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언의 만남-길을 묻다] 안병은, “나는 사회주의자! 아프면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 만들 것”
[박종언의 만남-길을 묻다] 안병은, “나는 사회주의자! 아프면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 만들 것”
  • 박종언 기자
  • 승인 2018.07.30 20:1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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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전문의·행복농장 이사장 안병은 인터뷰
정신장애인 취업 위해 빨래방, 세탁소, 커피점까지 차려
행복농장은 사람과 마을, 농업이 가치를 구현하는 곳
농업일 하면서 재활될 수 있는 모형 찾아
정신장애인이 전문가 되어 치유의 리더가 되길 바라
나는 바보, 바보는 우직하게 걸어가는 것
여유가 생기고 세상 품어 안는 어른 되고 싶어
국가가 퇴원 후 인프라 조성에 여전히 소극적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교회에서 기도원 같은 곳으로 수련을 갔다. 거기서 쇠사슬에 묶인 채 철걱 소리를 내며 걸어가는 한 여성을 봤다. 손이 다 묶여 있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교회 사람들은 그녀를 ‘미친 사람’이라고 했다. 어린 그는 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이 묶여 있어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그날 같이 갔던 친구와 훗날 이런 약속을 했다. “넌 목사가 돼, 나는 정신과 의사가 될 테니까.”

정말 친구는 목사가 됐고 자신은 정신과의사가 됐다. 그러나 정신과전문의로서 약 몇 알 주는 것으로 인간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정신병원과 정신요양시설에 있는 이들이 과연 삶의 주인공이고 행복한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의료 권력에 맞는 시스템을 만들어내고 그들을 거기에 끼워 맞춘 것은 아닐까. 그는 인간과 세계와 치유에 대해 고민했다.

그 사유의 끝은 정신장애인과 같이 노동하며 치유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직접 업체를 운영해 정신장애인들을 채용하는 방법이었다. 편의점을 만들어 정신장애인들과 함께 일하다가 접었다. 이어 빨래방을 했다가 망했다. 노동집약적 일들이었다. 그 분야 자영업자들의 일처리를 당할 수 없었다. 고민 끝에 기술을 활용한 커피전문점 우리동네 카페를 만들었다. 이건 4개의 체인이 생겼다. 모두 사회적기업이었다.

그는 사회적기업을 ‘비이성적 일’이라고 했다. 이성적 접근이 아닌 비이성적인 활동이 필요하면 그건 자신의 머리가 아닌 가슴이 시키는 일에 투자하는 일이었다. 그런 자신을 그는 광기(Madness)라고 규정했다. 비이성적인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제정신’으로는 할 수 없기 때문. 그래서 카페 정신장애인 직원들은 그를 ‘바보’라고 통칭했다.

현재 그는 충남 홍성의 행복농장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행복농장은 농산물을 생산하는 농업 고유의 목적에 치유라는 사회적 미션이 결합된 협동조합이다. 재배 작물의 선택 역시 판매 목적과 더불어 만성 정신질환자들의 생산 활동에 참여하도록 하는 데 있다. 그는 수원에서 정신과 개업의로 일하면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홍성에 내려와 자문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캄보디아에도 정신건강센터를 지어 한 달에 한 번씩 출국해 진료를 보고 있다.

그는 한때 자신을 ‘정찰병’ 같은 존재라고 칭했다. 임무를 마친 후 추락함 것을 아는 정찰병. 그는 말한다. “나는 추락하겠지만 나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멀리 전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인터뷰에서 자신을 ‘소셜리스트’라고 소개했다. 사회주의자. 인터뷰를 하다가 내가 놀라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안병은(47) 정신과전문의이자 행복농장 이사장. 그를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안병은 행복농장 이사장  ©마인드포스트.
안병은 행복농장 이사장 ©마인드포스트.

-정신과 의사 선택한 계기가 중2 때 기도원 가서 여성이 쇠줄로 묶여 있는 걸 보시고?

