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자유가 치료’라고 주장한 이탈리아 정신보건개혁의 본질은 무엇인가?
[서평] ‘자유가 치료’라고 주장한 이탈리아 정신보건개혁의 본질은 무엇인가?
  • 송승연 활동가
  • 승인 2018.10.10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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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재중, 「자유가 치료다」, 건강미디어협동조합, 2018
사진=건강미디어협동조합 제공
사진=건강미디어협동조합 제공

모든 것을 막을 수 있는 방패. 모든 것을 뚫을 수 있는 창. 우리는 이것이 공존하는 상황을 ‘모순’이라고 이야기한다. 신체적, 정신적 자유와 기본권은 모든 ‘시민’이라면 가지고 있어야 할 마땅한 권리다. 그러나 ‘정신장애인’의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은 때론 공존할 수 없는 ‘모순’처럼 느껴지곤 한다. 특히 정신장애인에 대해 현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낙인과 부정적 편견으로 인해 그들의 ‘강제적 치료’와 ‘폐쇄적 공간’은 당연시 되고, 자유권과 같은 기본권은 쉽게 무효화될 수 있다. 이처럼 정신장애인의 권리가 순식간에 무력화 될 수 있는 상황에 대해 ‘강요의 망령(spectre of coercion)’이 존재한다고 표현하기도 하며, 정신장애인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는 강제적 치료에 대해 우리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침묵하는 상황을 방 안의 코끼리가 아니라 ‘방 안의 킹콩’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Helen Spandler et al., 2015).

이처럼 여전히 우리는 정신장애인의 ‘자유’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기도 쉽지 않은 서글픈 상황에 놓여있다. 그러나 약 40년 전에 이미 이러한 모순에서 과감하게 벗어난 나라가 있다. 바로 정신병원이 없는 나라로 알려져 있는 이탈리아다. 도대체 왜 이탈리아는 정신병원이 없을까? 왜 ‘자유가 치료’라고 생각했을까? 이에 대해 녹색병원에 근무하고 있는 내과의사 백재중은 저서 ‘자유가 치료다’를 통해서 이탈리아의 정신보건개혁 역사를 심도 깊게 살펴보고, 우리나라 정신보건 현장에 대해 강렬한 함의를 제시하고 있다.

 

왜 ‘자유’가 치료인가?

우리는 일반적으로 정신장애인의 경우 치료의 과정에서 ‘자유’를 제한하는 것을 부득이한 현실적 상황으로 간주한다. 이탈리아 또한 과거에는 그것이 당연한 절차였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정신보건법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먼저 1904년 제정된 법률 36호(이탈리아는 법의 이름을 따로 명시하고 않고, 숫자로 표기한다)에 따라 자신 또는 타인에게 위해 위험이 있다고 여겨지는 정신질환자들을 정신병원에 강제로 수용하였다. 법률 36호 하에서 자발적 입원은 불가능했고, 정신병원 입원 기록은 범죄 기록과 같은 것으로 취급되었다(법률 36호 체제는 1968년 법률 431호가 제정되기까지 약 65년의 긴 장기체제를 유지하였다. 법률 431호가 제정되면서 자의입원 및 지역사회정신건강센터 설립 근거가 새로 추가되었다. 그리고 1978년 법률 180호가 통과되면서 이탈리아 모든 (국립)정신병원 폐쇄가 결정된다).

저자는 이탈리아 정신보건개혁의 중추적 인물인 정신과의사 프랑코 바살리아(Franco Basaglia, 1924-1980)의 삶을 중심으로 개혁의 과정을 설명한다. 왜 바살리아는 정신병원과 같은 전문기관에서 이루어지는 임상적 ‘치료’가 아니라, ‘자유’를 지향하는 정신병원 폐쇄와 같은 어려운 과제에 도전했을까? 우리는 간혹 어떤 혁명적인 ‘사건’이 있을 때, 단편적으로만 이를 바라보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 다르게 말해서, ‘정신병원 폐쇄’라는 다소 흥미로운 사건 그 자체에만 관심을 두는 것에 그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본 책에서 단순히 특정 ‘행위’에만 집중함으로써 우리가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본질’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리는 바살리아가 정신병원을 폐쇄한 행위의 근본 이유에 대해 입체적인 고찰을 할 필요가 있다.

바살리아는 처음부터 정신병원 폐쇄를 주장하진 않았다. 그는 애초 치료공동체모델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치료공동체모델에 참여하면서 이 모델의 한계를 깨달았다. 수용시설은 그대로 남았고, 환자들도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서 바살리아는 정신병원이라는 공간 자체가 만들어내는 현상에 주목했다.

