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우리, 여기 있어요...“앞으로도 계속 너의 노래를 부르렴”
[공연] 우리, 여기 있어요...“앞으로도 계속 너의 노래를 부르렴”
  • 박목우 시민기자
  • 승인 2018.08.16 20: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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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목우 기자가 조현병 연극인 후배의 극을 본 후 성찰 글로 담아
가야할 길이 있는 한 장애는 부끄럽지 않아

이 글은 조현병 당사자이자 <마인드포스트> 시민기자로 활동 중인 박목우(43·) 기자가 후배 조현병 당사자의 연극을 본 후 사유와 성찰을 담은 것이다. 연극 제목은 '우리, 여기 있어요'다. 흔들리지 않고, 아프지 않고 한 생을 살아가지 않는 자() 누가 있겠는가. 그래서 그는 생을 송두리째 잃고 자신을 자랑하며 사는 것을 깊은 슬픔 속에서 배웠다고 한다. 오래 앓아누운 자는 안다. 뜨거운 생(生)에 손 데어본 자는 안다. 평범한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그리하여 그는 "매순간 작고 부드러운 것들이 내는 천둥소리에 놀라워할 줄 안다"고 고백한다.

박목우 기자는 현재 조현병 당사자들의 문학모임 '천둥과 번개'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천둥과 번개는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 서울 봉천동의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진행되고 있다. 다음의 그의 전언(前言)이자 전문(全文)이다.

어제로부터 마음을 선물 받았다.

나는 지난 2월부터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조현증 당사자 글쓰기 자조모임인 ‘천둥과 번개’에 다니고 있다. 매주 토요일 10시 우리는 만나서 서로의 글과 삶을 나눈다. 처음 문학회에 와서 어리둥절할 때 누군가로부터 책을 선물 받았다.

그리고 종종 삶이 힘들어질 때마다 거짓말처럼 내 눈앞에는 책이 있었다. 혼자서 쌓아올린 책의 성채에 조금씩 무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누군가 내 삶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다는 것. 그 사실을 아는 것은 조금 두렵기도 했고 또 설레기도 했다.

성의 벽면에 비치는 물무늬처럼 어른거리는 잔상들을 뒤쫓다보니 나도 작은 마음 한 자락으로 어루어질 수 있게 되었나 보다. ‘천둥과 번개’에서 만난 은미의 연극 공연 ‘우리, 여기 있어요’를 보러 가자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렇게 전해진 마음이 단단한 머릿돌이 되어 내 마음의 중심에 있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 내 경우는, 분주하고 힘든 삶 속에서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열망하고 있을 때 마음에 시가 더 잘 떠오른다. 마치 제비가 사람살이 왁자지껄한 집에 찾아들어 새끼를 치는 것처럼.

우리는 114년만의 최악의 폭염을 기록하고 있는 8월의 초입, 은미의 연극공연을 보러 길을 나섰다. 성미산마을극장을 찾는 일은 지난했다. 위로는 창살이 꽂히는 것 같은 햇살이 퍼붓는데 카카오 맵이 알려준 길은 명확한 이정표도 없이 구불구불 오래 걸어 올라가야하는 길이었다.

그러고도 극장은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천둥과 번개’에서 모인 모두가 무더위에 지쳐있었다. 땀이 비 오듯 흐르고 나는 조금씩 환청을 듣기 시작했다. 몸이 피곤해지면 일어나는 일이었다. 다행히 먼저 극장을 찾아간 일행들이 우리를 인도해 주어서 연극이 시작되는 3시 정각에 우리는 성미산마을극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약을 먹어야 했고, 그 때문에 연극이 조금 지체되어 시작되었다. 나의 느린 속도가 받아들여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은미가 부르는 시(詩)를 보게 됐다.