“뒤집어 보면 그런 거죠. 정신과의사가 됐고 왜 탈수용화, 탈원화 운동을 하고 있을까. 그랬을 때 가장 떠오르는 게 그때 당시 장면인거죠. 쇠사슬에 묶여 있었던 기도원의 정신장애인, 중증의 정신질환자가 맞겠죠. 왜 묶여 있어야 되나. 그런 고민을 그때 당시 했었고 정신과 의사가 되고 싶었고. 자연스럽게 그게 연결된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 보죠.”

-친구 분하고 고등학교 때 약속했다고요. 친구는 목사가 되고 선생님은 정신과의사.

“그러니까 기독교적 공동체, 그 중에서도 민중신학적 입장. 당시 읽었던 책들이 그랬는데. 그런 얘기도 했었죠. 너는 목사가 되고 나는 의사가 돼서 한번 공동체를 고민해 보자고 했던 기억이 있죠.”

-당시 이사장님은 운동권이었습니까?

“아니었어요. 저는 학생운동을 안 하고 운동만 좋아했죠. 실재 하는 운동만(웃음). 그런데 정신질환을 가진 분들을 보다 보면 치료적 입장에서 운동권적 사고를 가질 수밖에 없어요. 운동권이라는 표현보다는, 소셜리스트(사회주의자), 코뮤니스트(공산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생각을 가졌어요.”

-그럼 코뮤니스트로서 스스로 생각하시는 겁니까?

“저는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하죠. 공산주의자보다는 사회주의자에 가깝게.”

-그럼 대학 시절에 회의하는 지식인이었습니까?

“아니, 저는 놀기만 했어요. 정신과를 하고 싶어서 갔는데 의과대학이라는 것이 정신과와는 거리가 멀었던 거죠. 제가 하고 싶었던 공부하고 너무 머니까 테니스만 치고 공부도 안 하고 방황을 했었죠.”

-한번 그런 말씀 하셨어요. 정찰병 같은 존재라고. 그래서 ‘나는 추락하겠지만 나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멀리 전진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여전히 정찰병이신지?

“아뇨, 그러고 싶지 않아요. 무슨 얘기냐면 초창기에 외래에서 제일 많이 듣던 말이 ‘일하고 싶어요. 근데 일할 곳이 없어요’였어요. 왜 일을 못할까. 왜 일자리는 없을까. 남 탓만 하고 있을 수가 없다는 거죠. 누군가는 해 봐야 되는 거죠. 근데 정신건강센터에서도 고용을 안 해요. 자기들은 고용 안 하면서 누구보고 고용해 달라고 하냐. 하나의 핑계죠. 그래서 망할지라도 왜 안 되고 뭐가 문제인지는 내가 알아보자. 정찰병이라면 미지의 세계에 가서 여기는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스타크래프트의 정찰병. 그게 임무였죠. 근데 지금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요. 성공하고 싶어요.”

-성공요?

“네. 정찰병이 아니라, 이제는 격추 당하고 싶지도 않고 내가 한다면 다시 잘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어떤 방식의 성공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다른 모델을 한다면 이제 경험만 하고 싶지는 않고, 실제로 제대로 된 조직을 만든다든지, 사업을 하더라도 잘 할 수 있을 거 같다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래서 세탁기, 빨래방, 커피전문점 했으니까 이제는 성공 모델로 나가겠다?

“네. 한다면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행복농장 소개 부탁드립니다. 2014년 4월에 개농했다고?

“네. 제가 광역정신건강센터장을 맡다 보니까 직원들과 팀장이 농촌에 직업재활 고용을 만들어보자(고 했어요). 항상 화두가 직업재활이잖아요. 농촌에서 마땅한 게 없다면 농촌에 가장 흔한 인프라인 농업을 한 번 활용을 하고 직업재활과 고용으로 가보자. 그때 저는 반대했어요. 농업 자체가 힘들고, 정신장애인들의 직업재활이 힘든데, 이 힘든 걸 엮어가지고 뭘 하자는 얘기인지. 이건 안 된다(했어요). 단순히 사업으로 생각하지 않고 삶을 바칠 준비가 돼 있냐고 하면서 반대했는데 공동모금에서 돈을 따왔더라고요. 그게 계기가 돼서 예산하고 해서 하게 됐죠.”

©마인드포스트.
©마인드포스트.