“아픈 환자가 수용소 시설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는 감정적 공백이라는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버튼(burton)은 이를 ‘시설 신경증(institutional neurosis)’라고 부르지만 나는 단순하게 ‘시설화(institutionalization)’라고 부른다. 환자가 수용된 공간에서는 치료를 제공하지만 역설적으로 환자의 개성은 완전히 사라지고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32쪽)

이처럼 바살리아는 ‘시설화’로 인해 환자의 개성이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고 새로운 대안이 필요함을 인지하게 된다. 더군다나 개성이 없어지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비인간화 과정으로 환자가 재구성되는 더 큰 부작용에 대해 바살리아는 언급한다.

“이러한 비인간화 과정의 결말은 환자들이 정신병원에 속박된다는 것이다. 이제 인간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는 지배 속으로 흡수되어 엮여 버리게 된다. 그는 이미 끝났다. 다시는 풀 수 없다고 낙인찍히고 어디 호소할 수도 없는 상태가 된다.” (39쪽)

우리는 지금도 ‘정신장애인의 인권, 권리, 자기결정권, 행위주체성, 낙인, 차별, 편견, 고정관념’ 등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며, 수많은 연구를 하고, 다양한 담론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여전히 확실한 해결책은 제시되지 않고 있다. 어쩌면 바살리아는 이러한 문제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상의 본질에 집중한 것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정신장애인에게 붙은 꼬리표를 떼어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들의 완전한 시민권을 복원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정신장애인의 회복을 가로막는 본질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정신질환자들에게 있어 실제 문제는 질환 자체보다도 그들을 바라보고 그들을 치료하는 방식에 있었다. 사회로부터 분리하여 정신병원에 감금해 버리는 방식이 문제였다. 그들은 비인간적이고 굴욕적인 체제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바살리아는 ‘의학적 이데올로기가 폭력적 법률에 기여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끔찍한 현실에 직면하여 바살리아는 “정신의학자들은 정치가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벌이기도 했다(66쪽).

중요한 것은 바살리아의 목표는 결코 ‘정신병원의 폐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의 목표는 정신장애인의 진정한 치유, 회복, 해방이었다. 그리고 정신장애인이 겪고 있는 진정한 문제는 질환 자체로 인한 문제가 아니라, 그들을 ‘치료하는 방식’ 자체에 있었다고 보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신장애인을 비인간화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시민’으로 되돌려 놓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며, 이에 대한 전제로 ‘자유’의 가치가 필수불가분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진정한 치유는 결국 ‘자유’에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바살리아는 전문가 중심의 ‘탑다운’ 방식의 개혁뿐만 아니라 당사자 중심의 ‘바텀업’의 지향도 도모했다. 그리고 이는 바로 ‘마르코 까발로’라는 상징적인 동물로 그려진다.

이날의 행진은 수용소나 다름없는 정신병원에 갇혀 있던 환자들에게는 해방을 향한 첫걸음이었다. 그들과 함께 행진한 마르코 까발로는 그들의 애환을 나타내는 상징물이었다. (중략) 그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거대한 목마를 완성하고 ‘마르코 까발로’라는 이름을 붙여서 불렀다. (중략) 목마는 정신병원 안에 있는 마당에서 만들어졌는데 높이가 너무 커서 4미터에 이르렀다. 바퀴 위에 실려서 이동은 쉬웠으나 원래 있던 문을 통해서는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결국 문의 상단과 유리를 깨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과정 자체가 정신병원의 벽을 허무는 상징적인 작업이기도 하였다. (43-47.p)

바살리아는 ‘자유가 치료’라고 생각했으며, 이에 더 나아가 “환자들 스스로 수용소의 벽을 깨고 건물을 허무는 과정에서 비로소 해방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31쪽)”고 생각했다. 당사자의 연대로 만들어진 마르코 까발로가 벽을 허물 때, 이탈리아 정신보건개혁은 시작된 것이다.

 

개혁의 성공은 디테일에 있다

바살리아는 뛰어난 정신과의사이며, 혁명가이기도 하였지만, 꼼꼼한 실천가이기도 하였다. 그는 ‘자유가 치료다’라는 구호를 단순한 이념에 그치지 않고 현실 정책 및 제도, 그리고 실천현장에 녹여내기 위해 디테일한 준비를 했다. 우선 병원 내부 공간을 환자 중심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노력했고, 직원과 환자 간 계급 관계 타파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병동을 둘러싼 장벽을 제거하고 병원의 문과 출입구들도 개방했다. 병원 규모를 점차 줄이고 개방된 지역사회 개념으로 재구성했다(49쪽). 또한 개혁 과정에서 직원들과 지역주민의 저항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를 위해 바살리아는 종사자 의식변화에 집중했다.

