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죽음의 이미지로 소비하지 말라
우리를 죽음의 이미지로 소비하지 말라
  • 박종언 기자
  • 승인 2018.09.14 20:31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베트남 아내 흉기로 찌른 남편 징역형
50대의 남편은 조현병으로 추정되는 피의자
정신장애는 죽음의 이미지와 밀접히 연관
존재론적 두려움이 언론 왜곡 불러와
위법한 행위 처벌 동의, 그러나 질병과 섞지 말아야

베트남 아내를 흉기로 찔러 살해하려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장본인은 조현병을 갖고 있다고 추정되는 50대 남성이었다.

14일 복수의 언론들이 이 사건을 속보로 보도했다. 피의자 A(50)씨는 지난 4월 28일 아내 B(28)씨를 향해 “왜 집에 몰카를 설치했냐. 통장에 있는 돈을 맘대로 쓰냐”고 질책한 후 흉기로 3차례 찌르고 도주했다가 경찰에 잡혔다.

B씨는 앞집에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고 병원으로 후송돼 생명을 건졌다.

전주법원은 같은 날 살인미수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법원은 “생명을 잃는 중대한 결과가 발생할 수 있었다”며 “정신질환으로 심신미약 상태에서 범행을 저지른 점,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 점 등을 고려했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조현병이었다.

피의자인 A씨가 정신장애 몇 급인지는 나오지 않았다. 정신적 장애 중에서 지적장애인지, 자폐성장애인지, 정신장애인지 밝혀지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언론은 쓴다. 그가 조현병일 거라는 확신을 갖고서 말이다.

법원의 양형 이유에도 ‘정신질환’이 들어가 있다. 그러므로 정신질환은 조현병이고 조현병은 위 사건처럼 흉기와 심신상실, 죽음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은 생의 끝이다. 죽음 이후는 알 수 없다. 죽음은 삶을 살아가야 하는 과정에서 절대로 발설해서는 안 되는 고통스런 무엇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죽음을 피하고 삶을 선택하려고 한다. 죽음은 그만큼 두려운 미지의 세계다. 그 어떤 시선도 죽음을 바라보지는 못한다.

그 죽음을 현실적으로 상기시키는 세력이 있다. 바로 조현병 환자다. 사회가 용인하지 못하는 이들은 공동체 안에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자로 배제돼 있다가 죽음의 이미지와 함께 사회 안으로 소환된다. 조현병이라는 타자는 공동체에서 격리된다.

선량한 시민인 ‘나’는 저 타자에 의해 언제든지 살해당할 수 있다. 그 죽음에는 원인이 없는 무동기의 죽음이다. 조현병 당사자들은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는 존재들이다. 언론은 이 두려움에 근거해 텍스트를 생산한다. “봐라, 조현병을 앓는 자들은 이렇게 위험하다”라고 하면서.

오늘의 기사에서 조현병 환자로 추정되는 그는 흉기를 들었고 그 흉기로 아내를 살해하려고 했다. 실제로 3차례나 그녀를 찔렀다. 이후 그는 도망갔다가 친누나집에서 검거됐다.

조현병은 곧 흉기다. 이는 물질적 흉기를 드는 주체이며 존재하는 자체가 흉기가 되어 버리는 괴물이다. 언론의 시선은 이 괴물을 향하고 괴물이 행하는 행위를 사회적으로 유포한다. 경험되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은 기자에게도 있다.

아무리 조현병 당사자의 삶을 배려해달라는 요청도 이 같은 사건이 발생하면 묻혀 버린다. 시민이 될 수 없는 비시민들이 시민들이 사는 공동체에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위험성이 강화된다는 의미다.

중세 이후 타자화됐던 정신장애는 구빈원과 정신병원으로 존재를 옮겼다. 근대의 태동기에 만들어진 정신병원은 정신장애인을 타자화했다. 런던 시민들은 주말이면 동물원 구경 가듯이 이 정신병원을 찾았다.

타자가 있고 주체인 내가 있다. 나는 타자를 바라본다. 타자의 얼굴은 기묘하게 일그러진다. 나는 타자의 그 모습을 보고 즐거워한다. 중요한 것은 타자가 위치한 곳이 쇠창살 저 너머라는 점이다.

쇠창살이 있어 타자가 나를 침범할 수 없을 때 나는 안심한다. 타자의 위험성은 사라지고 온전히 나의 시선에 타자는 대상으로만 존재하게 된다. 여기에는 소통과 민주적 시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타자가 쇠창살 밖으로 나왔을 때 타자는 곧 위험성으로 전환된다. 시민은 정치적 시선을 갖게 되고 이 괴물 같은 타자를 국가가 가두기를 바란다. 정신병원은 불안에 떠는 시민을 위해 타자를 감추는 공간이 된다.

타자를 위험성으로 규정하기 위해 정신병원은 규율과 억압적 훈육을 생산해 낸다. 구타하고 격리실에 가두고 묶어 버린다. 훈육을 통해 타자인 정신장애인은 자신의 자리를 알아서 찾아간다. 바로 격리의 자리다. 정신장애인은 정신병원에서도 타자가 돼 다시 배제된다.

이들이 사회로 복귀하는 것은 정신병원의 규율에 얼마나 잘 적응하고 얼마나 순응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아까도 말했지만 죽음은 그 어떤 인간도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금기의 세계다. 따라서 현세만 존재하며 현세 이후의 죽음의 베일 뒤는 바라보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의 모든 욕망을 누리고 싶어하는 게 인간의 심리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가끔은 우리는 죽음을 상기하게 된다. 미디어가 생산하는 사건사고는 사실 시민에 의해 만들어진다. 사건사고 속의 죽음을 보면서 우리는 죽음을 잠시 떠올린다. 그리고 그 죽음이 어떤 방식으로 생산된 것인지 궁금해 한다.

