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이란 무엇인가
"Il n’y a pas plus de forme privilégiée que de point de départ privilégie. Il y a partout des points de départ, des croisements et des nœuds qui nous permettent d’apprendre quelque chose de neuf si nous récusons premièrement la distance radicale, deuxièmement la distribution des rôles, troisièmement les frontières entre les territoires."
Jacques Rancière, Le Spectateur émancipé, La Fabrique-Éditions, 2008, pp. 23-24.
"특권화된 형태도, 특권을 누리는 출발점도 없다. 도처에 출발점, 교차점, 매듭이 있으며 이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를 배우게 해준다. 만일 우리가 첫째 근본적 거리를, 둘째 역할의 분배를, 셋째 영토 사이의 경계를 거부한다면 말이다."
자크 랑시에르, 『해방된 관객』, 2008, pp. 23-24.
*
프랑스 미술가 제롬 부트랭(Jérôme Boutterin)이 정의하는 ‘추상화’(abstract painting)란 '기본(Basic)'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처음 시작하려는 바로 그 순간에 주목한다. 무엇인가를 시작한다는 것은 창조행위를 의미하고, 창조를 하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것을 계속 덜어내야 한다. 불필요한 것을 계속 덜어내다보면, ‘질서가 잡힌 것’ 혹은 ‘평범하다’고 일컬어지는 것의 기원이나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소위 ‘창조 이전(pre-creation)’으로 돌아가는 셈이다.
창조 이전에는 ‘혼돈(chaos)'이 있었다. 곧, 질서가 잡히기 전의 상황은 무질서가 있었다는 말이다. 제롬은 바로 그 순간에 집중한다. 신이 천지를 창조하기 전에도 혼돈이 있었다. 혼돈에서 질서를 잡은 결과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다.
미술평론가 피에르 스텍스(Pierre Sterckx, 1936-2015)는 자신의 카오스론에 대해 3가지 유형의 작가들이 있다며 △카오스에 들어갈 엄두도 못내는 작가 △카오스에 과감히 들어갔지만 나오지 못해서 늘 혼돈 자체만을 표현하는 작가 △카오스를 충분히 경험하고 그로부터 에너지를 받아 카오스를 초월하는 정제된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 등으로 분류한 바 있다. 피에르 스텍스는 제롬을 마지막 유형으로 보았다.
제롬이 작품을 완성하는 결정적인 타이밍은 다음의 두 가지 상황이 동시에 발생했을 때다. 먼저, 그림이 화가를 쳐다볼 때다. 이는 화가가 그림의 현존을 느끼는 순간을 의미한다. 제롬은 이를 “그림이 영혼을 얻을 때(when painting gets its soul)"라고 표현한다. 두 번째로 해당 작품이 다른 작품을 시작할 수 있는 영감으로 열릴 때다. 사실 제롬은 작품을 눈깜짝할 새에 그린다. 다만 한차례 작업을 완성한 다음 “다됐다”라고 선언하기 전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 간격은 하루, 이틀은 고사하고 일주일씩 걸릴 때도 있다. 한 작품에서 다른 작품의 창조가 시작되는 순간, 아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 작품이 다른 작품을 낳으려는 순간이 바로 먼저 있었던 작품이 끝나는 시간이다.
제롬은 이 끝나지 않는 작업을 그룹으로 묶어 시리즈를 만드는데, 그는 이를 '가족'이라고 표현한다. 시리즈 내 각각의 작품은 서로 연관되지만, 그렇다고 한 작품이 다른 작품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제롬은 창조가 발생하는 순간에 집중한다. 그는 이 순간을 ‘언어 이전(pre-language)’이라고 표현한다. 제롬의 모든 작품은 언어적 세계가 형성되기 이전의 상황을 다룬다. 사실 우리는 말을 하고 문자를 사용함으로써 언어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 많은 철학자들이 언어적 세계 이전의 상황을 정의하려고 노력했는데, 지크문트 프로이트는 그것을 ‘무의식(unconscious)’으로, 자크 라캉은 ‘상상계(the Symbolic)’로 표현했다. 그러나 제롬에게 중요한 것은, 예컨대 말을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가 무엇인가를 표현하려고 할 때, 혹은 말을 하지 못하는 장애인이 감각적으로 매우 뛰어난 특징을 보여준다는 것을 관찰할 때다. 철학자들처럼 그 세계를 언어로 정의하는 일은 제롬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창조가 발생하는 순간이란, 선 하나가 춤을 추듯 그려지면서 희미하게 사라지는 순간이다. 그는 불필요한 ‘언어적’ 군더더기를 덜어내고 창조의 순간만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보면, 무엇을 형상했는지 알 수 없다가도, 동시에 그것이 무언인지 알 것만 같은 역설적인 태도가 나타난다. 이때가 작품이 말을 거는 순간이리라.