 

# 조선시대 지도를 보면 마니산은 섬이었다. 동막 곶부리에서 개뻘밭 길로 십여 리를 걸어나가면서 보면, 마니산은 미루지 곶부리를 머리로 한 거대한 용처럼 보인다. 그런데 분오리 포구에서 배를 타고 장봉도 앞으로 가며 보는 마니산은 동막 곶부리를 머리로 하고 서해를 박차 오르는 거대한 봉황처럼 보이기도 한다. 벼룩신문을 보고 집을 고르는 시대와 산세를 보고 집을 짓던 시대의 차이.

은미는 지난 4월 연극공연을 준비하면서부터 은미의 집을 짓기 시작한 것 같다. 은미가 평온히 쉴 수 있고 자신을 드러내는 취향으로 꾸며볼 수도 있는 은미만의 집. 그것은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가름될 수 있는 세속의 언어와는 다른 언어로 되어 있는 집이다.

나를 들여다볼 수 있고 나를 표현해낼 수 있으며 그렇게 숙고된 내가 세상을 향해 ‘우리, 여기 있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집. 아직 떨림과 수줍음을 담은 그 집은 상서로운 산의 기운과 구름의 움직임, 흐르는 산의 시내와 무엇보다 그곳의 이웃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조화가 함께 하는 존재의 집이다. 재빨리 손익계산을 하며 손쉽게 사고 팔 수 있는 집이 아니다.

 

# 동네 청년 십여 명이 모여 옻닭을 삶아 먹었다. 팔팔 끓는 옻닭 국물은 신기하게도 뜨겁지 않았다. 내장에 옻칠이 되면 위가 좋아진다고 노란 옻 국물을 훌훌 마신다. 옻이 올라 보건소에 가 주사 두 대를 맞고 약 사흘 치를 지었다. 의료보험증이 있으면 구백 원인데 없으니까 삼천 원을 내라고 했다. 옻나무가 된 것일까. 죽은 옻나무의 옻이 몸에 들어와 보름을 머문다. 어떤 음식을 먹으면서 그 음식이 몸으로 들어와 몸에 흡수되지 않고 그대로 남기를 간절히 바라며 먹어 본 음식이 또 있었을까.

음식은 흔히 흡수되라고 먹는다. 그런데 흡수되지 않고 먹는 음식이라니. 우리가 앓는 장애도 그렇지 않을까. 생의 자연스러운 흐름처럼 다가와서는 옻이 오르는 것처럼 생을 송두리째 앓게 하고 제발 내 삶으로 흡수되지 않고 그대로 배설되어 버리기를 바라게 되는 것.

그러나 연극을 통해 은미는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된 것 같다. ‘자신을 자랑하며 사는 것’. 나 자신을 드러냈을 때 관객들이 얼마나 즐거워하며 따뜻한 웃음을 웃는지를 체험한 것 같다. 그대로 남아 소통되지 않던 나의 장애가 소통되고 공유되는 느낌. 이 느낌을 꼭 붙잡는다면 은미는 앞으로 사람들에게 특별한 음식을 만들어주는 사람이 될 것이다.

조현이라는 병을 차가운 물에 씻고 양념을 하고 뜨거운 불에 삶아 끓여내어 사람들의 살과 피 속으로 온전히 흡수되게 하는 멋진 요리사가 될 것이다.

 

# 요즘 강화도에서 들을 만한 소리는 기러기 소리다. 하늘에서 나무대문 열리는 소리가 나서 나가 보면 수십, 수백 마리 기러기가 하늘에 글자를 쓰며 날아간다. 살아 우는 글자, 장관이다.

우리는 새다. 드넓은 하늘을 경계 없이 날아다니며 우는 새다. 홀로 외떨어져 우는 새가 아니라 함께 우는 새다. 함께 울 때 하늘에 글자를 새기기도 하는 새다. 아직 우리의 존재는 미약하지만 먼저 나는 새들을 보고 많은 새들이 도약할 준비를 할 것이다. 우리의 비행은 아직 서투르나 그런 서투름들이 모여 이렇게 글자를 만들었다. ‘우리, 여기 있어요’라고.

