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언의 만남] 박현동, “내가 가진 돈으로 갈 수 있는 데가 고시원 밖에 없어요”
[박종언의 만남] 박현동, “내가 가진 돈으로 갈 수 있는 데가 고시원 밖에 없어요”
  • 박종언 기자
  • 승인 2018.09.05 02: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시원 생활하는 정신장애인 박현동 씨 인터뷰
전투경찰 생활 당시 두 차례 탈영
정신과적 증세 나타나…영창 생활 후 겨우 제대
건강해져서 수급비 안 받고 열심히 일할 것
고시원 소음 겪는 게 가장 어려워
약 잘 먹고 건강한 게 자립…건강하면 뭐든 할 수 있어
포기하지 말고 희망 가지는 삶 살아가야

살아가면서 삶이 버거워지고 사회적 관계망까지 훼손돼 고립에 빠질 때 사람들은 고시원으로 간다. 그곳에는 알코올중독자도 있고, 정신장애인도 살고, 막노동을 하러 다니는 이들이 ‘뜨내기’처럼 산다. 그들이 떠나면 또 다른 생의 생채기를 가진 이들이 그곳으로 들어온다.

생(生)의 최악의 자리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삶의 고통의 결이 그대로 민낯으로 보이는 곳이 바로 고시원이다. 정신장애인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런 도움을 받을 곳이 없을 때, 예정된 수순처럼 그곳으로 들어와 아픈 정신을 어루만진다.

정신장애인들은 고시원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기자는 늘 궁금했다. 그곳을 떠나기 위해서는 어떤 법적 제도적 장치들이 마련돼야 하는지도 알고 싶었다. 지인(知人)의 도움으로 고시원에 살고 있는 정신장애인을 만날 수 있었다. (기자 역시 고시원에서 일 년 가까이 생활한 적이 있다)

박현동(42)씨. 충남 삽교에서 태어나 한 살 때 부친이 돌아가시자 자신은 할머니 집에, 형은 당숙 집에, 누나는 엄마랑 같이 각각 떨어져 살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가족은 다시 모였다. 가리봉동 쪽방촌에서였다. 이후 이사만 스무 번 이상 했다. 현동 씨는 공업고등학교를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대학은 포기했다.

육군으로 갔는데 ‘뺑뺑이’ 돌려 전투경찰로 빠졌다. 김포 국제공항에 배치됐다. 밑으로 들어오는 후임이 없어 1년 넘게 ‘막내’ 생활을 했다고 한다. 잘 해도 때리고 못 해도 때리는 군대에서 자신은 얻어맞으면서 “밑에 후임 들어오면 절대 때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부대원이 탈영하는 것도 보고 구타에 턱뼈가 부러지는 광경도 목격했다.

전투경찰은 사고를 치고 합의를 못 보면 군 교도소로 가지 않고 일반 교도소로 간다고 했다. 폭행한 이가 폭행당한 이에게 고소당하지 않으려면 합의금을 물어줘야 했다. 그는 그 모습들을 보면서 절대 폭행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고참들이 물밀 듯이 전역해 나갔고 후임들이 어느 날 마구 들어왔다. 그 와중에 후임병 한 명이 면회 때문에 밖에 나갔다가 귀대 시간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지각 귀대한 그는 웃으면서 들어오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참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또 사고가 터졌다. 공항 청사의 보안을 담당하는 후임들이 귀대하지 않고 엉뚱한 곳에서 잠을 자고 온 것이었다.

마침내 폭발해 버렸다. 그때부터 그는 ‘워커 발’로 후임들을 마구 때렸다고 한다. 이후 모두가 그를 피했다. 그는 “오히려 내가 왕따를 당해버렸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경찰병원에 갔다가 그곳에서 탈영을 했다. 친구에게 전화했다가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에 나가니 어머니가 와 있었다. 탈영 이틀 만에 귀대. 영창 생활을 한 후 규율대 갔다가 다시 소대로 복귀했다.

이후 경찰병원을 이용하다가 또 탈영을 했다. 이번에는 수개월이었다. 여름에는 아파트 옥상에서 자고 쪽방에서도 자고 겨울에는 신문지를 덮고 잠을 청했다. 피시(PC)방에서 인터넷으로 정신과 약을 찾았다. 한 약국에서 그 약을 사서 먹었다. 몸이 뒤틀리고 휘어지는 기분이었다.

