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형 기자의 변론] "성녀 딤프나여, 내 정신의 아픔을 고쳐주소서"
[이관형 기자의 변론] "성녀 딤프나여, 내 정신의 아픔을 고쳐주소서"
  • 이관형 기자
  • 승인 2020.12.02 19: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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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딤프나는 정신건강의 수호신...순례객들 "심적 안정감 줘"
친아버지 구애 피해 달아났지만 아버지에 의해 참수돼
벨기에 길 마을에서 정신질환자 위한 병원 세워
이후 당사자와 마을주민들의 공동체 만들어져

서양에는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들에게 전통처럼 내려져 오는 기도 방법이 있습니다. 한 메달을 손에 쥐고 “성녀 딤프나여, 내 뇌를 고쳐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죠. 이 메달의 앞면에는 성녀 딤프나(St. Dymphna)라고 불리는 한 여성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테두리에는 스트레스와 염려와 정신건강의 수호신이라는 문자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이 기도가 회복으로 이어지는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심적 안정을 찾고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을 느낀다고 합니다. 이처럼 성녀 딤프나는 어떻게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들에게 수호신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먼 과거로 돌아가 7세기 아일랜드 지방의 작은 왕국, 오리얼(Oriel)이라는 곳에서 시작됩니다. 그녀는 오리얼의 왕, 데이먼(Damon)의 딸로 태어납니다. 당시 데이먼 왕은 켈트족의 옛 신을 숭배하였고, 그녀의 어머니는 예수를 믿는 독실한 교인이었습니다. 딤프나도 어머니의 영향으로 신앙을 가졌고 14살의 나이로, 하나님 앞에서 순결의 서약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어머니는 숨을 거두었고, 데이먼 왕은 몹시 상심하여 정신마저 병들게 되었습니다. 이를 본 신하들은 왕에게 재혼을 권유했지만 왕은 그의 아내처럼 아리따운 여인이 아니면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신하들은 아리따운 여인을 찾아 전국을 다녔지만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이로 인해, 왕의 정신건강은 더욱 악화되었죠.

그러다 데이먼은 그의 아내를 빼어 닮은 자신의 딸, 딤프나에게 마음이 가기 시작합니다. 데이먼은 지속해서 딤프나에게 동침할 것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순결을 서약한 딤프나로서는 아버지의 청을 받아들일 수 없었죠. 결국 그녀는 아버지의 끈질긴 요구를 벗어나고자 배를 타고 벨기에의 앤트워프 항구에 도달합니다. 그리고 다시 길(Geel)이란 마을까지 도망가서 피신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가져온 값비싼 동전으로 마을에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위한 병원을 세웠습니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병원은 그녀의 아버지처럼 정신적, 혹은 신경계에 질환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운영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유럽의 중세 시대는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핍박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이들을 위한 병원을 세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가 병원을 짓기 위해 사용했던 동전이 그녀를 위험에 빠뜨립니다. 데이먼 왕이 보낸 추적자들이 오리얼 왕국의 동전을 사용하는 여성에 대해 수소문한 것입니다. 결국 데이먼 왕은 직접 길(Geel) 마을로 찾아와 딤프나를 자신의 검으로 참수합니다. 그녀는 15살의 나이로, 아버지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전해져 내려오는 한 이야기에 따르면 현장에서 그녀의 죽음을 지켜본 정신질환 환자들이 기적적으로 병이 치유되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녀가 환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베푼 선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가 퍼지면서 길 마을은 정신질환, 뇌전증, 신경 장애 등 다양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순례지가 되었습니다. 순례자들을 딤프나의 무덤으로 몰려들었고, 그녀는 이 지역의 성인으로 숭배되기 시작합니다. 1349년에는 길 마을에 성 딤프나를 기리는 교회가 세워졌고, 1430년에는 진료소를 열었습니다. 이후 1480년까지도 유럽 전역에서 몰려 온 순례자들을 위한 교회 주택이 확장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순례자들이 거주할 시설은 부족했습니다. 그러자 길 마을에 본래부터 거주하던 주민들은 이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마을 주민들에 의해 순례 온 정신질환 환자들을 돌보는 전통이 이어져 왔습니다.

주민들은 이 순례자들을 환자가 아닌 하숙인이라고 부르며, 마을의 평범하고 유용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입니다. 하숙인들 역시, 집안일과 노동 일 등을 도우며 공동체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십 년 동안 마을에 머물며 공동체를 이루어 갔습니다.

St. Dymphna 교회, Geel, 벨기에

이렇게 길 도시는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들로 인구가 늘어났고 이들의 존재는 마을에서 자랑거리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교회도 1852년까지 진료소를 지원하다, 이후로는 국가가 직접 나서서 진료소를 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1938년에는 3800여 명의 정신질환자들이 2만 명의 원주민 집에 거주할 수 있었습니다.

이 마을에서는 정신질환자에 대한 편견과 낙인이 없었고, 마을 사람들은 이들을 길의 시민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놀라운 사실은 하숙인 중에는 벨기에 국민뿐 아니라, 네덜란드, 프랑스, 잉글랜드, 러시아 같은 유럽인은 물론, 칠레, 중국, 미국인들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구가 많을 때는 45개의 언어와 사투리가 이주민들 사이에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로, 세계대전을 거쳐 독일이 벨기에를 점령하면서 길 마을의 이주민은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전쟁 중에도 마을의 돌봄은 계속되었지만, 세월이 흘러 2019년에는 232명의 이주민들과 187가구의 마을 주민들만 길 마을에 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정부는 길 마을의 전통과 정신을 존중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정부는 하숙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목욕탕과 마을 가장자리에 병원을 지었습니다. 이 병원은 의료센터라기 보다, 붉은 색 벽돌로 지은 시골 휴양지처럼 보여집니다. 하숙인들은 원주민 가정에 배치되기 전에, 정부 직원들로부터 개별 사례를 모니터링 받습니다. 또한 의사는 일주일에 한 번씩 하숙인들의 건강과 위생 상태를 살펴봅니다. 다만, 진단 결과를 위탁 가정에 공개하지 않고, 대신 행동과 성격에 있어서의 특성으로 조화가 맞는 위탁 가정을 선정합니다.

하숙인들을 맞이한 가족들은 정부로부터 약간의 봉급을 지급받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돈이 아닌 지역의 전통에 대한 자부심으로 하숙인들을 받아들입니다. 하숙인들은 종종 여러 세대에 걸쳐 동일한 위탁가정에서 생활합니다. 2세대, 3세대 하숙인들을 위탁가정의 자녀와 후손들이 대를 이어 수십 년간 돌보는 것이죠. 그래서 어린 아이들도 정신질환을 가진 하숙인들을 이상하거나 무섭게 바라보지 않습니다.

성녀 딤프나는 기본적인 인권조차 가질 수 없었던 유럽의 정신질환자들을 하나의 고귀한 인간으로 이해했던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딤프나처럼 당사자들을 한명의 고귀한 인간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많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길 마을의 주민들처럼, 당사자들과 함께 어울려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공간이 늘어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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