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60분 ‘조현병 범죄의 진실’편을 보고…“우리는 탄식한다”
추적60분 ‘조현병 범죄의 진실’편을 보고…“우리는 탄식한다”
  • 박종언 기자
  • 승인 2018.08.30 20: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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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병 당사자의 강력 범죄 집중 보도
사회가 포용해야 논지는 ‘범죄인인데 우리집에서 재우자’ 의미
조현병 당사자를 보는 프레임은 ‘존재론적 두려움’

신체장애인에게는 하나의 신화가 있다. 장애 극복 신화가 그것이다. 휠체어를 타고 패럴림픽에 참가해 메달을 따거나 혹은 장애를 극복하고 어떤 사회적 위치까지 올라갈 경우 극복 서사는 ‘감동’이라는 래퍼토리를 구성한다.

그런데 정신장애인에게는 여타 신체장애처럼 극복 신화가 없다. 대신 하나의 신화가 더 있다. 바로 범죄의 주체다. 신체장애는 손상된 신체라는 물리적 한계를 ‘정신력’으로 넘어설 때 거기에 ‘인간 승리’라든가 ‘정신력 승리’라고 명명할 수 있다.

그런데 정신장애인에게는 그 ‘정신’이 쪼개지고 분열돼 있어 사유와 운동의 출발점인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고 흔히 생각한다. 그래서 정신력으로 쪼개진 정신을 극복한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정신장애인에 대한 신화는 오직 범죄의 대상이자 주체라는 것만 덩그러니 남는다.

 

정신장애는 선천적 두려움의 대상인가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시골 마을에는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온 남성이 있었다. 그때 내 나이 12살. 나와 친구들은 모이면 그 정신병원 퇴원자의 위험성을 이야기했다.

무서웠다는 말이 더 맞다. 무섭고 두려웠다. 그가 산에서 마주치면 우리를 해칠 거라는 근거 없는 이야기를 우리는 무척이나 심각하게 나누곤 했었다.

지금의 나는 의아하게 생각한다. 이제는 나 역시 조현병 당사자다. 그런데 그 어린 시절 정신병원에서 퇴원했다는 이유만으로 10대 초반의 우리 또래가 모여 두려운 ‘담론’을 만들어 낸 이유가 나는 궁금했다.

누가 나에게 정신질환자는 위험하다는 이데올로기를 심어주었던 것일까. 텔레비전에서? 그때는 텔레비전도 없었다. 그럼 라디오에서? 아니면 전(前) 세대가 어린 우리들에게 정신적 유산을 남겨준 것일까. 정신질환자는 모두 위험하다는 존재로 말이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어떤 이데올로기와 소문이 나에게 정신질환자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안겨 준 것일까. 조현병 당사자인 나도 그렇다면 지금의 어린 나이의 아이들에게 두려움의 존재가 돼 버린 것일까. 그리고 사회가 정신질환자의 위험성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유포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 안에 혹 무의식적 두려움이 있는 것은 아닐까.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더럽고 무서운 것은 엄연히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 더럽고 두려운 것은 피하려고 하는 사회의 무의식적 합의는 있지 않을까.

 

추적60분 분석

지난 29일 KBS의 추적60분은 ‘아프거나 나쁘거나-조현병 범죄의 진실’ 편을 방영했다. 스토리는 네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첫째, 지난 7월 8일 경북 영양군의 한 마을에서 40대의 남성 백모 씨가 집을 찾아온 경찰관을 흉기로 찔러 경찰 1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백씨는 사건 한 달 전 정신병원에서 퇴원했다. 처방받은 정신과 약도 그는 복용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항상 불안했어요. 항상 새벽에 돌아다니고 소리 지르고 맨발로 다니니까”이라며 공포심을 토로했다.

둘째, 백씨가 범행을 저지른 바로 그날, 광주의 한 정신병원 폐쇄병동에서 살인 전과자로 보호관찰 중이던 조현병 환자가 병원을 빠져나갔다가 검거되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같은 날, 서울에서는 또 다른 조현병 환자가 정신병원 입원을 요구하는 모친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세 사건은 같은 날 발생했다.

시민적 두려움은 증폭됐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이미 사람을 죽였어요. 또 비슷한 일을 저지를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요. 그냥 하던 대로의 보호관찰제도로 위험을 관리할 수 있겠는가”라고 답했다.