나는 그것을 시민적 죽음이라고 부르겠다. 시민은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시민은 나와 같이 버스를 타고 자가용을 몰기도 하고 밥을 먹고 일터에서 일을 하고 가정으로 복귀해 내일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의 죽음은 안타까움을 생산한다. 역주행하는 차량 때문에 사고가 나 사망한 이에게 우리는 동정과 안타까움을 느낀다. 사회적 질서를 위반한 자에 대해 분노하기도 한다.

정신장애인은, 특히 조현병 환자는 죽음의 이미지로만 소환된다. 무섭고 두려운 존재. 시민을 해치는 존재자들이자 사회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위험한 대상들이다. 이때 타자성은 강화된다.

시민은 죽음을 불러온 이들을 비난한다. 시민들은 이 조현병 환자가 저지른 살인과 죽음의 메커니즘을 보면서 죽음을 상기하고 죽음을 두려워하게 된다. 그리고 그 죽음의 실제 주체인 정신질환자는 반드시 사회가 배척해야할 인구집단이라는 데에 기꺼이 동의한다.

죽음을 보면서 죽음을 떠올리며 그 죽음에 대한 원인 제공자인 주체가 정신장애인일 때 시민들은 깊이 분노한다. 비이성이 이성의 자리를 훔치려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비이성은 이성의 자리로 넘어와서는 안 된다. 비이성은 고립돼야 하고 병원이라는 억압적 공간으로 가야 한다. 그곳에서 살든 죽든 너희들의 문제인 뿐이다.

언론 역시 조현병을 비롯한 정신질환을 두려워한다. 정신장애인이 사고를 쳐서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 했을 때 기자들은 마치 자신이 비시민이고 비이성적인 존재인 정신질환자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과 같은 감정을 가지게 된다.

타자인 정신장애인들이 죽인 것은 바로 근대적 합리성을 갖춘 ‘나’일 수 있는 것이다. 타자가 나를 죽였다. 타자는 나의 인간으로서의 상징을 죽여버린 것이다.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이번 사건은 조현병 환자로 추정되는 이가 사람을 죽이려 했다는 결론에 이른다. 조현병이라는 표상이 불러오는 죽음의 위험성을 해체하기 위해 언론은 기사에서 죽음을 소비한다. “조현병 환자가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비이성과 타자가 감히 이성의 자리와 주체의 자리를 위협하고 훼손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두려움을 느끼면서 말이다.

정신장애인도 사고를 친다. 조현병 환자도 사고를 친다. 그런데 이들의 ‘사고침’에는 죽음의 이미지가 스며든다. 만약 그 죽음이, 죽음과 가까운 폭력일 경우 언론은 위험성 이데올로기에 기대 텍스트를 생산하게 된다. 이 과정은 끊임없이 반복 재생산된다. 이 확대되는 모순에 대해 어떤 해결책도 없다.

정신장애 분야에서는 적어도 언론은 대안을 내놓지 못한다. 다만 두려울 뿐. 정신장애인들의 욕구와 삶을 욕망하는 시선은 의미가 없다. 온전한 것은 두려움뿐이다. 정신장애인들은 존재론적으로 두려운 타자일 뿐이다.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언론은 정신장애인이 위법한 행위를 했을 때 그 위법성에 대해 글을 쓰기 바란다는 점이다. 그 위법성 옆에 붙어 있는 한 인간의 특이성에 대해 죽음의 이미지를 덮씌워 보도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미 그 이미지로 정신장애인들은 죽음과 결부됐고 그 이데올로기는 강화돼 왔다. 정신장애인의 행위에 대해 왜 언론은 이토록 잔인한 것일까.

신체장애가 가지는 서사적 감동은 정신장애에는 없다. 이성이 없는 이가 이성으로 고통을 극복한다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정신장애에게는 범죄의 주체라는 이데올로기밖에는 남지 않는다. 누가 이들을 보호하겠는가.

사회가? 사회는 타자인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언론은? 언론은 비이성인 이들의 행위에 질병을 포섭시킨다. 시민은? 시민은 대상으로서의 정신장애인을 의혹과 두려움의 시선을 보낸다. 정신장애인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언론은 성찰하기 바란다. 정신장애인을 죽음의 이미지로 공고화시켜버린 데에는 언론의 책임도 크다. 정신장애인을 직접 경험해 본다면 이 소비되는 텍스트들이 얼마나 허구에 기초해 있는지, 혹은 이유가 없는 존재론적 두려움에서 출발한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언론은 정신장애를 죽음과 결부시키지 말라. 위법한 것은 위법한 대로 처벌하면 된다. 거기에 그 어떤 질병적 특이성을 혼합시키지 말라는 이야기다. 이미지를 생산하는 언론이 먼저 정신장애인의 삶을 긍정해 줘야 한다. 거기서 출발하자.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인랑제수민 2018-09-15 13:57:26
존재론적 두려움에서 벗어나자. 조현당사자는 치료받아야 할 질환 장애가 많고, 자기 병 관리만도 힘들다. 우발적 또는 계획적 범죄, 살인 폭력을 계획하지 못한다. 몸의 고통 때문에 숨고 위축되 눕기 바쁘다. 왜 폭력적 잠재적 범죄 살인자가 되었는가? 언론의 비뚤어진 시각, 확대재생산 됨으로 차별격리수용의 아이콘으로 전락된다. 국민편가르기 그만 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