-이사장님께서는 처음 반대하셨단 말이에요. 누가 그런 방식을 계속 하자고 한 겁니까?

“팀장이죠(웃음). 제가 반대한 건 하지 말아라가 아니라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 어설프게 해봤자 니들 망한다였어요. 결국 이게 제대로 유지됐던 건 같이 하고 있는 농부들이 있고 도와주는 농촌 커뮤니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건강건강센터가 중심이 된다든지 하면 절대 되지 않는다. 제 생각은.”

-농촌 마을 공동체인데 차별 같은 건 없습니까. 농촌 토박이들한테?

“아휴, 사람이 없잖아요. 어르신들도 기존에 들어와 있던 그룹에 협조적이었고. 물론 차별도 없지는 않았죠. 그렇지만 심하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처음부터 우리가 많은 숫자가 와서 한 건 아니고 프로그램 위주로 하다가 소수로 하고 있어서 (괜찮아요).”

-여기 일 하시는데 정신과의사는 이사장님 혼자?

“네.”

-처음 시작할 때도 혼자?

“네.”

-농장 홈페이지를 봤는데 ‘한 사람 한 사람을 치유해 지역에는 치유의 가치를, 행복농장은 사람과 마을 그리고 농업이 스스로의 가치를 높여가는 구심점이 될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걸 보고 일본 베델의집이 떠올랐습니다. 베델의집과 차별화되는 어떤 게 있겠습니까? (베델의집은 일본 홋카이도 우라카와 마을에 있는 정신장애인 치유공동체를 말한다-편집자 주)

“베델의집은 정신장애인들의 그룹이 중심이 된 거잖아요? 근데 여기는 기존의 마을이 중심이 되고 여기에 한 분이 오시고 두 분이 오시고 더 올 수 있으면 오고. 그리고 정신장애인만이 아니라 약자들이 또 올 수 있는 거고. 농촌에는 노인 자체가 약자인 거죠. 정신장애인이라는 동질적 그룹을 중심으로 한 게 아니에요. 행복농장은 정신장애인들만 모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지적 장애와 자폐장애도 있을 수 있고. 노인 분들도 될 수 있고. 힘들어서 오는 분들도 있을 거고. 그분들이 공동체를 만든 거잖아요. 베델의집이 정신장애인을 중심으로 주거시설 플러스, 생활시설 플러스해서 만든 거라면 저희는 농장이 먼저 농장을 세팅하고 거기에 올 수 있는 분들(을 모으고), 아직도 과정 중에 있고요.”

-전망을 몇 년 정도 생각하십니까?

“잘 모르겠어요(웃음). 농업 자체가 어렵고 수익을 내기가 어렵기 때문에 먼저 주거할 수 있는 집 같은 게 확충이 돼야겠죠. 지금은 두 분 정도가 상시적으로 일하고 있고.”

-여기서 일하시는 두 분은 정신장애인인가요?

“네.”

-하루 일과는 어떻습니까?

“저는 농장 일은 많이 못 도와요. 지금 수원에 있고 이 농장과는 자문만 하는 역할이고. 수원에서는 다른 일들이 많죠. 여러 가지 일들 중에 하나가 협동농장이고, 진료가 제일 일 번이죠. 자살예방센터장도 하고 있고 수원 지역의 행정복지센터 사례관리들을 자문하고 강의도 하고.”

-프로그램 받을 때 사람들이 프로그램 받고 어떤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습니까. 치유입니까?

“그냥 쉬었으면 해요. 여기서 쉬었다가 가고요. 행복농장의 대표적 프로그램이 중증정신질환자들이 4박5일 머물면서 농업 과정을 체험하는 건데요, 사실 이런 기관이 없잖아요. 그래서 쉬었다 가고 농업에 흥미도 느낄 수 있다면 좋겠고요. 농업 자체가 돈벌이가 돼서 이걸로도 업을 삼을 수 있는 재활모형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게 제 바람이죠.”

-재정적 문제는 어떻습니까?

“힘들죠.”

-편의점 하실 때부터 재정 문제가 힘드셨다고?

