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고발한다. 조현병 겨냥해 제거 이데올로기 양산한 OCN 드라마 보이스 2의 허구를..."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한 것일까?"
우리는 고발한다. 조현병 겨냥해 제거 이데올로기 양산한 OCN 드라마 보이스 2의 허구를..."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한 것일까?"
  • 박종언 기자
  • 승인 2018.08.12 23: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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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블OCN 드라마에 대한 마인드포스트의 사유
관련 드라마, 조현병환자 폭탄 테러범으로 설정
그 폭탄은 누가 만들었던 것인가?
묻지마 범죄의 극단적 형태인 테러로 극화
'보이스2' 캡처 ©OCN.
'보이스2' 캡처 ©OCN.

케이블TV OCN 주말드라마 ‘보이스2’가 또 하나의 허구적 신화를 생산해냈다.

이 드라마에는 한 남성이 폭탄을 몸에 매단채 지하철에 들어가 여성을 인질로 잡아 폭탄을 터트리겠다고 난동을 부렸다. 112신고센터의 골든타임 센터장 강권주(이하나)는 사건이 접수되자 황급히 그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고 그가 조현병이 있다는 것을 파악한다.

강권주는 출동한 특공대에 “인질범은 조현병 환자이며 최근에 약을 끊어 망상이 더욱 심해졌다”고 설명한다.

골든타임팀이 출동했고 나머지 팀원들은 사무실에서 현장중계를 통해 지원에 나선다.

강권주는 조현병을 가진 남성 강두원을 향해 “강두원 씨가 그 스위치만 버리면 더 이상 그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그를 달랬다.

하지만 강두원은 “거짓말 마라. 그래 놓고 또 내 욕할 거 아니냐”고 따진다. 강권주는 “CCTV로 강두원 씨에게 욕한 그 여성분이 어딨는지 찾아보자. 그리고 있다면 사과받을 수 있도록 제가 돕겠다”고 설득했다.

저격수가 있었지만 승객을 인질로 하고 있어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드라마는 설명한다.

범인 강두원은 폭탄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몸에 연결된 폭탄의 연결선 하나가 제대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을 강권주가 목격한다. 강권주는 곧바로 이 사실을 팀원들에게 알려졌고 경찰들은 범인을 잡을 수 있었다.

11일 이 드라마는 첫 방송됐다. 그리고 위 이야기는 1회분의 주요 내용이다.

한 가지 독자들에게 물어보자. 당신은 조현병이 무엇으로 알고 있는지. 조현병은 과거 정신분열증으로 불리는 의학적 용어였으며 2010년 조현병이란 용어로 바뀌었다. 현을 고르듯 정신을 이완시키고 안정시킨다는 의미로 기존 용어의 사회적 낙인에 대한 대안적 의미로 만들어졌다.

다시 물어보자. 정신분열병은 뭐라고 생각하는지. 정신이 분열된 것인가. 그러면 그 정신은 뭔가. 이성이 머무는 불가침의 자리인가. 그럼 정신분열은 그 인간의 존재성을 상징하는 이성이 없거나 왜곡돼 있는 경우를 의미하는가.

이성적 사유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는 일단 위험한 존재로 낙인찍힌다. 그 위험성은 경험적 수치가 아니라 미디어를 통해, 그리고 세대를 통해 전달돼온 신화적 이데올로기다. 위험한 존재는 공동체에서 격리돼야 하는 게 당연하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이들이 가는 곳은 정신병원이나 정신요양시설이라는 전근대적 치료의 공간이다. 정신이 분열된 자는 이 수용소에서 의사의 지시를 따라야 하며 의사가 내린 진단명과 약물에 의존해 살아야 한다. 저항은 있을 수 없다. 저항하려면 더 긴 시간을 더 병원에 머무르는 걸 각오해야 한다. 의료권력에 충실히 협력해야 병원에서 나갈 수 있다. 이것이 치료인가?

다시 드라마로 돌아가자. 강두원이라는 극중 인물은 조현병 환자라고 추정됐고 실제 조현병 치료 이력이 있는 존재다. 그는 폭탄을 몸에 감고 전동차로 들어가 승객들을 위협한다. 그가 승객을 위협하는 데는 우선 이유가 없다. 현실적으로 발생하는 ‘묻지마 범죄’의 극적 상징을 의미한다. 묻지마 범죄는 정신질환자들이, 특히 조현병 환자들이 저지르는 것으로 미디어와 사회는 보고 있다. 그래서 두렵다. 동기가 없는 폭력은 언제라도 내가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낳는다.

여기 드라마는 그 두려움을 이용해 극화했다.

또 저격수가 있었다. 저격수는 인질이 있어 강두원을 쏘지 못했다. 여기서 물어보자. 강두원은 죽어야 마땅한 존재인가. 정신질환자들이 범죄를 저지르면 인터넷 포털 사이트 댓글에서 ‘격리시켜라, 사살해라, 수용소에 보내라, 현장에서 바로 죽여라’라는 혐오와 차별적 발언을 쏟아낸다. 어떤 존재가 정신질환자라는 것도 두렵고 이질적인 무엇인데 이 존재가 선량한 시민을 위협했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그리고 그 내적 두려움을 발화시킬 때 이들은 위협적 존재자의 죽음을 요청한다. 아니, 강요한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정신질환자는 사실 살 가치가 없는 존재들라고 누군가는 주장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생산적 노동을 해서 국부(國富)을 창출하지도 않으며(못하며), 군복을 입고 국가의 국경선을 지키는 용사들도 아니다. 정신질환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무위도식배로 국가가 이들을 먹여살려야 하는 것에 질문을 던지게 한다. 이들이 살아야 할 철학적 기반이 있을까.

