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병에 대한 사회·정치적 담론화를 요청한다
조현병에 대한 사회·정치적 담론화를 요청한다
  • 박종언 기자
  • 승인 2018.10.21 22: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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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구 피시방 사건 피의자는 자신을 우울증으로 설명
우울증은 잔인하지 않아…간계에 불과한 변명
조현병은 모든 정신질환에 포섭되는 오류 불러와
우울증과 조현병이 같은 질병으로 인식돼
조현병에 대한 정치적 담론 만들어져야
조현병 텍스트에서 여타 질환 분리돼야

21일 밤, 인터넷에서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 들어가 ‘조현병’을 쳐보았다. 지난 14일 발생한 강서구 피시방 살인사건에 대한 국민적 분노들의 청원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강서구 피시방 살인사건은 김모(30)씨가 피시방 아르바이트생 신모(21)씨를 흉기로 얼굴과 목을 찔러 살해했고 피의자 김씨는 자신이 우울증을 앓고 있으며 심신미약이라는 소견서를 경찰에 내 ‘감형’ 받으려 했다는 의심이 일고 있는 사건이다.

게시판은 분노의 질주처럼 ‘정신질환’에 대한 비난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한 청원자는 “우울증과 조현병을 가진 사람들을 잠재적 범죄 가능성이 있는 사람으로 여기고 성범죄자들에게 전자발찌를 채우는 것처럼 하나의 표식으로 여겨야 한다”며 “‘나는 심신미약자입니다’를 의미할 수 있는 목걸이, 명찰, 조끼, 옷, 팔찌 등등 여러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적었다.

또 다른 청원자는 “알코올리즘 환자나 약 안 먹은 조현병 이런 놈들은 그 자체가 살인미수 아닌가”라고 입장을 밝혔다.

다른 청원자도 “정신질환자에 대한 특히 폭력성이 있는 정신질환자(조현병 등)에 대해 정부가 직접 나서서 철저한 관리를 촉구합니다”라며 “성인이 되어서도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결론은 모든 정신질환자들에 대한 국가의 ‘특별한’ 관리와 사회적 격리에 집중돼 있었다.

사이코패스적인 한 인간이 피시방 직원이 불친절했다는 이유로 무려 흉기로 32차례의 자상을 입혀 숨지게 했고 자신은 우울증 환자라며 감형을 받으려 했다는 것이 이번 사건의 본질이라면 본질이다.

기자가 말하고 싶은 건 이 살인자가 우울증 환자이고 정신질환자이기 때문에 감형하라는 요구는 추호도 하고 싶지 않다. 그는 살인자이며 법의 엄중한 처벌을 받기를 오히려 주장한다.

그런데 이 우울증이 왜 조현병과 엮여야 하는 건지 그 문제를 질문하고 싶은 것이다.

이번 사건 이후 언론들은 정신질환자가 일으키는 재범률 등을 그래픽으로 친절하게 보도했고 어떤 신문은 조현병이 뭔지를 설명하는 기사도 내보냈다.

한 신문은 “조현병은 관리를 잘 하면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는 구태의연한 설명까지 내보냈다.

그런데 저 살인자는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저 살인자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말을 믿을 수 없다. 우울증이 자신을 찌르고 자신을 극단적 선택으로 몰아가는 질병 유형인데 타인을 저토록 참혹하게 훼손해 사망에 이르게 한 것은 우울증과 상관없는 그의 폭력적인 인격에 근거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럼 조현병은?

나는 조현병 당사자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우울증까지 갖고 있다. 만약에 조현병자인 내가 사건을 일으키면 사회는 나를 비난할 것이다. 그리고 조현병이 가지는 위험성도 언론이 앞장서서 내보낼 것이다. 시민들은 공분할 것이고 이 조현병 당사자들에 대한 격리와 배제, 공동체에서의 완전한 거세를 촉구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사건은 잊혀지고 조현병 당사자들은 존재하지 않는 존재자로 머물다가 다시 조현병에 의한 사건이 발생하면 공동체로 소환돼 낙인을 받는다. 이 순환은 끝없이 반복돼 왔다.

애초에 정신분열이라는 낙인적 질병 용어에서 조현병으로 바뀌었지만 그 낙인의 강도는 증폭돼 공동체에 두려움의 존재로 바뀌어 버렸다.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이나 언론의 보도를 보면 우울증은 정신질환의 한 종류이며 모든 정신질환에는 조현병이 포섭된다는 식으로 인식되도록 프레임이 짜여져 있다.

위의 게시판 글과 언론 보도처럼 '우울증'은 '조현병'이고 ‘알코올리즘 환자’와 ‘약 안 먹는 조현병’은 같은 질환이 된다. 그리고 ‘폭력적’ 정신질환은 또 ‘조현병’과 교차된다. 사회적 안정성과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이 조현병이라는 질병은 정신적인 질환과 관련해서 폭력적 성향의 모두와 공통분모를 가질 정도로 광범위하게 인식되는 질병이 된다.