시리즈의 탄생
제롬은 학생시절 몇몇 화가들의 오만한 태도에 늘 반박하곤 했다. 그는 타인에게 자신의 작품의 위대함을 강요하는 작가들의 태도를 늘 경계했다. 그러나 건축가들은 달랐다. 제롬이 보기에 건축가들은 건축설계도면을 창조하고 건물을 지으면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도 여전히 제롬은 도시에 있는 새로운 건축물들을 부지런히 관찰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건축물이 구축되는 것처럼 회화를 구축해야겠다는 영감을 받게 된다. 바로 이 때가 본격적으로 시리즈를 제작한 시기였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제롬은 <Ma> 시리즈를 제작했다. 건축적 특징이 가장 뚜렷한 시리즈다.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모티브는 격자무늬(grid)다. 다채로운 색채의 선들로 짜인 그물망은 체계적이고, 안정된 기반을 상징한다. 그런데 그 위에서 다양한 색채 덩어리가 서로를 오염시킨다. 예컨대 바둑 게임의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무질서한 상황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그 뒤 격자무늬는 희미해진다.
두 번째 시기인 2004년부터 제롬은 <K> 시리즈를 제작한다. 이 시리즈에서 ‘형상(figure)'과 ‘배경(ground)'은 우선순위가 없다. 서로가 동등하다. 배경 위에 주제가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배경에서’ 주제가 탄생한다. 배경은 배경 자체로 더 이상 머물지 않는다.
이 시리즈는 또한 오늘날 모니터와 스마트폰 스크린에 대한 그의 도전에서 시작된 시리즈이기도 하다. 그가 보기에, 컴퓨터 모니터, 텔레비전, 스마트폰 스크린을 볼 때 우리는 스크린 표면의 반대편에서 오는 빛으로 인해 색채를 강렬하게 체험한다. 그러나 회화 작품에는 그러한 강렬한 환상, 혹은 상대방을 속이는 강렬한 현혹이 없었다. 제롬은 <K> 시리즈를 통해, 모니터 스크린처럼 아주 얇게 캔버스를 채색하면서도 강렬한 색채를 드러냄으로써 오늘날 비디오 스크린의 기만적인 한계를 넘어서려고 했다. 색채를 먼저 칠한 다음에는, 만화(cartoon) 형상을 그 위에 그렸다. 곧, 드로잉을 한 다음 색을 칠하는 방법이 아니라, 배경색을 먼저 칠한 다음 드로잉으로 마무리했다. 이는 드로잉의 결과로 나타난 빈 칸에 색을 칠하는 미술사 전통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다.
제롬은 2005년부터 세 번째 시기인 <Jours> 시리즈를 제작한다. 이제 드로잉 자체가 사라진다. 드로잉 없이 캔버스 표면에 채색된 영역이 서로 침투하고 자신의 영역을 차지한다. 색채 스스로가 그 영역을 적극적으로 구축한다. 형상과 배경의 구분은 완전히 붕괴됐다. 끝없는 구축, 해체, 재구축 만이 존재한다. 질 들뢰즈가 말했듯, “추상은 배경이 붕괴된 공간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며, 거기에는 “시작이나 끝이 없고 궁극적인 목적도 없다.”
마침내 제롬은 2006년부터 2014년까지 <Mo> 시리즈를 완성한다. <Jours> 시리즈에서는 다양한 색채가 서로 침투했지만, 이제는 한 가지 색만 등장한다. 언뜻 보기엔 한 가지 색조에 명도와 채도만 변화시켜 그린 단색화인 모노크롬(monochrome)처럼 보인다. 하지만 제롬의 작품과 모노크롬은 완전히 다르다. 모노크롬의 색채는 깊이감이 없지만, 제롬의 <Mo> 시리즈엔 다양한 농도로 표현된 깊이감이 존재한다. 드로잉과 색채가 결합된 선들의 모티브는 <K> 시리즈에서 나왔다. <K> 시리즈에서 드로잉으로 그린 파편화된 장면들은 <Mo> 시리즈에서 드로잉과 색채가 결합된 선으로 표현된다.