“그럼요. 한국사회가 제일 일차적인 문제가 최저임금이 올라가고 있지만 이 수익으로는 줄 수가 없는 구조거든요.”

-월급을 줄 수 없다?

“네. 장애인 노동력에 대해서. 장애인고용공단에서도 지지고용이라고 하는데 최저 시급은 계속 올라가지만 보조금은 그대로 있단 말이에요. 이 갭을 채우기가 더 어렵다는 거예요. 저는 지금도 병원에서 사회적 기업으로 열 분 정도를 고용해서 하고 있지만 정말 쉽지 않아요. 근데 하물며 1차 농업의 생산성은 (더 어렵죠). 그러다 보니까 다른 스태프들의 인건비도 현실화되지 않아요. 농촌에 있는 분들이 돈을 못 벌잖아요. 그래서 더 많이 뽑고 더 많이 하려고 해도 생산성 자체가 1차 농업은 아직은 어렵습니다.”

-그럼 한 달 정도 운영하는데 얼마 정도 필요합니까?

“다 틀리죠.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기가 좀.”

-편의점하고 세탁공장 사장, 커피집 사장, 지금은 행복농장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가장 애정이 가는 곳은 어디입니까?

“저는 다 똑같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세탁공장도 편의점도 다 접었죠. 또 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우리동네라는 사회적 기업도 했고 행복한우리동네의원이라는 병원도 했어요. 결국 제가 지향했던 것은 중증의 정신질환이 있어도 충분히 지역사회에서 잘 살아갈 수 있는 가치를 지향하는 공동체였어요. 그 중에는 농장도 있고 편의점도 있고 세탁공장도 있었던 건데 마음은 다 같죠. 근데 제 몸을 다 던져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오히려 저는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이 전문가가 되게끔 해서 리더를 키워내는 게 저의 관심사고 가장 중점적으로 하고 있는 일입니다.”

-우리동네 커피점 지금 몇 호까지 나왔습니까?

“지금 많이 없어졌어요. 예전에는 10개가 넘었는데 지금은 네 개 정도. 근데 그건 큰 수익이 안 돼요. 이제는 카페 자체가 안 되니까. 그래서 중점적으로 전문가를 양성하려고요. 제가 청소년 전공인데 그런 친구들을 사회복지 전공을 해서 일을 시킨다든지 아니면 심리 쪽으로 전공해서 병원 직원으로 오고 치료보조자가 되고 그런 일들(을 하고 싶어요). 이게 제 목표고 카페 일보다도 그런 일을 더 열심히 하고 있고.”

-전문가라는 게 무슨 전문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여러 가지죠. 커피하면 커피 전문가가 되는 거고. 각각의 자기가 남을 가르쳐줄 수 있게 하는.”

-커피집에서 농장까지 끊임없이 흘러왔습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이유가 있었습니까?

“이렇게 해야 될 이유는 없었는데 남들이 자꾸 하자고 하고 하다보니까(웃음). 아마 외면할 수 없었던 거죠. 필요했고. 그리고 저도 그게 치료라고 믿었고.”

-마음이 여려서 끌려다닌 건 아니고요?

“그건 아니고요. 어쨌든 그게 치료라고 확신을 하니까 하는 거죠.”

-오해를 받았다고 합니다. 장애인 고용해서 집까지 샀다라는 등. 그럴 때 힘든 심정이었을 텐데 어떻게 이겨냈습니까?

“시간밖에 없었죠. 이겨냈다기보다는 상처로 남아 있어요. 동료 사회복지사들, 정신장애인 당사자들의 부모들, 당사자들도 마찬가지고요. 필요할 때는 자기를 장애인 취급하지 말라고 하다가 분명히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는 복지카드 내밀면서 나도 환자인데, 장애인인데 왜 이렇게 대접하냐라고 하거든요. 부모들도 전화해서, 우리는 월급을 주면서 고용했는데 장애인 갖고 돈 버냐. 수 없었죠. 지금은 많이 좋아졌죠.”

안병은 이사장이 지난 7월 28일 '2018 돌봄농업 연속 세미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c) 마인드포스트
안병은 이사장이 지난 7월 28일 '2018 돌봄농업 연속 세미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c) 마인드포스트

-가장 상처 입었던 에피소드가 있습니까?