"간호사 훈련에서 중요한 점은 의사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관점에서 의사 결정할 수 있는 새로운 작업자들을 키워내는 것이었습니다"(바자리아, 1979, 50-51쪽)

바살리아는 병원 자체에 집중하기보다, 정신장애인의 진정한 지역사회통합에 초점을 두었다. 우리는 이탈리아 정신보건개혁의 기나긴 운동 끝에 1978년 탄생한 법률 180호에 주목한다. 그러나 사실 이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저자 또한 78년 이후가 더 중요했음을 강조하며 이후 진행된 과업들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우선 바살리아는 당사자와 가족들과의 관계에 집중하였다. 또한 지역사회 내 주민들과의 관계에도 집중했다.

바살리아는 병원 마당에서 진행하는 전시회, 파티, 콘서트 등을 일반 시민들에게 개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험들을 통해 여성운동, 학생운동, 정치 조직, 노동조합, 미디어, 지식인, 예술가 집단 등, 일반 대중 조직들과 정신의학의 협력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52쪽).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진행된 이탈리아의 정신보건시스템이 전 세계 유일한 것은 아니다. 유럽과 북미를 중심으로 대다수의 국가들은 지역사회 중심으로 전반적인 전환을 도모했다. 그러나 저자는 다른 나라의 경우 “지역사회 정신의학이 시행되었으나 정신병원 제도 자체는 유지되면서 보완적 기능만을 담당하기도 하였다”고 언급하며 이탈리아의 경우 지역사회 시스템이 “기존 정신병원 중심의 정신의학을 보완하는 성격이 아니라 완전히 대체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103쪽)”고 강조한다. 완전히 새로운 시스템이 구축된 것인데, 여기에는 ‘정신건강국(MHD, 지역사회체계 총괄), 지역사회정신건강센터(CMHC), 종합병원정신과병동(GHPU), 사회적 협동조합, 주거지원서비스(그룹홈, 지원주택 등), 주간재활센터, 낮병원, 개인보건예산, 대학병원정신과클리닉’ 등이 포함된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지역사회정신건강센터’라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 바살리아 법 이후 전국에서 정신병원 폐쇄와 더불어 정신건강센터 설치가 확대됐다. 이는 정신병원을 대체하는 흐름이라고 볼 수 있다.

로텔 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말 그대로 365일 24시간 문을 여는 정신보건센터의 설치였다. 이 센터가 있어야 정신장애인들에게 응급상황이 발생했을 때 제대로 대응할 수 있었고 지역사회의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었다. 정신병원을 대신하는 가장 핵심적인 기능을 정신보건센터가 담당하게 되었다. (중략) 이곳에는 야간 또는 짧은 기간(길면 6개월까지도) 환자가 지낼 수 있는 6-12병상이 있었다. 24시간 운영되는 강력하고 포괄적인 센터였다. 정신질환자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정신적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로부터 회복되어 사회에 바로 복귀할 수 있도록 그리고 가장 심각한 상황에도 대비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정신보건센터는 작은 병원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중략) 센터 내 소규모 약국도 있고 비교적 약도 자유롭게 처방할 수 있다(111쪽).

앞서 언급했듯이 바살리아의 목표는 정신장애인의 완전한 해방(회복)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시민권의 복원이 필요하다고 파악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전제조건은 정신장애인을 ‘관리’의 객체가 아닌 ‘권리’의 주체로서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지역사회시스템의 핵심인 지역사회정신건강센터를 통해 바살리아는 정신장애인 당사자가 ‘공통의 요구나 억압에 따라 연대감을 느끼게’ 되며, ‘병원 안에서의 환자관리인 온정주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협상을 시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고 언급하였고 이것은 ‘환자 자신의 인생에서 다른 방식을 허용하게 되는 상호작용으로 변화’를 끌어올 수 있다고 강조한다(55쪽). 지역사회정신건강센터에 힘을 주었던 것은 정신장애인에게 한 사람의 시민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의 변화를 도모하는 것을 촉구하는 것이었고, 이것이 ‘당사자의 회복’과 직결되는 문제라고 그는 보았던 것이다.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솔직히 단순하게 적용하기엔 여러 어려움이 있다. 저자가 책에서 언급하듯, 이탈리아 정신보건개혁은 여러 가지 조건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예를 들어 78년 개혁법 통과와 동시에 시행된 NHS(국가보건서비스, 이탈리아 언어로 SSN)체계가 구축됨으로 국립정신병원 중심의 체계였기 때문에 변화가 용이했다. 또한 이탈리아 정신보건개혁 당시 시대적 배경(68혁명, 반정신의학 운동의 영향 등)도 무시할 순 없다.

