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의 사과를 요구한다
한국일보의 사과를 요구한다
  • 박종언 기자
  • 승인 2018.09.05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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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적심 심사 퇴원에 대해 ‘불안한 조현병 강제퇴원’ 제목
입적심 심사 1%인 115명 퇴원에 과잉 반응
사후 관리 체계 없어 정신질환자들 범죄 가능성 우려 보도
정신장애인에 대해 사회방위적 태도 보여
왜곡된 이데올로기는 시민의 원초적 두려움 증폭

 

입원적합성심사위원회가 지난 5월 시행돼 3개월에 접어들었다. 5일 보건복지부는 입원적합성심사위원회 심사 건수가 지난 3개월간 모두 8천495건이라고 밝혔다. 이중 퇴원 건수는 115건으로 전체의 1.4%를 차지했다.

현행 입원적합성심사위원회는 비자의입원(강제입원)을 당한 정신장애인이 그 입원의 적합성을 재심판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통로로 활용되고 있다. 이 경우 국립정신병원 소속 조사원들이 직접 요청자가 있는 병원을 방문해 대면조사를 할 수 있다.

지난 3개월 간 입원적합성심사위원회가 대면·서면 조사를 한 건수는 8천495건이었다. 이중 대면조사 건수는 1천399건으로 전체 16.5%를 차지했다.

결론은 이렇다. 입원적합성심사위원회가 시행된 3개월 동안 모두 8천여 건의 대면·서면조사를 진행했고 증빙서류 미구비 등의 절차적 문제로 퇴원하게 된 이들이 115명이었다.

이 가운데 치료의 필요성이 있어 비자의로 재입원한 사례는 총 16건이었다.

보건복지부의 이 발표에 대해 <마인드포스트>는 제목을 ‘전체 1.4%에 불과’라고 달았다. [마인드포스트 버전으로 기사 읽기(클릭)] 그런데 한국일보는 ‘불안한 조현병 강제 퇴원’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나는 이쪽에서 보고 당신은 저쪽에서 보니까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위험성 이데올로기에 의한 사회방위적 태도로 한국일보는 그런 제목을 달았던 것일까.

한국일보의 제목을 다시 보면 ‘강제입원 정신질환자 115명 심사 통해 퇴원 결정’으로 ‘이중 16명은 위험성 등 인정돼 다시 입원’이라고 각각 적었다.

한국일보의  텍스트를 보면 정신질환자에 대한 이들의 위험성 이데올로기는 더 극명하게 나타난다. 기사는 ‘강제입원으로부터 보호하는 절차는 필요하지만, 그 구멍도 적지 않다는 얘기다’라고 적었다. 또 ‘일각에서는 사후 관리 체계가 미흡해 퇴원 결정된 정신질환자들이 방치되거나 충동적으로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 등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고 자신들의 우려감을 사회적 공포심을 빌려 기사를 생산했다.

기자 개인의 세계관은 텍스트에 때때로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 기사를 쓴 기자는 정신질환자에 대한 맹목적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아니면 기자의 기사를 데스크가 수정하면서 제목과 본문을 이렇게 고친 건 아닐까.

한국일보는 더 나아가 지난 7월 발생한 경북 영양의 조현병 환자가 흉기를 휘둘러 경찰이 사망한 사건을 기사의 아래 부분에 달았다.

한국일보의 텍스트를 종합하면 이렇다. 보건복지부는 입원적합성심사위원회를 통해 지난 석 달 동안 정신질환자 115명을 퇴원시켰다. 이들을 모두 강제입원 당한 이들이다. 그런데 16명은 자타해 위험 등으로 재입원했다. 안전에 구멍이 뚫려 있음을 보여준다. 사후 관리 체계가 없다. 퇴원한 정신질환자들이 방치되거나 범죄를 저지를 우려가 있다. 지난 7월에도 퇴원한 조현병 환자가 경찰을 죽였다.

기사는 정신질환자가 사회로 나왔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범죄를 우려하고 있다. 정신병원과 정신요양시설에 있는 8만여 명 중에 강제입원 당했던 이들이 입원적합성심사위를 통해 불과 115명이 퇴원한 것에 대해 한국일보는 과잉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유에는 무엇이 있을까. 정신질환자는 위험한 대상이며 이들이 사회에 ‘풀려나오는’ 것은 사회적 안전성을 해친다는 위험성 이데올로기에 기반한다. 정신질환자는 존재론적으로 가치가 없는 자들이며 무능하고 게으르며 예측 불가능한 존재이다. 정신질환자는 흉기를 늘 소지하고 다니며 선량한 시민인 나를 해칠 수 있는 위험한 존재라는 편견이 그것이다.