“그거죠, 너 장애인 가지고 돈 벌면서 똑바로 해. 부모가 전화해서 그런 얘기를 하죠. 편의점 시간표 하나 짜는데도 전화해 가지고 뭐라고 하고, 뭐 그렇게 짜냐, 내가 짠 것도 아니고 자기들이 상의해서 하는데도요. 그럴 때는 자기가 장애인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분들도 똑같은데. 섭섭하게 대하면 왜 장애인 취급하냐고 하고. 아픈 것은 없어요. 그러나 타인의 권리까지 침해하면서 자기를 그렇게 하면 많이 상처가 됐죠.”

-이사장님이 노력을 해서 정신장애인들 고용시켰는데 고용된 사람이 욕하고 고용된 사람의 부모가 욕하고, 그러니까 이중으로?

“그랬죠. 왜냐하면 순수하게 조현병적 증상이 있는 게 아니라 인격적 문제가 있는 분들이 있어요. 그렇지만 알아야 되는 게 그 정도 수준의 일반 직원을 뽑아도 그 정도 문제는 있다, 더 심하다 (생각해요). 인격적으로 문제 있는 건 일반인에게도 더 많다. 그 정도지 이게 뭐 일반인 그룹보다 더 심했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욕먹고 울지는 않았습니까?

“많이 울었죠. 왜냐면 이게 돈 벌려고 한 것도 아닌데, 진심이 매도될 때가 세상에서 가장 힘들 때에요. 그런 식으로 돈 벌려고 했으면 그 짓 안 했죠.”

-카페 운영할 때 정신장애인 직원들이 이사장님을 ‘바보’라고 불렀습니다. 여전히 바보이십니까?

“네, 바보죠. 너무 약게 사는 게 헛똑똑이죠. 바보가 뭘까요. 우직한 거고 믿는 거죠. 내가 생각하는 내 믿음. 물론 돈은 못 벌어요. 거기서 바보라는 게 (나왔겠죠). 편한 길도 알고 돈 많이 버는 것도 알아요. 근데 그게 제가 싫은 걸 어떡해요(웃음).”

-지금 정신과 상담 하시면서 그 걸로도 수입이 만족하실 정도입니까?

“병원은 돈은 많이 벌어요. 쓰는 게 많아서 그렇지.”

-어디다 쓰십니까?

“빚 갚는 데 쓰고 있고 예전에 빚졌던 거 쓰고 있고. 저는 또 캄보디아에도 정신건강센터를 설립해서 지금 시범적으로 운영하고 있고요.”

-그건 무슨 말입니까?

“저희가 NGO(비정부기구)를 설립해서 운영을 하고 있고 캄보디아에 정신보건사업을 지원하고 있고요. 저는 상임이사로 일을 하고 있어요. 매달 가서 진료하고 있고요.”

-거기를요?

“한 달에 한 번씩.”

-한 달에 한 번 가서 몇 명 정도 진료하십니까?

“3일 진료하고 한 20명 정도.”

-그쪽은 한국과 비교해서 정신장애인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정신장애인이라는 그런 개념이 없죠. 그러니까 정신병원이 없어요. 그럼 어떻겠어요.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이 별로 없어요. 근데 약 사먹을 돈이 없고, 정신과 인프라 자체가 없으니까 그냥 방치되거나 아니면 쇠사슬에 묶여 있거나.”

-종교가 있습니까?

“없어요, 저는.”

-정신과 의사 아니었으면 무슨 일 하셨을까요?

“전 똑같은 일을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의사였든, 사회복지사였든, 간호사였든, 다른 직장이었어도 저는 또 소수자들, 가지지 못한 자들, 배제된 자들과 같이 살아가는 그런 모형을 만들었을 거예요. 교사였어도, 간호사였어도 똑같은 삶을 살았을 거 같아요. 정신과의사는 하나의 겉옷에 불과하니까요.”

©마인드포스트.
©마인드포스트.

-최근 조현병 당사자들에게 의한 사건사고가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언론에서도 이를 센세이셔널하게 보도하고 있고요. 정신장애인은 사회에 정말 위험한 존재인가요?