다시 어머니한테 전화했다. 어머니랑 부평의 한 정신과로 가서 사촌동생 이름을 빌려 치료 받다가 어느 날 불심검문에 걸렸다. 집행유예 2년. 다시 부대로 복귀. 탈영 이전의 계급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기 때문에 자기 후임들은 다 병장을 달고 있었다. 자기만 상병 5호봉 그대로였다. 그때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경찰병원에 가서 약을 타 먹었다. 이후 제대. 다음은 일문 일답.

[박종언의 만남] 박현동 씨 (c) 마인드포스트
[박종언의 만남-길을 묻다] 박현동 씨 (c) 마인드포스트

-제대하고 어떻게 살았습니까?

“몸이 괜찮아져서 신도림 가서 전철역에서 양말 오천 원짜리 팔았어요. 그땐 약을 안 먹었어요. 재발도 안 했고. 삼촌 ‘빽’으로 인천의 대우GM에서 일하다가 힘들어서 그만두고 친구집에서 지내다가 다시 약을 먹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형이 관리소장하는 당구장에서 일을 했어요. 괜찮더라고요. 약을 안 먹어도 되는 줄 알고 의사 선생님한테 약을 안 먹어도 될 거 같다. 근데 의사 선생님은 약을 더 먹어야 된다고 하고. 제가 장사를 잘 해서 매출도 꽤 올렸는데 당구장이나 하나 차려볼까 했죠. 그래서 형한테 얘기하고 나가겠다 했죠. 친구 집에서 일 년 동안 지내는데 어느 날 엄마가 전화가 와서 집에 들어와서 좀 쉬라고 해서 집에 갔는데 거기서 강제입원 당했죠.

영등포의 A병원이었는데 알코올병원이에요. 예를 들어 백 명이면 조현병 환자 한 명, 저 같은 조울증 환자 한 명. 나머지는 다 알코올중독자들. 술만 안 먹으면 거기서 싸울 사람도 없고 장기 두고. 그때가 세월호 사건 터지기 전이었어요.”

-지금 장애 몇 급입니까.

“장애 3급요.”

-언제 등급 받으신 거예요.

“몇 달 안 돼요. 5~6월쯤요.”

-기초생활수급비는 받고 있습니까.

“네. 지금 받고 있어요.”

-얼마 정도 받으십니까.

“주거비가 21만 원, 기초비 50만 원 정도.”

-그럼 한 70만 원 받으시는 거네요.

“대충 그 정도요.”

-어떻게 생활하십니까. 고시원 비용은.

“저희는 돈을 못 벌어요. 왜냐면 돈을 벌면 차감(差減)이 되어버리고 (일 하다가) 걸리면 6개월 이상 35만 원이 떨어져 버려요. 저는 목표가 약 꾸준히 먹고 재심 받으려고 해요.”

-왜요?

“아깝죠. 젊은 나이에.”

-일을 하면서 수급비 받지 않겠다?

“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일을 못 하는 상황이고. 어디 가서 아르바이트도 못 하고 운전면허도 없어 운전도 못 하고.”

-보통 기초생활수급비 받으려고 일을 안 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당신 같은 경우는 기초생활수급비 끊으려고 재심을 신청한다고 했어요. 굉장히 어려운 결정인데요.

“제가 나이가 50~60이면 재심 안 할 거예요. 계속 여기서 살면서 산책이나 하겠죠. 근데 제가 아직 나이가 젊으니까. 제가 장사를 좀 잘 했어요. 여덟 군데 팀장으로 돌아다니면서 250(만원)까지 받았어요. 그런데 좀 아프다고 50만 원으로는 만족 못 해요.

저는 약 꾸준히 먹고 산책하고 운동하고 해서 낫고, 다시 재심받아서 운전면허 따고 택배나 아르바이트. 사실 오토바이로 배달해도 190만 원은 받아요.”

-재심 신청 없이도 그냥 일하면 되지 않나요. 재심 받는다는 건 큰 결심이에요.

“재심이 한 번, 두 번, 세 번이 있어요. 열 번 있는 게 아니라. 일단 제가 몸이 낫고 건강해지고 그러고 나서 얘기죠. 이게 저도 모르는 거예요. 운동하는 것도 그 계획 때문이에요. 제가 약 먹고 운동하고 재밌는 프로그램만 보고 뉴스는 안 봐요. 이상한 시위하는 장면 나오면 안 좋아지니까. 재밌는 거만 보고 웃고 저녁에도 명상 음악 틀어놓고 명상도 하고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요.”