셋째, 추적60분은 조현병 증세를 망상과 환청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산속에 움막을 짓고 살아가는 남성과 조현병 아들의 폭력을 견디지 못해 컨테이너에서 생활하는 가족의 현실을 방영했다.

넷째, 추적60분은 현실적 어려움과 고통에 대해 이를 환자와 가족들에게만 감당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하는가를 질문한다. 그 대안의 하나로 미국 애리조나 주의 커뮤니티케어 시스템을 소개한다.

오현성 애리조나주립대 교수는 “조현병 환자에 대한 두려움은 미국 사회에도 똑같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여기는 조현병을 가지고 있어도 지역 사회에서 살고 계신 분이 많아요. 훨씬 많아요”라고 말했다.

방송은 정신장애인의 범죄율이 일반인의 1/15 수준이지만 재범률은 2배 가까이 높아 대책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오해와 편견을 버리고 정신장애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성숙한 사회를 위해 무엇부터 준비해야 하는지를 질문한다.

공정식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인력, 예산 문제로 인해 상당수 정신질환자들이 방치되고 있다”며 “정신질환자 치료, 수용 시설이 부족하기 때문에 지역사회에서 관리 시스템으로 보완해 줘야 하는데 지역사회 역시 인력과 예산이 충분하지 못해 제대로 관리를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존재론적 모욕감

방송을 보는 동안 나는 뭔가 불편함을 느꼈다. 그 불편함은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존재론적으로 모욕당한 그런 기분이었다. 추적60분이 내보낸 조현병 살인자는 바로 나 자신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정신질환자가 저지르는 범죄는 위험성을 증폭시켜 언론이 내보낸다. 관절염을 앓고 있는 사람이 약을 복용하지 않아 남을 다치게 하거나 물건을 훔쳤다고 언론이 긴급보도하지는 않는다. 절대로. 왜냐하면 보도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비정신장애인이 살아가며 일어나는 일탈에 대해 그것이 사회적 관심과 범죄 강도가 높은 것을 제외하고는 굳이 보도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정신질환자는 약을 먹지 않았고 주변을 향해 소리를 질렀고 타인의 몸을 건드렸고 흉기를 휘둘렀고 누구를 때리려 했고 하다못해 가게의 빵 하나를 훔쳤다고 하면 언론은 ‘당연히’ 내보낸다. 그가 약을 복용하지 않았으며 이전에도 동네 슈퍼에서 새우깡을 훔쳤다는 것을 팩트로 확인했다고 하면서 말이다.

조현병 당사자는 이렇게 위험성으로만 사회에 소환된다. 추적60분이 내보낸 제목 ‘아프거나 나쁘거나’는 많은 함의를 갖고 있다. 정신질환자는 아픈 사람이지만 관리가 안 되면 ‘나쁜’ 범죄인이 된다는 상징적 발화인 것이다.

조현병 당사자들을 위험한 존재로 규정해 놓고 난 다음에 우리 사회가 성숙하게 이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결론은 의미가 없다. 이미 위험성 이데올로기를 전파한 다음에 사회를 향해 포용을 요청하는 것은 ‘이 사람은 범죄인인데 우리 집에서 재워주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방송에는 조현병을 치료한 이의 에피소드도 나왔다. 성공 스토리가 아니라 치료 스토리로 등장하는 것이다. 바로 바리스타 이야기다. 정신장애를 겪은 이들은 사회 진출을 꿈꾸지만 그들을 받아주는 곳은 거의 없다.

최저임금법에도 정신장애인을 고용할 경우 최저임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되도록 규정하고 있다. 법을 만들 때 ‘불쌍한’ 정신병자들을 기업이 마음을 내서 받아들여달라는 ‘읍소(泣訴)’에 기반한 것이라 보인다.

따라서 정신장애인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군은 좁다. 너무 좁아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마주하는 것이 바리스타 종업원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곳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국가가 제공하는 몇 안 되는 직업에 배치되는 것이다. 그 배치의 최정점에 바리스타가 포진해 있다. 쉽게 말해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치료라고 부른다.