“정신장애인에게는 사회가 위험한 존재죠(웃음). 무슨 얘기냐면 정신장애인이 오히려 덜 위험하죠. 살인을 하거나 강력범죄 등 형사사건이 일어나는 건 일반인에게는 없나요? 다 있죠. 근데 정신장애인들에 대해서만 치료 안 받고 그렇게까지 된다고 말하거든요. 중요한 건 대접을 어떻게 받느냐에 따라 내가 그 병을 앓고 싶으냐 안 앓고 싶으냐를 결정짓는다는 거죠. 정신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시선, 처우, 태도 등이 내가 그 병을 앓고 싶으냐 안 앓고 싶으냐를 결정합니다. 근데 내가 그 병을 앓고 싶지 않게끔 대한다면 나에 대한 처우가 안 좋다면 증상이 있더라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숨어들어갈 거란 말이죠. 그러다 보면 피해망상이 더 심해져서 사고로 간다는 거죠. 사회적 태도가 중요해요. 캄보디아를 보면 그런 게 없으니까 약을 정말 잘 먹어요. 와서 망상, 환청에 대해 그렇게 잘 얘기하는데 한국에서는 경험해보지 못했을 정도로 정말 잘해요. 와서 도와달라고 하고. 왜? 그런 취급을 한국처럼 받지 않거든요.”

-한국 같은 취급이 뭡니까?

“같이 살아서는 안 되는 존재, 경계의 대상.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더 뒤로 물러날 거란 얘기죠. 우리가 정신장애인을 치료선상에서 배제한 자들로 바라보면 물러난 사람이 경계심을 갖겠죠. 나를 그렇게 대하는 사람들을 가해자로 보게 되고 나를 보호하기 위해 그 사회와는 싸울 수밖에 없는 구조가 생기지 않을까, 개인적 생각입니다.”

-이사장님 혼자 이런 일 하셨고 저런 일 하셨고 또 정신장애인들을 동료로써 바라보신단 말이에요. 일반 정신과 의사들은 동료로 안 보거든요. 오해도 받았을 테고 그들의 시기심과 질투심도 있었을 것 같아요. 어떻습니까?

“자주 안 만나서 저는 모르는데요. 모르는 거 같아요. 너무 단순한 명제거든요. 정신질환자가 똑같은 인간이고 똑같은 우리와 같은 사람이거든요. 그 단계가 안 된 거 같아요. 그러다보니까 (저에게) 너무 격의 없다, 선이 없다, 의사로서 그러면 안 된다, 권위를 지켜야 한다(라고 하죠). 오해 많이 받았죠. 요샌 근데 얘기는 안 하더라고요. 저를 그냥 원래 그런 놈인 걸 하다보니까. 진료실에서도 증상만 얘기하지 사실 알까요 삶을? 잘 모를 거 같아요. 그럴 시간도 없고.”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누구나 마음이 아플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아프다’라고요. 마치 시인 이성복이 말한 것처럼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싯구가 떠오릅니다. 우리는 모두 아픈 존재인가요. 어떤 면에서는 조금씩은 정신적 병을 갖고 살아가는 존재들이 아닌가 여쭤보고 싶습니다.

“네, 다 아프죠. 어떻게 무엇이 얼마만큼 아프냐의 차이죠. 저는 꿈꾸는 세상이 있다면 진짜 아프면 아프다고 말할 수 있는 세상. 몸 아픈 건 참 잘 말해요. 근데 마음은 아파하면 안 되는가. 아프면 아프다고 얘기해야죠. 마음이 아프니까 나 좀 쉬게 해 줘. 그런데 우린 마음이 아픈 걸 인정을 안 하잖아요. 마음이 약한 거. 정신이 좀 약하고 의지가 약하고 이런 걸 용납을 안 하잖아요. 근데 아픈 거거든요. 마음껏 아파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저는 항상 그런 얘길 했었죠.”

-아픈 것이 용인돼야 된다?

“그렇죠. 아파야죠.”

-살면서 가장 하고 싶은 게 뭡니까?