따라서 정신질환은 조현병이며 이는 우울증이나 정동장애(조울증), 자폐성 장애, 지적장애 모두가 조현병과 엮이도록 만든다. 정신질환이 곧 조현병인 것이다.

따라서 우울증에 의한 사건이든, 조울증에 의한 사건이든, 발달장애에 의한 사건이든 거기에는 조현병이 반드시 ‘깍두기’처럼 끼어들게 된다. 이것이 텍스트가 되면 시민은 모든 정신질환을 조현병으로 바라보게 된다. 조현병은 엄연히 다른 질병인데도 말이다.

강서구 피시방 사건 이후 시민들은 조현병 환자들을 감금하고 관리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 살인자의 질병은 조현병이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이 조현병임을 믿고 싶어 한다.

나는 여기서 한 가지를 제안하고 싶다. 과연 조현병이 무엇인지 사회가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어쩌면 알 필요도 없다고 그 앎을 거부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조현병 당사자인 나는 말하고 싶다. 조현병에 대한 사회적 합의 정도는 만들자는 것을 말이다. 만약 지금 우리가 조현병에 대한 사회적 담론을 구성하지 않는다면 조현병은 언제까지나 비난받고 소환되고 낙인 찍혔다가 잊혀지고 다시 비난받고 소환되고 낙인 찍히고 잊혀지기를 반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조현병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없다면 조현병은 모든 발생하는 정신질환에 필요조건으로 작동하게 될 것이다. 넌 정신질환을 앓았고 사고를 저질렀어. 그러면 너는 정신질환자이니 조현병자고 당연히 공동체를 떠나야 해. 산속에 감금되든 배제되든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야. 너는 조현병 환자고 위험스러운 존재이니 공동체를 돌아다니지 마.

이번 강서구 피시방 사건도 우울증 환자-라고 스스로 칭하는-에 의해 저질러진 사고다. 이 질병은 조현병하고는 무관한 질병이다. 조현병과 우울증이 복합적 질병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저 살인자는 자신을 우울증 환자라고만 주장했다. 조현병은 그 스펙트럼 안에 없는 질병이다. 그렇지만 조현병은 낙인처럼 사회적 담론 안으로 들어오고 만다. 쉽게 말하자면 덤으로 욕을 얻어 먹는 것이다.

저 살인자는 우울증 환자가 아니라고 나는 믿고 싶다. 그가 우울증 환자이고 저렇게 잔혹하게 사람을 살해할 정도라면 대한민국의 우울증 환자들을 모욕하는 말일 것이다. 심신미약을 통해 자신의 죄를 감형받으려는 간계에 불과한 자기 방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나는 부탁한다. 조현병에 대해 사회적·정치적 담론을 만들어 보자고. 그 담론에서 조현병의 증상이 어떤 것이고 어떤 사회적 태도를 가지고 있으며 범죄와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 그리고 실제 범죄 건수 중에 몇 퍼센트를 갖고 있으며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조현병이 진정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조현병인가에 대한 질문과 답변을 지금 담론화해 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질병이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라 누구나 걸릴 수 있는 보편적 질병으로 인식하도록 해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사고가 나면 격리와 배제의 이데올로기로 낙인 찍히는 게 아니라 증상이 있지만 이들이 그렇게 폭력적이지 않으며 만약에 폭력적이어서 사건을 일으킨다면 법의 선처를 구하지 말고 징역형을 살든 치료감호소로 이동해 질병을 치유하든 사회적 합의 안에서 그렇게 만들어 보자는 것을 요청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어떤 사회적 인프라를 구축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말이다.

요약하면 ‘정신질환’이라는 애매하고 포괄적인 질병에서 조현병을 떼어 놓고 한번 바라보자는 의미이다. 그것이 정말 뜬구름 잡는 이야기일까.

텔레비전에서 조현병과 관련한 토론회를 해보라. 신문에서 조현병에 대한 객관적인 기획기사를 써보라. 그리고 조현병 당사자가 스스로를 조현병이 있음을 드러낼 수 있는 사회적 포용을 가져보라. 조현병 당사자의 절대 다수는 자신이 자신을 학대하는 병이고 타인을 해치는 병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사회가 존중할 수 있을 때까지 이 이야기를 정치적으로 담론화해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저 잔혹한 살인자가 저지른 ‘우울증적’ 범죄가 감형의 사유가 될 수 없으며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자체로 조현병까지 덤으로 연결고리가 되어 버리는 지금의 오류를 조금은 바꿔보자는 것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비난받고 잊혀졌다가 다시 소환되고 비난받고 잊혀지는 모순의 고리를 이어가야 할까. 여기서 끊었으면 한다. 사회적 담론화와 합의를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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