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동료활동가로 파도손에서 배운 건 신뢰와 소통, 자기결정권이었어요.”
“내가 동료활동가로 파도손에서 배운 건 신뢰와 소통, 자기결정권이었어요.”
  • 박종언 기자
  • 승인 2020.11.20 19: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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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장애인 타운홀 미팅...여성 당사자 4명에게 듣는 삶의 지혜
고통 없으면 행복도 없어...고통을 알아야 행복도 알아
정신병원은 ‘상처’...묶이고 갇히는 게 일상이었던 과거
자기 합리화보다 자기객관화가 중요하다는 걸 배워
도전하고 실패를 경험하는 것에 두려워 말아야
좋아하고 원하는 걸 찾아나서야..용기 내 한 발짝 나가야

“대학교 때 만난 남자친구는 사귄지 50일이 지나자 데이트 폭력을 했어요. 뺨을 때리고 발로 차고. 저는 걔가 저를 사랑해서 때린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3년을 사귀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때 참으면 안 됐었는데.”

정신장애와인권 파도손과 함께하는 정신장애인 토크쇼 타운홀미팅이 20일 서울 중구 YWCA 대강동에서 진행했다. 행사 사회를 맡은 제출웅 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정신건강 문제를 단순히 사회적 배경을 도외시한 채 내 문제로 취급하면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며 “당사자와 가족이 네트워킹하고 연대해서 인간적인 사회, 상호 이해하는 사회로 바꾸는 동력을 만들기 위해 이번 미팅을 기획했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이번 미팅에 참여한 토론자들은 파도손에서 동료활동가로 일하고 있는 정신장애인 당사자 예나, 토마토, 민트, 케이 등 여성 네 명이다.

예나 씨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극심한 두통을 느끼게 된다. 성적 스트레스였는데 머리가 너무 아파 수업 시간에 소리를 지르고 책을 찢어버렸다.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정신과를 찾았지만 설문지 검사만 하고 나와버렸다.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 때 체육대학 입시 준비를 하다가 쓰러졌다. 병원에서는 뇌에 물집이 잡혔다고 당장 수술을 권했다. 그는 사흘 뒤 입시 시험을 친 뒤 수술을 했다. 2시간30분의 긴 수술이었다.

대학 때 남자친구를 사귀었다. 만난 지 50일째부터 남자는 폭력을 행사했다. 사랑하기 때문에 때리는 거라고 생각했다. 3년을 그렇게.

어느 날 환청이 들렸다. 길거리를 지나는 차에서도 환청이 몰려왔다. 누군가 자신을 스토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두 달 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입원의 첫 번째 원인이었던 남자친구와는 헤어졌다.

퇴원 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지냈다. 그때 엄마가 신문에서 무료로 한식 자격증을 취득하게 해준다는 정보를 보고 예나 씨에게 등록을 권유했다.

“한식 자격증을 세 번만에 땄어요. 중식 자격증은 여섯 번만에, 양식은 다섯 번만에요. 바리스타는 첫 번째 도전해서 땄어요. 나중에는 요가 자격증도 땄어요.”

환청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대부분이 자신을 비난하는 소리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환청의 90%는 자신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소리로 바뀌었다. 그는 “환청이 칭찬해줘서 자존감이 올라간 듯하다”고 말했다.

예나 씨는 “고통이 없으면 행복도 없다. 고통을 알아야 행복을 안다”며 “고통을 비관적으로만 보지 말고 고통받았으면 내가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나는 지구 역사상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자부한다”고 전했다.

토마토 씨는 초등학교 1학년 때 홍역을 앓던 친구의 죽음을 접했다. 중학교 때는 사이비 교회에 들어갔던 삼촌의 죽음을, 고등학교 때 친구의 교통사고로 인한 죽음 들을 목격하게 된다. 그는 “삶의 큰 충격들이었다”고 토로했다.

중학교 때는 가족이 기르던 개를 잡아먹었다. 그는 “슬펐고 울었고 가족에게 실망했고 의지할 곳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 고통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스스로 고립을 택한 것이다.

너무 힘겨울 때 교회에 가서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다. 보다 못한 아버지는 딸의 치유를 위해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 아무것도 변한 건 없었다.

그에게 정신병원의 입원 경험은 “상처”였다.

“병원에서 3년은 지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살 곳이 못 됐어요. 퇴원하고 계산해 보니 3개월을 그 병원에 있었더라고요. 독방에도 갇히고 침대에 묶이면서 상처와 실망감으로 죽고 싶었어요.”

그때 동료지원가가 병원을 찾았다. 그는 병원에서 ‘약 잘 먹고 말 잘 들으면’ 퇴원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하루라도 빨리 나가고 싶어서 그 말에 희망을 가지게 됐고 이후 퇴원한다.

