 해서.”

-백 권 정도 판매되면 본인 손에 얼마 정도 떨어집니까?

“전자책 말고 자비로 종이로 된 책을 만든 게 있었어요. 근데 그거는 지인들한테 나눠주기도 하고 팔기도 했어요. 몇 십만 원 되나?”

-만족하십니까?

“만족 안 하죠. 돈 더 많이 벌기를 원했는데 몇십만 원이니.”

-'천둥과번개' 소개 좀 해주세요. 언제 시작됐죠 이게? (천둥과번개는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이 토요일마다 모여 책을 읽고 글을 발표하는 소규모의 모임이다-편집자주)

“제가 천둥과번개 이전에 한울지역정신건강센터에서 토요일마다 문학교실이 있었어요. 그땐 자조모임 형식이 아니었고 서울시로부터 지원을 받아서 강의하시는 분들 초빙해서 글쓰기를 배우는 곳이었죠. 다니던 센터의 선생님이 그런 문학교실이 있다고 소개를 하기에 봉천동에 오게 됐어요. 그 때가 2011년이에요. 2011년 이후부터 계속 백일장도 나가고 글도 쓰고 그랬는데 천둥과번개는 몇 년 됐지? 서울시로부터 지원이 끊기고 나서 자조모임이 시작된 거거든요. 근데 그 자조모임이 한 4~5년 된 거 같아요.”

-지금은 어때요. 몇 명 정도 나오고 있어요?

“지금은 십여 명 정도 나오는데 처음 나오셨던 분들이 꾸준히 나오면 좋은 데 나오다가 안 나오기도 하고 새로 오는 분들도 간혹 있고 그래서 한 14~15명 정도 오는 것 같아요. 솔직히 저희가 완전한 자조모임 형식도 아니에요. 왜냐면 조금 지원을 받고 있거든요.”

 

문학 자조그룹에서 만난 치유…전자 시집도 출간해

-서울시에서?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사무실을 빌려서 하는 거잖아요. 그쪽에서 해도 된다고 해서 하고 있는데 참여도도 떨어지는 것 같고, 솔직히 재미는 없어요. 물론 문학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서 나가기는 하는데 솔직히 옛날이 그리워요. 옛날에 박상주 선생님이라든지 김영 선생님이라든지 오셔서 강의해 주시고.

지금은 박상주 선생님이 한 달에 한 번씩 오시는데 오신 지 얼마 안 됐거든요. 오셔가지고 강의 해주고 합평해주시고. 그랬을 때가 좋았는데 지금은 지원을 많이 받지 못하니까 우리 자조 모임 형식으로 이끌어가야 하니. 예전보다 참여도도 떨어진 거 같고 아무래도 재미는 없어요. 그래도 천둥과번개가 있기 때문에 저는 힐링이 되는 느낌이거든요.

매주 스트레스도 받고 알게 모르게 어렵고 힘든 일도 있고 이러다가 토요일 돼서 거기 모여서 사람들끼리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도 나누고 힘들었던 일도 같이 나누고 단톡방 만들어서 얘기도 하고 그런 게 저는 좋아요. 그래서 제 바람은 해체되지 않고, 무너지지 않고 이 자조모임이 쭉 계속 이어서 나갔으면 좋겠어요. 저는 회원들이 좀 더 열의를 가지고 열심히 참여해 주셨으면 하는데 회원들의 참여도가 떨어지니까 아쉽긴 하죠.

그래도 저는 천둥과번개가 있어서 든든해요. 내가 게을러서 글을 안 쓰더라도 스스로 한 번은 토요일마다 가서 글을 쓰잖아요. 저는 그 쓰는 게 좋은 거 같아요.”

©마인드포스트.
©마인드포스트.

-문학상 여러 번 받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한번 얘기 좀 해주시죠.

“2011년에 양주김삿갓전국문학대회에서 장원을 했어요. 100만 원. 그리고 전국김소월백일장에서 준장원 10만 원. 근데 그 이후로 상을 못 받았어요. 백일장 나가서.”

-왜 못 받은 거 같아요?

“제 글이 심사위원들 마음에 안 드는 거 같아요. 내가 부족한 거 같기도 하고 진정성이 많이 발휘되지 못한 거 같기도 하고 스스로 생각해 볼 때 너무 꾸미려고 하지 않았나.”

