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미디어가 재현하는 정신장애인의 사건 에피소드는 왜 부조리한가
“또?”…미디어가 재현하는 정신장애인의 사건 에피소드는 왜 부조리한가
  • 박종언 기자
  • 승인 2018.08.26 22: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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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장애인 사건사고는 격리 이데올로기 더 강화
사건사고 때마다 정신장애인은 죄인으로 소환돼
예측불가능성이 안겨주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사회적 생태계를 교란하는 정신장애인의 사고는 죽음과 결부
선량한 시민이 동기 없는 정신병자에 위협받는다는 두려움
위험한 존재가 아닌 시민권을 가진 존엄한 존재
언론의 성찰 요청…공정한 담론 만들 수 있어

다시 정신장애인에 의한 사건이 터졌다.

미디어들은 앞다투어 이 정신장애인이 저지른 ‘공포스러운’ 풍경을 재현했다.

광주 동부경찰서는 흉기 난동을 부리고 피해자의 사무실에 불을 지른 혐의(특수상해·일반건조물방화) 혐의로 정신장애 2급의 최모(44) 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고 26일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최씨는 24일 오전 7시 13분께 광주 동구의 한 인력사무소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업주 A(50)씨에게 “○○씨를 아느냐”고 말을 걸었다. A씨가 “모른다”고 답하자 최씨는 시비를 걸며 주머니에서 흉기를 꺼내 들고 A씨를 위협했다.

최씨는 A씨와 몸싸움을 벌였고 소란을 목격하고 몰려온 시민들에 의해 제압당했다.

경찰은 손을 심하게 다친 최씨를 수술받게 하려고 병원에 입원시켰다. 이후 최씨는 병원을 무단이탈해 25일 아침 다시 A씨의 사무실을 찾아가 미리 준비한 생수병 3개에 담은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A씨는 퇴근한 상태였으며 지나던 시민이 불을 발견해 신고하면서 조기 진화됐다.

불을 지른 최씨는 곧장 자전거를 타고 경찰서로 가 자수했다.

경찰 조사에서 최씨는 “A씨가 무뚝뚝하게 대답해 기분 나빠 흉기 난동을 부리고 불을 질렀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최씨를 경찰관 감시 하에 손가락 봉합 수술을 받게 하고 입원 조치할 예정이었으나 최씨가 입감을 희망해 수술이 끝난 직후 유치장에 가뒀다.

언론들은 ‘흉기 난동 보복 방화까지…정신장애인 40대 구속’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생산했다.

 

흉기 난동 부리는 최씨. 미디어는 사건사고를 재현하면서 정신장애인의 격리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킨다 (c)연합뉴스
흉기 난동 부리는 최씨. 미디어는 사건사고를 재현하면서 정신장애인의 격리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킨다 (c)연합뉴스

여기까지다. 피의자 최씨는 선량한 시민을 향해 흉기를 휘둘렀고 게다가 화가 난다는 이유 하나로 건물에 불을 지르려고 시도까지 했다. 그리고 그 범죄를 저지른 자(者)는 뚜렷한 동기 없이도 사고를 칠 수 있는 ‘정신장애인’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자. 언론은 왜 이토록 정신장애인에 대해 모진 보도를 하는 것일까.

언론이 정신장애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리고 언론이 이 정신장애인의 사건을 기사화하는 것은 모호한 존재인 정신장애인에 대한 무의식적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두려운 것이다. 저 이질적이고 공동체에서 배제돼 있어야 할 정신장애라는 표상이 사회 생태계를 혼란스럽게 만들어버리는 데 대한 깊은 두려움, 혹은 불안함의 외적 발화가 정신장애인의 위험성 이데올로기라고 믿어 버리는 것이다.

미디어는 정신장애인의 위험성을 이렇게 사건사고를 통해 재현해낸다. 이는 공정성의 문제라든가, 특이성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이고 이념적 문제이다. 기자가 바라보는 정신장애인의 위험성 이념은 그들이 생산하는 텍스트에 고스란히 묻어 있다. “봐라, 이런데도 정신장애인이 위험하지 않은 존재인가”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정신장애가 미디어에서 재현되고 소비되는 방식은 ‘죽음’의 이미지와도 겹쳐진다. 이들 정신장애인은 -이것은 분명히 정치적 개념이다. 어쩌면 언론은 정신질환자라는 비정치적 개념의 의료적 모델을 선호할 수 있다- 이성적 사회가 구성해낸 두려움의 상징이다. 그 두려움은 어쩌면 선량한 내가 예측불가능한 존재인 정신질환자에게 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는 위험성으로 소환된다.

정신질환자들은 범죄를 저지르는 즉시 사회로 소환되며 이를 간접적으로 학습한 대중은 정신질환자의 격리를 요구하게 되고 정신장애인의 절멸 이데올로기를 강화한다.