[박종언의 만남-길을 묻다] 박현동 씨 (c) 마인드포스트
[박종언의 만남-길을 묻다] 박현동 씨 (c) 마인드포스트

-기초생활수급비로 한 달 견딜 수 있던가요. 아니면 어머니한테 손을 좀 내미는 겁니까.

“저는 어머니하고 관계가 끊어졌어요. 엄마랑 자주 마찰이 있으니까 더 안 좋아지는 거예요.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어요. 엄마가 회사 취직해서 일 안 하려면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해서 쫓겨난 거죠.”

-그러니까 생활비가 됩니까. 그걸로 다 충당이 돼요? 모자라지 않습니까?

“충당은 안 돼요. 다른 데 손 벌릴 데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밥하고 김치는 제공이 되니까.”

-고시원에 들어오게 된 이유가 있습니까.

“왜냐하면 엄마가 나가라고 했으니까.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때 제 통장에 30만 원밖에 없어요. 이 돈으로 갈 데는 고시원밖에 없어요. 이걸로 어떻게 전세를 잡고 월세를 잡아요. 내 통장에 있는 돈 갖고는 갈 수 있는 데가 고시원밖에 없어요, 현실적으로.”

-고시원에 고립돼 있어요. 살면서 필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일단 조용했으면 좋겠어요. 여기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 와요. 월세 25만 원 정도 하니까 최저잖아요. 보증금도 거의 없고. 위층에 사는 사람이 새벽에 발로 바닥을 차지를 않나. 그래 갖고 저녁 취침 약을 먹고 푹 자야 되는데 시끄럽게 해 버리면 한 번 깨면 다시 잠들기 힘들어요. 그럼 밤새는 거예요.”

-싸움은 없었나요.

“(고시원은) 세 번 정도 고성방가 나오면 퇴출돼요. 한 번은 새벽 두 시에 약 먹고 자려고 하는데 위층에서 전화로 욕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요. 총무하고 같이 올라갔죠. 그 사람이 몇 번 그렇게 걸렸으니까 원장한테 얘기해서 이번 달만 살고 나가라고 해서 그 사람이 나갔어요. 고시원에서 제일 피곤한 게 밥이랑 이런 게 피곤한 게 아니라 문 여닫는 소리가 들려요. 그러면 잠을 잘 땐 괜찮은데 그럴 때 좀.”

-소리 때문에 고시원 생활이 괴롭다?

“그게 고시원의 취약점이죠.”

-또 다른 건 없습니까.

“여긴 최하위 사람들이 오니까. 알코올중독자도 오고. 그런 사람은 계단 입구에서 쓰러져 자고. 그러니까 좀 신경이 쓰이죠. 여기서 생활하는 게 50만 원 갖고 되냐,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여기서 생활하면서 욕하고 막 그런 거. 밑에 층에 여자 한 명이 사는데 제가 밖에서 담배를 피우니까 막 뭐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저는 쳐다보지도 않았거든요. 그런 게 힘들지 다른 건 뭐. 시끄러운 건 힘들어요.”

-임대주택 신청은 해보셨습니까?

“그건 나중에 생각할 문제고 지금은 제가 어떻게든 낫는 게 가장 중요하죠.”

-힘들 때 대화할 친구가 있습니까?

“네. 두 명 정도. 한 명은 일반인이에요. 걔가 술을 안 먹으면 잠이 안 온다고 해서 병원에 가 보라고 했더니 정신과 가니까 공황장애래요. 약 4개월 먹고 지금은 괜찮아졌다고 그래요. 한 명은 조현병.”

-만나면 무슨 얘기 나누십니까? 술을 마십니까?

“술 마실 때도 있고. 근데 저는 적당히 마셔요.”

-일자리는 구하고 있습니까?

“일자리는 못 구해요. 막노동 하루 뛰어도 걸리면 한 달 50만 원이. 이게 한 달만 깎이는 게 아니라 6개월을 가요. 6개월 간 30만 원. 그렇게 되면 제가 뭐하려 뛰겠어요. 차라리 50만 원에 만족하고 말지. 지금은 여기에 만족하자.”

-지금 이렇게 하면서 나중에 안정이 되면 수급비를 안 받고 일하겠다?

“네.”

-어떤 일을 하고 싶습니까.

“어떤 일을 하든 간에 일 단계, 이 단계, 삼 단계가 있잖아요. 그러면 이 단계까지 생각을 안 해봤어요. 지금 내 몸이 이 상태니까 몸이 좋아지는 상태까지만 생각하지.”