-백일장 가서 떨어지면 어떤 생각 듭니까?

“슬프죠(웃음). 솔직히 말하면 질투심도 있거든요. 주위의 문학회 동료들이 상도 타고 하면 ‘쟤도 타는데 나는 못 탔을까’ 이런 생각도 들고. 되게 심정이 말이 아니죠. 처참해지죠. 무너져요. 글을 계속 쓸까 말까 이런 생각도 들고. 나는 글쟁이가 아니구나라는 생각도 들고.”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하죠. 지난해 보건복지부 텔레비전 홍보물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출연한 계기가 됐는지.

“제가 보건복지부에서 회복수기 공모를 했어요. 거기에 작품을 써서 냈어요. 써서 냈더니 은상을 받은 거예요. 시상식장 가서 은상 받고 했는데 보건복지부에서 어느 날 연락이 왔어요. 우리가 정신건강복지법이 2017년 5월 31일 시행이 됐는데 캠페인 광고를 찍으려고 한다, 혹시 찍을 마음이 있냐하고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하겠다고 흔쾌히 대답을 했고. 그때 제가 100만 원 받을 거라 생각은 안 했어요. 얘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데 광고 찍으러 가니까 그 자리에서 얘기를 해주더라고요. 그래서 그 자리에서 계약서를 쓰고 찍은 거예요.”

-그 당시에 방송에 나오는 게 커밍아웃인데 쉬웠습니까?

“전혀 어렵지 않았어요. 지금도 누군가가 나를 인터뷰하고 방송에 내보내겠다 하면 저는 망설임 없이 오케이할 거예요.”

-커밍아웃 하는 데 부담이 없다?

“네 부담이 없어요.”

 

커밍아웃 두렵지 않아…나를 알아가는 과정 속해 성숙해져

-그게 언제부터 그렇게 되신 거예요?

“서서히. 제가 한국산문으로 등단도 했었거든요. 그리고 텐데시벨도 하고 있잖아요. 텐데시벨에서도 저의 이야기를 방송에 팟캐스트로 내보내잖아요. 저는 제 얘길 솔직하게 꾸밈없이 하거든요. 그래서 거기서도 페이스북이나 유튜브에 동영상을 찍어서 올린 것도 있고. JTBC 방송국 소셜스토리 거기서도 연락이 와 가지고 영상도 찍게 됐고. 저는 솔직히 말씀드리면 우리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이 숨으려고만 하잖아요.

아직도 잘못된 사회 인식 때문에 우리들은 위험하다, 그리고 늘상 하는 얘기가 범죄를 저지르고 가까이 다가가서는 안 되는 그런 무서운 사람으로만 인식을 하니까 저는 너무 슬프고 억울한 거예요. 안 그런 사람이 더 많잖아요. 그리고 오히려 비장애인보다도 범죄율이 낮은데 언론이나 매체, 미디어에서는 우리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을 안 좋게만 얘기하잖아요.

위험한 사건·사고 나면 그 사람의 정신감정을 해보겠다, 이런 식으로만 나오고. 그 사람들이 조현병이나 우울증이라든지 정신과 이력이 있으면 그 점만을 크게 강조해서 내보내잖아요. 저는 그게 너무 싫었어요. 저는 정신장애인 중에서도 이렇게 잘 생활하는 사람이 있다, 나쁜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위험한 인물이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그래서 그건 제가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주위에 저랑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거거든요. 말하고 싶은 건 드러내지 않으면 저희는 나아질 수가 없다는 거예요. 나 스스로가 달라지지 않으면, 나 스스로가 변화되지 않으면 우린 언제까지나 숨어서 지내야 하거든요. 근데 조현병 당사자들도 숨으려고 하고 가족들도 막 쉬쉬하고 저는 그게 너무 싫어요. 비장애인들도 생활하다가 어떤 장애를 겪을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 걸 생각하지 않고 마치 되게 이상한 사람을 보듯 정신장애인들을 폄하하고 비하하고 안 좋게 여기는 것에 대해 인식 개선을 하고 싶었어요. 저는 솔직히 말씀드리면 두렵지 않아요. 만약에 광고를 찍었다든지, 영상을 페이스북이나 유튜브에 올리면 악플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저는 그런 거 신경 쓰지 않아요. 만약에 나를 욕하거나 나를 흉보거나 어떤 비방의 글이라 하더라도 저는 견뎌낼 자신이 있어요.”