이후 결혼을 했고 약국에서 전산원으로 일했다. 약사는 성품이 따뜻한 사람이라 자신의 어려움을 도왔다. 잔병치레가 심했는데 그때마다 약사는 며칠 쉴 수 있도록 아량을 베풀었다. 7년간 그곳에서 일한 뒤 목 디스크가 심해지면서 약국을 나와야 했다.

“다른 일을 찾아다녔어요.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거든요. 우연히 파도손 이정하 대표를 페이스북으로 알게 되고 동료지원가로 일하게 됐어요.”

그는 “자녀가 마음에 안 들고 답답하고 화가 나도 아이의 말을 잘 들어주고 무엇이 고민인지 잘 살피고 경청해야 한다”며 “자녀의 편이 돼 무조건 지지해주고 힘든 부분을 감싸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트 씨는 대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공부 욕심이 있었다. 대학교 때 미국으로 이민 간 친구가 있어 미국의 그 친구 집에서 한 달 정도 생활한 경험도 그 욕구를 부추겼다. 영문과를 나온 그는 통역사가 되기 위해 4년간 공부했지만 대학원 시험에 연거푸 떨어졌다. 부모님도 공부에 몰입해 있던 민트 씨에게 “너무 공부만 한다. 사회생활도 좀 했으면 좋겠다”고 걱정했다.

“30대 초반까지 공부만 했어요. 정말 열심히 했는데 아무 결과가 없었어요.”

그때 남자친구를 만났다. 3개월 연애했는데 부모님은 남자친구를 만나 본 후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헤어지라고 종용했다. 헤어지기까지 시간을 달라고 했지만 부모님은 바로 헤어지라며 폭력도 행사했다. 깊은 상처를 입었다. 이후 또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이 조심스러워지고 겁이 나기 시작했다.

남자친구를 잊어야 한다는 마음에 걷고 걷다가 그가 멈춘 곳은 다시 도서관이었다. 도서관은 그에게 슬픔과 혼란을 잠재우는 아지트였다. 그곳에 가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다시 공부에 빠져들었다. 부모님은 공부를 그만하고 불끄고 자라고 했지만 자신의 방에 불을 끄면 화장실 욕조에 앉아서 새벽 3시까지 공부를 했다. 몸이 상했고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지냈다. 부모님께는 복수를 하듯이 항의하고 말도 듣지 않았다. 어느 날, 아침에 자신의 방에 건장한 남성 2명이 들어와 자신을 끌고 나갔다. 병원으로 가는 건 알았지만 자신이 왜 병원으로 가야 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몰랐다.

“감옥 같은 데 끌려가니 간호사 3명, 의사 1명, 보호사 1명 등 5명이 제가 도망갈까봐 옆에 붙었어요. 그들은 환자복을 주면서 귀금속도 다 빼라고 했어요. 내가 환자복을 아무 말 없이 입으면 정말 환자가 되는 것 같고 자기결정권을 박탈당하는 것 같아 이를 거부했어요. 사흘 동안 독방에 갇혔어요.”

그는 이 병원 폐쇄병동에서 1월부터 7월까지 입원했다. 지루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사회복지사가 병원 프로그램에 참여할 것은 제안했다. 열심히 들으면 등급이 올라가고 그러면 개방병동으로 옮길 수 있고 외출도 할 수 있게 된다고 했다. 나가고 싶다는 마음에 그의 말을 따랐다. 그곳에서 그는 바리스타를 배운다. 한 달 10만 원의 월급이었지만 어느새 그에게 바리스타는 ‘꿈의 직업’이 됐다. 병원에서 지내면서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게 된다.

그렇지만 자격증을 들고 찾아간 대형 커피점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정도의 노동강도를 요구했다. 메뉴판에 메뉴가 60가지가 넘고 행사하는 상품에 대해서도 알고 있어야 했고 레시피가 틀리면 야단을 들었다. 약을 먹으면서 손이 느렸고 밥도 늦게 먹고 동료들에게 도움이 안 되는 사람으로 찍혔다. 4개월 만에 그만뒀다. 다시 우울한 날들이 찾아왔다.

이후 10개월 정도 낮병원을 다니던 그는 그곳 사회복지사 팀장으로부터 파도손이라는 존재를 듣게 된다.

“파도손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저의 증상을 내재화시키는 작업을 했어요. 제 증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거였죠. 자기 합리화를 시키기보다는 자기객관화가 중요하다고 했어요. 내가 파도손에서 배운 건 신뢰와 소통, 자기결정권이었어요.”