기사에서 나온 ‘충동적으로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 우려’는 이 지배적 사유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은 혐오 논리다.

그러므로 이들은 공동체에서 격리되는 것이 옳으며 이를 위해 정신질환자를 사회에서 솎아내 병원과 요양시설로 보내야 한다. 사회는 안전해야 하며 더구나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비생산적인 인간은 마땅히 집단 수용돼 살아가야 할 가치 없는 존재들이다.

20세 초 독일 법학자 칼 빈딩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정신질환자들은 국가를 방위하는 존재도 아니고 노동자로서 사회적 가치들을 생산해내는 존재들이 아니다. 왜 우리가 이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가.”

이 이데올로기는 나치 파시즘 하에서 정신질환자 절멸이라는 사상적 뿌리가 된다. 왜 살려야 하는가.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존재들인데 말이다. 그리고 왜 우리 사회가 저 게으르고 가치 없는 존재자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가.

근대의 이성적 사유는 많은 타자를 만들어 냈다. 그 중의 하나가 정신장애인들이다. 르네상스 시대까지 공동체에 어울렸던 정신장애인은 17세기 갑작스레 만들어진 구빈원 안에서 이성의 타자로 배제된다. 그 타자성은 비(非)이성에 대한 두려움이며 혹은 런던 거리에서 주말이면 정신장애인이 사는 병원을 동물원 가듯이 가는 유행도 있었다. 자신의 시선 밖인 창살 안에서 타자로 존재하는 이들은 이를 바라보는 ‘나’를 해치지 못하는 한도 안에서 정신장애인은 대상이 되고 향유의 즐거움이 된다. 그런데 이들이 만약 풀려난다면 이성적 사회는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어쩌면 한국일보는 이 질문의 밑바닥에 흐르는 비이성을 차단해 이성적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자신도 모르는 이데올로기에 포섭돼 기사를 생산했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전체의 1%가 퇴원하는 것이 마치 사회의 거대한 안전망이 훼손되는 것처럼 기사를 쓸 이유는 없을 것이다. 이 불안감의 조장은 텍스트를 받아들이는 ‘선량한’ 시민에게 원초적 공포심을 심어주고 이 공포심의 결론은 정신질환자의 영구적 격리를 합리화시킨다.

이 신문은 기사 말미에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중간집 사업을 철저하게 준비하겠다’고 적었는데 이 관계자는 그 어떤 ‘철저한’이라는 말을 사용한 적이 없다. 보건복지부 홈페이지 보도자료에 따르면 이 관계자는 ‘적극 검토’하겠다고 말했을 뿐이다.

기자가 갖는 편견 이데올로기는 타인의 말에 자신의 두려움을 동원해 발화시킨다. 나쁜 정신질환자들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철저해야’ 한다는 기자의 의중이 개입된 것이다. 객관성이 아닌 두려움과 혐오 논리에 포섭당해 관계자의 ‘멘트’를 조작해 버린 것이다.

한국일보의 제목 ‘불안한 조현병 강제 퇴원’은 분명한 혐오 논리다. 입원적합성심사를 받은 정신장애인 중 1%가 퇴원하게 됐는데 만약 10%가 퇴원하게 된다면 이 신문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한국일보뿐이겠는가. 어쩌면 대다수의 신문들이 사회적 위험성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만큼 정신장애인은 공동체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그리고 언론은 이 시민사회와 정신장애인의 괴리감을 좁히기보다 갈등을 더 크게 조장해 버렸다.

언론은 분열적 사회 생태계를 통합하고 질서를 만들어줄 의무가 있다. 소수자와 약자에 대해서는 더 그렇다. 그런데 한국일보는 정신장애인이 마치 수만 명이 퇴원해서 사회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혐오 논리를 유포했다. <마인드포스트>는 정신장애인을 차별과 배제의 시선으로 보도한 한국일보의 사과를 요구한다.

 

편집 후기: 한국일보는 5일 오후 7시 31분에 기사 제목을 '방치 충동범죄 여전한데'로 바꿔 같은 내용을 내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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