-가족과 살고 있죠? 어머니하고?

“오빠는 2006년 결혼해서 그때부터 분가해서 살고 있어요.”

-가족 어머니랑 사는데 힘든 점, 좋은 점 말씀해 주시죠.

“우선 좋은 점은, 솔직히 말씀 드리면 아빠 있을 때 되게 힘들었거든요. 아빠가 술을 많이 드시니까 알코올성 치매가 오신 거예요. 제가 많이 도와드리기도 했지만 엄마가 되게 신경을 많이 쓰시고 많이 힘들어 하셨거든요. 물론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나 딸로서 모자랐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도 많이 있지만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저희 가족은 회복이 된 거라 생각해요. 뭐랄까, 스트레스 면에서도 덜 구속을 받고 엄마랑 잘 지내고 있으니까 그런 점은 좋아요. 그리고 엄마가 우울증도 와서 우울증 약도 드시고 계신데 좋아지셨어요. 엄마도 좋아지고 있고 나도 좋아지고 있으니까 그런 점은 좋은 거 같아요.

근데 나쁜 점은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니까 든든했던 한 버팀목이 없어진 거 같아서 가끔 아빠 생각이 많이 날 때가 있어요. 엄마도 아빠를 그리워하시거든요. 그래서 간혹 이렇게 말씀하시죠. 조금 더 있다 가지 왜 그렇게 빨리 갔을까라고 얘기를 하시는데 안 좋은 점은 아빠의 빈자리가 커 보이는 상황이 있거든요. 그런 상황을 직간접적으로 느끼게 될 때, 아빠가 없는 부재를 받아들이기 힘들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아빠가 살아계셨으면 좋았을 거 같다는 생각을 하죠.”

-어떤 때 받아들이기 힘듭니까?

“친척들과 연락이 끊겨요. 연락도 잘 오던 건 아니었지만 아빠가 살아계셨을 때는 그래도 아빠 안부도 묻고 행사 같은 게 있으면 오라고 연락하고 그랬어요. 물론 연락이 오긴 하지만 아빠 있을 때랑은 다른 거 같아요.”

-스스로 정신장애인이라고 인정하시죠?

“네, 인정해요.”

 

스스로 변화되지 않으면 늘 숨어살아야 돼

-스스로 인정하면 어떤 느낌이 듭니까?

“솔직히 저는 이 병에 걸리고 나서 정신장애인이라는 말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거든요. 저는 장애인이라고 하면 다 지체장애인을 말하는 줄 알았어요. 제가 복지카드를 만들고 나서도 정신장애인이라는 말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어요. 근데 여러 당사자들을 만나게 되니까 나는 정신장애인이고, 물론 받아들이는 게 힘들고 슬프긴 하지만 처음에는 안 좋았는데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나니까 저는 괜찮아요.”

-정신건강복지법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계십니까?

“뭐 자의입원, 행정입원, 동의입원 그런 것들. 어떤 과정에 의해서 입원을 하는 절차라든지, 그런 걸 조금 교육을 받은 적이 있거든요. 서울시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도 인권에 대한 교육을 들을 때도 변호사 만나서 들은 적 있고. 조금은 알고 있어요.”

-지금 알고 있는 게 자의입원, 동의입원, 행정입원, 강제입원 등. 그 외적인 부분들 아직 공부 안 하셨죠?

“그렇죠(웃음).”

-정신장애인들이 자신하고 관련된 법에 대해서 무지(無知)한 측면이 많아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무지한 게, 알지 못하는 이유가 교육을 많이 못 받아서 그런 거라 생각해요. 반복된 교육이 중요한 거 같아요. 그러니까 반복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어떤 단체나 기관에서 당사자들에게 그런 것들을 설명해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게 시급한 일이지 않나 싶어요. 그런 자리가 없기 때문에 모르는 거잖아요. 들을 데도 없고서. 그러니까 그런 교육을 들을 수 있게 자꾸 자리를 마련하는 게 저는 제일 우선 급하다고 생각해요.”

-살면서 하고 싶은 게 뭡니까?

“저는 살면서 가장 하고 싶은 건 글을 좀 더 잘 썼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회원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글.”

-그럼 소설을 쓰신다는 얘기인가요?