민트 씨는 직업을 찾는 정신장애인과 가족들에 대해 “자기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고 잘 하는지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봐야 한다”며 “취업과 관련된 인터넷 강좌가 있는지 알아 보고 대학교 가면 평생교육원에서도 여러 강의들이 있으니까 이용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어 “제가 생각하는 청춘은 다른 말로 실패를 통해 나를 성장시키는 기회”라며 “두려워 말고 많은 것들에 도전하고 많은 실패 역시 경험해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케이 씨는 고등학교 때 친척 아저씨에게 ‘몹쓸 짓’을 당할 뻔했다. 간신히 그걸 피해 도망 나왔지만 바깥에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이가 없었다. 그는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울기만 했다. 그 충격은 그에게 깊은 상처와 함께 정신질환의 원인으로 환원된다.

“대학을 갔지만 남성에 대한 공포가 컸어요. 사람들 많은 곳에 가면 숨쉬기 힘든 공황장애 증상도 나타났고요. 결국 적응하지 못하고 대학을 그만둬야 했어요.”

엄마는 딸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했고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다고 핀잔만 했다. 그는 “엄마와 대화를 할 수 없게 됐고 방 밖으로 나오기가 힘들었다”며 “세상과 고립돼 누구와도 대화를 할 수 없었고 은둔형 외톨이 생활을 해야 했다”고 말했다.

은둔 생활 중 어느 대학에서 인형 제조와 관련된 학과가 생긴 걸 알게 됐다. 그 학과에 들어가 인형 제조를 배웠다. 그렇지만 졸업 후 취업 자리는 없었다. 또 다시 집에 있어야 하는 시간들이 길어졌고 이후 환청과 환시, 망상이 몰려왔다. 자해까지 하게 되자 부모는 그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다행히 강제입원이 아닌 동의입원이어서 병원 입원 과정에서 트라우마가 적었다.

퇴원 후 인형과 옷을 만드는 회사에 들어갔고 좋아하는 분야라 열심히 했지만 회사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또다시 퇴사하게 된다. 다시 돌아온 집. 그때 그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은 내가 상상하는 세계를 그릴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럴 때면 부정적인 생각들이 물러갔고 손으로 인형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거나 수를 놓으면서 상태가 호전돼 갔습니다.”

그렇지만 생은 또 다른 출렁였다. 가족과 떨어져 살던 아버지가 숨진 지 일주일 만에 경찰에 의해 발견된다. 여름이었다. 부패가 시작되고 있었고 그걸 본 그는 충격으로 다시 두 달 간 입원을 하게 된다.

다시 나와서 잘 살고 싶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다쳐서 그만두게 됐을 때 그는 엄마한테 여행을 가자고 했다. 그리고 떠난 여행에서 교통사고를 중상을 입게 됐다. 나중에 회복돼 갈 때 그는 엄마가 식물인간이 됐다는 말을 친척에게 듣게 된다.

“엄마가 그렇게 된 건 저 때문이라고 나도 따라서 죽겠다고 했어요. 환청이 들리고 환시가 보여서 너무 힘들어서 자살 시도를 많이 했어요. 그때 내 옆에서는 아무도 없었어요.”

회복이 된 후 그는 자신과 함께 같은 병원에 입원했고 지금은 파도손 동료지원가인 지인으로부터 파도손에서 자조모임 수공예 강사로 일해줄 것을 요청받는다. 강사 기간이 끝나고 집에 있을 때 파도손에서 연락이 왔다. 동료지원가로 일하자는 제안이었다.

“저도 같은 아픔을 겪었고 같이 이해할 수 있는 분들고 있어서 관심이 갔어요.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가 생가해서 지원하게 됐죠.”

5월부터 시작된 동료지원가 활동을 하면서 케이 씨는 지역사회의 사각지대에 고립돼 있는 정신장애인들을 찾아가 대화를 했다.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 그들은 동료지원가라는 존재의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케이 씨는 “보호자가 신청했지만 당사자가 이를 원치 않을 수도 있다”며 “그럴 때 우리가 가면 적이라고 생각해 도움을 거부하게 된다. 그러면 설명을 드리고 만나는 시간을 늘려가면서 라포(지지체계)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했다.

그는 정신장애인의 사회적 회복을 위해 “조금이라도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누군가를 한 사람이라도 만들어야 한다”며 “그게 안 되면 정신건강복지센터 등 어디든 찾아가서 힘겨움을 털어놓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또 “자기가 원하고 좋아하는 걸 찾아야 한다”며 “환청이 들리고 무섭기도 하겠지만 조금이라도 용기를 내서 한발짝 앞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당사자를 둔 가족들을 향해 “‘너 하기에 달렸다’, ‘너만 정신차리면 된다’는 말은 상처가 된다”며 “그렇게 타박하지 말고 이야기를 들어줘야 한다. 힘들겠지만 지켜봐주고 기다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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