“하고 싶은 거요? 빚 갚는 거(웃음). 농담이고요. 그냥 놀고 싶어요. 잘 하고 싶은 거 뭐 또 생기겠죠. 여유롭게 하면서. 그리고 이제는 제가 뭔가 하고 싶지 않아요. 누군가 하겠다면 도와주고 싶어요. 그러나 진짜 하고 싶은 건 어른이 되고 싶고 선생이 되고 싶다는 거죠. 또 도와주고 나누고 싶고, 제가 알고 있는 것을. 제가 굳이 안 나서도 될 것 같아요.”

-선생이라면 중·고등학교 선생님을 말하는 겁니까?

“아니죠(웃음).”

-삶에 있어서 어른?

“네.”

-지금 어른이신데?

“아직 어리죠(웃음).”

-어떤 부분이 어리십니까?

“아직 뭐 제가 더 여유 생기고 좀 더 품어 안을 수 있고 그런 여유가 좀 더 생겼으면 (좋겠어요). 관조적으로 볼 수 있도록.”

-깨달아지는 거군요?

“네.”

©마인드포스트.
©마인드포스트.

-정신병원은 여전히 격리와 배제, 집단적 규율, 신체적 폭행이라는 시스템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정신병원은 어떻게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바꿀까요 정말로? 저도 납득이 안 돼요. 이렇게까지 정신병원이 안 줄줄 몰랐어요. 정신병원 베드가 안 줄고 있는데 이거는 국가가 먼저 생각을 바꿔야 돼요. 무슨 얘기냐. 동료정신과의사들 탓하려는 게 아니라 1만원을 주고 2만 원짜리 서비스를 바라면 말도 안 되는 거거든요. 지금 교도소에 들어가는 돈이 많을까요,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돈이 많을까요? 교도소에서 교도소 재소자 한 명을 돌보는 돈과 정신병원의 환자 한 명을 돌보는 돈이 어떤 게 훨씬 많을 것 같아요? 정신과가 훨씬 많아요.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국가가 싼 돈으로 해치우고 있는 거거든요. 정신병원 앞에서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어요.”

-무슨 앞잡이요?

“퇴원하면 어디로 가요? 주거시설 더 만들어야 되거든요. 안 만들어놨어요. 그럼 어떻게 해요. 정신병원이에요. 싼 값에 싸게 돌보잖아요. 이게 치료인가요? 한 달에 그 정도 돈을 주고 치료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런 저가의 치료를 대행해주는 대행업체 노릇을 하고 있잖아요. 말도 안 되는 정신병원들은 과감히 단속해야 되겠죠. 입원 환자들 줄여야죠. 입원적합성 심사해서. 그런데 못해요. 퇴원하면 갈 데가 없는데 어떡해. 이 자체 모순부터 해결하지 않고 뭐할 거냐는 거예요. 국가가 당연히 만들고 운영해야 될 주거시설, 재활시설이 제대로 있냐는 거예요. 사실 나가는 게 낫거든요. 그런데 많은 분들이 나가는 걸 두려워해요. 그게 강박적 입원이라고 해가지고 본인이 불안한 거예요. 일종의 만성화가 된 거죠 스스로. 국가가 체계적으로 다양한 인프라를 확충해야 하는데 아직 멀었죠.”

-정신장애인들에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제가 이 명함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우리를 빼고 우리를 말하지 말라. 이제 정말로 더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가 아닌가. 밥그릇을 챙기자는 게 아니라 정말 우리를 누가 대변할 것이냐. 마음 아픈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조금 더 나서야 되지 않을까. 전문가의 힘도 필요하고 가족들 힘도 필요하겠지만 결국 당사자들이 나서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고 때로는 싸움도 해야 되지 않을까. 마땅히 권리를 요청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특히 회복되거나 병에서 좋아진 분들이 아직도 병원에 있거나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분들의 권리를 위해 같이 싸워야 하지 않을까. 우리를 빼고 우리를 말하지 말라. 참 좋은 캐치프레이즈 같습니다.”

창밖으로 폭염을 씻어내듯이 요란한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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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승연 2018-07-31 01:00:35
재미있고 흥미롭고 감동적인 인터뷰 기사 잘 읽었습니다. 길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