최근 시리즈는 2014년부터 작업해오고 있는 <Bppb> 시리즈다. ‘bppb’는 불어로 ‘beaucoup de peu, peu de beaucoup’의 약자로, ‘적음의 많음, 많음의 적음(a lot of a little, a little of a lot)'을 의미한다. 말 그대로 얽히고 설킨 색과 드로잉이 결합된 실타래 속에서 하나의 색채가 선택되어 선으로 튀어나온다. 무질서에서 튀어나와 각각의 장소를 찾기 위한 여정이다. 이때 선은 드로잉처럼 작동한다. 비록 붓에 묻은 물감이 다 소진된다 하더라도, 드로잉은 결코 끝나지 않는 행위가 된다.
그는 물감을 묻힌 선이 흰색 캔버스를 가로질러나가면서 나타나는 현상에 집중한다. 드로잉의 여행에 몸을 실은 색상들은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캔버스 위에서 계속 변형된다. 색채의 짙고 엷은 농도가 보이기도 하고, 채색된 표면의 채도가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볼 때마다 다르게 느껴진다. 때론 단호하지만, 때론 방향감각을 상실한 듯 하다. 결국 각각의 선들은 흰색 캔버스 표면에서 자취를 감춘다.
함께 있음
이러한 혼동과 불확실성 속에서 제롬이 추구하는 것은 한 가지다. 바로 ‘함께 있음(togetherness)'이다. 화목하고 단란하게 함께 머무는 것이다. 색과 드로잉은 함께 가족으로 존재한다. 함께 존재하면서 동시에 각각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춤을 춘다. 제롬의 모든 작품들은 드로잉과 색채 사이에서 각각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여행의 다양한 버전과 같다. 각각의 작품들은 무엇인가가 발생하려는 순간을 담았으며, 그 에너지는 관람자들에게 그대로 전해진다. 때론 제롬 스스로도 각각의 작품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관람자들이 그 작품을 이해하는 경우도 생긴다. 하지만 제롬에게 작품을 이해하느냐, 이해하지 못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화가도 관람자들에게 배울 수 있다. 창조는 바로 그런 방식으로 순환하며 결코 끝나지 않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함께 있음’은 가족이다. 우리는 종종 견딜 수 없는 타인과 뒤얽혀 살아간다. 개인은 그 뒤얽힘에서 벗어나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어디론가 가로질러 나간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소외감만 느낀다. 얽히고설킨 나무뿌리, 곧 리좀(rhizome) 같은 공간에서 계속 횡단하며 걸어나갈 뿐이다. 점점 오프라인 관계보다 온라인 관계가 더 익숙하고, 클릭 한 번에 인간관계를 쉽게 형성하고 청산한다. 나와 다른 ‘타인’에 대해 생각해 볼 시간은 점점 짧아진다. 서로 오해하고 멀어지기 쉬운 환경이다. 서로의 핵심에 완벽하게 들어가지도 못하고, 타인을 완벽하게 알려고도 하지 않는 그 세상에서는 사르트르가 말했듯이 ‘타인은 지옥’이다. 그러나 ‘함께 있음’은 각자가 어디에 있건 ‘한 마음 한 뜻’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타인이 불의하게 억울한 일을 당했다면 함께 나서서 아파하고 위로해준다. 각자 자신의 길을 횡단하며 걸어나가지만 언제나 함께 있다. 언제나 하나로 이어져 있다. 그들에게 ‘타인은 천국’이다. 바로 그들이 ‘가족’이라 불린다. 제롬이 각각의 작품들을 시리즈로, ‘가족’으로 묶는 것도 이런 이유다.
그는 특이하게도 조경학(landscape architecture)을 수학한 작가다. 다양한 식물들의 특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그의 작품에서 파편화된 이미지들이 조화로운 정원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가 존경하는 작가는 셀 수 없이 많다. 특히 프라고나르(Fragonard), 와토(Watteau), 카시오로브스키(Gasiorowski), 거스튼(Guston) 등 알려지지 않은 영역을 개척해 나가며 위험에 맞서 싸워나간 인물들을 존경한다. 이는 그들이 자유로웠음을 의미하며, 제롬 스스로 원하는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자유로움 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작품에 등장한 비정형(informe) 형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자유로운 것인지 나는 잘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함께 춤을 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