“아니요. 저는 소설까지는 못 쓸 것 같아요. 수필이나 시를 통해서 사람들한테 울림을 줄 수 있는 그런 시를 쓰고 싶어요.”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있었나요?

“후회되는 일은 왜 그렇게 라디오를 열심히 들었을까(웃음). 그래서 왜 이렇게 나는 정신장애인이 됐을까. 그러니까 지금은 정신장애인이라는 게 아무렇지도 않지만 처음 발병했을 때는 되게 절망적이었거든요. 어떻게 보면 장애인보다 비장애인이 나은 거잖아요. 그러니까 너무 20대 때 열심히 살지 않았던 거, 그게 후회가 돼요. 너무 집안에만 있으려 하고 라디오나 듣고 그렇게 허송세월 보낸 게 가장 저한테는 안 좋았던 거 같아요.”

-20살 때로 돌아간다면 뭐하고 싶으세요?

“공부요. 대학교를 가든지 어떤 기관을 통해서든지 열심히 공부를 해서 저의 어떤 숨겨진 그런 걸 찾고 싶어요. 그러니까 제가 할 수 있는, 지금은 기초생활수급자라서 진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는 거예요.”

-노동을 못 하죠?

“네. 그러니까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있거든요. 솔직히 말하면. 물론 미래에도 그냥 수급자가 돼서 수급비 받고 살면 될 수도 있긴 한데 저는 욕심이 더 많은 거죠. 기초생활수급자로 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는 거예요. 그래서 만약 20살 때로 돌아간다면 공부를 더 열심히 해가지고 나의 어떤 진로를 잘 찾아서 거기에 맞게 돈도 벌고 잘 생활하고 싶은.”

-정신장애를 통해 고통받았어요, 본인 스스로 그 고통 속에서 성숙했다고 생각합니까?

“네. 성숙했어요.”

 

사람들에게 울림 줄 수 있는 시 쓰고 싶어

-어떤 부분이 성숙한 겁니까?

“솔직히 말씀 드리면 저는 정신장애인이 되지 않았다면 이 만큼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런 교육을 받고 나를 알아가는 과정을 내가 느낄 수 있었을까 싶어요. 지금 회복되어 가고 있다는 거요. 누군가 그러더라고요. 회복은 나를 알아가는 과정 같다고. 그래서 저는 성숙해졌다고 생각해요. 나를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저는 회복되고 있고 충분히 성숙하고 있는 거 같아요. 그런데 아직 멀었다고 생각을 해요. 지금도 계속 잘 하고 있는 거 같아요. 성숙한다는 게.”

-어떤 사람이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가장 높은 수준의 회복은 다른 정신장애인을 돕는 거다, 동의하십니까?

“네 동의해요. 동료지원가 활동에 대해서 지금 많이 논의가 되고 있잖아요. 최근에 끝난 서울시정신건강복지센터 동료지원가 교육도 있었고요. 저는 그걸로 활동하면 수급 때문에 영향이 있어서 동료지원가를 할 수 없을지 모르겠지만 내년에 교육은 받아보려고요.”

-결혼은 할 생각이 있습니까?

“좋은 사람이 나타나면 하겠지만 안 나타나도 상관없어요, 혼자 살아도.”

-어떤 상대를 만나고 싶습니까?

“저는 저랑 말이 통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든든하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물론 나도 혼자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둘일 때가 좋을 수가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간혹 찾아올 때가 있거든요. 살면서 이러 저러한 일들이 많이 있잖아요. 그럴 때마다 저의 배우자가 그런 일처리를 잘 해줬으면 좋겠고 그리고 이왕이면 마음도 몸도 건강한 사람이면 좋겠어요. 하지만 제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방도 그런 사람이 나타나더라도 제가 좋으면 할 수 있는 건데 저는 반반이에요. 결혼은 해도 그만이고 안 해도 그만.”

-사귀게 되면, 결혼하게 되면 남자친구한테 커밍아웃할 겁니까?

“네. 할 거에요.”

-왜요?

“전 저랑 같은 당사자들을 만나면 말할 필요도 없이 커밍아웃을 하는데 비장애인을 만난다면 처음에는 밝히기 힘들 거 같아요. 왜냐면 그 사람도 나를 모르고 나도 그 사람을 모르는 상황에서 무조건 나는 정신장애인이에요 라고 말하면 거부감이 들게 뻔하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한 몇 개월 만나다가 진짜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구나, 나도 이 사람이 진짜 좋구나라면 그때 말할 거 같아요.”