-정신장애인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무엇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일반 사람들이 조울증이나 조현병을 무서워한다 그러는데 저는 오히려 일반 사람이 저를 이렇게 만들었거든요. 그 사람들이 저한테 막 욕하고. (강남역) 묻지마 사건도 그 사람이 당연히 잘못했죠.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 애가 어려서부터 여자들한테 무시를 당했다고 그러더라고요.”

-무엇이 필요하신지.

“저는 일단 고마운 건 고맙다고 인정을 해요.”

-누구한테 고마워해요?

“정부 쪽에. 저는 어디 가나 얘기해요. 고마운 건 고마워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북한이나 더 어려운 나라에 살면 이런 제도 못 받는다. 50만 원, 70만 원이 어떻게 나오냐. 저는 그래요. 우리가 일반 사람들이 편견을 갖는다고 하지만 자기 자신이 편견을 갖는 것도 있는 거 같아요.”

-정신장애인이 사회에서 살려면 뭐가 필요한지.

“너무 두렵지 않은 존재로.”

-어떤 경우에 차별을 느낍니까.

“제가 산만해서 금방 금방 까먹거든요. 그래서 가게에서 처음에 이거 뭐예요 물어보면 상대방 측에서 한 두 번은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데 그 다음에 가면 그때 설명해주지 않았냐고 언성을 높일 때가 있어요. 그럴 때는 좀. 제가 하는 게 메모지 갖고 여기에 기자님 오는 거 메모를 해 놨거든요. 제가 불편한 건 제가 해소해야죠. 어떻게 해요.”

-사람들에게 정신장애인이라고 스스로 말합니까.

"굳이 물어보지 않는 사람들한테는 말하지 않죠. 솔직히 일반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더 무섭죠. 일반 사람들은 무슨 사건이 터지면 치밀하게 하잖아요. 그런데 저희들은 그런 거 잘 못해요. 치밀하게 경찰에 안 잡히려고 하는 그런 걸 못 해요. 일반 사람이 더 무섭다고 생각해요."

“저도 일반 교도소를 가 봤잖아요. 거기 죄짓고 온 사람들을 보면 사기꾼도 있고 여러 사람들이 있는데 말도 잘 하고 다 잘해요. 그런데 저희들은 그런 걸 못해요. 왜냐, 금방 까먹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내가 범죄를 저지른다? 그러면 내가 어디로 숨어야 되는데 돈도 없고 아무 것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저는 오히려 흉악한 범죄를 일으키는 일반 사람들이 더 무섭다고 생각해요.”

-컨디션 안 좋을 때는 어떻게 대처하십니까.

“그때는 취침약을 먹어요.”

-대처하는 게 취침약 먹는 거 빼고 다른 건 없습니까.

“제가 가장 취약한 게 산만한 거예요. 산만하니까 잘 까먹고 잘 잊어버리고 그렇죠. 그러니까 이렇게 메모해 놓고 오늘은 며칠이고 오늘은 기자님이 오시니까 옷도 입고 바로 나가봐야 하니까. 제가 딴 데 가면 안 되잖아요.”

-하루 일과는 어떻습니까.

“폭염 때문에 웬만하면 의사 선생님이 외출을 하지 말래요. 땀을 많이 흘리면 안 좋다고. 의사 선생들이 말하는 데 계절을 탄대요.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저희들이 계절에 민감한가 봐요.”

-아침에 일어나서 특별히 가는 곳이 있습니까.

“일어나서 아침밥 먹고 개그 콘서트 보면서 일부러 막 웃어요. 그러다가 한두 시 정도면 산에 올라가서 당구 한 게임 치고.”

-산에 당구장이 있어요?

“네. 바로 옆에 헬스장 있어요. 헬스하고 킥복싱하고 산책 좀 하다가 다섯 시 정도 내려와서 밥 먹고. 그리고 많이 웃으려고 해요. 명상이 잡념을 없애는 데 좋다고 해서 저녁에 30분 정도 명상을 해요. 이어폰 꽂고.”

[박종언의 만남-길을 묻다] 박현동 씨 (c) 마인드포스트
[박종언의 만남-길을 묻다] 박현동 씨 (c) 마인드포스트

-몇 시에 주무십니까.

“열 시에 주로 자려고 노력해요. 11시 넘으면 배가 고프니까 뭐라도 먹어야 되니까 주로 10시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요.”