“죽여버려야 돼”, “당장 사형에 처해라”, “불안해서 못 살겠다”, “사회에서 격리하라”, “무섭다”, “저런 위험한 존재가 돌아다니는데 국가는 뭘 하고 있나”, “경찰은 왜 정신장애인을 내버려두나”, “가두어라”, “세상 밖으로 못나오게 해라” 등등.

모호한 존재를 가차없이 절멸시켰던 파시즘과 유전적 질병이 있는 자들을 절멸했던 우생학 이데올로기는 모습을 바꾼 채 우리 사회에 재등장한다. 우리는 이 이데올로기에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죽여버려야 할 존재가 사회를 돌아다닌다는 것은 적어도 이성적이고 선량한 국민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비이성적이고 모호한 존재자들, 두려운 존재자들, 예측불허의 동기 없는 사건 유발자들이 곧 정신질환자들이다.

만약 관절염을 앓고 있는 자가 이 같은 범죄를 저지르면 언론은 이를 기사화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아니면 고혈압을 가진 이가 위와 비슷한 사고를 일으킨다면 기자는 데스크에게 이런 사건이 발생했다고 다급하게 보고할까. 고혈압 약을 안 먹어서 사고를 쳤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그때의 사건사고는 지극히 개인의 일탈로 이해될 뿐 사회적 위험성이라는 프레임으로 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정치적 프레임은 사회적 위험성에 대한 대중적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때에 따라서 담론이 된다. 따라서 관절염과 고혈압은 기사 가치가 없으며 정신질환은 높은 기사 밸류를 가지게 된다. 마치 개가 사람을 물면 기사화되지 않고 사람이 개를 물면 기사화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기자는 정신장애인과 관련된 두 가지의 시선을 갖고 있다. 하나는 인간 승리, 또 하나는 범죄의 주체다. 인간 승리는 ‘역경’을 이겨내고 성공에 이른 대상이 주는 서사적 감동에 역점을 둔다. 정신질환을 극복-극복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지만-한 사람이 음악을 잘 해서 성공하거나 교회에서 기도를 통해 나았다든가 하는 스토리로서 등장한다.

반면 범죄의 주체로 구성되는 것은 사회적 위험성을 알리는 메신저 역할을 하게 된다. 위험성으로의 표상은 정신장애인에 의한 사건사고가 불거져 나올수록 공고화된다.

이유 없이 여성을 살해한 강남역 살인사건이 그랬고 최근 경북 영양군에서 있었던 조현병 당사자가 경찰을 흉기로 살해한 사건이 그렇다. 이 경우 위험성 이데올로기는 더 강화되고 일상에서 정신장애인은 자유적 주체가 아닌 관리의 대상으로 전환되어 버린다. 혐오와 차별, 낙인은 그 대상에 ‘보너스’로 함께 온다.

최씨의 행위는 용인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그는 사람에게 흉기를 휘둘렀고 불까지 지르려고 했다. 그가 정신장애인으로 죄를 저질렀으니 사면하라는 요청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당연히 그는 지은 죄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적어도 <마인드포스트>가 주장하는 것은 정신장애인의 사건 에피소드를 미디어가 왜곡해서 재현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쩌면 기자는 한 사건을 왜곡한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썼다고 항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 사건을 기사로 채택하는 논리와 텍스트로 옮기는 이유는 정치적 프레임이 작동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당신이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텍스트로 생산된다는 말이다.

방화하는 최씨. 정신장애인의 위험성 이데올로기는 내가 당할 수도 있다는 무의식적 두려움의 방어기제다 (c)연합뉴스
방화하는 최씨. 정신장애인의 위험성 이데올로기는 내가 당할 수도 있다는 무의식적 두려움의 방어기제다 (c)연합뉴스

누구나 살아가며 사회적으로 일탈할 가능성이 있다. 정신장애인이라고 해서 그 일탈이 더 많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비정신장애인이 흉기를 휘둘러 손을 다친 기사는 기사에 실리지도 않거니와 설령 실린다고 해도 하단의 단신으로나마 생산될 것이다. 그런데 정신장애인이 저지르면 1면이든 사회면 상단에 실릴 가능성이 더 크다. 그것이 언론이 정신장애인을 바라보는 이념적 시선이다. 그리고 그 내면에는 선량한 시민인 내가 죽음을 당할 수 있다는 깊은 두려움이 숨어 있다.

기자도 정치적 이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기자의 정치적 프레임은 하나의 사건을 다르게 해석하게 할 수도 있다. 대중은 비판적 독해 없이 그 프레임을 그대로 수용하게 된다. 그러므로 요청한다. 정신장애인의 에피소드를 확대해석하지 말라,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자유이지 관리가 아니다. 우리가 모두 정신병원이나 정신요양시설로 들어가 격리돼야 사회가 안정된다는 신화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정신장애인은 언론이 바라보는 시선만큼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그 두려움은 기자가 설정한 왜곡된 시선일 뿐이다. 우리도 충분히 사회에서 시민적 권리를 갖고 살아갈 수 있는, 그리고 살아가야 하는 존엄한 존재다. 언론의 성찰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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