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들, 당신들은 조현병이 무엇인지 모른다
기자들, 당신들은 조현병이 무엇인지 모른다
  • 박종언 기자
  • 승인 2018.10.07 23: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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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장애를 죽음의 이미지로 조작해
정신장애인 사건 보도는 특이성이 아닌 두려움 때문
인권보도준칙 사문화에 불과
사회안정을 위해 정신장애인 격리 합리화시켜
기자들, 당신들이 원하는 건 무엇인가?

손이 떨렸다.

7일 매체들은 앞다퉈 20대 청년의 살인 사건을 신속하게 속보로 보도했다.

피의자 A(28)씨는 지난 5일 오후 10시 40분쯤 부평구 부개동 한 아파트에서 어머니 B(55) 씨를 흉기로 숨지게 하고 여동생 C(25) 씨에게도 흉기를 휘둘러 부상을 입혔다.

인천 삼산경찰서는 존속살해 등의 혐의로 A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밝혔다.

언론은 피의자의 병력에 대해 ‘조현병’이라고 단정하거나 ‘정신질환’으로 추정된다고 보도했다.

기자는 A씨를 옹호할 생각이 없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게 숨지게 해 당연히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기자는 이 기사를 쓴 기자들, 그리고 기사를 생산하라고 명령한 데스크와 시경 캡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조현병을 아는지, 조현병이 무엇인지 아는지를 말이다.

당신들, 기자들에게 조현병은 어머니의 생명을 이유 없이 빼앗을 수 있는 잔혹한 질병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 내면적 두려움, 존재론적 두려움이 이 사건을 속보로 보도해 버렸다. 시민들에게 “자, 조현병은 이렇게 두렵고 무서운 질병이다”란 왜곡된 텍스트를 던져주면서 말이다.

이제 시민들은 조현병을 표상하면 ‘살인’이나 ‘무서운 범죄’로 연관해 떠올릴 것이다. 아니 그 ‘범죄성’에 대한 두려움은 미디어를 통해 이미 학습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 사건을 통해 그 내면의 두려움은 정당화되고 더 강화된다.

인간이 어떤 대상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그의 존재와 속성을 모를 때이다. 그래서 비과학적인 자연적 현상에 어떤 이는 두려움을 느끼고 그 두려움을 정화시키기 위해 종교적 의식을 행하기도 한다.

경험되지 않은 대상이 죽음의 이미지와 결부될 경우 그 두려움은 증폭된다. 마치 출구가 없는 막다른 곳에 서 있는 듯한 숨막히는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 두려움의 마지막 해결책은 그 두려움의 대상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신장애인인 조현병 당사자는 사회적으로 절멸시켜야 할 적대적 대상으로 변환되어 버린다.

어떤 두려운 존재가 사회생태계를 혼란스럽게 하고 무고한 시민들을 이유 없이 해칠 경우 시민들은 그 두려운 존재의 격리와 배제를 옹호하고 이들이 사회로 복귀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에 기꺼이 합의하게 된다.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건의 주체가 ‘조현병’ 당사자다. 혹은 정신질환자이다. 그리고 한 사람이 그 존재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주체는 약을 먹는 환자다. 그것도 아주 무서운 이미지로 표상되는 조현병 환자다.

이 삼각 꼭지의 고리에서 조현병은 곧 죽음의 이미지와 결부된다. 조현병은 곧 죽음이 되는 것이다. 상상적 죽음을 불러일으키고 공포를 소환시키는 초대받지 못한 타자로서 정신장애인은 호명되어 버리는 것이다.

조현병은 구 용어로 정신분열증이다. 이 어감이 주는 낙인적 의미를 제거하기 위해 조현병이라는 의학용어로 바뀌었지만 이 같은 사건들이 발생하면서 조현병은 기존 구 용어가 가진 낙인의 의미로 원상복귀하게 된다. 어쩌면 그 부정성을 더 강화된 채 말이다.

2015년 범죄통계에 따르면 비정신장애인, 곧 일반인이 일으킨 범죄 건수는 200만 건을 넘었다. 같은 해 정신장애인의 범죄건은 8천여 건이다. 전체의 0.4%.

그런데 언론들은 다른 ‘위험성’을 알리는 데이터를 보도했다. 지난 5년간 살인과 강도 등 강력범죄 비중이 정신장애인의 경우 비정신장애인보다 높다는 경찰청 보고서를 인용하는 것이다. 실제 정신장애가 없는 ‘정상’의 피의자는 1.6%인 반면 정신장애 범죄자는 10.6%로 나타났다.

그런데 계산해 보자. 정상인 피의자의 1.6%는 200만 건을 기준으로 했을 때 2만5천 건이다. 정신장애인의 재범률 10.8%는 8천 건 기준으로 900명이다. 뭔가 잘못된 것은 아닌가.

정신장애인의 재범률이 900명이고 비정신장애인의 재범률이 2만5천 건이면 비정신장애인의 재범률이 정신장애인 재범률보다 2만4천여 건이 더 많다는 점을 왜 퍼센티지로 환산해서 시민의 두려움을 증폭시키려 한 것인가.