-상대방도 정신장애인이라면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네, 사랑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좋아하는 마음이 있을 거 같아요. 만약에 어떤 나의 마음에 든다면.”

-약은 하루에 어떻게 복용하세요?

“저녁 때, 자기 전에.”

-몇 알 먹어요?

“자이프렉사 15밀리.”

-외래 한 달에 한 번씩 가는 거죠?

“6주에 한 번.”

-주치의하고 라포라고 하는데?

“라포?”

-라포(rapport)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 좋은 관계를 의미하는데 주치의하고 라포가 잘 형성돼 있습니까?

“저는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왜냐면 만나는 시간이 너무 짧아요. 2~3분이잖아요. 잘 지내냐 하면 잘 지낸다, 그리고 요새 텐데시벨은 아니까 텐데시벨은 잘 하고 있냐, 그럼 잘 하고 있다고 하고. 잘 지내시는 것 같다, 약 타러 언제 오라, 이게 다거든요. 근데 무슨 친밀한 관계가 되겠어요. 아닌 것 같아요.”

-약을 끊은 적이 없죠?

“있어요.”

-한 번 있어요?

“네, 한 번.”

©마인드포스트.
©마인드포스트

-몇 살 때죠?

“20대 후반에 한 7개월을 단약을 한 적이 있어요. 왜냐하면 난 다 나았어, 나는 이제 안 아퍼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단약을 했는데 재발을 했죠, 7개월 만에.”

-당신에게 정신과약은 무슨 의미일까요?

“정신과약은 먹고 싶지 않지만 끝까지 먹고 생활을 해야 하니까 같이 걸어가는 동반자, 친구 같은 관계.”

-적(敵)은 아니고?

“네, 적은 아니고.”

 

약물은 어쩔 수 없는 동반자…끊지 말고 꼭 먹어야

-약은 꼭 먹어야 한다?

“네, 약은 먹어야 된다. 제가 주위에서 너무 많이 봤거든요. 약 안 먹고 재발하는 사람들을. 저도 재발했고.”

-최근에 정신장애인들의 사고사고가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거기에 언론들이 편승해 정신장애인들을 비하하고 범죄자 취급하고 있어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열불이 나요(웃음). 진짜 내가 대변인이 돼가지고 그 사람들 잘못이 없다고. 물론 죄는 지었지만 그 사람이 조현병이라서 죄를 지은 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조현병이나 그런 병이 있다고 해서 다 범죄자는 아니잖아요.

그래서 저는 어떻게 하면 달라질 수 있을까 많은 고민을 하는데 제가 커밍아웃을 하는 이유가 그런 거 같기도 해요. 내가 스스로 잘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 내가 정신장애인들의 어떤 대변인이 되고 싶은 마음, 크게 욕심을 부리자면 그런 마음도 있어요.”

-고통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살아오면서 가장 깨달은 게 있다면 뭘까요?

“커밍아웃하는 게 중요하다.”

-그 커밍아웃이 상처가 돼도 해야 된다?

“자신이 고통스러우면 할 수 없겠죠. 자신이 고통스럽고 가족이 고통스러운 걸 보지 못한다면 할 수 없겠는데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만약 정신장애에 걸리지 않았다면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 것 같아요?

“걸리지 않았으면 그냥 선을 봐서 결혼을 했을 거 같아요. 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잘 살았을 거 같기도 하고, 아니면 직장에 다녀서 돈을 벌어서 돈을 모은 자금으로 가게를 한다든지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았을까.”

-평범하게?

“평범하게.”

-정신장애인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왜냐면 당사자들이 용기가 너무 부족하고 너무 상처를 많이 받잖아요. 상처를 많이 받다 보니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너무 주저하고 있어요. 그리고 커밍아웃이 아니더라도 좀 많이 주저하거나 힘이 없다거나 아니면 그런 상처들 때문에 풀죽어 있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그런 사람들한테 용기를 내라고 말하고 싶어요.”

사진을 찍겠다고 하니 그녀가 “모자를 쓰고 찍어도 괜찮죠?”라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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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혜경 2018-07-24 11:39:33
용기있는 인터뷰 감사합니다
병이 있어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에 많은 감동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