이것은 우리를 보고 누군가 삶을 향한 작은 용기를 낼 수 있다면 우리는 계속 목소리를 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연극에서 ‘우물쭈물, 왔다 갔다 해도 할 건 하는 강박증 현경’과 ‘불안과 불면에도 당당하고 의연한 성욱’과 ‘무대에서 펄펄 나는 보람’과 ‘장애나이 오십에도 싫은 건 싫은 선미’를 보았다. 장애를 가진 우리들의 느슨한 연대.

그것이 돌올한 언어를 타고 서로의 손을 붙잡아 주고 있었다. 파랗게 펼쳐진 하늘을 나는 철새들의 대열을 바라볼 때처럼 이들의 언어가 부딪치고 어울리며 부서졌다 합쳐지곤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눈가에 시린 물방울을 맺히게 했다. 이들이 연극을 준비하며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을 오롯이 담아낸 무대에서는 이들의 느린 동작에 스며들어 있는 삶의 어떤 지체가 밟혔다. 그것은 현실이었으며, 이들이 겪어낸 아픔의 생생한 진언이었다. 나는 목이 메었다.

# 담배를 사러 이웃 동네에 가려면 덕고개를 넘어야 한다. 고개를 넘다가 뻐꾸기 울음소리에 놀란 지난봄. 고개를 넘어 한참 걸어가서도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뻐꾹! 고개를 사이에 두고 양 동네에서 다 들리다니. 뻐꾸기 울음소리는 도대체 얼마나 큰 것인가. 산의 몇 갑절 아닌가.

은미가 연극에서 노래를 한다. ‘인형의 꿈’과 ‘걱정 말아요, 그대’와 ‘네가 참 좋아’를 부른다. 그런데 이들 익숙한 대중가요가 어쩐지 모두의 가슴에 새겨질 듯 울리는 이유는 무얼까. 이 노래는 은미 삶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온힘을 모아 부르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장애와 비장애 사이를 거대한 벽처럼 가로막고 있는 무관심과 편견을 넘어 우리의 가슴에 와 닿는다. 노래란 본디 그런 것이다. 산맥보다도 크고 바다보다도 깊다. 왜냐하면 노래는 산맥과 바다가 줄 수 없는 소박한 진실에서 기원하기 때문이다.

지금 나의 가슴 속에 있는 작은 진실 하나가 어떤 웅장한 진리보다 더 멀리 가는 향기이며 소리라는 것을 노래는 깨우쳐준다. 은미가 노래를 한다.

은미야, 앞으로도 계속 너의 노래를 부르렴. 너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 우리가 함께 부르는 노래. 우리가 여기 있다는, 이렇게 모여 아름다운 작품으로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노래.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가, 너와 내가, 무언가를 들리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노래.

 

# 참으로 오랜만에 그대가 고향에 돌아왔다. 고향이 누구에게나 푸근하고 따뜻한 기억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던 그대가 고향에 돌아와 나, 당산 느티나무를 바라다보고 있다. 그대를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게 한 힘은 어디에 있었던가.

이 글의 강조부분은 ‘천둥과 번개’의 미현이 선물한 『눈물은 왜 짠가』라는 책에서 인용한 것이다. 이 글의 저자인 함민복 시인은 가난이라는 천형을 온몸으로 밀고 나가며 이 글을 썼다. 책에는 말끔하게 정돈된 도시에는 가려져 있는 삶이,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와 외진 습지에 머무는 철새들의 가려진 삶처럼, 활공하고 있다.

철새들이 서로의 비행을 보며 대열을 짓듯, 서로의 마음을 나누며 글을 쓸 수 있는 힘을 ‘천둥과 번개’에서 함께 하고 있는 미현을 보며 얻었다. 미현이 평범한 보통의 삶을 살고 싶다며 가슴 아파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그녀의 마음을 찾아주고 싶었다.

미로처럼 이어지던 이야기 끝에 우리는 함께 은미를 생각해냈고 은미에게 마음을 선물하자고 생각을 모았다. 그렇게 은미에게 선물이 될 글을 쓰며 어렵게 은미의 마음을 더듬어보게 되었다. 닿았을까.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흐르고 있다. 처음 책을 선물 받지 못했더라면 이 글은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최초의 사랑의 행위, 그 속에서 답을 찾고 싶었다.