신체장애인이 육체적 한계를 넘어 무언가를 이루면 성공신화가 되지만 정신장애인은 바리스타가 되면 치유라고 부른다. 선택할 수 있는 몇 개의 일 중에 하나를 선택하면 그것이 치유로 가는 길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직업재활 서비스를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제공하고 있고 일터를 알선하고 있지만 정신장애인이 갈 수 있는 일터는 단순 노무직이 거의 대부분이다.

2014년 자료에 따르면 정신장애인의 경제활동 참여율은 13.9%였다. 다른 전체 장애 평균 39.0%에 비하면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이는 뇌전증장애, 지적장애에 이어 15개 장애유형 중 밑에서 세 번째다. 게다가 수익도 전체 장애인은 153만 원이었지만 정신장애인은 56만 원이었다. 정신장애인이 직장에서 가지는 애로 사항은 항상 ‘낮은 임금’이 일순위로 오르곤 한다.

정신장애인, 특히 조현병 당사자는 최근의 사건사고로 인해 ‘조현병 포비아’라는 신조어의 대상이 됐다. 정신분열이라는 의학 용어가 주는 거부감 때문에 현을 잘 타면 괜찮다는 ‘조현병’이라는 대안적 용어를 만들었지만 ‘포비아’ 논란이 정치화되면서 낙인의 강도는 더 증폭되어 버렸다.

우리는 탄식한다, 막연한 존재론적 두려움을

추적60분은 ‘조현병 범죄의 진실’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조현병 범죄. 우리는 탄식한다. 우리가 왜 범죄자로 보여져야 하는 것일까. 물론 정신장애인도 사고를 치는 순간이 있다. 조현병 당사자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비정신장애인도 그러할 것이다.

추적60분은 그 정신질환자의 범죄의 잔혹함을 더 알리고 싶었던 것일까. 그래서 사회가 성숙한 자세로 이들을 포용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결국은 정신질환자는 원래적으로 이렇게 공포스러운 존재라는 이미지를 더 확산시킨 것은 아닐까.

어린 시절, 내가 처음 마주했던 정신병원 퇴원환자였던 마을 아저씨에 대해서 가졌던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내가 이제 그 마을 아저씨처럼 조현병 당사자로 살아가고 있으면서 나를 향해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공포심은 같은 선상에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 사회의 정신질환자에 대한 막연한 공포심을 ‘존재론적 두려움’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일탈적이며 모호하고 사회에 포섭될 수 없는 존재. 그가 정신질환자다. 위험하고 더러우며 사회 생태계를 교란하는 존재, 그게 정신질환자인 것이다. 추적60분이 인터뷰한 오현성 교수가 “조현병 환자에 대한 두려움은 미국 사회에도 똑같이 있는 것 같다”라는 발언은 전 세계적으로 정신장애인에 대한 ‘존재론적 두려움’이 집단적 무의식을 형성하고 있다는 의미로 나는 받아들인다.

추적60분은 객관적 보도라는 이름으로 조현병 당사자, 정신장애인을 죽음의 이미지로 만들어버렸다.

추적60분이 조현병 당사자들을 보도하려고 했으면 애초 이들이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지, 어떻게 치유의 길로 가고 있는지, 사회적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먼저 보도해야 하지 않았을까. 왜 범죄라는 특정 부분에 포커스를 만들어 낙인 프레임을 더 강화시키고 만 것일까. 전체 범죄의 0.4%밖에 되지 않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말이다.

유감을 표한다. ‘이 사람은 범죄인이고 위험한데 우리 집에서 재우자’라는 모순된 합리화는 의미가 없다. 이 사람은 범죄를 저질렀는데 이 범죄자 수가 그렇게 많지는 않다. 그런데 이들이 사고를 치면 언론매체는 심각한 사회 질서의 교란 행위로 받아들이고 집중 보도한다. 왜 그럴까?

그 ‘왜?’에 대한 해답을 먼저 구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존재론적 두려움에서 출발한 정신장애인에 대한 이미지는 죽음과 결부돼 있는 것이다. 선량한 '나'라는 시민적 존재가 동기 없는 ‘정신병자’에 의해 살해당할 수도 있다는 그 그로테스크한 두려움. 그것은 방송을 만든 기자들에게도 충분히 녹아 있었을 것이다. 그 두려움이 추적60분의 조현병 방송 프레임을 공포에서 출발시키고 두려움으로 끝나게 만들어 버렸다고 나는 생각한다. 언론의 성찰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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