인간은 존엄한 존재다. 그리고 평등권과 행복추권과 자유권을 가진 침해 불가성의 근원적 존재다. 신자유주의적 가치하에서 정신질환자는 잉여적 존재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이데올로기 앞에서도 정신질환자의 인간됨을 거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기 때문이다.

조현병은 일상적 생활을 해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망상과 환청에 시달리는 존재다. 그 외적인 병의 현상들도 다수 있지만 조현병 환자를 설명할 때 우리는 자주 이 상태를 언급한다. 그는 일상적 삶을 살 수 없을 정도다. 망상과 환청이 현실을 덮어버릴 정도가 된다. 조현병 당사자는 현실과 환상의 길목에서 괴성을 지른다. 그 외침은 살고 싶다는 절규이자 인간으로서 행복하고 살고 싶다는 내적 외침이다. 그 외침에 시민은 두려움을 느낀다.

그렇다면 다시 드라마로 돌아가 보자. 조현병 환자는 일상을 꾸려나가기에 어려움을 겪는다. 증상이 심하면 50 빼기 13이 얼마냐는 산수 문제도 풀지 못한다. 그런 존재가 고도의 과학적 지식을 요구하는 폭탄을 제조했고 그것을 몸에 두르고 폭탄과 연결된 연결선 하나가 작동하지 않아 폭탄이 터지지 않았다는 그 순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극본을 만든 사람은 하다하다 안 되니 조현병 당사자를 테러리스트로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조현병 환자는 위험하고 두렵다는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편승해 이처럼 왜곡된 극을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강두원에게 강권주는 말한다. “당신을 욕하는 여자 분을 찾아보자”고. 강두원은 “거짓말 마. 또 내 욕 할 거 아니냐”로 말한다. 상황을 유추해보면 강두원은 범죄 당시 환청에 시달리고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향해 욕을 했다. 혹은 ‘넌 병신이야, 넌 죽어야 돼, 네 가족까지 몰살시켜버릴 거야’라는 실재하지 않는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현실에서 조현병 당사자는 이 위협적인 환청을 들으면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환상 속의 제물(祭物)로 그 목소리에게 던지려 한다. ‘나는 죽어도 되지만 제발 가족들은 괴롭히지 마’라고 하면서 말이다.

조현병 당사자에게도 급성기라는 상황이 찾아온다. 의료계는 약 잘 먹고 관리하면 조현병 환자는 위험하지 않다고 공식적 입장을 낸다. 그렇지만, 정말 그렇지만 조현병 당사자는 약을 잘 먹어도 재발할 때가 있다. 일종의 급성기가 찾아온다. 두려워서 방 안에서 몸을 벌벌 떨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는 목소리를 저주하며 귀를 막는다. 그럴 때는 응급입원을 해야 한다.

드라마로 돌아가 보자. 범인 강권주는 누군가 자신을 욕하기 때문에 폭탄을 들고 지하철에 뛰어들었다. 급성기 증상이다. 그런데 그 증상을 갖고 폭탄 만드는 매뉴얼을 자세히 보며 폭탄을 만들 수 있는 자가 어디에 있을까. 아니면 강권주는 황학동 골동품점에 가서 돈을 주고 폭탄을 산 것일까. 비싸다면서 좀 깎아달라는 말을 하면서 말이다. 아니면 군부대에 침입해서 그 폭탄을 훔쳐온 것일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그는 어떻게 폭탄을 만들었을까.

드라마는 연출됐고 조현병 당사자는 ‘극도로’ 위험한 존재라는 이데올로기는 다시 강화됐다. 사형시키거나 격리시켜야 하는 존재로 환원됐다. 우리가 -물론 기자도 조현병 당사자다- 무엇을 그토록 잘못한 것일까. 우리를 비난하는 당신들은 유엔인권선언 제1조 인간은 태어나면서 존엄하다는 선언에 포섭될 수 없는 비이성적이고 동물적이고 예측불가능한 3등 시민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묻고 싶다.

시민적 권리가 있다면 우리에게도 시민적 권리가 있다. 우리는 차별받고 통제되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권리를 가진 시민이다. 우리를 죽음의 자리로 내몰지 말라. 당신이 존엄하듯 우리 또한 존엄한 존재다. 그리고 이 드라마가 다시 한 번 조현병 당사자를 위험하기 때문에 통제해야 하는 전근대적 훈육의 대상이라고 믿어버리는 오류는 범하지 말기 바란다.

우리는 자유를 원한다. 자유는 공동체 안에서 만들어지는 고유한 가치다. 우리가 공동체 밖으로 나가야 할 이유는 없다. 강두원의 위험성은 우리의 위험성이 아니라 그렇게 바라보는 비정신장애인의 시선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드라마는 분명히 조현병 당사자를 혐오하고 차별하는 논리로 작동했다는 점을 적고 싶다. 유감을 표한다.

글을 쓰고 다시 인터넷을 들여다보니 이 드라마는 1회 시청률이 3.9%를 기록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케이블 방송 드라마치고는 높은 시청률이다. 한 매체는 ‘역대 최고 시청률’이라고 적었다. 조현병 당사자는 다시 허구적 신화 속으로 포섭된다. 위험하다는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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