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형 기자의 변론] '그 광인의 묶인 쇠사슬을 풀어주라'...필리페 피넬의 도덕적 치료를 복기하는 시간
[이관형 기자의 변론] '그 광인의 묶인 쇠사슬을 풀어주라'...필리페 피넬의 도덕적 치료를 복기하는 시간
  • 이관형 기자
  • 승인 2021.05.31 22: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울증 앓던 친구의 죽음이 그를 정신의학으로 이끌어
프랑스 혁명 후 비세트르 정신병원에서 의사 봉직
쇠사슬 묶인 정신질환자들 해방시킨 도덕 치료...정신의학의 아버지'

프랑스의 지방 도시 몽펠리에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지만, 지방대 출신이라는 이유로 의사 면허를 따지 못한 청년이 있었다. 이러한 차별과 좌절 속에서도 그는 공부를 쉬지 않았다.

그러던 중, 조울병을 앓았던 친구가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친구가 살아 생전 수용되었던 병원은 환자들을 비인격적으로 대해 왔던 곳이다. 이러한 병원의 관행이 친구를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생각했다.

지방대 출신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차별을 받았던 것처럼, 그는 정신병원의 중증 정신질환자들이 겪어야 할 차별과 대우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그는 오늘날, 정신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필리페 피넬(Philippe Pinel, 1745~1826)이다.

출처 : famousscientists.org
출처 : famousscientists.org

필리페 피넬은 1745년, 프랑스 남쪽 지방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의사였지만 가정 형편은 어려웠다. 필리페 피넬은 툴루즈 대학과 몽펠리에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30대 중반에 파리로 주거지를 옮겼다.

하지만 파리에서는 지방의 주립대에서 받은 학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15년 동안 작가와 번역가, 편집자로 생계를 꾸릴 수밖에 없었다. 1784년 「Gazette de santé」라는 의학저널의 편집자가 되었고, 수많은 해외 의학 자료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했다.

그러다 조울증을 앓은 친구의 죽음으로 정신의학에 강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어쩌면 친구의 죽음에 대한 충격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그를 정신의학의 길로 이끈 것일지도 모른다.

피넬은 편집일을 그만두고 광기 치료에 있어서 가장 유명한 개인 요양원에 취업했다. 이곳에서 5년간 환자들을 관찰하며 광기에 대한 자료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었다. 피넬은 혁명에 동조했고, 그가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이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잡았다. 정신과 의사로서 그의 행보에도 더 이상 방해될 것이 없었다. 결국 그는 1793년 비세트르(Bicêtre) 병원에서 의사로 일하게 됐다.

당시 프랑스 파리에는 거대한 종합병원이 2곳이 있었다. 남성 환자들을 수용하는 비세트르(Bicêtre) 병원과 여성 환자들을 주로 수용하는 살페트리에르(Salpêtrière) 병원이다. 두 병원은 1656년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가 환자와 노숙자, 정신질환자를 치료하고 휴식처를 제공하기 위한 호스피스 공간으로 설립했다.

그러나 피넬이 의사로 임명될 당시에는 매독, 정신질환 같은 환자들뿐 아니라 범죄자들까지 약 4천여 명을 수용해 쇠사슬로 묶어 감시하는 곳으로 변해 있었다.

출처 : 1st-art-gallery.com
출처 : 1st-art-gallery.com

피넬은 그중 정신질환자 200여 명이 수용된 제7병동에 관심을 가졌다.

많은 환자들의 증상과 행동을 면밀히 기록하고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들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환자와의 면담, 즉 도덕적 치료를 통해 그들을 도울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계몽주의 철학과 프랑스 혁명의 진보적 가치관에 영향을 받은 피넬은 환자들을 옭아맸던 쇠사슬을 풀어주게 된다. 비록 간호사들의 격렬한 반대가 있었지만, 이 사건으로 피넬은 사회적으로 큰 명성을 얻게 된다.

또한 1795년 살페트리에르(Salpêtrière) 병원의 원장이 된 뒤에도, 직원과 의료진으로부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던 7천여 명의 여성 환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쇠사슬을 풀어주었다. 이후 피넬의 도덕적 치료(le traitment morale)는 근대 정신의학의 효시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1826년 사망하기 전까지, 실증적 의학관과 기독교적 박애관으로 많은 환자들을 사람 대 사람으로서 대했다. 그의 사상과 치료법은 유럽 전체의 정신병원과 의사들에게 깊은 감명과 영향을 주었고, 오늘날 정신의학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 것이다.

출처 : kunst-fuer-alle.de
출처 : kunst-fuer-alle.de

이처럼 환자들이 쇠사슬로부터 회복되기까지, 피넬의 개인적 노력뿐 아니라, 프랑스 사회의 사상과 관습에 변화를 가져온 혁명이라는 배경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

오늘날 병원과 시설 안에서 정신질환자들이 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며, 도덕적 치료를 받기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뿐 아니라, 사회의 인식도 함께 변해야만 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해주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필리페 피넬 같은 의사가 더 많아지고, 프랑스 혁명처럼 사회의 인식이 개선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