-정신건강복지법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네. 제가 교육을 받았어요. 그러니까 그 전에는 (입원 기간이) 6개월이었는데 지금은 3개월로 하고. 지금은 입원해도 공립 의사가 두 명이 와서 중증 이상 아니면 입원을 못 시키게 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약 먹으면서 사람들을 때리거나 계속 술을 먹거나 이런 사람들을 경증 빼고는 제가 알기로는 지금 다 내보내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그래서 많이 개선된 걸로 알고 있어요.”

(개정 정신건강복지법은 강제입원의 경우 보호자 2인의 동의와 의사 1인의 진단이 있으면 가능하다. 다만 이주 이내에 국공립 병원이나 보건복지부가 지정한 병원의 의사가 왕진해서 2차 진단을 하고 이 진단이 일차 진단과 동일할 경우 3개월 강제입원이 가능하다. 당사자가 불복할 경우 입원적합성심사위원회에 심의를 요청할 수 있다. 정신장애인이 자기 운명과 결부된 정신건강복지법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건 그만큼 법적 권리에서 정신장애인이 소외돼 있음을 역으로 보여준다-편집자 주)

-정신장애인 당사자운동에 대해서도 알고 계십니까.

“네. 저도 서울대 시위에 참가를 했어요. 서울대 하모 교수가 정신장애인 비하 발언을 하고 학생이 그걸 녹음했다가 발표했는데 그 바람에 그 교수가 미국으로 간 걸 알고 있습니다.”

-당사자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겁니까.

“지금은 아니죠. 제가 다녔던 센터에 동료지원부가 있었는데 거기를 한 6개월 다녔어요. 거기 가서 그런 것도 배우고. 애로점이 뭐냐면 국회의원들이 법에 제일 가까운 사람들이잖아요. 그런 사람들이 (행사에) 좀 왔으면 좋겠는데 제가 본 건 송파구 시의원이 여자 분인데 그것도 늦게 와서 잠깐 자기소개하고 얘기하다가.”

-뭐 할 때 왔습니까.

“송파구에서도 새로 센터가 생겼는데 송파구 시의원이 약속이 잡혔는데 늦게 와가지고. 높은 사람은 안 오고.”

-당사자 자립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사자 자립은 약 잘 먹고 건강한 게 자립이라고 생각해요. 건강하면 뭐든지 할 수 있거든요. 제가 아프면 그건 자립이 아니죠. 저도 옛날에 건강해졌다가 아팠다가 건강해졌다가 다시 아팠다가 했죠. 그래서 제가 포기를 안 하는 이유가 그 경험을 해봤기 때문에요. 혼자 조용히 살면서 산책도 하고 그러면 계속 건강해지겠구나 (싶어요). 건강해지는 게 자립이라고 생각해요.”

-당사자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에 제가 결혼을 한다면 일반인 건강한 여성하고는 안 해요. 저하고 맞는 조울증 여성하고 할 거예요. 조현병 여자하고도 안 해요. 일반 여성이랑 하면 제가 위축이 되고 제가 돈을 못 버니까 여자가 막 말하면 할 말도 없고 오히려 제가 더 스트레스 받아요.

제가 돈도 못 벌어 오는 건 사실이고 애도 낳고 내가 실수를 하면 ‘그러니까 정신병자야’라고 하겠죠. 그럼 이혼이죠. 지금은 결혼할 생각은 없어요. 만약 결혼한다고 치면 저랑 인지도가 비슷한 여자하고 하지 일반 여자하고는 안 해요.”

-어떤 삶을 살고 싶습니까.

“일단 건강한 거죠. 그것밖에는.”

-정신장애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이 병이 타의로 인해 걸렸던 유전으로 인해 걸렸던 걸렸다는 건 인정해야 돼요. 낫는 게 문제이기 때문에. 저도 웃음치료도 하고 일부러 휴대폰으로 길거리에서 전화도 안 오는 상태에서 걸어가며 웃어요. 웃음 효과가 사람에게 엄청 좋다고 하더라고요.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옛날에 인터넷이 이렇게 빨라질 지 누가 알았어요. 힘들다, 힘들다 하면 사람이 힘들어지거든요. 나을 수도 있고 포기를 안 했으면 좋겠어요. 포기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면 (좋겠어요). 약도 어차피 더 진화를 하니까요.”

[박종언의 만남-길을 묻다] 박현동 씨 (c) 마인드포스트
[박종언의 만남-길을 묻다] 박현동 씨 (c) 마인드포스트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