이 모든 데이터의 왜곡은 정신장애인에 대한 위험성을 상징화하려는 간계가 있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하루에 열 끼를 먹고, 다른 사람은 한 끼를 먹는데 그 한 끼만 먹는 사람의 밥에 콩이 더 들어가 있다고 해서 한 끼를 먹는 사람이 더 배부르다고 말할 수 있는가.

당신이 돈이 많아 양주를 먹고 맥주를 마시는데 돈이 없어 소주 한 병을 마시는 사람을 향해 ‘알코올중독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사건이 발생했고 그 사건은 조현병으로 추정되는 피의자에 의해 발생했다. 그 사건으로 사람이 사망했다. 그것도 흉기로 살해됐다. 그 살해된 이는 피의자의 어머니이다.

따라서 조현병은 사람을 죽이는 흉악한 질병이다. 조현병 당사자는 사회로 나와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무고한 시민들에게 두려움을 주기 때문이다. 조현병 환자는 사회와 공동체에서 격리된 채 살아야 한다. 그 배제의 공간에서 죽든 살든 우리가 알 바는 아니다. 우리는 당장 현실의 두려움을 제거하고 싶은 것이다. 시민의 안전과 사회적 건강성을 위해서는 조현병자와 정신질환자는 당연히 정신병원이라는 억압의 공간으로 들어가야 한다. 어떻게 저 위험한 존재자가 사회를 아무 거리낌 없이 돌아다닐 수 있는가.

조현병 당사자에 의한 사건이 터지면 시민적 반응은 이 같이 왜곡된다. 정신장애인은 공동체 안에서 존재하지 않는 존재자로 있다가 사건이 터지면 공동체로 소환돼 비난받는다. 사회적 정화와 안전의 희생양이 되는 것이다.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한 것일까. 기자이자 조현병 당사자로서 나는 기자, 당신들에게 묻고 싶다. 그토록 우리가 두려웠는지 말이다.

다음은 당신들이 지난 2014년 한국기자협회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한 인권보도준칙의 전문이다. ‘언론은 일상적 보도과정에서 인권을 침해하는 내용이 포함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아울러 다름과 차이가 차별의 이유가 되지 않도록 노력한다.’

총강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언론은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들의 인권 보장을 위해 그들이 차별과 소외를 받지 않도록 감시하고 제도적 권리 보장을 촉구한다.’ 또 있다. ‘언론은 고정관념이나 사회적 편견 등에 의한 인권침해를 방지하기 위해 용어 선택과 표현에 주의를 기울인다.’

당신들 기자들이 합의한 준칙에 있는 문구들이다.

범죄 사건에 대해서도 준칙이 있다. ‘언론은 범죄 사건의 경우 헌법 27조의 무죄추정의 원칙,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등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수사나 재판 중인 사건을 다룰 때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 준칙들은 당신들 기자들에게 사문화된 권고 수준의 지침서에 불과한 걸까.

우리 정신장애인들, 조현병 당사자들을 죽음의 이미지로 소비하면서 기자들, 당신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죽음이 우리의 일상과 가까이 있었고 제의의 형식을 빌려 죽음이 두려움이 아닌 삶의 한 부분임을 알리던 시대가 있었다. 마을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힘으로 상여를 만들고 고귀한 한 생애를 마친 이를 떠나보내는 의례도 있었다. 지금의 죽음의 의식은 병원의 장례식장으로 숨어 버렸다.

사회는 죽음과 관련된 이미지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적 안정성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아니, 삶의 한 부분이 죽음이 아니라 죽음은 끝이고 무의미한 것이며 그래서 타자에게 보여서는 안 되는 내밀한 두려움인 것이다.

정신장애인도 마찬가지다. 사회생태계를 교란시키고 죽음과 너무나 맞닿아 있는 존재에 대해 사회적 관용은 필요 없다. 정신장애라는 낙인이 찍힌 자는 반드시 사회로 나와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두렵기 때문이다.

기자들에게 요청한다. 우리를 죽음의 이미지로 소환하지 말라. 범죄 사건이 있다면 범죄 사건으로 보도하라. 그 안에 낙인처럼 정신장애, 조현병을 들이밀지 말라는 의미다.

당신들이 오늘 쓴 하나의 기사는 시민들에게 조현병에 대해 더 왜곡되고 강화된 편견을 심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낙인의 효과는 전 사회적으로 전염병처럼 퍼져나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 대해 동정적이고 시혜적으로 기사를 써 달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런 시혜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정신장애라는 질병이 있지만 공동체 안에서 인간으로 존중받으며 살고 싶은 욕망이 있을 뿐이다. 기자들 당신들이 쓴 그 기사가 우리를 다시 한 번 정신병원 입원을 합리화시키는 기제로 작동하고 만다. 우리가 공동체에서 완전히 거세돼 저 죽음과도 같은 정신병원과 정신요양시설로 밧줄에 묶여 들어가는 걸 바라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왜 이런 형식의 기사로 우리 정신장애인을 왜곡하는 것인가.

정신장애인의 범죄를 일반화시키지 말기 바란다. 당신들, 기자들이 정신장애인에 대해 가지는 존재론적 두려움은 고스란히 시민적 불안감으로 증폭된다는 사실을 명심해 주기 바란다. 우리는 자유를 원하고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원한다. 한 개인의 일탈을 전체에 대한 두려움으로 전이시키지 말라.

그러므로 기자들, 당신들은 조현병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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