‘천둥과 번개’의 연홍 선생님의 말씀처럼 결국 사랑이 답이었던 것이다. 이 글을 쓰며 나는 지순한 사랑과 오랜 연애를 하는 기분이었다. 부드럽고 작고 소박한 그 사랑의 대화들. 그것이 이 글의 이곳저곳에 뿌려져 있다면 좋겠다. 왜냐하면 그것이 언젠가 언니, 라고 친근히 불러주던 은미가 전해주었던 온기이며, 일상을 지켜주던 미현이 주는 용기이며, 삶 속에서 사랑이라는 빛나는 진실을 살고 계신 연홍 선생님이 주신 지혜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생생한 사실이 되어 가슴으로 배어나오는 이 놀랍고도 가슴 찡한 경험이라니. 그것은 무딘 우리를 일깨우는 죽비소리처럼 가슴에 긴 현을 그어 노래하게 하는 것이다.

 

# 여름내 빗소리만 줄곧 들려오다가 풀벌레 소리 들려오는 새벽이다. 빨랫줄도 마를 새가 없던 긴긴 비의 날들이었다. 매미 울음소리를 건너뛰고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습기에 지쳐 있던 몸이 가벼워졌다. 잠자리에서 떨쳐 일어나 집 밖으로 나선다. 새벽 공기가 서늘한 포옹을 청해 온다. 무성하게 자란 풀에 맺힌 이슬방울이 가로등 불빛에 반짝인다. 징검돌로 놓인 중국산 맷돌에 서서 하늘을 본다. 옅고 맑은 구름이 천천히 달 위를 아니, 아래를 지나고 있다. 태풍의 서막을 여는 구름의 질주에 근심이 얼마나 깊었던가. 부드러운 것들이 부딪치며 내는, 세상에서 가장 큰, 하늘에서 내려오는 소리, 천둥에 나는 또 얼마나 놀랐던가.

시인의 여름에는 비 오는 날이 잦았나보다. 그럼에도 시인은 놀라워한다. 다시금 천둥이 치는 소리에.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매순간 가장 맑고 작고 부드러운 것들이 내는 천둥소리에 놀라워할 줄 안다면 좋겠다. 그 경이를 알아볼 수 있는 지상의 낮고 낮은 곳에서 사는 일.

나는 나의 장애가 부끄럽지 않다. 성미산마을극장을 찾아가는 뜨겁고 환청으로 어지럽던,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길 위에서 나는 거듭 생각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가고 있는 길이 있다는 것. 누군가를, 내가 박수를 쳐 줄 수 있는 다정한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이 있다는 것. 손을 꼭 붙잡아줄 수 있는 그녀를 만나러 불볕을 견디며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그 뙤약볕 속에서 가끔 잠자리가 날았다는 것을 나는 기억해낸다. 그것은 폭염과 가뭄 속에도 어딘가 조그맣게 고인 그늘진 웅덩이가 있었다는 증거였다. 아니라면 먼지 낀 도심의 새들이 쉬어 가는 풀이 웃자라 있는 자그맣고 고요한 인공호수이거나. 잠자리가 내 눈높이에서 머물다 간 자리에는 물 위에서처럼 파문이 동그랗게 일었다.

‘우리, 여기 있어요’라는 말이 내 가슴으로 번지다 다른 이에게 번져가는 것처럼. 다른 이에게서 번진 물기가 내 가슴을 말갛게 적셔버린 것처럼. 비가 내릴 듯 날이 흐리고 세상의 바닥을 씻으며 낮은 곳으로부터 투명하게 물너울이 지는 모습을 보고 싶은 날이다. 나는 비를 부르는 천둥소리를 환청처럼 듣고 있다. 긴 여름이 끝나가고 있다. 꽁지가 상처처럼 붉은 잠자리들이 속이 비치는 가벼운 날개를 달고 무수히 날아오를 가을이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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