지금 현존하고 있는 한국의 상황을 무시하고 무조건 이탈리아를 따라가야 한다고 보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특정 국가의 모델이 유토피아라고 믿는 것은 왜곡된 환상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무조건적인 폄하 또한 옳지 않다. 저자가 언급했듯이 “정신병원을 폐쇄하고 대안을 만드는 과정은 매우 어려운 길이었다. 정신병원에 장기간 강제입원을 당해야 했던 정신장애인들과 이들에 공감한 의료인들 그리고 바살리아 법 제정을 위해 헌신한 수많은 사회운동가들의 노력은 높게 평가(139쪽)”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우선 이탈리아 모델이 지향한 가치와 철학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처음 몇 년 동안은, 환자들의 시민권 회복과 경제 활동에 관한 환자들의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가족이나 부양자와 대화에 노력을 많이 기울였습니다. 이것이 정신의학의 통제로부터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습니다. 수용자들은 시설이나 정신의학에 의해 완전히 대상화되지 않는 독자적인 정체성을 갖는 사람으로 인식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선 그들에게 시민으로서 지위를 되돌려 주지 않는 한 그들과 적절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프랑코 로텔리 fraco rotelli 인터뷰, 1978, 56-57쪽)

정신장애인의 시민권 회복과 경제 활동, 그리고 독자적인 정체성을 가진 사람. ‘자유가 치료’라고 주장한 것은 ‘시민으로서 지위를 되돌려 받기 위함’이었다. 그래야만 적절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신장애인의 시민으로서의 지위를 어떻게 되돌려 줄 것인가? 이탈리아는 정신병원 폐쇄를 통해 자유를 주었다면, 국내의 경우 권익옹호 서비스를 통해 정신장애인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것이 우선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절차보조인, 사전의료지향서, 동료지원서비스 등이 포함될 수 있다.

“정신병원 폐쇄 후 가족 간 갈등을 어떻게 해소해 나갈 것인가도 관심 대상이자 과제였다. 정신병원 폐쇄 후 병원이 차지하던 공간은 ‘지역사회’로 확장된다. 막연한 개념으로서의 지역사회가 아니라 지역사회 안에 존재하는 ‘어떤 시스템’이 병원을 대신해야 한다. 병원을 대신하는 시스템이 존재함으로, 환자도 가족도 사회도 안심하게 된다.” (109-110쪽)

또한 이탈리아는 법적인 권리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권리에도 신경을 썼다. 이는 책에서 언급되었듯, 당사자와 가족 간의 관계를 풀 수 있는 중요한 열쇠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이탈리아는 협동조합을 통한 일자리 제공, 주거복지를 통한 거주지 제공, 개인 예산제를 통해 이용자 욕구 등을 반영했다. 국내에서도 정신장애인의 인권을 외치기 위해 지역사회라는 막연한 레토릭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 주거, 교육, 문화예술활동, 가족지원 등과 같은 복지서비스에 초점을 맞춘 디테일한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한 이탈리아 정신건강센터에 위치하고 있는 응급병상(위기완화시스템, 일종의 쉼터(drop-in center) 개념)은 적극적으로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실제 국내의 많은 정신장애인 당사자 단체는 응급상황 시 단기간 이용할 수 있는 ‘쉼터’를 요구하고 있다. 이는 정신장애인과 지역사회환경과의 관계를 단절하지 않는 지역사회 중심의 대표적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몇 년 전 이탈리아에 관심이 많아서 관련 논문을 찾아보다가 1986년 이탈리아의 어떤 학자가 쓴 논문에서 다음과 같은 글귀를 발견한 적이 있다. “더 나은 쪽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할 필요가 있다.” 안토니오 그람시라는 이탈리아 혁명가의 문장이다. 이 당시 이탈리아도 불안과 희망이 교차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탈리아는 1978년 모든 정신병원 폐쇄를 명령하는 법안이 통과되었지만, 실제로 22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려 2000년에 완료되었다. 우리도 아직 갈 길은 멀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믿으며 한 걸음씩 긴 호흡으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송승연 활동가
송승연 활동가

송승연 활동가는...

가톨릭대 사회복지학과 박사수료. 정신건강사회복지사로 현장에 있었으며, 한국정신장애인자립생활센터 비당사자 활동가로 근무함. 현재는 정신장애인 권익옹호 관련 연구 및 강의 등을 하고 있습니다. 정신장애인 당사자가 주체적 운동세력으로 확장되어야만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인드포스트 논설위원(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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